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최선을 다해 받들 터라2021.09.20.
휴고, 아르칸, 세드릭, 아르티나 기사단의 주역들이 응접실에 모여 앉았다. 그 주위에 엘리시아, 카론, 하델 등 공작저에 머물렀던 자들이 자리했고, 아가레스 역시 이 저택의 주인인 것처럼 긴 다리를 꼬고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휴고가 엘리시아의 머리를 귀 뒤로 꽂아주며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어깨를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요, 부인. 전령에게는 악마 둘이 공작저로 침입했다는 것밖에 듣지 못하였는데.”
엘리시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두고 천천히 설명했다. 가장 즐겨 마시는 차였으나 오늘만큼은 잘 넘어가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두 악마가 습격하였다는 것, 각각 63위와 64위의 악마였다는 것, 이브의 앞을 가로막은 비비안과 기사들, 하녀들과 하인들이 사망하였다는 것, 위기 앞에서 이브가 정령왕을 소환하였다는 것, 정령왕이 그들을 구해주었다는 것까지. 모두 설명하고 나니 차에서 오르던 김은 가신 지 오래였다. 망자를 연도하는 의미의 침묵이 들어찼다. 알렉은 포근한 어머니 같았던 비비안을 떠올렸고, 헤롤드는 함께 수련하던 기사들을 떠올렸으며, 하델은 함께 일하던 휘하 하인들을 생각했다. 휴고는 그 모든 죽음을 애도했다.
“우리가 직접 관을 짜서 정원 가장 양지바른 곳에 두었어요. 가문의 깃발을 두르고, 아끼던 유품을 올려두었고요. 유가족들에게는 평생 부족함 없을 지원을 하라 일러두었으니, 당신의 배웅만 받으면 안장하려 해요.”
휴고가 안기라는 듯 팔을 벌리자, 엘리시아가 기대어 편히 눈을 감았다. 그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무거운데, 모든 것을 보고 스스로 추스른 아내의 심정은 어떠할까. 의무라 기꺼이 출진하였으나, 그 의무가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한편 일각이 지나도록 아무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세드릭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토벌 중간에 갑자기 폭우가 내린다 싶더니…… 이브가 정령왕을 소환한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카론도 덧붙였다.
“밖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고 있는지 잠시 나가보았는데, 수도 전역에 물난리가 나고, 바다에서는 평소 볼 수 없었던 생물들이 해수면 밖에서 마치 춤을 추듯 헤엄쳤다고 합니다. 곳곳에 무지개가 뜨고 초목들이 결을 맞추어 흔들렸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물의 정령왕께서 아주 약간, 조금, 살짝, 힘을 썼다고 하셨는데.”
“약간, 조금, 살짝 힘을 쓰셨다기에는 상서로운 풍경이 이미 음유시인들의 손을 타고 각종 이야기와 노래로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왜 우리 아가 인생에 힘을 숨긴다는 선택지는 없는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곤한 듯 눈을 쓰다듬는 부인을 보며, 휴고가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그래도 다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 않겠나. 이브가 정령왕을 소환하였다는 사실만 숨겨지면, 이번 상서로움의 원인이 제국의 망조로 낙인찍히든, 용의 현신으로 낙인찍히든 알 게 뭔가.”
“……그렇죠. 정령사들은 원인을 알고 있을 테니, 일단 그들의 입만 막으면 되겠어요.”
“쉽군. 정령사는 몇 되지 않으니, 오늘 내로 불러 처리하도록 하지.”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이벨리아의 능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일은 당분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휴고가 제국 내 정령사들을 모두 불러 모으라고 명함과 동시에 기사들이 뛰쳐나가자, 엘리시아는 안도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정령사들 외에는 이 수상한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 딱 집어 밝힐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공작저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식료품 창고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부서진 파편들이 식료품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가 도저히 재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저택에 남은 하인들 대부분은 급한 재료들을 사러 시장으로 몰려갔다가 돌아오는 참이었다. 충실한 집사, 하델은 양손에 한가득 식료품을 들고 돌아오는 하인들에게 잘 보관해둘 것을 지시하며 지나가듯 물었다.
“밖은 별일 없었나?”
커다란 고깃덩이를 끙끙 짊어 옮기고 있던 어린 하인 하나가 활짝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이벨리아와 비슷한 나이로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다.
“예, 집사님! 황실 정령사라는 자가 거리에서 정령왕이 소환되었다며 만세삼창을 부르고 있는 것 외엔 별다른 일 없었습니다!”
“…….”
*** 전해 들은 엘리시아의 손에서 찻잔이 삐끗했다.
“거리에서…… 만세삼창을…….”
정령사들 입단속을 시켜 최대한 숨기려 애썼던 일이 모두 허사가 되어버렸다. 그저 그런 정령사도 아니다. 명성이라면 지나가는 개도 복종시킨다는 황실 정령사의 말이다. 사람들이 이를 헛소리라고 치부할 리 없었다. 기어코 엘리시아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찻잔을 휴고가 날렵하게 받아냈다. 모든 이들이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는 듯 엘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이를 갈며 의자 팔걸이를 내리쳤다.
“망할, 라비오르!”
공작부인 엘리시아가 아니라 과거 전쟁터를 훑던 장군 엘리시아의 말투였기에, 휴고를 비롯해 아르티나 기사단까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 황실 정령사 누군지 뻔히 알겠다며, 능력은 쥐뿔 없으면서 옛날부터 정령왕, 정령왕 노래를 부르던 것 하나 있었다며 엘리시아가 분노했다.
“헤롤드 경, 거리에서 만세삼창 하고 있다는 황실 정령사를 잡아 오게.”
“예, 마님. 혹시 세상 하직하게 하시려는 것이면 흔적을 지워 데려올까요?”
“명색이 황실 정령사라 죽이면 귀찮아진다. 몇 대 패고 말 테니 뒤통수나 반질반질 닦아두라고 전해.”
각 잡힌 모습으로 헤롤드가 존명! 외치며 기사 몇을 데리고 나가자, 엘리시아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실력을 숨기고 산다는데, 왜 우리 아가는 그것과 영 연이 없는지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첫 생일파티 때부터 그랬죠.”
“그랬지. 첫 계약을 의미하는 인장이 날 좀 보라는 듯 빛을 냈으니까.”
한탄하는 부부를 보며, 여유롭게 기대 손안에 붉은 포도알을 굴리던 아가레스가 반박했다.
“우리 꼬맹이 능력은 잘 숨겨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온 대륙이 들썩일 텐데 뭐가 잘 숨겨지고 있다는 말인가요?”
“나. 용. 아직 아무도 모르잖아.”
“…….”
“나와 마지막 용이 꼬맹이 곁에서 아양 떨고 있다는 건 들키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꼬맹이 능력의 일각만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지.”
대악마와 용이 우리 아가 곁에서 꼬리 흔들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면……. 잠시 떠올린 결과, 엘리시아의 감상평은 짧았다.
“아, 정말 싫다.”
*** 정령왕 소환이다, 나름의 애도다, 저택 정리다,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이벨리아는 그날이 다 가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 토벌전 실질적 주역들의 보고를 듣지 못한 황제로서는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악마의 현현으로 모두의 귀추가 주목된 토벌이었기에, 적어도 사령관들의 보고는 받아야 황실의 공식적인 입장도 정리해 발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나 공작과 소공작은 입궁하라」 명을 담은 칙서를 보냈으나, 휴고는 거절했다. 딸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칙서를 가지고 직접 방문한 에르트 백작은 단호하게 거절하는 휴고의 태도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차마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느냐 따위의 고지식한 말은 내뱉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자원하지 않은 이번 토벌에 온 가족 구성원이 다 나가는 바람에 홀로 남은 공녀가 큰일을 당한 것이 아니던가. 양심이 있다면 이 제국 그 누구도 자리를 비우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는 휴고를 탓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지금, 칼라일이 아르티나 공작저에 방문한 것도 그 일환에서였다.
“공녀는 좀 괜찮은가?”
“아직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정령왕과 대악마가 시간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했으니 큰일 있겠나 싶으면서도, 하나뿐인 딸이 저리 맥을 못 추고 색색거리고 있으니 휴고의 마음은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내 태의를 데리고 왔네. 태의는 가서 공녀의 상태를 좀 보도록.”
“예, 폐하.”
고개를 조아린 태의가 하델의 안내에 따라 위로 올라가려는데, 휴고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이의 곁에 요……상하게 생긴 여우 하나가 있을 것인데, 여우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게.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니.”
사람을 공격한다는 말에 태의의 발걸음이 멈칫했으나, 두 권력자는 더 시선 주지 않고 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의는 울며 겨자 먹기로 2층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올라가 문을 열자마자, 여우 한 마리가 마치 사람처럼 주저앉아 통통한 앞발로 약병 뚜껑을 뱅글뱅글 돌려 이 제국 하나뿐인 공녀의 입에 조르륵 흘려내는 것을 목격했다. 저게 뭐야!
“여우가 공녀님을 암살하려 하는 건가!”
달려가 여우의 앞발에서 병을 빼앗아 드니, 결 좋은 라벨지에 쓰인 우아한 필체가 보였다. [닭꼬치맛 사탕을 녹인 물. 아가 전용. 닭꼬치를 좋아하는 이브가 먹으면 빠르게 깨어날지도 모름.]
“…….”
“……캬릉.”
*** 2층에서 태의가 엔리르에게 ‘안 돼! 안 돼!’를 외치고 있을 무렵. 휴고의 집무실은 전례 없이 붐볐다. 칼라일, 휴고, 엘리시아, 아르칸, 아가레스만 은밀하게 논의할 것이 있어 응접실이 아닌 집무실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토벌전에서 있었던 일과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을 휴고와 아르칸, 엘리시아가 모두 보고하니 이미 제법 시간이 흘러 있었다.
“두 국지전 모두에서 악마가 현현한 데다가, 공작저에도 악마가 둘이나 나타났다니…….”
병사들과 황실 기사단을 통해 이미 1차 보고를 받기는 했으나, 직접 겪은 당사자들에게 들으니 무게가 달랐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공작과 소공작 모두가 출진하지 않았더라면 한쪽 국지전은 처참하게 패할 수도 있었겠어.”
“…….”
인재가 더 많이 필요하다. 제국에 무관은 많으나 단독으로 악마를 상대할 정도의 실력자들은 손에 꼽는다. 어느 날 72좌의 악마 중 10개체 정도만 수도로 넘어와 각기 다른 지역에서 깽판을 치더라도 수도는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 자명했다. 즉, 악마 몇이 쳐들어오더라도 각기 요격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자들을 부지런히 모으고, 키워야 한다. 이번 사태로 다시금 인마전쟁에 불을 지피고자 하는 악마들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했기에, 칼라일의 마음은 급했다.
“이보게, 악마.”
아가레스가 말하라는 듯 칼라일을 빤히 바라봤다.
“공녀 곁에서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면 그대도 인간계의 작위 하나 갖는 것이 좋지 않겠나.”
무려 마계를 지배하는 자에게 고작 인간계의 사소한 작위는 돌멩이만도 못하다.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아가레스는 작은 친구의 이야기가 거론되자 의중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해보게. 그대야 인간들에게 우호적이기로 평이 자자한…….”
“잘못된 평이군. 난 이브에게만 우호적이야.”
“……1차 인마전쟁 종결 건으로 인간들은 제멋대로 착각 중이니 대충 그런 줄 알게. 어쨌든, 그대가 동마계의 지배자로서 공녀의 곁에 머물러도 문제는 없겠으나, 인간들은 꽤 편견에 사로잡히는 종족이거든.”
“그래서.”
“대악마 겸 이 제국의 고위 귀족으로서 자리매김하여 공녀 곁에 머문다면, 그대가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이 훨씬 넓어질 뿐만 아니라, 공녀의 명예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거지.”
“이브의 명예?”
“단편적인 예시로, 그대는 나중에 공녀가 공식 석상에 서더라도 공녀를 에스코트할 수 없지. 제국에 편입된 자가 아니니까.”
“내가 그깟 인간들의 규율을 신경 쓸 것 같은가. 이브가 원하면 나는 해. 에스코트든 뭐든.”
“공녀는 인간일세. 인간들은 그들이 감히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규율 밖 존재에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어지럽히는 규율 안의 존재에게 비난을 던지겠지. 공녀를 보는 눈초리가 좋지 않아질 것은 자명해.”
“…….”
“그런데 대악마인 그대가 형식상이나마 제국 귀족의 작위를 가지고 있다 가정해보세. 공녀는 무려 인마전쟁을 끝냈던 악마를 이 제국에 편입시킨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아가레스의 모든 판단은 작은 친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의 이분법으로 나뉜다. 이벨리아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깟 제국 귀족 작위를 받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일견 타당하여 고민하는 악마에게, 칼라일이 쐐기를 박았다.
“그대가 대악마로서만 남아 있다면 인간들은 공녀를 폭탄을 안은 존재로 볼 것이고, 그대가 형식상 제국의 귀족으로 편입된다면 인간들은 공녀를 평화의 교두보로 볼 것이라는 말이네.”
작은 친구 곁에 한 점 흠 없이 당당히 서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이다. 확실히 어린 친구에게 자랑이 되기에는 ‘대악마’ 보다는 ‘대악마이나 어린 친구를 위해 인간계에 한 발 걸친 자’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지.”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게. 그렇다 해서 감히 그대를 진심으로 편입시킬 생각은 없으니. 다만 공녀를 위한 명예직 정도로 생각해주면 충분하겠네.”
엘리시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일별했다. 고고하기로는 이를 데 없는 대악마가 자신의 딸을 위해 인간계 작위를 받을지를 고민한다니. 처음에는 마뜩잖던 눈앞의 이 악마가 점점 딸의 친구로서 든든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묘했다. 진지한 색으로 물든 악마의 표정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칼라일이 손뼉을 치며 굳이 이곳까지 행차한 이유로 넘어갔다.
“이 주제는 이쯤하고, 당장 당면한 문제로 넘어가지. 공녀가…… 정령왕까지 소환할 줄이야.”
“바라시던 바 아닙니까.”
“군주로서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휴고의 친우로서는 바라지 않았다네. 공녀가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것이 나라고 마냥 좋을 리 있겠나.”
엘리시아가 한숨 쉬며 답했다.
“보통 일도 아니고 정령왕의 계약자입니다. 정령사들은 가르침을 원할 테고, 제국민들은 보호를 원할 것이며, 귀족들은 내 남편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다시피 이젠 이브에게도 그럴 테죠.”
영웅은 난세에서 난다지만,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혹독한 길을 걷는다. 부모는 딸이 영웅이 되길 원치 않았다. 일신이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숙명 아니겠나. 능력이 너무 뛰어나도 순탄한 길을 걷기 어려울 테지. 그대가 그러했고, 공작이 그러했고, 소공작이 그러한 것처럼.”
“…….”
맞는 말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뛰어난 능력을 가져 쉽지 않은 생을 살았다. 직접 겪었기에 더욱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무슨 개소리야.”
흘러가는 주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아가레스가, 이 자리에서 오직 그만이 내뱉을 수 있는 과격한 언사로 심기를 표현했다.
“인간들 뒤치다꺼리를 왜 이브가 해야 하지? 스스로 구명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들을, 이브에게 대신 사지로 나가 달라 종용하는 것들을, 왜 이브가 책임져?”
“그건 귀족으로서…….”
“헛소리 마라. 황제.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도, 보호를 원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도, 전쟁터에 나가라 종용하는 것들을 따라 출진하는 것도.”
“…….”
“이브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 하나 의무인 것 없다.”
마치 불변의 명제를 읊는 것처럼, 아가레스가 확언했다.
“하지만 환경이 그렇게 두지 않을 걸세.”
“내가 그렇게 둘 거다.”
“인간의 삶은 얽매일 것 없는 악마의 삶과는 다르네.”
“그러니 그 잣대를 내게 들이대지 말아야겠지.”
감히 그의 앞에서 이브가 원하지 않는 일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용기가 참으로 거슬렸다.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듯 일렁이는 진한 보랏빛 마기를, 그는 2층에서 쉬고 있는 어린 친구를 생각하며 애써 가라앉혔다.
“이브가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야.”
“……무엇인가.”
“행복한 것.”
휴고와 엘리시아의 고개가 아가레스를 향해 느리게 돌아갔다. 고위 귀족으로 살아왔기에 무의식중에 딸에게도 지우고 있던 의무. 그것을 깨부수는 말은 달콤했다.
“이브의 선택이 방종이든, 파괴이든, 그 무엇이든, 내가 곁에 있을 거다.”
평소와 달리 마기를 제하지 않은 눈으로 응시하자, 칼라일은 식은땀으로 등이 젖는 것이 느껴졌다. 존재감이 지나치게 무거워 마치 세계가 그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팔을 둔 채 비스듬하게 앉아 고개를 기울인 대악마가, 눈앞의 인간에게 경고했다.
“그러니 황제. 잘 알아둬야 할 거야. 이브가 정령왕을 그저 물뿌리개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브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 이상은 없을 것임을.”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오만한 비소가 흘렀다.
“이브가 걷는 길은 내겐 여지없이 옳은 길이니, 나는 그 걸음 평안하도록 최선을 다해 받들 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