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 미친 정령왕이?2021.09.23.
태의는 기겁했다. 통통한 앞발을 마구 휘둘러대는 여우의 손에서 닭꼬치맛 사탕을 녹인 물을 빼앗지 못하고 결국 입에 몇 방울 흘려보냈을 때, 공녀가 반짝 눈을 뜬 것이다.
“아니!!”
“캬릉!!”
엔리르가 봐봐, 내 말 맞지! 하는 듯 가슴 털을 뿌듯하게 부풀렸다. 태의는 이 닭꼬치맛 사탕 녹인 물에 뭔가 특효약이 있었나 싶어 주섬주섬 챙기며 크게 소리쳤다.
“공녀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아아-!!”
“카르으으응!!”
내가 잘했다! 외부인 앞에서 인간의 말로 외치지 못하는 엔리르도 함께 포효했다. *** 이벨리아는 다급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직 시야가 흐릿하고 몸이 무거워 인식이 빠르지 않았다.
‘닭꼬치맛 사탕을 녹인 물……?’
바로 옆에 놓인 약병의 라벨이 영 이상해서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건가 생각할 뿐이었다.
“아가. 엄마 보이니? 아가.”
태의가 깊이 고개 숙여 답했다.
“공녀님께서는 그저 무리하셔서 열이 조금 오르신 것뿐이라,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우리 아가, 아빠 돌아왔다. 이 손가락이 몇 개인지는 알겠느냐.”
“아기씨! 우리 아기씨!”
“누…… 아니, 캬릉! 캬르릉!”
“꼬맹이. 정신이 들어?”
모두가 와글와글 몰려들어 정신없이 안부를 묻자, 태의가 다시 덧붙였다.
“저기…… 공녀님께서는 그저 잘 드시고 잘 주무시면 나으실 경상이라,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그 말에 헤롤드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지금 네 가문 아기씨 아니라고 말 막 하냐?”
“예, 예?!”
“저 작은 몸에서 열이 나는데 어떻게 경상이야. 중상이지. 빨리 더 살펴봐.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곰 같은 덩치의 헤롤드가 왜소한 태의를 탈탈 터는 것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결국 잠긴 목소리로 웃고 말았다. 이벨리아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아가레스가 미리 따뜻하게 데워둔 물을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천천히.”
마치 어린 꿀벌에게 꿀을 먹이듯 조심스러운 손길. 이내 이벨리아가 일어나려 바동거리자 등을 살짝 받쳐 반쯤 일으킨 다음, 폭신한 쿠션에 기대게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편안한 자세를 잡은 이벨리아가 천천히 고개 돌려 곁에 선 이들을 바라봤다.
“다들 잘 다녀왔어?”
모두가 먹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냐며 왁자지껄 안부를 물을 때는 언제고, 막상 말을 거니 다들 울음을 참는 표정이다.
“나도 잘 지키고 있었어. 엄마랑, 엔리르랑.”
의심할 여지 없는 공작저의 주인.
“그리고…… 다들 보고 싶었어…….”
그리고 아직은 어린아이. 기쁨과 비탄, 소녀와 아이의 경계에 선 이벨리아가 휴고에게 안겨들었다.
*** 낮고 긴 나팔소리가 울렸다. 모든 기사가 가문의 제복을 입고 칼을 교차해 높게 들어 올렸다. 깊은 구덩이 아래로 관이 담기고, 그 위에는 가문의 깃발이 덮였다.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자 휴고는 눈 감고 인사를 건넸다. 딸과 부인을 지켜주어서 고맙다는 인사. 가주로서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는 인사. 은혜 입었으니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인사. 시원한 바람이 머릿결을 쓸어내리듯 불어왔다. 꽃이 피기 시작한 나무에서 꽃잎들이 눈발처럼 떨어졌다. 과히 슬퍼하면 죽은 이가 미련 남아 떠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기사단은 부러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이벨리아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처음으로 배운 작별하는 법은, 생각보다 쓰라렸다. *** 이벨리아는 오렌지주스 병 아래에 가라앉은 오렌지 덩어리를 빨대로 조준하여 빨아들였다.
“그럴 거면 오렌지를 먹지?”
“아냐. 주스에 가라앉은 오렌지가 좋아. 느낌이 달라.”
뭔지 모르겠지만, 땅 도둑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루드비히는 덩어리가 모두 사라진 오렌지주스를 본인이 마시고, 덩어리가 가득 찬 새 주스 병을 이벨리아 앞에 두었다. 곁에서 엔리르는 사과를 통째로 입에 넣어 콰득 씹어먹고 있었고, 아가레스는…….
“흐악! 송충이!”
“잡았어.”
간간이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작은 친구를 놀라게 하는 벌레를 잡는 중이었다. 모두가 제법 큰일을 겪은 뒤 처음으로 모인 비밀기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안정감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급변해도 늘 그대로인 장소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안식처였다.
“정령왕을 소환했다며?”
“응.”
“물의 정령왕?”
“응응.”
묻는 루드비히의 말에 태연하게 답하자, 아가레스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하필 가장 성격이 좋지 않은 왕을 골랐군.”
“응? 바람의 왕과 불의 왕도 모두 만나봤지만, 엘라임이 가장 정상이었어. 다른 두 정령왕은 계약하는 순간 내 평온한 인생이 모두 끝장날 것 같았는걸.”
“페르세스와 이프리트는 또 언제…… 아니, 그보다 엘라임이 가장 정상이었다고?”
“응!”
“어떤 면에서?”
“엘라임은 존댓말을 써! 나를 계약자로 아주 존중해줘.”
“……존댓말?”
어린 친구 앞에서는 바르고 고운 말만 쓰고자 노력하는 아가레스의 잇새에서 기어코 욕설이 새어 나왔다. 이 미친 정령왕이? *** 그 돌아버린 놈, 아니 엘라임 얼굴 좀 볼 수 있겠냐는 아가레스의 말에, 이벨리아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약자와 두 친구, 그리고 용을 서로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몸이 제법 회복되어 엘라임을 불러내는 데 큰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엘라임.”
부르자 지난번과 같은 혹독한 절차 없이 비밀기지의 잎새들이 물방울을 머금었다. 솟아오른 물기둥이 이내 사내의 형상을 빚어내고, 눈 깜짝할 사이 엘라임이 웃었다.
“기다렸어요, 나의 맹약자.”
“못 본 새 말투가 많이 바뀌었군. 혹시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건가.”
엘라임이 천천히 고개 돌려 대악마를 응시했다.
“……젠장.”
“내가 할 말을.”
“못 들은 거로 해. 내 계약자 앞에서만 보여주는 친절이니까.”
“기다렸어요- 나의 맹약자-.”
아가레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따라 읊었다. 놀리는 것이 명백한 말투였다. 얼굴이 붉어진 엘라임이 작은 구체로 압축된 대해를 사방으로 펼쳤으나, 일전에 두 악마를 일격에 소멸시킨 공격은 아가레스의 몸에 채 닿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마치 작렬하는 태양에 바다가 말라버리는 모양이었으나, 엘라임 역시 공격이 먹힐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듯 능글맞게 웃으며 반격을 가했다.
“그러는 그대는 동(東)마계의 지배자라고 불린다면서? 별 오글거리는 이명을 다…….”
엘라임이 말을 끝내기도 전, 검은색에 가깝도록 짙은 보랏빛 마기가 엘라임의 뺨을 후려치려다 멈칫했다. 자연체라면 몰라도 소환되어 나타난 엘라임을 때릴 수는 없다. 섣불리 공격했다가 그 피해는 작은 친구가 입게 될 테니까. 한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네.”
“조금.”
“어떻게?”
“오랜 세월 봐왔죠.”
“같이 벌을 받는 사이라.”
“……친구라는 말이야?”
“아닙니다.”
“내 친구는 너 하나야.”
“그러면?”
엘라임과 아가레스는 서로 빤히 쳐다봤다. 대략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난처한 기색이었다.
“음.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있던 이웃사촌이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엘라임은 정령계에, 나는 마계에 보내졌다고 보면 되겠다.”
“이자의 설명이 대략 맞습니다, 계약자.”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혀 이해가 안 돼.”
*** 이벨리아는 굳이 더 파고들지 않았다. 둘 다 설명이 매끄럽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자신에게 알릴 수가 없거나, 알리고 싶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사연 따위 몰라도 관계없다. 친구는 친구이고, 계약자는 계약자이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자, 여기는 내 비밀기지예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고, 저렇게 집도 지어뒀어요.”
엘라임은 비밀기지 가장자리에 있는 호수에 힘을 깊이 불어넣으며 답했다.
“아름답군요.”
“그리고 여기는 내 소꿉친구 토끼.”
“토끼가 어디…….”
계약자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아가레스가 있다. 엘라임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큭큭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토끼, 토끼, 읊조리는 것을 보아하니 아가레스의 별명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여기는 내 소꿉친구 식량 도둑.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이 나라 황태자예요.”
이벨리아는 엔리르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여우는 내 동생 엔리르. 사실은 용이에요.”
“일전에 봤습니다. 아주 실력이 뛰어난 용이더군요.”
“정령왕은 착한 존재구나…….”
엔리르는 단박에 엘라임에게 호감을 품었다. 아가레스는 엘라임에게 숲 뒤쪽으로 가자며 손짓했다. 엘라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가레스는 뭘 만졌는지 그새 더러워진 이벨리아의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꼬맹이. 안전하게 놀고 있어. 이 물 덩어리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응!”
이벨리아가 호수에서 물을 길어다 모래성을 쌓으며 답했다.
“손 안 다치게 조심하고.”
“말랑말랑한 진흙이야! 걱정하지 마!”
혹시 몰라 진흙을 한 번 만져본 아가레스는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엘라임과 비밀기지의 경계 밖으로 나갔다. 본래 맹수도 몬스터도 적지 않은 산맥이라, 지나치던 삿된 것들이 제 먹잇감인가 싶어 코를 찡긋댔으나, 아가레스가 옅게 흘리는 마기만으로도 꼬리 내리며 멀리 도망쳐버렸다. 바람이 나무를 훑는 소리가 두 존재의 사이를 가득 메웠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라임이었다.
“아가레스. 그대는 누구와 함께 걷고 있지?”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내 작은 맹약자 곁에 위험요소를 남겨두고 싶지 않은 보호자의 마음이라 해두지.”
“주제 모르는 것은 여전하군.”
오랜 세월 아가레스를 알아 온 엘라임은 그의 잔혹한 성정과 삶을 대하는 가벼운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계약자를 향한 감정이 언제고 떨어질 흥미본위의 것이라면 무력을 써서라도 잘라내야 했다.
“다시 묻겠다. 그대가 걷는 길이 내 계약자가 걷는 길에 반하는가.”
아가레스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비밀기지의 경계 안으로 닿았다. 수풀에 가려 작은 친구의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향하는 시선 끝엔 분명 이벨리아가 있었다.
“내가 걷는 길은 오로지 이브의 발자국 뒤다.”
“그대는 악마 아닌가. 형식상으론 말이지.”
“그리 오랜 세월 존재했다면 알 텐데. 그깟 종족, 별 의미 없다는 걸.”
그것도 그렇지. 엘라임이 낮게 웃었다. 없는 감정을 연기하는 것에는 날 때부터 취미 없던 아가레스이니, 채 보이지도 않는 그의 계약자에게서 시선도 떼지 못하는 저 모습은 진심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제 계약자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굳이 적대할 필요 없다. 엘라임이 기세를 거둬들이고 입매를 올렸다.
“고고하기 짝이 없던 그대가 어쩌다 인간 꼬맹이에게 목줄을 잡혔나 몰라.”
대화가 끝나자, 아가레스는 자연히 이벨리아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걸음을 옮겼다. 마치 관성처럼. 그 외의 그 어느 길도 모르는 것처럼. 그의 목적지는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이 세상 자체가 나를 가둬둔 감옥인데.”
“말은 정확히 해야지. 그대와 우리를 가둬둔 감옥.”
일견 맞는 말에, 아가레스는 함께 떨어진 자들을 떠올렸다. 지키겠다 막아서고, 지키지 못해 떨어지고, 애통하여 울부짖고. 끝내 세월에 감정조차 마모되어 막연한 증오만 남았던 세월도 되짚었다. 그러나 영겁의 시간 끝에 나타난 작은 친구에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되짚던 모든 것이 의미를 퇴색했다.
“어느 순간부터 증오스럽지가 않더라고.”
“…….”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목줄 잡힌 그 순간부터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