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이브가 쏘아 올린 초대장 전쟁2021.10.21.
성대한 연회를 통해 널리 알리기로 결정하고 나니 더 망설일 것도, 숨을 것도 없었다. 엘리시아와 이벨리아, 그리고 엔리르는 보란 듯 다 함께 외출했다. 마차 창밖으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밖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벨리아는 마차 아래로 몸을 숙이고 귀를 꼭 막았다. 아르티나 기사단이 마치 석상처럼 마차 주위를 호위하고 있어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과한 관심만으로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엔 부족함 없었다.
“날 잡아가면 어떡하지. 어디 연구단체 같은 곳에 나를 보내서 탈탈 털어버릴지도 몰라.”
“우리 누나 잡아가면 내가 가만 안 둬.”
“엔리르. 아마 내 백수의 꿈은 틀린 것 같지?”
“그건 이미 저 먼 별나라까지 날아갔어. 다신 못 돌아와.”
잔인한 비유에 이벨리아가 히잉 소리를 내며 볼을 감싸 쥐었다. 엔리르가 위로하듯 이벨리아의 팔에 꼬리를 살랑 비볐다. 공작저 인근을 벗어나자 소란스럽던 공기 역시 빠르게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벨리아는 다시 머리를 위로 들고 항상 구비되어 있는 간식거리를 입에 물었다.
“이 와중에도 젤리는 맛있는 것을 보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젤리인가 보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며 무릎에 대자로 누운 엔리르의 분홍색 배 위에 젤리로 탑을 쌓다 보니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늦춰졌다.
“거의 다 왔구나.”
“어디 의상실이에요?”
“예전에 우리 집으로 왔던 마담을 기억하니?”
“마담? 마담? 으음…… 마담?”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또르르 굴리자 엘리시아가 덧붙였다.
“내게 사랑한다 외치던…….”
“아! 우리 아빠의 경쟁자!”
“……어디 가서 그런 소리는 뻥긋도 말거라.”
엘리시아가 이벨리아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톡 건드렸다.
“그이가 들으면 수도 제일의 의상실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 엘리시아가 목적지로 정한 곳은 제국 내 가장 호화롭다는 의상실, 앙제스(Anges). 디자이너에게 맞춤 제작을 의뢰하기 위해서는 대기 기간만 기본 6개월. 이미 제작된 옷도 품절 대란이라 경매까지 넘어가는 일도 부지기수인 곳이다. 명성이 이에 달하니, 운영하는 마담 역시 제국 유수의 귀족들을 상대로 배짱을 부릴 줄 알았다. 일부러 더 적은 옷을, 더 적은 고객을 위해 팔았다. 예약은 받지만 이를 앞당기거나 순서를 바꾸는 일은 일절 없었다. 물밑에서 도는 소문으로 황후가 대관식에 입을 대례복을 요청하였을 때도 대기열에 이름을 올렸다고 하니, 다른 귀족들 역시 가문을 앞세워 제작을 강요하는 짓은 삼갔다. 다소 불친절하고 고압적이며, 옷 한 벌의 가격이라 보기에는 천정부지에, 봄옷 제작을 요청하면 가을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는 곳. 그럼에도 귀족 부인들과 영애들, 그리고 멋을 안다는 신사들은 마담의 영감이 담긴 의상 한 벌 얻고자 불만 없이 대기열에 이름을 올렸다. 의상실 1층이 카탈로그 한 번 보여달라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과는 달리, 가장 꼭대기 층은 마담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용했다. 예술가가 으레 그렇듯 마담 역시 한창 집중하고 있는 작업에 방해를 받으면 예민하게 반응하기 일쑤였기에, 종업원들은 감히 차도 올리지 못하고 숨소리마저 낮추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 어린 종업원 하나가 빠르게 바닥을 디디며 내는 걸음 소리가 꼭대기 층을 쨍하게 울렸다. 레이스 시안을 만들던 마담이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문양이 음각된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내던졌다.
“누가 이리 경박스러운 소리로……!”
“마담. 공작부인께서 이리로 걸음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런 큰 경사를 알려!”
마담, 앙제스의 얼굴에 환희가 들어찼다. 벌떡 일어선 마담이 홍조 어린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요즘 통 불러주시지 않아 시무룩하던 차인데! 내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걱정했었지 뭐야. 며칠 잠도 자지 못했는데, 내 얼굴이 너무 보기 흉한가? 지금 어디쯤 오셨다는가?”
“평소와 다름없이 아름다우십니다. 출발하신 지는 일각 정도 지나셨다 합니다.”
“어떤 옷을 보여드려야 그 높은 안목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까?”
제자리에서 검지를 몇 번 맞부딪치던 마담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겨 종업원들을 불러들였다.
“카탈로그를 모두 가져와. 아니, 아니지. 가봉해둔 드레스는 모조리, 죄다, 여기 내 방에 전시해.”
“의상실은 모두 비울까요, 마담?”
“으음…… 아니. 공작부인께서 나를 공작저로 부르시지 않고 직접 오신다는 건, 1층에 서성대는 귀부인들에게 뭔가 자연스레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일지도 몰라.”
앙제스가 변함없이 엘리시아의 총애를 받는 이유에는 빠른 눈치와 영민함도 한몫했다.
“어쩜 좋아. 내 사랑께서 오고 계셔! 내 의상실에!”
손뼉을 치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1층으로 휙 달려 나가는 마담의 뒤에서,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종업원이 중얼거렸다.
“마담께서도 공작부인 정도의 권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네요.”
바닥에 떨어진 자투리 레이스 등을 청소하던 다른 종업원들이 낮게 웃으며 반박했다.
“아니. 권세에 굴복한 게 아니야. 마담과 공작부인의 인연은 아주 깊지. 마담은 베르타샨 영지 출신이시거든.”
“베르타샨이요? 그 비극의 땅?”
“응. 베르타샨 백작가가 목숨 걸고 영지민들을 대피시킨 덕에, 마담의 일가는 무사히 영지에서 빠져나왔대.”
“그게 다가 아니야. 이후 1차 인마전쟁 때 가족을 모두 잃고 포로로 잡혀 있던 마담을 공작부인의 군대가 구해냈거든.”
어린 종업원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인연이다.
“마담은 공작부인께 목숨을 두 번이나 빚졌군요!”
의상실에 오래 근무한 종업원이 잉크가 새고 있는 만년필을 종이에서 치우며 긍정했다.
“가끔 마담께서 술에 취하면 그러셔. 다 해진 무복을 입고, 이가 다 나간 검을 들고,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그 뒷모습이 신이나 다름없었다고.”
“차라리 죽여달라며 신을 부르짖을 때 그분이 나타나셨다나.”
“맞아. 그래서 마담께서 이 의상실을 만드셨지.”
전장을 누비는 여성이 비교적 많지 않았던 탓에, 여성을 위한 갑옷들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돈이 되지 않으니 누구도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지도, 제작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엘리시아는 과거 전쟁터에서도 갑옷이 아닌 무복을 입는 일이 허다했다. 앙제스가 이름만 남은 남작 위(位)를 벗어던지고 의상실을 연 것은 그래서였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일가를, 두 번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오직 엘리시아의 안위를 바라며- 여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을 만들던 것이 이 앙제스의 시초였다. 어린 종업원은 마담의 방 한쪽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는 갑옷들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앙제스의 개점 당시부터 지금까지 가게 앞에 걸려 있는, 이제는 온 대륙이 아는 슬로건이 된 문구도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평안을 위하여. 안녕을 바라며.」 그건 모두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
“어머. 마담!”
“마담이 웬일로 1층에!”
“마담, 이번 시즌 카탈로그도 정말 예술이에요!”
내려가자마자 화사한 귀족 부인들과 영애들이 마담을 둘러싸고 저마다 칭찬을 내뱉었으나, 지금의 마담에게는 그저 하루살이들이 웽웽대는 소리에 불과했다. 마담은 대꾸도 하지 않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사둔 꽃 있니?”
“예, 마담.”
“가서 전부 가져와. 화병에 잔뜩 꽂아두고, 한 다발은 내게 줘.”
종업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귀부인들이 궁금하다는 듯 다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마담, 웬 꽃이에요?”
“기분 전환인가요? 아니면 혹시 중요한 손님이라도?”
“마담이 꽃까지 준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 있나요, 이 제국 내에?”
앙제스는 활짝 웃었다. 매번 날카롭고 예민한 모습만 보이던 이가 답지 않게 꽃을 들고 웃으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담이 저렇게 안절부절못한다는 건…….’
‘곧 공작부인께서 오시나보군.’
소문에 발이 빠르고 눈치가 조금 있다 하는 이들은 곧 당도할 손님이 누구인지를 짐작하고선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마담은 마치 망부석처럼 의상실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옅은 주근깨 위로 살짝 어린 홍조, 한숨을 쉴 때마다 살짝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칼, 흰 꽃을 가득 든 채로 달달 떨리는 손이 그녀의 긴장감을 사방에 알렸다. 곧이어 의상실 앞에 마차가 서는 소리가 들리자 발을 동동거리던 마담은, 의상실의 문이 열리자 냅다 고개 숙이고 꽃다발을 휙 내밀었다.
“이걸!”
“……?”
카론은 당황했다. 마님과 아기씨를 호위하여 온 참이었는데, 의상실 마담이 냅다 꽃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근무 중엔 받을 수 없습니다.”
“……?”
“…….”
카론의 체격에 가려져 있던 엘리시아가 안으로 들어와 대수롭지 않게 꽃을 받아들었다.
“미안하지만, 나였어, 카론 경.”
“……저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카론에겐 내가 따로 꽃을 줄게!”
민망해진 카론이 고개를 돌리자, 이벨리아가 자신의 호위 기사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부인! 이제야 찾아주시다니요. 요즘은 왜 저를 부르시지 않으셨어요? 제 옷이 이제는 별로인가요? 역시 예전처럼 갑옷을 지어드리는 것이 나을까요?”
“그만. 자네의 옷이 언제나 이 제국 최고임은 이곳 그 누구도 이견 없을 걸세.”
엘리시아는 의상실 1층을 느리게 둘러보았다. 실제로 옷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 가문의 부인들과 영애들만 여기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급 의상실은 본디 정보 교환의 장이 되기도 하며, 최신 유행을 눈대중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이 되기도 한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 역시 이곳에서 디자인을 잘 봐두었다가 최대한 패턴이 유사한 옷을 보다 저렴한 가게에 가서 구매하기도 했다. 고로, 지금 의상실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마치 이곳이 또 다른, 작은 무도회인 것처럼. 엘리시아의 시선이 귀부인들을 훑자, 마담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옳았어. 무슨 소식인진 모르겠지만, 부인께선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알리고 싶으셨던 거야.’
공작부인의 편안한 시간을 위해 의상실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길 잘했다. 만일 그랬다면 귀한 걸음이 헛것이 될 뻔했으니까. 앙제스는 눈치 빠르게 일부러 운을 띄웠다.
“부인께서 제 의상실을 찾아주신 연유가 있으실 텐데.”
똑똑한 조력자는 늘 달갑다. 기다렸다는 듯 엘리시아가 답했다.
“아, 우리 딸이 입을만한 드레스가 필요한데…… 꽤 중요한 자리라 그대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말일세.”
“물론이지요. 어떤 자리인지 알려주시면 격식에 맞게 가장 앞당겨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서를 앞당기는 일 없다는 앙제스의 지론은 엘리시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애당초 이 의상실은 이분을 위한 곳이니까.
“이번에 수도에 도는 소문과 관련해서 공작저에서 파티를 주최하려 하네. 소문의 주인공이 이브이니, 파티에서 가장 빛나야 할 이도 같겠지.”
“수도에 도는 소문이라면……!”
“……!”
“……!”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지척에 서 있던 귀부인들이 부채를 펼쳐 표정을 가렸다. 뒤에 서 있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한 이들은 목을 빼고 무슨 일인지 물었고, 삽시간에 의상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의상실이 누군가의 드레스 자락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천천히 뜸을 들여 분위기가 잡혔다는 것을 파악한 엘리시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들 들으라는 듯.
“우리 딸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초대장은 최소한으로만 제작할 예정인데, 어떤가. 초대장 제작과 연회장 단장, 우리 아가와 나의 드레스까지 모두 그대의 손을 빌려도 되겠는가?”
이렇게 큰 경사에 찾아주시다니! 앙제스는 채신없이 펄쩍 뛰어오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지요, 공작부인.”
그리고 눈치 빠른 사업가답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모두 잘 듣도록 목소리를 높여서.
“공작저에서 무려 십수 년 만에 여는 파티 아닙니까. 그것도 최근 모르는 이가 없는 제국의 경사를 이유로 해서요! 그저 영광일 따름입니다.”
“고맙네, 마담.”
엘리시아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며 앙제스가 계단 쪽으로 손짓했다.
“공작부인, 제 방으로 올라가시지요. 제가 공녀님께 어울릴 법한 옷들도 미리 손봐두었답니다.”
“카릉!”
“어머, 공녀님께서 아끼시는 반려동물이군요. 이 여우를 위한 멋진 크라바트도 제작하면 좋겠네요.”
크라바트! 집주인이 매고 있는 그것! 반짝반짝하고 보들보들하고 비싸 보이는 그것! 엔리르의 날개가 파닥이고 꼬리가 빠르게 살랑댔다.
“카르릉!”
이 인간은 뭘 좀 아는 인간이다. 엔리르는 장하다는 듯 통통한 앞발로 앙제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어린 용, 엔리르는 대번에 앙제스에게 호감을 품었다. *** 앙제스의 뒤를 따라 엘리시아와 이벨리아, 카론과 엔리르가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1층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무려 공작저에서, 공녀가 정령왕을 소환하였다는 이유로, 성대한 파티를 연다! 초대장을 얻어 다녀오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이익이 수도 없이 많다. 공작가와의 친분을 과시할 수 있고, 당분간 사교계 소문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이익이었다. 더 나아가 초대장을 얼마 돌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참석해서 새로이 인맥을 맺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다. 참석하는 자들이 또 어디 보통 이들이겠는가.
‘초대장.’
‘초대장을 얻어야 해.’
남편의 힘을 빌려서라도, 가진 연줄과 돈줄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얻어야 했다. *** 아르티나 공작가문이 최근 도는 소문을 이유로 성대한 연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모르는 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널리 퍼졌다. 공작저는 물론이고, 그들과 친분 있기로 유명한 카시스 후작저에도 온갖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귀족 영애들이 친근한 척 이벨리아 앞으로 서신을 보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정무로 입궁한 휴고에게는 부인들과 딸들의 성화에 못 이긴 귀족들이 달라붙어 은근슬쩍 연회 이야기를 꺼냈다. 이를 지켜보던 황제가 탄식하듯 말했다.
“공작. 아주 큰 전쟁이 시작된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황제라 저 초대장 전쟁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게 참 좋군.”
황제가 씩 웃으며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내 초대장은?”
“…….”
“초대장.”
“…….”
“설마 나 안 주나?”
말없이 돌아서서 나가는 휴고의 등 뒤로 황제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시종장. 내 초대장 구해와!”
제국 전역 귀족들 사이. 유례없는 초대장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