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악마 조련이라면 자신 있지2021.10.04.
두 악마에게 향하던 아가레스의 시선이 작은 친구에게 닿았다. 커다란 충복들 사이에 달랑 앉아 있으니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를 쭉 편 채 어깨가 시무룩하게 내려간 것이, 세상 둘도 없이 서러워 보인다.
“꼬맹이는 왜 저기 저렇게 앉아 있어.”
그가 한달음에 다가가 이벨리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이브. 나 봐. 여기가 좋아서 앉은 거야?”
뒤에 선 두 악마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이 없자 형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진한 마기가 흘렀다. 오른쪽 눈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금안이 섬뜩한 빛을 냈다.
“……누가 밀었어?”
로노베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본래 무엇 하나 애정을 보이지 않던 주군이시다. 그러니 그까짓 인간을 아껴봐야 얼마나 아끼시겠나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 말투, 저 자세는 다 뭐야.’
마르바스가 호들갑을 떨던 것이 이해가 됐다. 주군께 저 작은 인간은 한낱 유희 거리가 아님이 분명했다.
‘저 꼬맹이가 먼저 입을 열면 난 죽은 목숨이다.’
손속 잔인하신 주군께 받을 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나, 더 버티다가 저 어린 인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다면 더욱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 자명했다.
‘먼저 사죄드리면 죽이시진 않을지도 몰라.’
자수해서 광명 찾자. 로노베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몸을 하도 떠는 바람에 진한 분홍빛 머리칼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주군…….”
아가레스의 시선이 천천히 로노베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이벨리아가 일으켜달라며 두 손을 뻗고 칭얼거렸다.
“내가 앉았어. 러그가 폭신해 보여서 앉아봤는데 그래도 엉덩이가 아파. 일으켜 줘.”
로노베의 동공이 옅게 흔들렸다. 아가레스의 시선은 로노베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이벨리아에게로 돌아왔다.
“아프다고.”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니 마치 가문의 원수를 바라보듯 러그를 내려다보던 아가레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마르바스에게 명령했다.
“전부 태워. 다시 사와.”
작은 밥풀과 관련된 주군의 명에는 토 달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충실한 대악마이자 집사, 마르바스는 군말 없이 손가락에 불씨를 만들었다.
‘잠깐, 진짜 전부 태우려고?’
당황한 이벨리아가 두 손을 저으며 말렸다.
“아니, 죄다 태울 필요는 없는데!”
“금방 다시 사 둘게. 다음번에 오면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이런, 내 토끼의 행동력을 얕봤다.’
화르륵. 윤기가 흐르던 보드라운 러그에 마르바스의 화염이 옮겨붙었다. 악마의 능력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붙지 않고 딱 러그만 잘도 태웠다.
‘밀친 악마를 살리려다 내 러그가 모두 죽어버렸네.’
이벨리아는 사실 제법 마음에 들었던 짙은 색 러그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아련한 눈으로 러그를 봐?”
“……마음에 들지 않던 게 타오르니까 아주 마음에 들어서. 이건 사실 아련한 눈이 아니라 아주 폭력적인 눈이야.”
“그렇군. 다시 보니 우리 꼬맹이 눈이 아주 위협적이야.”
더 쳐다보면 자신의 토끼가 오해할지도 모른다. 태우고 나니 다시 마음에 들었냐며 잔디 악마에게 새것처럼 복구해오라고 명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벨리아는 거의 다 타올라 재만 남은 러그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안녕, 사실은 좋았던 러그. 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해서 미안해.
“꼬맹이. 위로 올라가서 디저트 먹을까?”
“디저트! 그래!”
신선하고 차가운 슈크림을 떠올리니 침이 고였다. 대번에 폴짝 뛰어가려던 이벨리아가 걸음을 멈칫했다. 막상 걸으려니까 넘어지면서 세게 부딪힌 엉덩이가 아팠다.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보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슬슬 문질렀다.
‘아마 새파래졌을 거야. 난 그냥 과자 주려고 한 건데.’
매몰차게 밀쳐진 것이 새삼 다시 서러워 아랫입술을 내미는데, 로노베가 대뜸 손을 뻗었다. 안기라는 듯한 두 손이 아닌, 한 손을.
‘이 언니 악마가 설마 아스 보는 앞에서 나를 때리려고 하는 건가?’
밀쳐졌던 충격 때문에 깜짝 놀란 이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어떤 타격도 가해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살짝 들리고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
“…….”
“손 뭐야? 왜?”
“들어준다고.”
“뭐를?”
“너를.”
안아서 들어준다기에는 한 손인 데다가 손의 위치도 어정쩡하다. 이벨리아가 됐다며 거절하기도 전이었다. 로노베가 마치 토끼를 잡듯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끄앙!”
“딱딱한 러그에 앉아서 엉덩이가 아프다며.”
어린 동물처럼 달랑달랑 들려가는 이벨리아의 뒤에서 마르바스가 검지로 입술을 쓸며 의문을 표했다.
“보통 인간 아가들을 저렇게 토끼 잡듯 들어 올리나?”
그러자 이벨리아를 몇 번 들어 안아본 아가레스가 아는 체를 했다.
“내려둬라. 우리 꼬맹이는 그렇게 드는 게 아니다. 야만스럽긴.”
“괜찮아. 아스도 날 이렇게 들었었잖아. 비밀기지에서. 나 검술 연습하고 있을 때.”
“……꼬맹이가 허락한다면 그렇게 들어도 된다.”
덜 익은 밥풀의 한 마디에 하늘 같은 주군의 의사가 바뀌었다. 로노베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손에 들린 어린 인간을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도시락 정도인 줄 알았더니. 정체가 뭐지, 이 밥풀.’
*** 디저트 방으로 올라간 이벨리아는 마치 여왕처럼 가운데 놓인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곧장 에클레르 세 개를 해치웠다.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시선이 닿는 디저트들을 앞으로 옮겨다 주기 바빴고, 마르바스는 긴 머리칼에 묻는 초콜릿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 닦아주었다.
두 악마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받은 이벨리아가 입술을 핥으며 칭얼댔다.
“입이 달아.”
단것을 잔뜩 먹으니 입가심할 차가 필요했다.
“차 마시고 싶어. 홍차.”
“저기 있는 차로 먹지? 캐모마일 있는데.”
“홍차.”
“쯧. 땅콩 주제에 입만 까다로워선.”
마르바스가 툴툴대며 일어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작은 땅콩이 마시고 싶다는 홍차를 타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잠시만. 타올게.”
냉큼 답한 아가레스가 먼저 일어났다. 마르바스가 황급히 달려가 자신이 타오겠다며 가로막았지만, 아가레스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마르바스를 밀쳐냈다.
“너보다 내가 더 잘 탄다.”
어린 친구 입맛에 맞는 차는 제법 타 보았으니, 이번에도 자신이 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아가레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 마르바스가 휙 돌아서서 이벨리아를 향해 삿대질했다.
“너 감히 우리 주군을 저렇게 부려 먹어? 저분이 어떤 분이신 줄은 알아? 네가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분이 아니라고!”
“유난 떨지 마. 우린 친구야. 아스가 어떤 존재이든 난 상관 안 해.”
“에잉. 맹랑한 땅콩 같으니라고. 네가 어느 날 마계에 한번 와 보면 아주 놀라서 기절할 거다.”
“에잉. 요망한 잔디 같으니라고. 네가 어느 날 비밀기지에 한번 와 보면 아주 놀라서 기절할 거다. 물론 초대도 안 할 거지만!”
“왜 초대를 안 해? 너 어린 게 벌써 악마 차별하기야? 그런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잔디는 나이도 많은 게 벌써 아가를 이렇게 괴롭히잖아! 다 잔디한테 배웠다!”
로노베는 사방에 널린 디저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병아리와 사자의 싸움인가. 병아리가 더 강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인가.’
로노베는 병아리와 사자가 가열하게 싸워대는 믿지 못할 현실 앞에서, 디저트 개수를 하나하나 세며 도피를 택했다. 한편 마르바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이벨리아를 흘겨보면서 주제를 돌렸다.
“근데 아까 내 자랑하다가 끊긴 것 같은데.”
“끊긴 김에 그만둬.”
“내가 사실은 자타공인 대악마…….”
“개뿔.”
“허, 개애뿌울? 너 밥풀만 한 게 어디서 또 이런 말을……!”
이벨리아가 입으로 집어넣으려던 파이 하나를 마르바스가 휙 잡아채고 성을 냈다. 가장 맛있어 보여서 아껴두었던 파이를 빼앗긴 이벨리아는 팔짝팔짝 뛰며 위로 손을 뻗었다.
“이리 줘!”
“내가 먹어야지. 냠.”
“진짜 먹어버렸어?”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이벨리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가 보면 세상 단 하나뿐인 귀보라도 빼앗긴 모양새다. 마르바스는 이를 보며 낄낄 웃었다. 그리고 로노베는 혼란에 빠졌다.
‘환장하겠군.’
주군부터 마르바스까지, 저 어린 인간과 대체 뭘 하고 노는지 모를 노릇이다. 고위 악마들을 홀리는 이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양이가 캣닢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듯, 저 인간에게 캣닢 비슷한 효능이 있는 것은……?’
그러고 보니 자신도 저 인간이 여기까지 올라오도록 도와주지 않았던가.
‘저 덜 익은 인간이 나까지 홀리고 있었어!’
깨달은 로노베는 붉게 칠해진 입술을 작게 벌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아니지. 몽마인 내가 그리 쉽게 누구에게 홀릴 리가 없지.’
그저 저 인간이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주고받는 격으로 딱 한 번 도와준 것뿐이다. 로노베가 고양이 같이 위로 올라간 눈을 더욱 치켜떴다.
“야, 덜 익은 인간.”
파이를 빼앗겨 서글프게 앉아 있던 이벨리아가 축 처진 눈으로 로노베를 돌아보았다.
“너 아까 나 왜 도와줬냐?”
“아스 부하니까.”
“내가 주군 부하인 거랑 널 밀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벨리아가 끙차 일어나 주변에 보이는 마들렌 하나를 집어 들고서 로노베의 앞으로 걸어갔다. 앉아 있는 로노베와 서 있는 이벨리아는 시선의 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아스는 항상 혼자야. 친구도 부하도 많이 없어. 아스가 곁에 두는 몇 없는 부하라면 잃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널 밀쳤는데도?”
“그게 뭐 대수라고. 아스의 사람을…… 아니 참, 사람이 아니지. 아스의 부하를 나 때문에 잃는 건 부당해.”
이벨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마들렌을 로노베에게 내밀었다. 로노베의 왼쪽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날리는 먼지만큼 작은 것이 제법 강단 있고 맹랑하다.
‘그래도 주군 곁에 붙어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마르바스 녀석도 정신 못 차리고 헤헤거리고 있고. 저 힘만 센 모자란 자식.’
이벨리아가 내민 마들렌은 받은 다음 옆에 대충 휙 던져두었다.
“이런다고 내가 널 예쁘게 여길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주군 곁에 붙은 모든 것들이 꼴 보기 싫으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이벨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라고 저 악마가 예뻐서 도와준 게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날카롭게 와닿는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곁에 놓인 크림빵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머금었다. 파이를 빼앗아 단숨에 먹어버린 대역무도한 악마를 향해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잔디. 너 한 번만 더 내 간식을 빼앗으면 가만 안 둬.”
“하이고, 무서워라. 크림이나 닦고 말해라.”
“내가 왜 너와 계약하지 않는다고 한 줄 알아?”
“흥. 궁금하지도 않네.”
“계약은 필요 없어. 언젠가 내가 널 사역마로 부려버리려니까.”
“너어, 너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질하는 잔디 악마를 가뿐히 무시하고 크림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을 왕 깨물자, 입가에 다시 부드러운 크림이 왕창 묻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닦아도 또 묻을 테니까, 다 먹고 세수해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난데없이 흰 손수건 하나가 나타나 입가를 거칠게 벅벅 닦아내는 것이 아닌가. 손수건에서는 진한 장미 향이 났다.
“칠칠치 못하게.”
입가를 닦아내는 손수건의 끝에 있는 로노베의 고운 손.
“어휴. 여기도 흘렸네. 턱에 구멍 뚫렸냐?”
무릎 위에 한 덩이 떨어진 크림도 재빠르게 닦아준다.
“머리에 이건 장식이야?”
금빛 머리칼에 붙은 부스러기도 탈탈 털어주었다. 거친 손길이지만 제법 세심하다. 이벨리아가 묘한 눈으로 로노베를 바라보았다.
‘꼴 보기 싫다며?’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는지, 로노베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지더니 이내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보지 마! 착각하지 말라고! 난 더러운 건 딱 질색이라서 닦아준 거니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흥!”
한껏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로노베에게, 이벨리아가 이번엔 쿠키 하나를 들고 다가섰다.
“자, 이거 먹을래? 되게 맛있는데.”
“안 먹어!”
“그럼 내가 먹고.”
이벨리아는 커다란 쿠키를 왕 베어 물었다. 수없이 다가오고 거절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보며, 로노베는 또 이를 갈았다. 저것이 주군을 홀렸다고 생각하니, 저 상처받지 않는 모습까지도 얄미워 보였기 때문이다.
‘요망한 도시락. 요망한 밥풀. 덜 익은 땅콩 주제에. 잠깐. 또 흘렸잖아?’
속으로는 한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손수건을 든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내 볼 좀 그만 좀 닦아.”
“난 더러운 걸 싫어해서 그런다니까!”
***
“저택에 남은 홍차가 없나 봐.”
“그럼 주군께서 이미 올라오셨을 텐데?”
“아니, 아스는 아마 홍차를 사러 갔을 거야. 내려가서 아스를 기다리자! 이제 다 먹었어.”
이벨리아는 로노베를 향해 두 손을 번쩍 뻗었다. 악마가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안아줘.”
“아까 들어줬잖아. 이번엔 너 혼자 내려와!”
이벨리아는 여전히 두 팔을 위로 뻗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픈 소리를 냈다.
“아야.”
“……?”
“아야야.”
“뭐…… 뭐!”
“엉덩이 아야. 못 걷겠어. 아마 새파랗게 변했을 거야.”
그러자 아까와 같은 자세로 목덜미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아까처럼 달랑달랑 들려서 1층으로 내려가는데, 계단 때문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로노베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이벨리아의 해사한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좋아, 잘 꼬셔지고 있군.’
악마 조련이라면 도가 튼 인간을 무시하면 곤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