114화: 멸문이다!2021.11.01.
하델이 이번 연회에 관한 서류들을 잔뜩 들고 엘리시아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많기도 하군.”
피곤한 눈을 문지른 엘리시아가 잠시 옆에 내려두었던 만년필을 다시 집어 들었다. 결재서류가 바닥을 드러내자, 하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님. 데퐁트 후작가에는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미 제국 유수의 귀족들에게는 초대장이 도착하였으나, 데퐁트 후작가에는 여전히 발송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 장에 서명을 휘갈긴 엘리시아가 만년필을 탁 내려놓고 다 식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오늘 발송하는 게 좋겠구나.”
“아예 초대하지 않으시는 편이 낫지 않을지요. 우리 아기씨의 경사인데…….”
데퐁트 가문으로 보낼 초대장에 직인을 찍어 하델에게 넘기며, 엘리시아가 씩 웃었다.
“그러니 오히려 보여줘야지. 우리 아가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지, 축복받는지, 머리칼 하나라도 건드리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인지.”
역시 마님이시다. 감탄하여 고개를 깊이 숙이는 하델을 바라보며, 엘리시아가 말을 이었다.
“데퐁트 후작영애가 이번 연회에서 되지도 않는 자격지심을 접길 바라보자고.”
그리고 몇 시간 뒤. 초대장을 받아든 세레스는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며 소리 높여 웃었더랬다. *** 연회 당일. 이벨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강제로 깨워져 부드러운 입욕제를 푼 물에 입수 당했다.
“끄앙! 이브 살려!”
“우리 아기씨. 그리 잠수만 하지 않으시면 살려는 드리지요.”
“나 아직 잠 덜 깼는데!”
“이제 곧 깨실 겁니다.”
비비안을 대신해 전담 하녀를 맡은 테사는 순박한 얼굴과는 달리 도무지 봐주는 일이 없었다.
“테사. 조금만 더 자고 목욕할까?”
“안 됩니다. 우리 아기씨가 주인공인 파티이니, 준비할 것이 아주 많답니다.”
“테사. 테사. 그럼 밥부터 먹고 목욕할까?”
“목욕을 마치시면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두겠습니다.”
“……테사는 어쩜 그렇게 연필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그럴 때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고 표현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다 비비안님이 가르쳐 주셨지요.”
“비비안이?”
“예. 혹시라도 나중에 아기씨의 전담 하녀가 된다면 우리 아기씨 투정은 이렇게 막아내라며 알려주셨습니다.”
“…….”
잠이나 식사를 핑계로 이 욕조에서 나가자마자 정령들을 불러 도망칠 계획이었던 이벨리아는 새삼 비비안의 혜안에 감탄했다. 뽀그르르. 아이는 태연한 척 물속에 얼굴을 묻고 눈물 한 방울을 흘려보냈다. *** 저녁 5시. 노을이 옅게 깔리는 시간이 되자 화려한 마차들이 속속들이 공작저에 도착했다. 연회는 7시부터 시작되지만, 문턱 높은 공작저를 방문하여 친분을 다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입장이 허락된 가장 이른 시간에 맞추어 걸음을 재촉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르티나 기사단이 가문의 무복을 입은 채 들어오는 마차들을 검사했으나 그 누구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영애들은 그 유명한 기사들이 자신의 마차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에 은근히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공작저의 드넓은 정원. 공작부인이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꽃들이었다.
“어머, 세상에!”
“아름다워라……!”
본래도 자태가 고왔지만 이벨리아가 불러낸 노움이 땅을 비옥하게 만든 다음 반딧불 몇 마리를 잡아 와 꽃들 위에 놓아두는 바람에 마치 요정들이 꽃 위를 뛰노는 것처럼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저것 좀 봐요!”
“저것도 정령의 힘일까요?”
경사를 축하하는 의미의 등불이 마법으로 고정되어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이제 제법 마법을 유연하게 구사하게 된 렐리안의 작품이었다. 발 들인 이들은 눈을 바삐 굴렸다. 공작부부의 결혼 이후 무려 십수 년 만에 열린 연회다. 운 좋게 초대장까지 얻었으니 장식품 하나, 장신구 하나, 음식 하나까지 모두 눈에 담아 이야깃거리로 풀어내야 했다. 정원에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선 알렉이 입장객들에게 꽃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한 송이씩 가슴에 달 수 있도록 뒤에 핀이 꽂힌 장신구였다. 지나가던 영애들이 자기들끼리 속닥이더니 쪼르르 다가와 알렉에게 말을 걸었다.
“경께서는 아르티나 기사단의 일원이시지요?”
“예에.”
“이 꽃은 경께서 준비하신 건가요?”
“예에.”
“왜 하필 이 꽃을 준비하셨어요? 이 꽃의 의미는 청혼인데!”
“……!”
어린 영애들은 수도에 명성이 파다한 알렉 경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나눠주는 꽃의 꽃말이 청혼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색이 병아리를 닮아서 산 건데. 다시 내놓으십시오.”
“왜요! 저에게 청혼한 것으로 해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평생 우리 아기씨 곁을 지킬 몸이라 혼인은 생각 없습니다.”
까르르-. 어린 영애들이 웃으며 꽃을 사수하고는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저런 기사단을 두다니, 공녀님은 좋으시겠다, 등등의 소리가 바람결에 알렉의 귀에 박혀 들었다. 한편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순차적으로 연회장에 입장한 이들은 상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화려함에 입을 떡 벌린 채 입구에 모여 있었다. 정화 마법이 걸린 분수대 위. 황금으로 만들어진 용의 머리에서 쏟아지는 각양각색의 술들이 아름다운 색을 내뿜었다. 사방에 꽂힌 생화가 내뿜는 향이 참석자들을 취하게 했다. 명색이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이니만큼,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물빛 사파이어가 연회장을 마치 바닷속처럼 느껴질 정도로 장식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참석자들의 감탄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맙소사. 설마 벽면에 붙은 저것들이 진짜 모리안인가요?”
“저 샹들리에는 마담 앙제스가 단 하나 만들었다는 그것 같은데!”
“그게 공작가에 있었군요!”
“공작 가문의 요리사가 솜씨 좋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이 핑거푸드들 좀 보세요!”
가산을 탕진한다는 마음으로 연회를 준비한 하델은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이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쟁반을 들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자, 이것을.”
참석자들은 하델이 쟁반에 담아 건네는 작은 주머니에 눈을 번뜩였다.
“공녀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아직 열어보지 마시고, 공녀님께서 오시면 함께 기쁨을 나누시지요.”
보라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주머니의 생김새는 모두 같았으나, 참석자들은 제각기 눈여겨 봐둔 주머니를 갖고자 실랑이를 벌였다.
“안이 제법 단단한걸요. 보석일까요?”
“세상에. 연회에 참석했다고 어린아이 주먹만 한 보석을 준다고요? 부인은 참 세상을 아름답게 보시네요.”
“공녀님께서 만드셨다 하니 그림을 그려둔 대리석 정도가 아닐까요?”
기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값비싼 보석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 안에서 돌멩이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가십거리요, 소문을 바람처럼 나를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니까. 참석자들은 이 연회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친분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 화려한 연회장을 품평했다.
“저기 카시스 후작영애도 왔군요. 공녀님과 친분이 깊다더니 역시 일찍 오셨네요.”
“저는 후작부인과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요. 요즘 진행하는 사업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한 영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데퐁트 후작영애는 안 보이네요?”
“늦게 오시겠죠. 아시잖아요.”
뒷말에 함축된 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의문을 표했던 영애는 납득하고는 제 무리를 찾아 떠나갔다. *** 한편 세레스는 데퐁트 후작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후작과 리카드는 이미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상태였고, 후작부인은 한창 단장 중이었는데, 세레스만 그대로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곁눈질로 흘끗 딸을 일별한 데퐁트 후작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왜 아직도 채비를 갖추지 않았지?”
“저는 오늘 공녀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래요.”
초대장이 오지 않는다고 하녀들에게 그렇게 패악을 부리더니. 의외의 발언이었다. 후작이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크라바트를 매면서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어떤 뒷말이 나올 줄 몰라서 그러는 게냐.”
“공녀가 주인공이잖아요. 다들 공녀를 떠받들고 칭송하는 꼴을 제 눈앞에서 보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그것이 이유라면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좋을 텐데.”
“왜요? 공녀가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볼 거 아니에요! 그 오만한 얼굴을 빳빳하게 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양 연기하면서!”
후작은 하인들이 깨끗하게 닦은 외알안경을 쓰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뒤에 선 딸의 표정이 표독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차기 황후라면 저 정도의 독기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피바람 부는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가 때로는 그 무엇보다 강한 열망을 만들어내고, 그 열망은 곧 힘이 된다는 것을. 후작은 딸의 분노에 기름을 조금 더 부어보기로 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늘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시더구나.”
“황태자 전하께서…… 고작 공녀의 연회를 위해 직접 공작저까지 가신다고요?”
쿵. 내려앉은 심장이 속절없이 두방망이질 쳤다. 연회에 가면 황태자 전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는 공녀를 축하하기 위해 황태자가 직접 방문한다는 사실에 질투가 일었기 때문이리라. 세레스가 울상으로 발을 세게 굴렀다. 발치에 놓여 있던 청동 장식품 하나가 볼품없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럼 더더욱 가고 싶지 않아요! 제가 그 꼴을 보려고!”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가야 한단다. 이리 오너라, 내 딸.”
후작은 짐짓 달래는 척을 하며 안기라는 듯 두 팔을 활짝 펴 뻗었다. 성질을 죽이지 못하는 패악질은 그 상대가 부모라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다. 세레스는 발을 쿵쿵 구르며 후작에게 다가가면서도, 손에 잡히는 간식 그릇, 잉크병 등을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우리 딸,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이 아비가 네게만 미리 일러주는 거란다.”
“뭔데요.”
후작이 주변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미래의 황후에게 낮게 속삭였다.
“공녀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악마라더구나.”
“……예?!”
“과거 마물을 소환했던 미로네 백작을 공작이 공개적으로 처형한 바 있었지. 그런 이의 여식이 고위 악마를 곁에 두고 있다라…… 이거 참 이율배반적인 작태 아니겠느냐.”
세레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만일 오늘 연회에 참석한다면 공녀가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 다 꾸며낸 일 아니겠냐며 선동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이건. 악마를 곁에 두었다는 건. 그저 그런 모함이나 가십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것이다.
“……악마와 내통하는 것은…….”
“그래. 소환하는 것, 내통하는 것 모두 제국법상 극형이지. 가장 잘 쳐줘도 사형이다.”
세레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증명해요?”
후작이 만지작거리던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연금술은 모든 학문을 망라하지. 고대 정령술에는 정령들이 어떻게 마기를 감지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단다. 그것을 조금 응용하였을 뿐이지.”
그러니 연회장에서 구슬을 잘 살펴보다가 구슬이 반응하면 공녀가 마족과 내통하였다고 몰고, 구슬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잘못 짚었나 보다 하며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확실한 방법이군요.”
구슬을 마치 보물처럼 소중히 안으며, 세레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연회에서 이를 밝힐 생각인데.”
세레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와 시선을 맞추었다. 잿빛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번들거렸다.
“오늘요?”
“오늘.”
시가를 즐겨 누렇게 변색된 이가 마치 이리의 것처럼 드러났다.
“이 정도면 우리 딸이 연회에 갈 기분이 조금 들었으려나?”
***
“얼른 채비해!”
세레스는 후작의 방에서 마치 날 듯이 뛰쳐나와 곧바로 하녀들을 독촉했다.
“오늘 드레스는 얼마 전 후작님께서 선물하신 목걸이에 맞추어 붉은색으로…….”
“아니, 보라색으로 가져와.”
세레스가 소리 높여 웃었다. 이런 날 보랏빛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늘부로 보라색 드레스를 몸에 걸칠 수 있는 이가 두 명은 줄어들 테지.’
공작부인과 공녀는 죄인의 신분이 될 테니까.
‘멸문! 아르티나의 멸문!’
높은 기대가 척추를 타고 짜르르 내달렸다. 공녀의 곁에 머무르는 이가 악마라는 것을 연회장에서 밝혔을 때. 그 증거를 눈앞에 들이댔을 때. 황제가 투옥을 명하고, 황실 기사단이 공녀의 양팔을 잡아 끌어낼 때.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더러움과 추위에 떨 때,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처형장에 오를 때. 온 제국민들의 야유 소리를 들을 때, 끝내는 광장을 내려다보며 매달릴 때. 그 모든 순간 공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가 똑똑히 지켜봐 주겠어.’
굽힐 줄 모르던 당당한 눈이 비탄으로, 절망으로, 좌절로, 끝내는 죽음을 바라는 애원으로 가득 차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롱해줄 테다.
“아하하하하하-!”
세레스의 높고 뾰족한 웃음소리가 후작저를 바늘처럼 찔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