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대악마와 용, 황태자의 살생부2021.10.28.
이벨리아는 휴고의 집무실을 샅샅이 뒤져 고급스러운 종이 몇 장을 찾아냈다.
“아빠가 쓰는 종이는 낙서하기 딱 좋게 생겼다!”
황제에게 올릴 서류나 타국에 공식적으로 보낼 중요한 서신에만 사용되는 종이는 이벨리아의 손에 들어가자 그저 낙서장으로 전락했다.
“누나. 여기 펜.”
“색깔별로 다 있네! 어디서 찾았어?”
“형아 방.”
“아르칸 오라버니?”
“아니. 작은 형아 방.”
“세드릭 오라버니? 꼭 공부도 못하는 사람들이 펜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니까.”
엔리르의 앞발에서 펜 다발을 받아낸 이벨리아는 물감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엔리르가 두 앞발 사이에 물감을 꼭 쥐고 파닥파닥 날아왔다.
“누나, 여기 물감.”
“이건 어디서 찾았어?”
“기사단 방.”
“대체 어느 기사가 물감을…… 아냐, 알고 싶지 않아.”
이벨리아는 고급스러운 종이와 색색의 펜, 물감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비비안을 대신해 이벨리아의 전담 하녀가 된 테사가 잠옷을 정리해주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기씨. 그것들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직접 초대장을 쓰려고!”
가문에서 일괄적으로 찍어내는 초대장을 발송하기에는 소중한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벨리아는 폭신한 러그에 배를 깔고 엎드려 색색의 펜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브가 주인공인 파티에 깜찍한 토끼를 초대합니다.」 「이브가 주인공인 파티에 괘씸한 식량 도둑을 초대합니다.」 「이브가 주인공인 파티에 황금을 좋아하는 아가 용을 초대합니다.」 「이브가 주인공인 파티에 미친개 1을 초대합니다.」
“글씨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나름대로 꾸며보겠다고 물감을 덕지덕지 칠하는 바람에 영 깨끗하지 않은 초대장 여러 개가 완성되었다.
“어때, 테사?”
“……무슨 일이든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아기씨.”
“테사는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이벨리아는 초대장에 칠해진 물감을 말리고자 햇빛 드는 창가에 주르르 늘어놓았다. 잘 마르고 있나, 초대장 앞에 쪼그려 앉아 물감을 톡톡 건드려보던 이벨리아는 이내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엘라임에게도 초대장을 주는 게 나을까.”
“응.”
“하지만 정령왕을 인간들의 연회에 초대하는 건 실례가 될지도 몰라.”
“나는 누나가 직접 만든 초대장을 받으면 기쁠 것 같아. 아마 그 정령왕도 그럴 거야.”
“엔리르가 어떻게 알아?”
“그 정령왕은 나보고 훌륭한 용이랬어. 착한 정령왕이야. 나는 알아.”
“…….”
그래. 사실 이 파티의 주인공은 나와 엘라임인데. 엘라임을 초대하지 않는 것도 웃기지. 공식적인 초대장이 정령계를 주소로 해서 도달하지는 못할 테니, 이벨리아는 자신이 직접 만든 초대장이라도 전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브와 엘라임이 주인공인 파티에 나의 맹약자를 초대합니다. ps.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는 따로 우리만의 연회를 열면 되니까요! ps. 이 초대장은 이브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꼭 주고 싶었습니다.」 엘라임을 상징하는 물방울 모양을 통통 그리고 나니 아주 못생기고 의미 있는 초대장이 완성되었다. *** 이벨리아로부터 뜻깊은 초대장을 받고 정령계로 돌아간 엘라임은 늑대 형상의 상급 정령, 일레스트의 머리에 턱을 괴고 고심했다. 사실 얼마 전 아가 계약자가 주최한 봄 소풍에 초대받지 못하여 조금 서운하던 차였다. 그러나 직접 만든 이 초대장을 보자 그런 꽁한 마음 따위 단번에 풀어져 내렸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왕이시여.”
“흠…….”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내 계약자가 나를 소환한 것을 이유로 인간계에서 연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가실지를 고민하고 계시는지요.”
“아니.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안 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리 저를 껴안고 한숨을 쉬시는지요.”
연회란다. 연회. 마땅히 화려하고 빛나야 할 연회. 그것도 자신의 계약자가 주인공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야 함은 물론이다.
“일레스트. 넌 인간들과 몇 번 계약을 해봤었지.”
“예, 왕이시여. 잦지는 않으나 종종 맺었습니다.”
“통상 연회의 주인은 가장 화려하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아주 화려하지요.”
잠시 침묵한 엘라임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걱정이군. 내 맹약자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아. 눈에 보여야 화려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면 큰일이군요. 인간들 사이에서 밟히기라도 하면…….”
엘라임이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큰 문제군.”
누가 우리 아가 맹약자를 못 보고 밟고 지나가면 어쩐단 말인가. 흔치 않게 깊은숨을 내뱉는 왕의 모습에, 일레스트가 통통한 앞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왕이시여. 제게 맡겨 주시지요.”
“어떻게 하려고?”
“왕의 아가 맹약자가 가장 화려할 수 있도록 운디네들과 논의를 좀 해보겠습니다.”
일리 있다. 드높은 곳에 홀로 칩거해있던 엘라임과 달리, 인간계를 유영하고 인간들과의 계약도 잦은 하급 정령들이라면 우리 아가 계약자가 가장 빛날 방법을 생각해올 것이다.
“내가 부하 하나는 잘 뒀군.”
엘라임이 흡족하게 웃었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왕의 칭찬에 눈을 반짝 빛낸 일레스트는 성심을 다해 받들기로 마음먹고 후다닥 달려나갔다.
‘화려하게! 화려하게!’
그날, 왕의 아가 계약자는 인간계에서 가장 화려해야 했다! *** 수도 거리 곳곳에 활기가 돌았다. 제국의 요충지인 만큼 평소에도 가장 활력 넘치는 곳이기는 하나, 이번에는 결이 달랐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고소하게 퍼지는 가게 앞. 사람들은 아르티나 공작가에서 대대적으로 구휼미를 푼다는 소식을 듣고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뭄으로 힘들던 차인데!”
“공녀님께서 소환하셨다는 정령왕이 벌인 물난리로 우리 밭 가뭄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도 다행이지 뭔가.”
경작하는 이들은 모두 동의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가뭄이 최근의 물난리로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되었던 터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기근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이 제국 가장 부유한 가문이 식량 창고를 털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니.
“내가 귀족의 연회 날을 이리 목을 빼고 기다릴 줄이야!”
최근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던 채소가게 주인이 하는 말에, 상인들 모두가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화려한 연회는 늘 귀족들만의 잔치요, 전유물이었다. 특정 귀족 가문이 연회 날에 맞추어 식량을 배부한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벨리아의 경사를 제국 모두의 경사로 만들어 감히 그 누구도 이 소식을 악용하지 못하게 하려던 엘리시아의 계책은, 늘 그렇듯 빗나감 없이 맞아떨어졌다. 한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연체로 허공을 동실동실 걸어 다니던 일레스트는 귀를 쫑긋 세워 듣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가뭄으로 힘들다. 비가 와야 한다. 그렇다면 상서로운 구름과 무지개, 산과 들에 적당히 내리는 비!’
정령계에 다다르자 일레스트의 생각은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왕의 아가 계약자가 한 일인 줄 알게 하려면 하늘과 바다에 아가 계약자의 얼굴을 수놓는 것이 좋을까?’
*** 수도와 변방을 불문하고 제국 전역의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대장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수플레가 담긴 접시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경악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각양각색의 봉투에 담긴 서신들이 책상과 간식 테이블 위에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기씨 앞으로 온 편지들입니다.”
“내 수플레 자리를 편지들이 빼앗았어!”
“침대에서 드시지요. 드실 동안 깨끗하게 치워두겠습니다.”
침대에 기어 올라가 털썩 주저앉은 이벨리아가 방을 온통 점령한 편지들을 두렵다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분명 어제 다 치웠는데. 편지들이 스스로 아가를 낳아 늘어나는 게 아닐까.”
근처에 떨어져 있는 편지를 펼쳐보니 그 내용도 가관이었다.
“……날 언제 봤다고 아름다워서 눈이 먼대?”
이게 연회에 초대해달라는 취지의 서신인지 약혼을 하자는 취지의 서신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엔리르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브레스를 뿜어 편지를 화르르 태워버렸다.
“그만. 그만 태워, 엔리르.”
손도 대지 않고 전부 태워버리기에는 이 산더미 같은 서신 내에 정말 필요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걸 다 어쩌면 좋지.”
곰곰이 생각하던 이벨리아는 편지들을 모두 자루에 쑤셔 담았다.
“비밀기지로 전부 가져가서 봐야겠다! 다 같이 보면 금방 정리할 수 있겠지!”
비밀기지에는 무료로 일을 해줄 일꾼들이 많이 있었다. *** 목걸이를 돌려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준비된 일꾼 둘이 곧바로 눈에 띄었다. 이벨리아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인사하고는 서신이 담긴 거대한 자루를 질질 끌어 앞에다가 턱 내려두었다.
“……이게 다 뭐야?”
“나한테 온 편지! 아마 이번 연회에 초대해달라는 게 대부분일 거야.”
아연한 표정으로 묻는 루드비히에게 이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가레스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오렌지주스를 이벨리아의 입에 물리며 자루를 발로 툭 건드렸다.
“음. 전부 태워버리면 되는 거지?”
대악마의 손에서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불씨. 이벨리아는 다급하게 경고했다.
“아니! 여기 안에 꼭 필요한 내용이 담긴 서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굉장히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안타까운 사연이 있으면 어쩌려고?”
“뭐.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야지.”
루드비히와 아가레스, 엔리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이 작은 병아리는 아무래도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호구인 게 분명하다.
“나 혼자 다 읽기에는 너무 많으니까 셋이 같이 읽어주는 거야! 필요 없는 서신은 저쪽으로, 필요한 서신은 이쪽에 두면 돼!”
못마땅한 눈으로 이벨리아에게 온 서신들을 바라보던 셋은 군말 없이 돗자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받들어야지요. 누구 명령이신데.”
“땅 도둑이 하라면 해야지.”
“우리 누나 말은 법이야. 다들 열심히 일해.”
이벨리아는 착실한 일꾼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난 간식을 가지고 올게! 다들 보고 있어!”
“일 시켜놓고 너만 도망가기냐. 땅 도둑.”
“가…… 간식은 중요하지!”
이벨리아가 간식거리를 가지러 오두막에 잠깐 들어간 사이. 셋은 가장 가까이 있던 편지들을 집어 펼쳤다. 눈동자가 서신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려갈수록 셋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가장 먼저 아가레스의 잇새에서 스산한 욕이 흘러나왔다.
“이 새끼가.”
“이 새끼도인데.”
“이놈도야.”
루드비히와 엔리르 역시 쥐고 있던 편지를 자비 없이 구기며 답했다. 아가레스가 손에 쥐고 있는 편지를 태우려다 말고 말미에 쓰인 이름과 서명을 흘끗 보고서는 그대로 옆에 두었다.
“거긴 뭐라고 쓰여 있나.”
“여긴 공녀님의 눈동자를 보면 속절없이 빠져든다고…….”
“빠져 죽을 소리 하고 있네.”
“이거에는 공녀님만 뵈면 입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얼어 죽을 소리 하고 있네.”
루드비히와 엔리르가 서신을 읊자 불쾌한 티를 있는 대로 내던 아가레스가 말했다.
“이봐. 모자란 용과 멍청한 황태자. 잠깐 동맹이다. 그딴 소리 지껄이는 서신들은 전부 이쪽에 둬.”
“좋아. 죄다 찾아가서 불을 뿜어야지.”
“좋은 생각이군. 지하 감옥 자리는 많이 남아 있지.”
이벨리아가 그려두었던 두 개의 원은 텅텅 비고, 아가레스의 옆쪽에만 서신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가레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 정도면 2차 인마전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것 같군.”
“귀족 숙청의 도화선이 되기에도 충분하고.”
“악룡이 이 제국을 멸망시켰다는 전설의 시초가 되기에도 충분해.”
조금 뒤. 제국이 큰 위험에 빠졌다고는 상상도 못 한 이벨리아가 커다란 오렌지주스 병을 들고 나와 해사하게 외쳤다.
“오렌지주스 먹을 사람이랑 악마랑 용?”
역시 대답은 듣지 않고 쪼르륵 따라진 오렌지주스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갔다. 이벨리아가 직접 접시에 담아둔 마들렌도 마찬가지. 손에 비해 커다란 유리컵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 홀짝이던 이벨리아가 엉뚱한 곳에 착실히 쌓인 서신들을 발견했다.
“저기 놓인 것들은 뭐야? 필요한 편지는 여기, 필요 없는 편지는 저기인데.”
“아. 저거.”
“우리 누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 꼬맹이는 이거 가지고 놀고 있어. 편지는 우리가 모두 정리해둘 테니까.”
‘뭔데 저러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아가레스가 쥐여준 퍼즐을 착실하게 맞추던 이벨리아는 따뜻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대자로 뻗어 단잠에 빠졌다. 이벨리아는 꿈에도 몰랐다. 저들이 따로 분류하고 있는 저 편지 더미가.
“이 노트에 전부 이름 적어둬라, 황태자.”
“잠깐만. 제목부터 좀 쓰고.”
“제목은 그걸로 하자. 살생부.”
무려 대악마와 용, 황태자가 머리 맞대고 작성한 살생부라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