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아가레스의 질투2021.10.14.
이벨리아는 새로운 규칙을 정했다. 게임은 물 건너갔으니,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경치를 구경하거나 근처를 산책하거나 간식을 먹을 것. 말싸움이든 주먹다짐이든 싸움은 절대 금지! 가벼운 대련은 허용!
“싸우면 일주일간 이브 금지형이야!”
모인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제시되었다. 착한 강아지들처럼 일제히 끄덕이는 고개들이, 이벨리아에게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진짜 싸우기만 해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세상 선량한 눈빛들 역시, 일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난 근처 좀 구경하고 올게. 다들 착하게 놀고 있어.”
오렌지 주스 하나를 들고 일어선 이벨리아의 팔을 페르세스가 살짝 잡아당겼다. 소개해주고 싶은 이가 있다는 이유였다. 이 외진 곳에 페르세스가 아는 이가 있다니 의외였다. 이벨리아는 순순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페르세스는 대뜸 소개했다.
“자, 인사해!”
뭐에 인사하라는 거지. 가리키는 곳엔 흙밖에 없었다.
“여긴 내 계약자!”
“언니의 계약자는 고대수라고 하지 않았어요? 여긴 흙밖에 없는데…….”
근처에 나무는 제법 많았으나, 고대수라고 할 정도로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는 없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페르세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땅에는 흙과 나무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 봐봐! 이 나무뿌리! 얘가 내 계약자야!”
“……? 이 미꾸라지 같은 나무뿌리가 언니를 소환했다고요?”
이벨리아는 상상했다. 나무뿌리가 간절함을 가져 페르세스를 부르고, 페르세스가 근엄하게 나타나 나무뿌리와 계약하는 장면을. 이벨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페르세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 이 뿌리는 내 계약자의 본체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해. 아마 본 적 없겠지만, 고대수는 굉장히 오랜 세월을 살아왔거든. 속설로는 그 기둥에서 파생된 뿌리가 이 대륙 전역을 덮는다고 하지.”
“정말로요?”
“아니. 궁금해서 고대수에게 물어봤더니 걔가 아니라더라. 근데 아니라는 건 비밀이래. 자기는 최대한 신비주의로 남고 싶다고.”
대번에 환상이 깨졌다. 신비주의는 얼어 죽을.
“고대수랑은 어떻게 대화를 하세요?”
“내가 그나마 자연을 다루니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 대부분은 걔가 뿌리를 두 번 움찔거리면 부정의 뜻, 한 번 움찔거리면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
나무가 계약자라면 그런 고충이 있구나. 이벨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니 내가 엘라임 녀석이 안 부럽겠냐고. 이렇게 귀여운 아가와 계약을 맺었는데!”
페르세스는 인자하게 웃으며 쪼그리고 앉아 이벨리아를 꼭 껴안았다.
“그래도 네 덕에 엘라임 녀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요즘 참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 애정을 준 인간 하나 덕분에 이 징벌도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징벌……?”
달빛으로 자아낸 실타래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페르세스가 옅게 웃었다.
“정령왕들은 인간계에 존재하는 이들과는 제법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곳에 속한 존재가 아님은 명백하지. 그건 저기서 우리 이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악마도 마찬가지고.”
이젠 가장 소중해져 버린 친구다. 그런 친구 역시 이들과 함께 벌을 받는 처지나 다름없다는 말에 이벨리아가 페르세스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고 다급히 물었다.
“아스도? 그럼 어디서, 왜……!”
“나보다는 저 악마나 엘라임에게 듣는 것에 나을 것 같은데. 난 말주변이 워낙 없어서.”
페르세스가 이벨리아를 번쩍 안아 들고 어르며 답했다. 아이의 얼굴에 진한 걱정이 어렸다. 둘도 없는 소중한 이를 걱정하는 듯 그늘이 깊었다. 그녀는 이벨리아의 보드라운 뺨을 손등으로 살짝 쓸었다.
‘부럽네.’
이 아이와 오랜 시간 함께하고, 곁에서 지켜보고, 더불어 추억을 쌓고. 이젠 이 아이에게 이리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저 악마가 부러웠다.
‘……그에겐 이제 이 삶이 소중해졌겠어.’
생의 소중함을 모르는 페르세스는,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부러웠다. *** 이벨리아를 내려둘 생각 없이 안고 다니던 페르세스는 이벨리아가 발버둥을 치기에 이르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돗자리 위에 내려두었다. 너무 세게 발버둥 쳤나 싶어 미안하던 찰나. 페르세스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대련 한 판 하자며 마르바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귀찮다며 고개를 돌리던 마르바스는 ‘야, 겁나냐? 겁나?’ 한 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다들 반골 기질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라 잘 어울릴까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모두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끼리끼리라더니. 망나니들끼리 모이니까 망나니처럼 잘도 노네.’
사자로 변한 마르바스의 갈기 속에 헤롤드가 숨어드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자신도 최근 조련 중이던 악마와의 친분을 조금 더 쌓아보고자 마음먹었다.
“악마 언니.”
“뭐.”
“나랑 빵 먹자.”
“빵 안 먹는다. 너랑은 더더욱.”
“아야야.”
“……?”
“엉덩이가 아파…….”
“너! 그걸 언제까지 써먹으려고!”
“빵 한 조각만 나눠 먹자. 응? 그러면 오늘은 그만할게.”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초리로 이벨리아를 노려보던 로노베가 바구니에서 가장 작은 빵을 꺼내 뚝 잘라 휙 던졌다.
“먹고 떨어져!”
두 손으로 빵을 잡고 냠냠 입에 집어넣은 이벨리아는, 꼬물꼬물 로노베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붙여 앉았다.
“저리 가라니까?”
“추워.”
“네가 춥든 말든, 저기 아무한테나 가서 붙던가. 아니, 그보다 저기 불의 정령왕도 있는데 추운 게 말이 돼?”
타박하면서 로노베는 목에 매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이벨리아의 목에 매주었다.
“따뜻하다.”
“이것도 덮던가.”
외투도 벗어 작은 몸 위에 휙 던져버렸다. 밥풀만큼 작은 게 춥다는데 그냥 뒀다가 얼어버린 도시락이 되어버리게 둘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아가레스의 오른쪽 눈이 살짝 경련했다.
‘이브가 로노베의 외투를 빌려 입고 스카프를 빌려 매고 함께 빵을 나누어 먹고 있군.’
대종말의 전조라고 해도 믿을 법한 서늘한 마기가 아가레스의 눈에서 넘실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꼬맹이와 이젠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게 된 부하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
“예, 주군.”
“앞으로.”
“출입 금지라는 말은 금지야, 아스.”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가레스가 멈칫했다. 슬쩍 이벨리아의 눈치를 보던 그가 다시금 오만한 표정으로 부하에게 명했다.
“……이브 금지다.”
*** 알렉과 마르바스는 일전에 이바스 저택에서 속 시원히 끝내지 못했던 대련을 이어서 했고, 결국 알렉의 패배로 끝났다. 알렉은 분한 듯한 얼굴이었으나, 애초에 대악마인 마르바스를 상대로 하자면 휴고가 직접 칼을 맞대도 비등할 것이었으니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헤롤드와 카론은 마르바스에게 자신들과도 한 판 붙자며 조르고 있었고, 마르바스는 귀찮다는 듯 커다란 사자로 변해 꼬리를 휘둘렀다.
“저 사자 머리 위가 잔디색인 게 너무 웃겨.”
이벨리아가 다시 한번 배를 잡고 폭소하자, 저 멀리에서 마르바스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앞발로 땅을 찼다. 차기 대마법사 후보로 불리는 이크리안은 악마들과 정령왕들에게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묻고, 귀중한 정보를 접하면 작은 노트를 꺼내 적어두기도 했다.
‘렐리안은 뭘 하고 있지?’
둘러보니 렐리안은 햇빛이 가장 잘 비치는 곳에 앉아서 하얀 들풀로 꽃반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의외로 옆에는 아르칸이 붙어 앉아 있었다.
‘렐리안의 얼굴이 살짝 붉은데. 바람을 너무 오래 쐬어서 무리했나?’
렐리안이 섬세한 손으로 맺은 꽃반지는 이벨리아의 검지에 안착했다. 한편 루드비히는 페르세스와 이프리트 사이에 앉아 정령왕들도 왕이니 올바른 지도자의 자세를 알려달라며 채근했다.
“올바른 지도자란, 예쁘면 된다.”
“올바른 지도자란, 멋있으면 그만이지.”
“…….”
별다른 노력 없이 태생이 왕인 그들의 조언은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엔리르와 세드릭은 무언가를 작당하는 듯 저 구석에서 속닥속닥, 끄덕끄덕하더니, 엔리르가 화환을 들고 뽈뽈 날아와 페르세스의 머리에 슬쩍 얹어주었다.
“어머, 이건 뭐야, 아가 용?”
“저쪽의 신사분께서 전달하라고 했어.”
시선을 돌린 세드릭의 귓가가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어린 소년의 귀여운 치기에 페르세스가 환하게 웃으며 화환을 고쳐 썼다. 아가레스의 성화에 로노베의 외투와 스카프를 돌려주고 그가 건넨 담요를 덮은 이벨리아가 그 모든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참 좋다, 그치?”
“응.”
답하는 금빛 시선은 어린 친구를 향해 있었다. 그래, 참 좋았다.
“앞으로도 이럴 수 있으면 좋겠다. 자주.”
“그렇게 될 거야.”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아가레스를 올려다보자니 눈이 시렸다. 이벨리아가 살짝 눈을 찌푸리자 곧바로 진보랏빛 마기가 햇빛을 가렸다. 마치 차양처럼. 화살처럼 내리꽂히던 빛이 가려지자 푸른 눈이 다시 동글동글해졌다. 이벨리아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있지, 이거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나에게 얘기해선 안 될 건 없어.”
“페르세스 언니가 그랬는데, 토끼와 정령왕들은 벌을 받고 있는 거래.”
“……별소리를 다 했군.”
모두가 이 세계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자들이다. 벌이라고 해봤자 별것 있겠나 싶었다. 또 나름 다들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벌이라는 것의 어감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이벨리아로서는 자신의 작은 토끼 친구에게 자신도 미처 모르는 고충이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말해달라고 졸라볼까.’
이벨리아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토끼는 단 한 번도 나한테 조른 적 없었어.’
속상함에 울상짓고 있으면 늘 가만히 위로해주었다. 말하기 껄끄러운 것을 말하라며 다그친 적 없다. 그리고 이벨리아는 그게 정말 좋았었다.
‘나도 똑같이 해줘야지.’
올바른 친구의 정의를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를 통해 배우고 있는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그저 곁에 있어 주자고 다짐했다.
“지금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옆에 내가 있다는 것만 알아줘. 나중에 말할 곳이 필요하다면 그냥 말하면 돼. 항상 듣고 있을게.”
작은 손이 커다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자 단단하게 햇빛을 가리고 있던 아가레스의 마기가 일순 울렁였다.
“……항상?”
“응. 항상.”
이미 보드라운 언사가 셀 수 없이 쌓여 있는 마음 한구석에 여지없이 또 한 번 커다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매번 닿아 수없이 겪었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또 속절없이 퍼지는 따뜻함이 그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벌이었는데.”
“……응.”
“이젠 아니야.”
파문 없는 금빛 시선이, 훨씬 아래에 있는 금빛 머리칼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오직 어린 친구 앞에서만 짓는 웃음은 어김없이 피어났다. 조용한 꽃비처럼. 오히려 상이지. 꽃잎을 타고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벨리아가 물었다.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으면 흘려넘길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벌이 상이 된 이유에 내가 조금이라도 있을까? 그렇다면 행복할 텐데.”
“전부야.”
“응?”
아가레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긴 시간 무료하게 중도를 지켰었는데, 이제 와서 참으로 극단적이다. 모순이 혼란스러우면서도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았다. 상관없다. 혼란스러워 길을 잃더라도 따라야 할 나침반이자 등불이 이 앞에 있으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내면의 저울을 치워버렸다.
“전부라고. 그 이유의 전부가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