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가주의 귀환2021.09.16.
맺힌 감정이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뚝 해봐. 응? 우리 아빠도 강하고 오라버니도 강해서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혹시 누가 토끼를 괴롭혔어? 누구야?”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악마는 목을 가다듬었다. 울컥 치받는 것이 어색했다. 단 한 번도 흘려보지 않았던 것이라 축축하고 찝찝했다. 목이 멘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다친 곳 없어?”
아주 낮게 침잠한 목소리로 아가레스가 물었다. 이벨리아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다 들었어?”
아직도 속이 헤집어지는 것 같아, 아가레스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난 많이 다치지 않았어. 다들 지켜줬거든.”
이벨리아는 애써 씩씩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힘든 전장에서 돌아온 친구에게 걱정거리를 더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크게 다친 곳이 없기도 했다. 눈을 맞추고 세심히 표정을 살피던 아가레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쳤겠네.”
“아니야. 난 아무 상처도…….”
“마음이 아주 많이 아팠을 텐데.”
“…….”
괜찮은 척 숨겨보려고 해도 오랜 친구의 앞에서는 쉽지 않았다. 토끼는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줄까. 가주가 부재중인 공작저. 지키고 있는 후계자가 자신뿐이니 애써 단단한 척 잡아매고 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어떠한 위협에서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친구가 돌아오자, 저 깊은 곳으로 눌러두고 있었던 눈물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다들, 많이, 죽었어. 비비안도…… 비비안도.”
토닥, 토닥, 아가레스는 규칙적으로 이벨리아의 등을 도닥였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으면…….”
“…….”
늘 그렇듯, 아가레스는 섣불리 이해한다며 위로하지 않았다. 감정 대부분이 마모된 그로서는 감히 작은 친구의 빛나는 슬픔을 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다만 자신이 이벨리아를 잃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 하나만으로도 무너져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작은 친구의 마음 역시 엉망일 것이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부드럽게 도닥이는 품에 고개를 묻고 소리 죽여 울던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그래도 많이 슬퍼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도 그걸 원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서 관 위에 은백양이 아니라 복숭앗빛 동백꽃을 올려뒀어.”
“그들이 사랑이 너에게는 자랑이구나.”
“……응. 누구도 나처럼 사랑받진 못할 테니까.”
“그들에게도 네가 자랑이었을 거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도 그러하니까. 이토록 올곧게 모든 것을 마주하는 작은 등이 그 누구에게라도 자랑 아닐 리가 없었으니까. 이벨리아는 옅게 웃으며 창문을 통해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았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따뜻한 위로가 마음에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관 위에 둔 동백꽃이 창백한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그렇게 한참. 흐트러짐 없이 서서 모든 것을 되새긴 아이가 다짐했다.
“……나는 매 순간 그들의 자랑이 될 거야.”
*** 아가레스는 창문에 비친 이벨리아의 모습을 응시했다. 모든 것을 감내하고도 여전히 부서지지 않는 어린 친구는 그가 마주했던 그 어떤 존재보다 고결했다. 일순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제국도, 마계도, 그 외에도 그가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저 곁에, 그냥 있으면 족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부족했다. 저 긍지 높은 모습 곁에 한 점의 부족함도 없는 친우로 서고 싶었다. 아가레스는 생각했다. 그렇게 나 또한, 너의 자랑이 되고 싶다고. *** 믿음직한 친구에게 안겨 펑펑 눈물을 흘린 이벨리아는 결국 이틀을 꼬박 앓아눕고야 말았다. 엘리시아는 재난을 겪은 공작저를 추스르는 데에 정신이 없었기에, 간호는 자연스럽게 아가레스가 전담하게 되었다. 아가레스는 단 한시도 이벨리아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그 옆에서 몸을 말고 끙끙대는 아가 용도 그저 방치할 수 없어 물수건을 몇 번 갈아주었다. 엔리르가 흐릿한 눈을 떠 웅얼거렸다.
“악마…… 개과천선했어?”
“착각하지 마라, 용. 이브를 간호하는 김에 물수건이나 갈아주는 것뿐이니까.”
타박하며 아가레스가 약통에서 약을 한 숟가락 떠 내밀었다.
“악마, 그 약 엄청나게 쓰다.”
“어쩌라고. 말로 할 때 처먹어.”
“꿀 타줘.”
“꿀 같은 소리 하네.”
그렇게 열이 오른 이벨리아가 깊은 잠을 자고, 그 곁에서 아가레스와 엔리르가 작은 소리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무렵. 공작저 밖에서부터 수십 기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속력을 늦추는 일 없이 수도 한복판을 질주하는 것이 선두에 선 자의 다급한 마음을 짐작게 했다.
“앗, 집주인 왔다. 오기 전에 보석 훔쳐뒀어야 했는데…….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네.”
“그러게. 휴고 아르티나에게 잡혀 네 목이 떨어질 좋은 기회였는데.”
낮은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출진했던 이들의 개선(凱旋)이자, 가주의 귀환이었다. *** 휴고와 아르칸을 선두에 두고, 출진하였던 대부분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쉴 새 없이 말을 몰았다. 통상 수도 거리에서는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정 속력 이상 말을 달리지 않았으나 이를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사정을 아는 수도 경비대가 막힘없이 달릴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개선을 축하하는 제국민들이 아르티나를 연호하며 온 거리를 가득 메우고 꽃가루를 뿌려댔으나, 이를 즐길 겨를 따위도 없었다. - 부우우우우. 가주의 귀환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채 멈추기도 전. 한 무리의 군마가 공작저로 뛰어 들어왔다. 굳은 표정으로, 휴고와 아르칸이 가장 앞을 달렸다. 거대한 대문이기는 하나 모든 인원이 한 번에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은 아니었다. 정문으로 모두 한꺼번에 들어올 수가 없으니, 성격 급한 일부 기수들은 다른 길을 찾았다. - 퍼억. 미처 다 보수되지 못한 담장이 다시금 무너졌다. 담장을 무너뜨려 길을 개척한 자, 헤롤드. 이내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우리 아기씨이이이이-!!”
그리고 헤롤드가 무너뜨려 열어놓은 길을 아르티나 기사단이 줄줄이 따랐다. 대문이든 담장이든 알 바 아니었다. 길이 있다. 고로 간다. 아기씨가 안에 계시다. 고로 간다.
“아기씨이이이-!!”
차근차근 복원되고 있던 담장은 여러 개의 말발굽에 차례로 밟혀 다시 형체도 없이 바스러졌다.
“이게 무슨……!”
뿔피리 소리와 소란을 한꺼번에 듣고 달려 나온 엘리시아가 정원 한구석에서 몸을 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인부들을 일별했다. 푸른 눈동자가 죄다 무너져버린 담장에도 가닿았다. 그리고 군홧발에 무참히 밟히고 있는 꽃밭과 똑 부러진 묘목까지.
“…….”
“우리 아기씨이이이-!!”
와중에 눈치 없이 아기씨를 부르짖으며 저택 내로 진입하려는 헤롤드의 엄지발가락 바로 앞으로 얇은 레이피어가 휙 내리꽂혔다. 아직 남은 악마가 있었나 싶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표정의 마님께서 손을 풀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부르짖던 기사단의 입이 조개처럼 꼭 닫히고, 우리 아가는 어디에 있냐며 채근하려던 휴고와 아르칸의 입도 슬며시 닫혔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엘리시아가 서늘하게 웃었다.
“닥쳐. 우리 아가 자고 있으니까.”
*** 휴고가 성큼성큼 걸어 득달같이 엘리시아의 어깨를 부여잡은 뒤, 시선으로 엘리시아의 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다친 곳은.”
물음과 동시에, 예리한 감각은 드레스 속에 감춰진 깊은 상처들을 찾아냈다.
“여보, 고생했어요. 아르칸과 세드릭도 고생했다. 아주 장해.”
엘리시아가 휴고의 목에 두 팔을 감아 안겨들며 귀에 낮게 속삭였다.
‘쉿. 아직 공작저가 안정되지 못했어요. 내 부상이 알려지면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피가 배어나도 티 나지 않는 어두운색의 두꺼운 드레스를 찾아 입은 참이었다.
“당장 의원에게……!”
“이미 보였고, 약도 받았고, 별 상처 아니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리고 이 정도 상처야 과거엔 늘 달고 살았는걸요.”
웃으며 답하나, 눈은 엄격함을 담고 있었다. 더 소란 피우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생존한 사용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깊은 슬픔과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휴고는 가주로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동요 없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나마 엘리시아의 표정과 말투에서 어린 딸의 부상이 심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감정을 내리누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브는 어떻소.”
“크게 다친 곳은 없어요. 다만 무리했는지 열이 조금 올라서, 지금 간호받는 중이에요.”
“열이 올라? 누가 간호 중이오, 주치의가?”
“아뇨.”
“아, 황실에서 신관과 의원을 보냈나 보군.”
“아뇨.”
“……그럼 누가 우리 아가를 간호하고 있단 말이오? 비비안?”
“비비안은……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지금 우리 아가 곁엔 동(東)마계의 지배자가 붙어 있어요.”
“이 개자식이.”
***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이 2층 이벨리아의 방으로 올라갔다. 의무실은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비교적 중상을 입은 자들을 위해 내어주었기에, 특별한 치료 없이 푹 쉬기만 하면 되는 이벨리아는 방에 있었다. 그 뒤를 아르티나 기사단이 쭈뼛쭈뼛 따랐다. 아기씨가 쉬고 계신 공작저에서 이 이상 큰 소리를 냈다가는 당장에 마님께 참수당할 판이다. 그러나 아기씨가 안전하신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잠도 자지 못할 것이 뻔했기에, 발꿈치를 높게 들고 살금살금 뒤를 따랐다. 기척이 문 바로 밖에 와 닿자, 아가레스 몰래 약을 퉤 뱉어내던 엔리르가 비틀비틀 날아 문 뒤로 샥 숨어들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크왕!”
보석을 훔치지 못한 것이 분하여 날개를 크게 펴고 집주인의 얼굴로 날아들어 놀래주려 했건만. 엔리르는 단박에 꼬리를 잡혀 대롱대롱 들리고 말았다. 휴고는 옅게 자상이 남은 엔리르의 등과 탈진한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엉덩이를 톡톡 치고 침대에 휙 던져두었다. 무심한 손길에서 걱정을 읽은 엔리르는 푸르르 털고 일어나 이벨리아의 상태를 알렸다.
“누나는 괜찮아. 그냥 열이 나는 것뿐이야. 인간은 약하니까.”
동시에 아가레스는 보란 듯 물수건을 짜 이벨리아의 이마 위에 놓아주었다.
“내가 간호했지.”
“이제 비켜라. 내가 왔으니.”
“네가 왔다고 내가 비킬 이유 있나.”
“비켜. 내가 간호하게.”
“그대는 나와 계약한 것이 있지. 이브와 내가 친구로 지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친구로 지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동대륙에 데려가는 것에도, 이브의 첫 이 빠진 것에도, 간호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우려먹고 앉았다.
“그만 좀 써먹지?”
“그러게 악마와의 계약은 신중히 했어야지. 아, 꼬맹이 약 먹을 시간이야.”
과거의 계약을 당당히 내세운 아가레스가 여유로운 손길로 해열제를 집어 들었다. 투명한 병 안에 주황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아가레스가 직접 써서 붙여둔 라벨이 선명했다. [맛있는 해열제. 아가 전용. 오렌지 맛이라 이브가 화내지 않음.] 한 숟가락 떠서 이벨리아의 입에 흘려 넣은 악마가 약통을 뒤적여 피로회복제도 꺼내 들었다. 역시 자필로 써 붙여둔 라벨이 빛을 발했다. [조금 쓴 피로회복제. 아가 전용. 약간 써서 이브가 인상을 찌푸림.] 아니나 다를까, 맛을 느끼자 이벨리아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아가레스는 바로 다른 약병을 열었다. [달콤한 영양제. 아가 전용. 아주 쓰나 꿀을 대량으로 섞어둠. 피로회복제 뒤에 먹이면 이브의 화가 풀림.] 아기 새처럼 입맛을 다신 이벨리아가 다시 이불 속을 꼬물꼬물 파고들어 깊이 잠들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체온을 재고, 식은땀을 닦아주고, 물수건을 갈고, 약통을 순서대로 좌르르 정리했다.
“…….”
가히 치료사 못지않은 간호 실력을 직접 목도한 휴고가 입을 다물었다.
“간호가 악마들의 기본소양인가?”
“어린 인간 곁에 머무는 악마의 기본소양이지.”
흡족한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바라보던 엘리시아가 속삭였다.
“자, 다들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여기서 떠들면 이브가 깰지도 몰라요.”
반박은 없었다. 모두가 응접실로 나가고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는데, 아가레스가 방에 남은 엔리르에게 약병 하나를 툭 던졌다.
“20분 뒤에 이브 먹여. 시간 잘 지켜.”
엔리르는 눈을 반짝이며 약병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이거면 우리 누나가 금방 깨어날지도 모른다. 약병에는 고상한 필기체로 내용물의 정체가 적혀 있었다. [닭꼬치맛 사탕을 녹인 물. 아가 전용. 닭꼬치를 좋아하는 이브가 먹으면 빠르게 깨어날지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