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도 껴줘, 봄 소풍2021.10.07.
돌아온 아가레스는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며 로노베의 무릎 위에 착 달라붙어 앉아 있는 어린 친구를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금안이 로노베의 얼굴에 닿을 때는 언짢음을 가득 담았다.
‘감히 꼬맹이와 왜 저리 붙어 앉은 거지.’
작은 친구의 관심을 돌리고자, 아가레스는 따뜻하게 데운 홍차를 손에 쥐여준 다음 사 온 러그를 바닥에 펼쳤다.
“새 러그 사 왔으니 여기 앉아.”
곧바로 러그를 공수한 추진력에 감탄하기는 하였으나, 로노베의 품이 제법 말랑말랑 편안했기에 이벨리아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군으로부터 세상 다시 없을 적군을 보는 시선이 날아들자 로노베가 이벨리아를 밀어냈으나, 이벨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 꼬맹이가 어쩌다 거기 앉아 있는 거지?”
“내가 엉덩이 아프다니까 이 악마 언니가 날 들어주고 안아주고 했지 뭐야.”
“무슨! 내가 언제!”
“그랬잖아. 2층에서 내 입도 닦아주고 나 들어서 내려오고 지금 무릎 위에 두고 안아주고 있잖아.”
“……!”
객관적으로는 맞는 사실이지만 얄미운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게다가 이 꼬맹이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주군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
‘뭐지, 이 꼬맹이. 고단수 복수인가.’
로노베는 이벨리아를 휙 들어 옆에다가 던지듯 내려두었다. 착지한 곳은 부드러운 소파였기에 타격은 전혀 없었지만, 이벨리아는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
“너 아주 엄살쟁이구나?”
눈치도 빠르긴. 이벨리아가 생긋 웃으며 로노베의 무릎으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또 왜 올라와!”
“포근해.”
이젠 활활 타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로노베에게 성큼 다가섰다.
“너.”
바로 위에서 무겁게 떨어지는 목소리. 이렇게 가까이에서 주군과 이야기 나누기는 또 처음이다. 로노베는 대번에 심장이 팔딱이고 뺨이 붉어졌다. 혹시 아끼는 꼬맹이에게 잘해주었다 하여 치하를 하시려나 기대가 되기도 했다.
“예, 예, 주군.”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나비처럼 팔랑이는 속눈썹을 슬쩍 들어 주군을 보는데.
“앞으로 출입 금지다.”
***
‘이런.’
로노베와 친근함을 뽐내는 바람에 소중한 악마 친구가 토라져 버렸다. 이벨리아에게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했지만, 로노베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출입 금지라며 으름장을 놓더니, 이벨리아가 말리자 이번엔 새로 사 온 홍차를 로노베에게만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스…….”
“응. 홍차 더 줘?”
아니. 너 굉장히 속이 좁았구나.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이벨리아는 뱉지 않았다. 다만 저 구석에서 쭈글하게 서 있는 로노베를 위해 이 대악마님의 기분을 조금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날씨도 좋은 봄이잖아!”
“그래, 봄이지. 우리 꼬맹이가 가장 좋아하는.”
“봄에는 당연히 소풍을 가야지! 그리고 원래 소풍은 가장 소중한 친구랑 함께 가는 거야.”
아가레스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꿈틀댔다. 가장 소중한 친구라는 말에 반응하는 것이 눈에 빤하게 보였다. 이벨리아가 아가레스가 앉아 있는 의자로 걸어가 그 옆에 비집고 앉으며 헤헤 웃었다.
“가장 소중한 친구는 아스니까 아스랑 함께 가야지.”
그 말에, 아가레스는 로노베의 출입 금지령을 풀어주고, 알아서 타 먹으라며 찻잎을 휙 던져주었다.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가소로운 토끼 같으니라고.’
***
“으음…… 간식은 출발 직전에 넣게 세토한테 부탁 해뒀고, 돗자리랑 보자기랑 책은 미리 넣어두고…….”
작은 손이 바삐 바구니 속에 물건들을 채웠다.
“아! 운디네를 불러서 호수를 만든 다음에 뱃놀이도 해야 하니까 배도 챙겨야지!”
배는 아마 아르티나 기사단에게 부탁하면 사 오든가 뚝딱 만들어주든가 할 것이었다. 맑은 물 위에 커다란 배를 띄워두고 그 안에서 간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배시시 웃음이 흘렀다. 마침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칸과 세드릭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르칸의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기 때문에 재활을 겸하여 적당히 가벼운 대련만 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우리 아가, 뭘 그렇게 챙겨? 그 바구니 들고 어디 가려고?”
“소풍! 아스랑!”
“소풍을 간다고? 그 악마랑?”
“둘이? 소풍을?”
“응, 봄이니까! 아, 곰치도 챙겨가야지!”
이벨리아의 손이 애착 인형 곰치에게로 닿자, 엔리르가 곰치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날개를 펼쳤다. 자신은 빼놓고 둘이 간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누나, 나는……?”
“으응?”
“곰치도 데려가면서 나는 안 데려가……? 내가 곰치보다 못해? 나 그럼 곰치 배 속에 들어가서 곰치인 척하고 있을래.”
“으음…….”
마음이 약해진 이벨리아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두 형제도 저것이 답이다 싶어 가세했다.
“이브, 나는……?”
“그래, 우리 아가. 오라버니는……?”
“우리도 아가랑 소풍 가본 적 없는데. 우리도 아가랑 소풍 가고 싶은데.”
“봄인데. 매번 수련장에만 있기도 속상한데.”
“얼마 전에 전쟁까지 다녀와서 기분도 전환하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아스에게 단둘이 간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만에 둘이 있는 시간을 좀 만들고 싶었는데. 저 가련한 눈빛들을 보아하니 매몰차게 내치기도 어려웠다.
“그……그럼 같이 갈까?”
세 형제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얌전히 있을게!”
“우리 아가 노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나는 곰치처럼 조용히.”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를 마저 싸기 시작하자, 뒤에 선 세 형제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너 좀 한다, 용.’
‘이 자식, 제법인걸.’
‘엣헴.’
그렇게 아르티나 가문의 두 형제와 용 하나가 봄 소풍에 가세했다. ***
“소풍…… 소풍이라니.”
로노베의 장밋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발아래에는 감히 순위 결정전을 신청해 온 악마 하나를 밟고 있는 채였다.
“나 그런 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길고 긴 악마 생, 소풍이란 것은 가장 접할 일 없는 단어 중 하나였다. 정확한 정의가 궁금해 책을 찾아보니, 통상 봄과 가을같이 날씨가 좋을 때 바람과 꽃비를 맞으며 함께 맛있는 것도 나누어 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는 모임이라 했다. 자존심이 있어서 같이 가겠다 말은 못 하였지만, 사실 로노베는 정말 가고 싶었다.
“가고 싶다…….”
무의식중에 본심이 나오자, 곁에서 사자로 변한 채 지켜보던 마르바스가 기지개를 켜며 답했다.
“주군께 말씀드려 봐. 가고 싶다고.”
“주군께 말씀드리면 난 저승에서나 소풍을 즐기게 되겠지.”
맞는 말이다. 사실 자신도 가고 싶었던 마르바스가 거대한 몸집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쓰러진 악마를 휙 물어 채며 대안을 제시했다.
“주군께서는 밥풀의 말이라면 잘 들어주시니, 밥풀을 설득하는 게 어떨까.”
“난 걔를 밀치기도 하고 패악도 부렸는데.”
“걔가 몸집은 밥풀만 해도 속마음은 밥솥 정도는 되거든. 주군의 수발을 들 악마가 필요하다는 정도로 얘기하면 아마 들어줄걸.”
“……사자 주제에 똑똑하군.”
자신들의 방으로 복귀한 두 악마는 각자 편지를 써서 아르티나 공작저로 보냈다. 「밥풀. 나도 소풍.」 「엉덩이는 괜찮으냐. 주군을 보필할 이가 필요하니 나도 소풍에 데려가라.」 편지를 받은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년필을 찾아 쥐었다.
“아스를 보필할 악마는 필요하지. 아스는 높은 악마니까. 로노베한테는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고…… 이 버릇없는 잔디는 뭐야. 답장 안 할래. 퉤.”
*** 한편 이벨리아가 소풍을 간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황궁에까지 닿게 되었다. 이벨리아가 렐리안에게 편지로 알리고, 이를 렐리안이 이크리안에게 알리고, 이크리안이 루드비히에게 알린 것이 과정이었다.
“이브가 소풍을 간다고…….”
이른 오전, 업무를 보고받으면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함께 보고받은 루드비히는 앞에 놓여 있던 보고서 뭉치를 괜히 휙 뒤집어버렸다. 부관인 에르트 백작이 심혈을 다해 순서대로 정리해둔 보고서들이 허공에 나풀대며 떨어져 내렸다.
‘내게는 왜 알리지 않았지?’
속으로는 서운함이 가득 차올랐으나, 자신과는 황궁에서 단둘이 시간을 제법 보냈으나 그 악마와는 그런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애써 가라앉혔다. 바닥에 떨어진 보고서 뭉치를 대충 집어 들어 루드비히의 책상에 얹으면서, 이크리안이 물었다.
“전하, 그 소풍에 저도 함께 갈 방법은 없겠습니까?”
시무룩함에 살짝 내려가 있던 홍안이 대번에 날카로운 빛을 뿜었다.
“왜. 그대가 왜.”
“마법사들은 본디 모르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품습니다. 그 대악마, 공녀님을 통하지 않으면 일평생 만나 볼 기회도 없는 이 아닙니까.”
“만날 수야 있겠지.”
“정정하지요. 공녀님을 통해 만나지 않으면 제 목은 땅을 구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오로지 이브에게만 다정할 뿐, 본질이 손속 잔인한 악마이니만큼 이브를 통하지 않고 대뜸 만난다면 결과야 뻔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르티나 공작저에서 만났었지 않나. 이브가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던 때.”
“전하와 렐리안이 누가 첫 친구냐면서 다투는 바람에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눠보지 못해서 말이지요.”
“…….”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조금 유치하긴 했다. 몇 살 더 먹었다고 과거가 영 쑥스러웠다. 시선을 돌리며 입가를 쓸어내리던 루드비히가 좋은 방안을 제시했다.
“이브는 카시스 영애에게 약하지. 영애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그러면 되겠군요. 오늘 귀가하여 렐리안에게 슬쩍 흘려보아야겠습니다.”
무심한 척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던 루드비히가 옅게 붉어진 귀로 툭 내뱉었다.
“부탁하는 김에 나도.”
“예?”
“나도 가고 싶으니, 카시스 영애에게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해.”
“…….”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크리안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민망해진 루드비히가 애써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며 무게 잡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명이다.”
*** 사려 깊은 렐리안은 대뜸 데려가 달라며 부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대뜸 편지로 함께 가고 싶다 청하면 이브도 불편해할지 몰랐다.
‘그렇지만 나도 정말 가보고 싶긴 한데. 네피르가 소풍을 다녀왔다고 자랑했을 때 조금 부러웠었기도 하고.’
몸이 약해 제대로 외출조차 해본 적 없던 렐리안으로서도 이 화창한 봄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소풍을 꼭 가보고 싶었다. 망설이던 렐리안은 직접 공작저로 찾아가 이벨리아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이브. 이번에 가는 소풍을 저도 따라가면 방해가 될까요?”
“렐리안이?”
“네. 이브와 함께 가서 바깥 구경도 조금 하고 싶고……. 물론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같이 가지! 방해는 무슨!”
약한 몸 때문에 바깥에 나가는 것을 꺼리는 친구가 자신을 믿고 나와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벨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악마 몇이 같이 가게 될 것 같은데, 다들 착한 악마들이니 물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렐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조심히 말을 꺼냈다.
“혹시 이브가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 오라버니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가셔도 괜찮을까요? 오라버니는 악마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것 같았고,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브를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이벨리아는 렐리안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렐리안 자신이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바깥에 나가는 일이 손에 꼽는데, 악마들과 함께 가는 소풍이라니.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좋아! 루이랑 아스랑 이크리안 오라버니랑 렐리안은 다들 아는 사이니까 괜찮아!”
혹시 아가레스가 불편함을 느낄까 고민하던 이벨리아는 모두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봄 소풍의 동석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그리고 소풍 당일. 생각보다 인원이 많아지는 바람에, 소풍 장소는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로 정해졌다. 모이기로 지정한 약속 장소는 아르티나 공작저 앞. 약속 시각에 모두 모여서 함께 소풍 장소로 향하기로 했다. 채비를 갖추고 시간에 맞추어 소풍 바구니를 달랑달랑 들고 뛰어나온 이벨리아는 목격했다.
“……!”
동작 그만. 저것들이 다 뭐야. 해사했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아. 왠지 아주 팍 망해버린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