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이 소풍은 망했어2021.10.11.
“너희들이 왜 전부 여기서 나와……?”
이미 동참을 허락했던 아가레스, 루드비히, 이크리안, 렐리안, 아르칸, 세드릭, 엔리르, 로노베 이외에도. 헤롤드, 알렉, 카론, 그리고 마르바스가 마차 앞에 조르륵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당신들은 또 왜 여기서 나와요……?”
이미 소풍 사실을 알고 있던 기사단과 마르바스는 백 보 양보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페르세스와 이프리트는 어떻게 알고 여기에 있는 거란 말인가. 페르세스가 멋쩍은 표정으로 높게 묶은 포니테일을 쓸어내렸다.
“이번에 너희가 소풍 가기로 한 그 장소가 내 계약자인 고대수의 뿌리가 닿은 자리거든.”
아르티나 가문의 사용인들이 우리 아기씨 평화로운 소풍을 위해 사전답사 가면서 했던 대화들을 고대수가 듣고 페르세스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이프리트도 민망한 듯 말을 이었다.
“그게, 우리도 인간 계약자는 없었다 보니까 소풍 같은 건 가 본 적이 없어서.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을게. 우린 불이고 바람이니까.”
그럴 리가 없다. 얌전? 저들이? 불이라면 지옥불이고 바람이라면 태풍인 저들이?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시선을 살짝 돌려보니, 알렉은 이미 한 판 붙자며 마르바스를 상대로 검을 빼 들고 있었고, 마르바스는 이거 참 재밌겠다며 마기로 만들어진 창을 꺼내 들고 있었다. 페르세스는 아가레스에게 오랜만이라며 팔을 올리려다가 내쳐지고서는 으르렁대고 있었다.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대기를 집어삼켰다. 그나마 얌전하던 엔리르는 자신과 비슷한 머리카락 색의 이프리트 앞으로 조르르 달려가 인간형으로 변한 다음 고개를 갸웃댔다. 색이 비슷한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프리트의 목걸이에 달린 보석을 잽싸게 낚아채 후다닥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
아무래도 행복한 소풍이 아니라 극한의 지옥 훈련이 될 것 같다. 이벨리아의 작은 손이 이마 위로 탁 올라갔다.
“개복치…….”
“개복치요, 이브?”
“렐리안, 내가 얼마 전에 책에서 개복치라는 물고기를 봤거든.”
“맛있어 보이던가요?”
“아니, 그 물고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죽는대.”
렐리안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땐 참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 이젠 알 것도 같아.”
“뭘요?”
“개복치가 왜 스트레스로 사망하는지.”
더럽게 밝은 귀로 개복치 이야기를 들은 아르티나 기사단이 왕왕 이벨리아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개복치가 드시고 싶으시다고요, 아기씨? 그거 맛없을 텐데!”
“개복치라……. 지금 엘라임에게 알리도록 하지.”
“그럴 것 없다. 내가 직접 찾아오면 그만이니까.”
개복치를 잡자며 으쌰 으쌰 하는 아르티나 기사단과 당장 엘라임에게 알려 바닷속을 뒤집겠다는 이프리트,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가겠다며 사자로 변하는 마르바스까지.
“안 먹어! 알렉 검 집어넣고, 양아치 오라버니 내 계약자에게 신호 보내지 말고, 마르바스 다시 악마로 돌아오고, 다들 마차에 알아서 나눠타고 출발!”
이벨리아가 상황을 정리하며 가장 앞에 서 있는 마차로 대뜸 걸어갔다. 그러나 한 마차당 수용 인원은 4명. 자연히 이벨리아가 타고 있는 마차에는 3명만 더 탈 수 있었다. 모두가 이를 알아채자, 마치 적군을 앞에 둔 듯 낮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렇게 소리 없는 눈치싸움이 거세질 때.
“난 누나 무릎 위에 앉으면 돼.”
작은 몸집과 귀여움을 적극 사용하는 엔리르는 파닥파닥 날아가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이 소풍은 날 위해 이브가 계획한 것이다.”
소풍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아가레스는 다른 이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설 수 없도록 짙은 마기로 벽을 만들어두고는 마차 안으로 진입했다. 즉, 다른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기보다는, 그냥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짙은 불처럼 타오르는 마기에 헤롤드가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윽. 이 마기는 뭐야.”
“……여전히 대단하긴 하군.”
페르세스도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한 걸음 크게 물러났다. 힘의 상성이 좋지 않다 보니 와닿는 마기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저건 논외로 치지. 저것과 싸우자면 여기 있는 누구도 살아서 소풍을 가지 못할 테니.”
진작부터 아가레스의 능력을 알고 있던 이프리트의 정리 아래, 아가레스가 마차를 타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제 두 자리가 남았다. 렐리안이 작은 몸집을 십분 활용하여 여러 존재 사이를 뚫고 마차 앞으로 다다랐다.
“어디 한 번 저에게 무력 행사를 해보시죠. 아마 이브가 여러분을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걸요.”
창백한 얼굴과 가녀린 몸집. 좋지 않은 건강을 이브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오늘만큼은 약한 몸이 한 몫 톡톡히 했다.
“뭐야, 저 인간 꼬맹이! 엄청 약았잖아?”
“제가 요즘 마법을 배워서 점점 똑똑해지고 있거든요.”
마르바스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렐리안이 생긋 웃어 보이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한 자리.
“저는 아기씨의 호위 기사입니다. 마땅히 제가…….”
“저 마차 안에 지금 대악마와 용이 타 있다. 설마 그대의 호위가 진정으로 필요하다 여기진 않겠지?”
“…….”
또래의 인간 기사 중에서는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기사이기는 하나, 용과 대악마에 비하자면 미미한 힘일 뿐이다. 아르칸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카론이 시선을 돌렸다.
“좋다. 다들 힘깨나 쓰는 것 같은데, 한 판 붙자.”
헤롤드가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무식하게 생긴 기사가 제법 현명하군.”
로노베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단검을 손에 쥐었다. 다들 전투라면 이골이 난 이들뿐이다. 그들에게 대련으로 무언가를 정한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것이요, 불만의 제기가 없는 합당한 것이었다.
“저 마차에 함께 타면 우리 아기씨와 이야기도 더 나누고, 마차 안에서 간식도 나누어 먹고, 달리다가 중간에 휴식도 함께 취할 수 있을 테지.”
알렉이 얇은 쌍검을 두어 번 휘두르며 하는 말에, 그 자리의 모든 악마, 정령왕, 기사들, 형제들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자, 저는 저 마차에 큰 욕심이 없으니 심판을 보도록 하지요.”
이크리안이 웃으면서 마법을 사용하여 커다란 원을 그린 다음, 그 밖으로 몇 걸음 물러나 크라바트를 풀었다.
“이 크라바트가 아래로 내려감과 동시에 시작입니다. 살상은 금지. 심각한 부상도 금지. 원 밖으로 나가면 장외 패입니다. 항복……은 고려할 필요가 없겠군요.”
누구 하나 항복할 리가 없었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 자들이며, 실력 또한 이를 받쳐주는 자들이라. 전장 한가운데 같은 서늘함이 흘렀다. 허공에 들린 이크리안의 크라바트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저 마차 자리! 포기할 수 없다! - 휙. 그리고 이크리안의 크라바트가 허공을 가름과 정확히 동시.
“어엇?”
“으엉?”
이벨리아가 타고 있던 마차가 인원을 채우지 않고 출발해 버렸다. ***
“이브. 저 밖에서는 이 마차에 타겠다고 결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알아. 기다리다간 끝이 없을 거야. 소풍 못 갈걸, 아마.”
인간형으로 변해 이벨리아의 옆자리에 앉은 엔리르가 몽롱한 말투로 말했다.
“참 유치해. 왜 이런 걸 가지고 싸우는 거야?”
“그럼 네가 내리지 그랬나, 용.”
엔리르는 마치 세상 둘도 없는 못된 이를 본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되지. 난 누나 동생인걸.”
결국, 용으로 변해 무릎 위에 올라타는 꼼수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엔리르 역시 저 밖에서 브레스를 팡팡 뿜으며 결투하고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우리 마차 창문 열고 가자! 봄이니까 바람이 시원할 거야.”
창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봄바람이 날아들었다. 특유의 봄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정돈해둔 머리칼이 정신없이 휘날리지 않을 정도로 옅은 바람이 기분을 떠오르게 했다. 열어둔 창문으로 꽃잎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이벨리아는 꽃잎을 냉큼 손으로 잡아 엔리르의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원래 여행을 갈 땐 간식을 먹는 거랬어. 내가 잔뜩 가져왔지!”
이벨리아는 아침 일찍부터 세토를 졸라 챙겨둔 간식 바구니를 열었다. 여러 개의 상자 속에 색색의 스콘과 마들렌, 과일, 주먹밥 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와아-!”
“대단하지? 우리 집 세토는 요리를 정말 잘해!”
커다란 마차의 좌석 가운데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기에, 그 위에 올려두고 다 함께 나눠 먹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게 바로 소풍이구나. 어떡하지. 너무 설레.”
알아서 다른 마차 타고 오라며 저 밖에 내버리고 오기는 했지만, 오늘 소풍을 함께 가기로 한 이들 중에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더없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소풍. 이벨리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헤헤. 소풍. 소풍.”
“아주 기뻐 보여요, 이브.”
“나도 소풍이 좋아. 처음 가보지만 벌써 좋아졌어. 누나가 좋아하니까 좋아.”
“소풍이란 것은 아주 좋은 것이군.”
로노베 때문에 토라진 아가레스를 달래주기 위해 충동적으로 소풍을 계획한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잘한 일이었다. *** 오전 시간 내내 달려 도착한 곳은 수도에서 약간은 벗어난 곳이었다. 제법 많은 시간을 이동에 할애하기는 했지만, 분주한 수도와는 달리 한적한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아르티나 가문의 사용인들이 자신들의 하나뿐인 아기씨가 완벽한 소풍을 즐길 수 있도록 사전답사까지 해가며 고르고 고른 장소였다. 키가 작은 들꽃과 향기로운 들풀이 가득 피어 있었다. 둘러싼 나무들에는 화사한 꽃송이들이 자태를 뽐냈다. 훈기 있는 봄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사방에서 꽃비가 흩날렸다.
“우리 여기다가 돗자리…….”
한가운데에 서서 흡족한 듯 주변을 둘러보던 이벨리아는 돗자리를 가져오라 명하고자 뒤를 돌았다가 눈밭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아르티나 기사단을 발견했다.
“…….”
커다란 은빛 돗자리가 허공을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헤롤드가 돗자리를 마치 말뚝을 박듯 땅에 콱 박아넣었다.
“우와아아-! 여기다! 여기다가 돗자리를 펴자!”
“멍청아. 우리 아기씨 저기 서 계신다! 저기가 가장 마음에 드신다는 뜻이라고! 돗자리 가져와!”
알렉의 말에 헤롤드가 땅에 파묻히다시피 한 돗자리를 꺼내 팔락팔락 흔들자 모래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흥. 바보 같은 인간들. 이깟 나들이가 뭐가 그리 신난다고……. 잠깐! 그 간식은 밥풀이 좋아하는 거다. 손대는 것들은 내 손에 뒤질 줄 알아!”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떠는 아르티나 기사단과, 아닌 척해도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마르바스, 이렇게 많은 존재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처음이라 조금 얼떨떨한 정령왕들. 그리고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볼이 슬그머니 붉어진 아르칸과 세드릭, 이크리안과 렐리안까지. 모든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돗자리를 펼치고, 간식을 꺼내 예쁘게 진열하고, 이제 뭘 하면 되겠냐는 듯 반짝반짝한 눈으로 이벨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공 던져달라는 강아지들 같아…….’
이벨리아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작은 공과 수건을 꺼내 들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어린 하녀에게 물어 준비한 게임이었다.
“자! 이걸로 노는 거야. 내가 다 알아보고 준비했지!”
“공이로군. 내가 자신 있지.”
“그래? 그럼 잔디부터!”
어깨를 풀며 가까이 다가온 마르바스가 공을 멀리 던지고 다른 이들이 잡는 놀이를 기대했건만. 작은 고무공은 처음으로 공을 잡은 마르바스의 손에서 펑 터져나갔다.
“……그거 아닌데.”
“누가 가장 먼저 터트리는지 시합하는 거 아니었어?”
“……됐어.”
낭만도 없는 잔디 같으니라고.
“이걸로 놀자. 공은 잔디가 망가뜨려 버렸으니까.”
이벨리아는 모두 원을 만들어 앉도록 지시한 다음, 술래인 마르바스에게 빙빙 돌며 누군가의 뒤에 수건을 두라고 일러주었다. 뒤에 수건이 놓인 이가 재빨리 알아채고 달려 마르바스를 잡으면 되는 게임이었다. 신나게 웃으며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달리던 마르바스는 엔리르와 알렉의 딱 중간에 손수건을 떨어뜨렸고.
“이건 내 수건이다, 여우.”
“난 여우가 아니라 용이야. 이건 내 수건이야. 용과 싸우고 싶어?”
손수건은, 서로 자신의 뒤에 놓인 것이라며 잡아당기는 둘 때문에 양쪽으로 쭉 찢어져 버렸다.
“누나. 수건이 두 개가 되어 버렸는데. 두 개로 놀까?”
“……아기씨. 두 개로 놀면 두 배로 재밌을 겁니다.”
잘못한 건 알아서인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이들에게, 이벨리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여기 대부분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깜빡하고 약한 도구를 준비한 내 탓이지!”
흐드러지게 날리는 분홍색 꽃잎을 맞으며, 수건을 찢은 장본인인 알렉이 손을 들고 반박했다.
“저희는 인간인데요, 아기씨.”
이벨리아는 땅에 가득 쌓인 꽃잎을 한 움큼 집어 수건을 찢어버린 장본인에게 휙 집어 던졌다.
“저리 가. 넌 멍멍이야.”
“아기씨의 충견은 맞지요. 멍멍!”
알렉이 사르르 눈을 접으며 이벨리아의 앞에 부복했다. 애써 준비한 수건을 찢어버리고선 능글맞게 넘어가려는 것이 한층 더 얄미웠다. 이벨리아가 꽃잎을 한 움큼 더 집어 던지며 외쳤다.
“난 너 같은 강아지 둔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