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아르티나의 멸문을 위한 패2021.10.25.
데퐁트 후작가의 하인들과 하녀들은 평소보다 더욱 신중하게 행동했다. 주인 일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발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한창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소식을 전할 때면 매질을 당하지 않도록 언어를 고르고 골라 순화했다. 후작가의 금지옥엽 영애, 세레스의 방에서는 어김없이 찻잔 깨지는 소리가 쨍하니 울려 퍼졌다. 방 밖을 지키고 있던 하녀들이 일제히 목을 움츠렸다. 찻잔이 깨지기 전에 집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소리가 울린 것을 보니, 안에 들어간 하녀 중 하나가 얻어맞은 것이 분명했다. 하녀들이 모두 꿇어앉은 방 안, 세레스는 잘 관리된 엄지손톱을 앞니로 물어뜯었다. 고위 귀족이라기엔 교양 없는 행동이었으나 감히 그 누구도 지적할 엄두를 내진 못했다.
“초대장은!”
“아직…… 아직은 도착한 것이 없…….”
“그게 말이 돼? 우리 가문은 이 제국 단 둘뿐인 후작가인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겠다는 의미인가. 세레스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또 무언가 날아올까 잔뜩 겁먹은 하녀들의 어깨가 안으로 말려들었다.
‘아르티나의 연회가 이토록 주목받는 것도 불쾌한데!’
아르티나 가문에서 무려 십수 년 만에 개최한다는 연회로 온 수도가 떠들썩했다. 게다가 그 사유가 세레스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도, 또 납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정령왕! 정령왕이라니! 분명 거짓이겠지. 눈속임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된다.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행운이 하필 그 오만한 것에게 돌아갔을 리가 없다. 세레스에게는 가세가 예전과 같지 않은 아르티나 공작 가문이 곧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서 모두 까발려줘야 하는데……. 감히 초대장도 보내지 않아?’
아마 자신이 가서 모두 밝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이렇게 치졸한 짓을 벌이는 걸 테다. 여하간 초대장을 받지 못한다면 꼴이 제법 우스워질 것은 분명했다.
‘수도 전역이 초대장으로 난리가 난 상황인데.’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조기에 초대장을 받은 가문들은 신이 나서 자랑을 일삼았다. 보다 체통이 있는 가문들은 드러내고 뽐내진 않더라도 은근히 초대받았다는 티를 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세레스는 함께 다과를 즐긴 또래 영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데퐁트 영애께서는 당연히 초대장을 받으셨겠죠?”
“두말하면 뭐 해요! 무려 데퐁트 가문인걸요!”
“하긴. 아무리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르티나가 데퐁트를 무시하진 못할 테죠.”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영애들 사이에서 세레스는 대답 없이 여유롭게 웃었었다. 마치 그깟 초대장 이미 도착하여 제 방에 고이 놓여 있는 것처럼. 그 반응을 본 영애들이 역시 데퐁트 가문은 다르다며 입에 발린 말들을 해댄 것도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세레스의 방에는 초대장 따윈 없었고, 저녁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초대장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세레스가 다시 한번 찻잔을 집어 던졌다.
“다시 확인하고 와!”
“예, 아가씨.”
“이게 말이 돼?!”
초대장을 받고도 거절하며 가지 않는 것과 받지 못하여 가지 못하는 것은 결이 다르다. 데퐁트 후작가가 아르티나 공작가로부터 초대장조차 받지 못하였다는 소문이 수도에 파다하게 퍼진다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인사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르티나가 데퐁트를 완전히 배척했다더라, 하긴 아르티나 정도 되면 데퐁트 후작가에 체면치레로라도 예의 차릴 필요 없지 않나, 그런 헛소문이 파다하겠지.
‘끔찍해!’
그건 대외적으로 보이는 두 가문의 격차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일일 테다. 초대장이 왔는지 확인하러 뛰쳐나가는 하녀의 뒤로, 값비싼 찻잔이 하나 더 파편이 되어 사라졌다. *** 세레스의 횡포로 몇 번이고 초대장의 도착 여부를 확인하는 하녀들의 발소리가 빨라졌다. 다급한 하녀들의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데퐁트 후작부인은 불안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흐읍…….”
금방이라도 황실 기사단이나 아르티나 기사단, 그도 아니라면 공작 본인이 직접 들이닥쳐 이번 일에 대한 죄를 물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지. 증거는 없고 알리바이는 확실해.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 할 일이야.”
그래. 감히 누가 데퐁트를 의심하겠는가. 심지어 후작 본인이 직접 연금술의 간섭을 알아보겠다며 출진까지 한 마당에 말이다. 후작부인은 설렁줄을 흔들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하나 불렀다.
“목이 결리는구나.”
하녀는 곧바로 후작부인이 즐기는 오일과 부드러운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하녀의 손길을 받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태연하게 굴어야 한다. 이 살얼음 같은 사교계에서 가문과 아이들을 지키려면.’
죄책감은 없어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면 더 빠르게 추락하는 정치판에서 그녀의 아이들을 드높은 곳에 올려두려면.
‘리카드는 데퐁트 공작가의 가주가 되어야 하고, 세레스는 황후가 되어야 한다.’
표독한 눈이 선뜩하게 빛났다. 당연한 것들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우는 것이 마땅했다. ***
“사실이라던가.”
부복한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가 진실로 정령왕을 불러냈단 말이지.”
한 번 더. 일찍이 데퐁트 후작의 그림자가 되기로 맹세하면서 혀를 끊어낸 복면인이 말없이 끄덕였다. 데퐁트 후작이 깊은숨을 몰아쉬자 독한 시가 연기가 어두운 밀실을 가득 채웠다. 흐릿한 조명 사이로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각종 연구재료가 언뜻 비쳤다.
“보람이 없군.”
눈속임하려 기껏 그 더러운 전쟁터 한복판까지 출진했더니만, 공녀가 정령왕까지 불러낼 줄이야.
“대단히 아쉬워.”
전사자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정령왕이 현현하지 않았더라면 공작부인과 공녀까지 모두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아르티나 공작이 수도로 돌아와 지을 표정을 보는 것도 제법 흥미로웠을 터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고고하다는 듯 구는 그 태도가 처참하게 무너졌을 텐데. 부인과 딸을 잃은 공작의 앞에서 보란 듯 부인과 딸을 데리고 활보하고 싶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 그들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는가.”
후작의 시선이 못마땅하다는 듯 허공을 맴돌다가 복면인에게 다시 닿은 찰나.
“마침 왔지!”
72위의 악마 중 3위. 밧사고가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의 모습에 가벼운 말투. 광대 인형처럼 눈에 세로로 그려진 검은 줄. 일견 쉽게 보이는 모습이나 그 내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데퐁트 후작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놀랐어?”
밧사고가 키득키득 웃으며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후작에게서 별 반응이 없자, 밧사고가 영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검지로 머리칼을 돌돌 말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쉽게 됐지! 정령왕을 소환할 줄이야. 그 꼬맹이 능력이 보통이 아닌가 봐? 너와 네 여식과는 달리!”
대놓고 비난하는 말에, 후작 역시 독한 시가 연기를 밧사고 쪽으로 내뿜으며 맞불을 놓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만만치 않더군요. 그깟 꼬맹이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그대의 수하들과는 달리.”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밧사고가 어두운 마기를 피어 올렸다. 주변에 진열된 후작의 연구재료가 속절없이 터져나갔다.
“인간. 말조심해. 우리에게 너 정도의 체스 말은 있으나 마나야.”
“그대들의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
“이번 습격만 해도 그렇지요. 내가 황실 기사단의 교대 시간을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공작저를 폐쇄할 수 있는 결계석을 주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아르티나가 출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
“그랬다면 그대의 수하들이 공작저 내로 진입이나 했을 것 같습니까.”
밧사고가 터져나간 연구재료를 허공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일부는 인정.”
“이젠 정령왕까지 소환된 마당이니, 이곳 실정 전해줄 이 하나는 있어야 하겠지요.”
“흥.”
“모처럼 맺은 동맹인데, 목적을 이룰 때까지 상호 간 예의는 갖추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후작이 번들거리는 외알안경을 추켜올리며 밧사고에게 직접 만든 결계석 몇 개를 더 건넸다. 잘 지내보자는 일종의 뇌물인 셈이었다. 밧사고가 냉큼 받아들었다.
“이왕 동맹을 맺을 거라면 너처럼 처세를 아는 이가 좋긴 하지.”
후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르티나 가문의 멸문까지입니다.”
“대가는 계약으로 맺은 그대로야.”
“잊지 않았습니다.”
허공에 검은 연기로 휩싸인 계약서가 둥실 떠올랐다. 일방적인 계약이 아니라 상호 동맹이기에 서로가 원하는 대가를 받기로 했더랬다. 데퐁트 후작은 아르티나의 멸문을 돕고 인간계의 정보를 빼돌리는 대가로, 만일 이 인간계를 악마들이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고위 귀족으로 대우받으며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악마들은 아르티나의 멸문을 돕는 대가로, 필요한 정보들을 데퐁트 후작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받기로 했다. 이후의 행보가 어떻든 간에 일단 아르티나의 멸문이라는 단기 목표가 같기에 이뤄질 수 있던 계약이었다. 밧사고가 허공에 떠오른 계약서를 다시 말아 품에 넣으며 춤추듯 방 안을 한 바퀴 걸었다.
“아,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뭡니까.”
“아니다. 이건 예언이 아니라 정보 전달이네. 예언 하나 할까는 내 말버릇이라 그만.”
“……얼른 얘기하고 돌아가십시오. 제국법상 악마의 소환은 극형입니다. 내가 그대와 오래 붙어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단 말입니다.”
키득키득, 일견 천진한 웃음소리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그거! 그거 말이야! 제국법상 악마의 소환은 극형이라는 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인마전쟁으로 혹독한 시기를 겪은 이 제국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구시대적 입법이지요.”
“그러니까!”
“혹시 서운해서 그러는 거라면 후일 제가 원하는 자리에 앉거든 폐지하도록 하지요.”
“서운하긴. 우리도 인간들 꼴도 보기 싫은데. 내가 하려는 말은, 그 공녀 있잖아.”
밧사고가 미끄러지듯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들어 후작과 눈을 맞췄다. 까닥까닥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마치 고개 숙여 다가오라는 뜻으로 보여, 후작은 허리를 숙여 밧사고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미세하게 쇳가루가 섞인 것만 같은 속삭임이 후작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공녀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악마인 것 같은데.”
“……!”
“이번에 네가 출진했던 산맥에 다녀왔거든. 우리 애들 얼마나 죽었나 보려고. 그런데 아주 아주 희미하긴 해도 마기가 녹아 있었어.”
“대체 어떤 악마가……!”
“난 짐작이 가는데. 대단히 옅어서 나 정도가 아니면 맡기 어려웠을 기운. 뭘 뜻하겠어.”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약하거나.”
밧사고가 생글 웃으며 덧붙였다.
“전쟁터에서까지도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강하거나.”
예의 웃음소리와 함께 밧사고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누구일지, 어떻게 쓸지 잘 생각해 봐. 연금술사들은 똑똑하다며.”
밧사고의 신형이 사라지자, 데퐁트 후작은 픽 웃으며 남은 시가를 발로 밟아 작게 부쉈다.
‘악마라. 공녀의 곁에.’
그 아르티나가 곁에 악마를 둔단 말인가. 공작도 알고 있는 것인가. 묵인한 것인가. 오랜 연구를 거듭한 영민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다양한 가설이 세워지고 그만큼 많은 가설이 지워졌다.
‘과거 사절단과 이번 토벌전에 따라갔던 마법사. 그자로군. 공작도 알고 있었어.’
1차 인마전쟁 당시 일선에 섰던 고위직 몇몇은 아가레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나, 후작은 후방 지원을 맡았기에 정확히 그 정체까지 짚어낼 수는 없었다. 후작은 책장에서 먼지 쌓인 제국법전을 꺼내 들었다. 방이 어두워 불빛을 찾자, 곁에 서 있던 충복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심지에 불을 붙였다. 민법, 형법, 모든 일반법령을 지나치고 나니, 1차 인마전쟁 이후 새로이 제정된 특례법이 나타났다. 「악마 소환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빠르게 읽어내려가던 후작의 눈이 제30조에 다다르자 천천히 글자를 더듬기 시작했다. 「악마를 소환하거나 악마와 통모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됐다. 굳이 악마들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패를 잘 쓰면 공녀는 물론이요, 아르티나 가문까지 전범(戰犯)으로 묶어 멸문시킬 수 있다. 「단, 투항한 투귀자(반마半魔)이거나, 사역마로 복속된 악마이거나, 제국에 편입된 악마의 경우는 제외한다.」 공녀의 곁에 붙은 것이 반마가 아닌 악마라 하였으니 투귀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3위의 악마가 ‘강하다’라고 평가하였다면 고작 인간에게 사역마로 복속될 리 없음은 명백했다. 마지막으로, 악마가 제국에 편입되었다면 자신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아주 좋아.’
모든 단서조항이 배제되면, 극형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가설을 세우든 결론은 같다. 아르티나 공작가의 멸문. 황후가 된 세레스. 공작이 된 리카드. 차기 황제가 될 자신의 손자. 그렇게 이 제국을 휘어잡을 데퐁트.
“크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언제 폭로해야 할까.’
아르티나가 그 힘으로 덮을 수 없도록 최대한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여야 한다. 더하여 황가와 아르티나가 말을 맞출 수 없도록 황제 또한 있는 자리면 더욱 좋다.
‘그렇다면 이 제국의 근간을 흔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일단 아르티나 일가를 투옥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 제국민들을 선동하고, 아르티나를 제국에 항적하고 악마와 내통한 가문으로 만든 다음, 기분 좋게 사형일만 기다리면 그만이다.
‘마침 공녀가 정령왕을 소환하였음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다지.’
밀실에 데퐁트 후작의 웃음소리가 짙게 흘렀다.
“크하하하! 하늘이 돕는구나! 하늘이 이 데퐁트를 도와!”
허리를 반으로 접고 호탕하게 웃던 데퐁트 후작이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제국 역사서를 소중한 듯 손으로 쓸었다.
“무가(武家)에 권력이 기울면 곧 제국의 명맥이 끊길 것이 아닌가! 제국을 위하는 뜻에 하늘도 어찌 감명받지 않을까!”
인마전쟁은 1차 때처럼 막아내면 그뿐이고, 막지 못하더라도 데퐁트의 안위는 보장받았으니 문제없다. 유구한 역사, 매국하는 것들이 늘 그렇듯 데퐁트 후작 역시 분수 모르는 욕심을 말도 되지 않는 대의로 포장했다. 외알안경 속 잿빛 눈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공녀의 연회. 그날이 아르티나 가문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