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가산을 탕진하라!2021.10.18.
돌아가는 길에서도 누가 함께 마차를 탈 것인지 논란이 일었지만, 자꾸 이러면 그냥 운디네를 타고 가버리겠다는 이벨리아의 으름장에…… 왜인지 이상한 결정방법이 제시되었다.
“자, 우리 아기씨 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말하는 거다. 2초 이상 고민하면 탈락!”
“그거 좋군.”
“아니, 대체 왜?!”
이벨리아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다들 원을 만들고 서서는 순서대로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심판은 이벨리아와 함께 타는 마차에 큰 욕심이 없는 이크리안이었다.
“아가.”
“땅콩.”
“병아리.”
“밥풀.”
“저기…… 여기 아직 나 있는데.”
멋있는 것으로 좀 해줘. 검술을 잘한다, 대정령사다 뭐 그런 거. 이벨리아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몇 바퀴 돌자 연상되는 소재가 떨어져 버렸다. 다들 없는 것을 쥐어짜 내느라 무의식 가장 아래 가라앉아 있던 것들까지 꺼내 들기 시작했다.
“덜 익음.”
“검술 못해.”
“약간 모지리.”
“이 자식들, 우리 아기씨에 대해 꽤 아는구먼.”
다들 마차에 타겠다는 일념 하나로 게임에 집중하느라 점점 새빨개지는 이벨리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히잉. 운디네!”
부름을 받고 나타난 운디네는 계약자의 요청에 따라 게임 중인 이들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방울을 터뜨려버렸다. 하급 정령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는 두 정령왕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의 머리칼이 흠뻑 젖었다. 이벨리아가 위협적으로 발을 콩 굴렀다. 슬프게도 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여기 아직 나 있어! 이 못된 사람과 존재들!”
[그래, 이 못된 사람과 존재들! 덤벼봐라! 앙? 앙? 그동안 나를 아주 무시하고 괴롭혔겠다?]
씩씩대며 발을 구르는 이벨리아와 달리, 두 왕과 같은 장소에 있자 자신감이 급격히 상승한 운디네는 히히 웃으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봤자 마르바스가 꼬리를 잡으려 손을 뻗자, 죽은 척 이벨리아의 손에 톡 떨어져 버렸지만. *** 수도 전역이 들썩였다. 수도란 통상 소문의 집결지로 매번 다양한 화젯거리가 입에 오르내리나, 최근 가장 입에 많이 올린 주제를 꼽으라면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네 그거 들었나?”
“아르티나의 공녀님 이야기라면 내가 모르는 게 없지!”
신분으로 따지자면 귀족부터 상인, 평민, 다리 밑의 아이들에게서까지. 장소로 따지자면 의상실, 푸줏간, 객잔에서까지. 평소 입에 담기도 조심스러웠던 아르티나 가문의 공녀님 이야기가 수도 전역을 휩쓸었다. 수도의 랜드마크인 종탑 아래,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들은 소문들을 꺼내며 보란 듯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내가 믿을만한 정보통한테서 들은 소식인데, 공녀님은 검술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시더군.”
“그래? 그건 처음 듣는데!”
믿을만한 정보통을 운운하는 거대한 사내에게 이목이 쏠리자, 구석에 서 있던 사탕 가게 주인도 한마디 보탰다.
“내가 들은 얘기로는 전술에 뛰어난 능력이 있으시다고 하던데! 이번 토벌전의 전략도 다 공녀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더라고!”
“에잉, 자네 말은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건 또 어디서 들었나?”
“내 친척의 사돈의 팔촌이 무려 황실 기사단이란 말이지!”
사탕 가게 주인이 워낙 뜬구름 잡는 소리를 즐기기로 유명한 자라,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다른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하르벤타 제국에서 우리 공녀님 이름만 대면 아주 벌벌 떤다지!”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바다라도 뒤집어 엎어버리면 하르벤타는 아주 물바다가 될 텐데!”
이처럼 제국 내 유례를 찾기 힘든 경사에 저잣거리가 들썩임과 동시에 헛소문들도 양산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모으고 싶었던 사탕 가게 주인이 불쑥 덧붙였다. 목소리는 크게 높인 채였다.
“공녀님께서 추후 카렌 백작가의 영식과 혼인하신다지?”
혼인! 마들렌을 좋아하신다더라, 검술에 재능이 있으시다더라, 보랏빛을 좋아하신다더라, 황태자 전하와도 친분이 있으시다더라. 그런 소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가십이었다. 저잣거리가 싸하게 얼어붙고, 이내 모든 이들이 사탕 가게 주인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들은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해보라는 취지였다.
“카렌 백작가의 영애께서 공녀님과 친분이 있어, 자연히 영식과도 안면을 익히셨다 하더군. 내 이웃의 사촌이 백작가에서 일하고 있거든. 혼담이 오간다는 소식을 내 직접 들었지.”
“카렌 백작가와 아르티나 공작가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기우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갸웃 의문을 표하던 찰나였다. 불쑥 튀어나온 단단한 손이 사탕 가게 주인의 멱살을 세게 잡아챘다.
“억!”
순식간에 목이 졸려버린 가게 주인이 발버둥치자, 멱살을 잡은 이의 옅은 갈색 머리칼이 봄바람에 휘날렸다. 그 아래 드러난 눈은 겨울바람보다 시렸다.
“이 새끼가. 어디 우리 아기…… 아니, 우리 공녀님을 그딴 백작가에 갖다 붙여.”
“켁, 이거 놓게!”
“우리 병아…… 아니, 우리 공녀님을 상대로 감히 혼담의 ‘혼’자라도 꺼내는 인간들은 다음날이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헛소문을 내뱉는 입 역시 마찬가지고.”
제법 체격 있는 사탕 가게 주인이 멱살을 잡은 손을 풀어내고자 몸을 비틀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놈 눈이 완전 맛이 갔잖아!’
어서 정정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세상 하직하게 될 미래가 보였다. 이 자식은 공녀님에게 단단히 미쳐버린 팬이 분명했다. 켁켁 기침하던 사탕 가게 주인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손이 풀리자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헛소문을 들었나 보구먼! 하긴 공작님께서 공녀님의 혼약을 그리 쉬이 맺으실 리가 없지!”
정정하자 사람들은 금방 흥미를 잃고 비둘기 떼처럼 흩어졌다. 저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가십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걸으며, 알렉은 손을 두어 번 탈탈 털었다. 헛소리하는 이의 목을 그대로 꺾어버릴 뻔한 것을, 단장이 죽이진 말라며 신신당부하였던 것을 떠올리며 애써 참았다.
‘헤롤드와 드웬은 잘하고 있나.’
혹시라도 그들의 귀한 아기씨에 대해 허튼 소문 하나라도 돌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아르티나 기사단은 상인들처럼 변복하고 수도 곳곳에서 잠입 임무 중이었다. 그들의 소중한 아기씨가 제국민들의 흥미나 채워주는 소문의 온상지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저 멀리에서 헤롤드가 드잡이하고 있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거하게 한 판 하고 있나 보군. 단장이 죽이진 말랬는데.”
나와서 엿듣고 있길 잘했다. 하마터면 우리 아기씨가 되지도 않는 가문과 혼인한다는 헛소문이 수도 전역에 돌 뻔하질 않았는가.
‘떨어진 명예는 회복이 어렵고, 퍼진 소문은 담기가 어렵지.’
아르티나 기사단은 소중한 아기씨의 한 점 티 없는 명예를 위해 며칠간 은밀한 암행을 이어가는 것이 기꺼웠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알렉은 손목을 돌리며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만일 진정으로 혼담이 오가기만 해봐라. 신랑 될 이의 목을 꺾어버릴 테니.”
*** 며칠이 지나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의아한 일은 아니었다. 가주와 소가주가 모두 출정한 상황에서 남은 공작부인과 공녀. 빈틈을 노린 두 악마. 위기 앞에서 소환한 정령왕. 그 정령왕이 수도 전역에 뿌린 충만한 생명력. 그 무엇 하나 음유시인들의 예술적 감각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미 황실 정령사가 정령왕이 현현하였으며 그 맹약자는 아르티나의 공녀님이 분명하다고 거리에서 크게 외치고 다닌 뒤였다. 흡사 동화 같은 이야기에 믿을만한 이의 확언까지 뒷받침되니 거칠 것이 없었다. 상상을 더한 과정이 그림으로 그려졌고, 살을 붙인 내용이 노래가 되어 읊어졌다. 그리고.
“흐아암-.”
그 모든 작품의 뮤즈이자 장본인은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려 칭얼대고 있었다. 쓸데없이 위엄 넘치는 상상화(畵)와 달리 노란 잠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였다.
“나 엄마랑 봄옷 사러 가야 하는데.”
“나도 옷 사고 싶어. 누나랑 똑같은 거로.”
“그러면 엄마랑 나랑 엔리르랑 다 비슷한 거로 맞추자!”
셋이 비슷한 옷을 맞추어 입으면 정말 예쁠 것이다. 상상한 이벨리아가 환하게 웃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고 베개에 얼굴을 폭 묻었다.
“그런데 갈 수가 없네…….”
“왜 못 가? 지금 가자!”
“못 가. 기사단이 그러는데 지금 밖에는 나를 찜쪄먹으려고 기다리는 이들이 여럿이래.”
실제로 아르티나 가문의 대문 바로 앞에는 온갖 신문사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사들이 쫓으려 하였으나,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이들은 잠시 물러날 뿐 금세 다시 돌아오기 일쑤였다.
“조금 잠잠해져야 나갈 수 있댔어.”
“내가 다 찜 쪄서 먹어버리고 돌아올까?”
감히 우리 누나를 이토록 시무룩하게 만든 것들이 괘씸했다. 엔리르가 날개를 파닥이며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됐어. 현자님이 그러셨는데, 기자들은 펜으로 금수강산도 만들어내니 조심해야 한댔어. 낮잠이나 조금 자고 있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이벨리아는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엔리르를 폭 안으며 눈을 감았다.
“엔리르. 너 참 호빵 같다.”
“……나는 위엄 있는 용이야.”
사르르, 잠이 들며 이벨리아는 긍정했다.
“응. 맞아. 우리 엔리르는 위엄 있는 호빵이지.”
“…….”
*** 그렇게 약 사흘 뒤. 잠잠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구나.”
좋은 봄날, 바깥나들이를 금지당해 시무룩해진 딸을 보던 엘리시아는 결심했다.
“숨겨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차라리 드러내자꾸나. 그래도 되겠지요, 여보?”
“그게 좋겠군.”
휴고는 생각했다. 엘리시아가 우호적인 신문사 하나를 지정하여 독점 기사를 내든지, 황실을 움직여 공식 입장을 표명하든지,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어느 방법이든 간에 크게 나쁘지 않았으므로, 휴고는 단번에 수긍하고 외부 일정을 소화하러 잠시 외출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휴고가 돌아옴과 동시에 엘리시아는 오후 내내 작성한 기안서를 휴고와 하델에게 하나씩 건넸다. 예상과 다르게 제법 두꺼운 기안서에 휴고와 하델이 당황하기도 잠시. 엘리시아가 곧장 본론을 말했다.
“연회를 열어요. 아주 크게. 공작저에서 여는 연회는 흔치 않으니, 장소와 취지만으로도 이목이 쏠리겠죠.”
“……연회를?”
“초대장은 매우 한정적으로. 본래 희귀할수록 가치 높은 법이니, 모두가 초대장 구하기에 혈안이 되도록 할 거예요.”
“흐음…….”
“가문의 경사임과 동시에 제국의 경사이니, 초대받지 못하는 제국민들에게는 구휼미를 아낌없이 풀도록 해요. 마침 작년 경작이 어려웠다고 하니.”
휴고는 기안서를 꼼꼼하게 살피며 천천히 턱을 쓸었다. 엘리시아가 초안을 작성하였으니만큼 손을 댈 곳은 거의 없었다. 휴고가 원하는 만큼 화려했고, 부족함 없이 성대했다.
“우리 딸을 주인공으로, 공작저에서, 다시 없을 화려한 연회라……. 좋군.”
“그러면서도 제국민들에게는 공작가의 식량창고를 열어 자본주의의 참맛을 보여준다니. 역시 마님이십니다.”
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 아버지와, 아기씨라면 환장하는 한 집사는 빠르게 반색했다.
“지금 당장 초대장 시안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마님.”
“역시 집사는 일 처리가 빨라.”
“과찬이십니다, 마님.”
깊이 고개 숙이고 돌아서는 하델의 뒤로 휴고의 음성이 떨어졌다.
“아, 잠깐.”
“예, 주인님.”
휴고가 작은 열쇠를 휙 던지자, 하델이 날렵하게 받아들었다. 열쇠를 확인한 하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보물고를 개방하지.”
휴고가 씩 웃었다.
“가산을 모두 탕진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