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스, 울어?2021.09.13.
다음날, 페르세스는 아르티나 가문의 저택으로 당당하게 찾아갔다. 아주 먼 산에 수백 년 드러누운 바람에 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티탄을 계약자로 둔 이프리트도 페르세스의 뒤를 따랐다. 가문은 여전히 뒷정리로 어수선했으나, 비통한 소식을 들은 황제가 곧바로 황실 기사단을 파견한 덕에 경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공작저 대문 앞을 지키던 황실 기사 둘이 창을 교차하여 두 정령왕을 막았다.
“정지. 신분을 밝히시오.”
“아가한테 언니라고 하면 딱 알아들어.”
“……양아치라고 하면 알아듣는다.”
이자가 말하는 ‘아가’가 누군지 모르겠다. 게다가 신분이 대단히 수상하다. 기사들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제대로 된 신분을 밝히시오.”
“언니라니까?”
“양아치라고.”
언니와 양아치라. 음. 경계 서던 기사가 소리 높여 외쳤다.
“여기 2인의 거동수상자가 있다!!”
*** 두 정령왕은 꽁지 빠지게 뛰어 도망쳤다. 인간 세상에서 내세울 수 있는 마땅한 신분이 없고, 그렇다고 저기서 잡혀주면 거동수상자로 압송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담장을 돌아 그늘 밑으로 샥 숨어든 페르세스와 이프리트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방도를 강구했다.
“어쩌지?”
“때려 부수고 들어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얼마 전에 큰일을 겪은 우리 아가 놀라게 할 거야, 이 양아치야?”
“……그건 안 되지.”
“담을 넘자!”
“얼마 전에 큰일을 겪은 집에 담을 넘어 들어가는 건 괜찮고?”
“조용히 들어가서 아가를 보고 우리가 누군지 알려준 다음, 아가 집 정리하는 걸 도와주면 되지!”
타당한 의견이라는 듯 이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했다.
“그럼 컨셉도 정하자. 엘라임이 존댓말을 했다니, 우리도 질 수 없지.”
“난 이미 정해뒀지! 온화하고 다정한 언니!”
“그럼 나는 점잖은 학자로 하면 되겠군.”
이 정도면 아가에게 멋들어진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기엔 충분하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두 정령왕은 기사들의 발걸음이 한적한 곳을 골라 담을 넘어 들어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몇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넓은 공작저, 여러 개의 기척 사이에서 이벨리아의 소재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물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찾는 것은 정령왕들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햇빛이 강하여 죽은 이들의 관 앞에 차양을 만들어주던 이벨리아가 두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엥? 침입자?”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악마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미처 회복되지 않은 자신의 몸 따위 생각지 않고 엘라임을 부르고자 하는데.
“아가! 아가! 언니야, 아가!”
이를 눈치챈 페르세스가 손을 붕붕 흔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야, 온화한 언니 한다며. 너 지금 되게 몬스터 같아.”
“저리 비켜봐, 이 양아치야. 아가야! 언니야!”
페르세스가 이프리트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며 애타게 ‘언니야’를 외쳤다. 흡사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을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모양새에, 이벨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나한테 나도 모르는 언니가 있었나? 아르티나 가문에 언니가 있었나? 언니…… 언니…….’
은발, 머리 묶음, 예쁨, 키 큼, 눈이 과하게 번쩍임. ……그때 그 축복제!
“언니?!”
“그래! 언니야! 하이고, 우리 아가, 언니 기억하는구나!”
“언니! 여긴 어떻게! 그리고 그 옆엔…….”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불의-.”
“양아치!”
“양아치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
“와아- 오랜만이에요! 언니와 양아치 오라버니!”
양아치에 반박하려던 이프리트는 뒤를 잇는 오라버니 한 마디에 화색을 띠며 이벨리아의 앞으로 호다닥 뛰어갔다. 페르세스와 이프리트는 자신들의 정체를 간단히 소개했다. 우리가 사실 네 계약자 엘라임과 옆집 사는 이웃 비슷한 거야. 실프와 카사의 왕이지. 정도로. 가진 위엄 따위 반도 담지 못하는 대충 만든 소개는 이 집 안주인 엘리시아의 앞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정체를 알게 된 엘리시아는 경악했지만, 이프리트와 페르세스는 뻔뻔하게도 들어섰다. 어질러진 물건들은 페르세스의 바람을 타고 둥둥 날아가 쓰레기 더미 위에 안착했고, 이리저리 흩어진 먼지들은 이프리트의 입김 한 번에 작은 불씨를 맞아 화르르 타 없어졌다. 무려 정령왕들이 쓱싹쓱싹 집 청소 중인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보며, 엘리시아가 물었다.
“대체 왕들께서 우리 아가와는 어떤 연으로…….”
“축복제 때 아가를 만난 적이 있었거든. 아가가 나를 양아치로부터 구해주기도 했었지.”
“엘라임만 우리 몰래 계약하고 왔다길래 질투 나서 왔다.”
페르세스가 마치 여우의 꼬리처럼 생긴 먼지떨이를 보고 눈을 빛내며 집어 들었다. 우아하게 탈탈 털 때마다 기껏 정리해둔 가구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프리트는 물걸레질하는 하녀들의 걸레에서 물을 모두 말려버렸다. 엘라임이 생각나서 싫다는 이유였다.
‘악마가 떠나니 정령왕들이 우리 집을 점령해버렸다.’
골치가 아파진 이벨리아는 이 사태를 어머니에게 넘기기로 마음먹고, 두 정령왕이 먼지떨이와 물걸레에 정신 팔린 사이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적 둘을 물리쳤더니 적 둘이 또 생겨버렸어.’
그러나 이벨리아에게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있던 페르세스가 귀신같이 따라와 뒤로 붙었다.
“아가! 우리 아가 어디 가니! 언니 데리고 가!”
“나 방에…….”
“가자, 방에!”
그렇게 두 정령왕이 곁을 뱅글뱅글 맴도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진로가 방해되기도 여러 번. 심지어 계약까지 종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벨리아는 슬슬 두 정령왕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아가, 언니도 좀 불러봐. 응? 페르세스. 따라 해 봐. 페-르-세-스.”
‘함정이다. 불러선 안 돼.’
이벨리아는 이 정령왕을 소환해서 계약을 맺음과 동시에 조용한 제 삶이 모두 날아가 버릴 것을 영민하게도 짐작했다.
“페-르-세-스. 아직 아가라서 발음이 어려운가?”
“크흠. 부르는 김에 나도 좀 불러봐. 이-프-리-트.”
자신이 아직도 아가인 줄 아는지 한 글자씩 느리게 발음하며 쫓아다니는 두 정령왕에 이벨리아는 정말이지 질려버렸다. 결국 이벨리아는 겨울에 사용하는 털 귀마개로 귀를 덮어버리고 이브 금지령을 외치며 도망쳤다.
“이브 금지령! 이브 금지령!”
그렇게 두 정령왕이 아르티나 공작저에 밀고 들어와 터를 잡은 지 반나절.
“페-르-세-스.”
“이-프-리-트.”
“페-르-세-스.”
“이-프-리-트.”
귀를 막고 종종 도망 다니던 이벨리아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야 말았다.
“으아아아! 엘라임! 당신 친구들 좀 데려가요-!”
악마 처치에 쓰려고 아껴둔 정령왕을 같은 정령왕 퇴치에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청량한 물보라와 함께 나타난 엘라임은 미안한 듯 웃으며 자애롭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계약자. 이 두 녀석이 이브와 계약한 제가 아주 부러웠나 봅니다. 어디 감금시켜두든지 할 터이니 걱정 말고 편히 쉬어요.”
“웩, 존댓말! 아가 너 지금 속고 있는- 읍!”
페르세스의 입을 틀어막은 엘라임이 이프리트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이벨리아에게 눈웃음을 보인 채 순식간에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공간을 바라보며, 이벨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장 정상적인 정령왕을 계약자로 고른 것 같아. 참 다행이야.”
*** 한편 이벨리아가 택한 가장 정상적인 정령왕은 정령계로 데려온 페르세스와 이프리트에게 협박을 가했다.
“뒤지기 싫으면 그만 찾아가라.”
“싫은데. 이 이중인격자야.”
“싫다. 이 이중인격자야.”
그러나 두 정령왕에게 통상적인 협박이 먹힐 리가 만무했다. 엘라임은 예상했다는 듯 일말의 동요 없이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치사해서 이 방법까지는 쓰지 않으려 했건만. 제 계약자의 평화로운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내 계약자를 찾아가서 네놈들의 흑역사를 모조리 불어야겠군.”
“흑역사? 무슨 흑역사?”
“아주 오래된 흑역사를 다 불다 보면 내 계약자도 더 이상 너희를 보고 싶지 않겠지. 거슬러 올라가 볼까. 페르세스 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가레스를 주제로 로맨스 소설을 하나 썼었지. 제목이 뭐였더라……. 악마의 꽃밭에는…….”
“야! 그거 아가레스 자식도 모르는 거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걸 끄집어내?”
“이프리트 너는 용병으로 유희를 했던 시절 스스로 별칭을 지어서 퍼뜨렸었지. 왼손의 흑염룡이었던가.”
“허리케인 흑염룡이었……. 어쨌든 미안하다. 네 계약자 덜 괴롭힐게.”
지켜보던 트로이가 씩 웃으며 두 정령왕의 어깨를 두드렸다.
“순진한 아가가 가장 정상이 아닌 정령왕과 계약을 해버렸네. 이걸 어째.”
엘라임은 반응 없이 물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아무렴 어떠랴. 제 아가 계약자 앞에서만 착한 척하면 그만이다. *** 인적 드문 산맥은 밝은 달이 떴음에도 불구하고 스산했으나, 승전의 기쁨으로 타오르는 병사들에게는 술 한잔 기울이기 부족함 없는 광경이었다. 아르칸의 명에 따라 모든 군사가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분주하게 침낭을 펴는 소리와 불을 때는 소리가 바람결에 흘렀다. 그때. 한 필의 말이 군사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영으로 곧바로 달려들었다. 기수의 등에는 전령임을 의미하는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허억…… 허억…… 공작 각하와 소공작님은 어디에 계시나!”
“이 야밤에 웬 전령? 어디서 온 건지 신분을 제대로 밝혀라!”
전령으로 위장한 적군일 수도 있다. 신분 검사 없이 곧바로 진영으로 짓쳐 든 전령을 향해 기사들이 검을 겨누었다.
“폐하의 명을 받았다!”
전령이 황제의 명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칙서를 펼쳤음에도 기사들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칙서가 위조된 것은 아닌지 사령관의 확인이 있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무슨 일인가.”
소란스러움을 듣고 휴고가 막사 밖으로 나서자, 전령이 곧바로 부복했다. 전하기 어려운 소식이었으므로 전령은 휴고의 얼굴을 보지 않고자 깊이 고개를 숙이고 큰소리로 비보를 알렸다.
“각하, 습격입니다!”
“황궁인가.”
“공작저입니다! 악마 둘이……!”
전령이 보고를 끝마치기도 전이였다. 휴고는 대답 없이 곧바로 군마 위에 올라타 옆구리를 박찼다. 그와 정확히 동시. 아가레스의 신형도 사라졌다. 아르칸 역시 휴고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곧장 말을 달리려던 아르칸은 이내 자신의 위치를 상기해냈다. 그는 이 군의 통솔자였다. 떠나더라도 권한 위임은 이뤄져야 했다. 아르칸은 망설임 없이 가장 신뢰하는 아르티나 기사단의 단장에게 명했다.
“에딘 경. 부상병을 추슬러 복귀하도록. 빠른 운신이 가능한 자들은 모두 따라도 좋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곧바로 내달리는 아르칸의 군마를 루드비히가 바짝 따랐다.
“마님…… 아기씨…….”
병아리 아기씨께 선물로 드릴 전리품을 한가득 모아 시시덕대고 있던 헤롤드, 알렉, 드웬도 마찬가지였다. 뒤에 남아 부상병을 챙기는 에딘과 일부 기사들을 제외하고, 대다수 이들은 최대한의 속도로 말을 달렸다. 아르티나 가문 소속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공작저에 악마가 들이닥쳤다면 그들이 속한 가문들 역시 안전한 것인지 장담할 수가 없었으므로. *** 이리 절박했던 적은 단연코 처음이다. 무슨 정신으로 공간을 이동하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애원만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익숙하게 드나들던 공작저. 반파된 대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엉망이 된 정원과 채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 아가레스는 두려웠다. 이게 공포라는 감정이구나, 그는 절실히 깨달았다. 공작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기가 겁이 났다. 혹시라도 작은 친구에게…… 그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일이 생겼을까 봐. 다른 악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멸했거나, 목적을 달성하고 떠났거나. 아가레스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브…….”
내 친구야. 하나뿐인 내 안식아. 구석구석을 눈으로 더듬어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앉아 있던 응접실 소파에도 없었고, 그가 방문하면 뛰어 내려오던 2층 계단에도 없었다. 공작저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항상 반기던 온기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아…….”
부정적인 감각이 그를 집어삼켰다. 속에서부터 일렁이는 이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절망인지, 상실감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윽…….”
심장이 뻐근하여 움켜쥐고 허리를 숙였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어떻게 삼켜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가진 감정 모두를 어린 친구가 가르쳐 주었으나, 이건 배운 바 없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반응한 기운이 짙은 보랏빛으로 일렁이다가 끝내 터져나가려던 찰나.
“어? 토끼다!”
맑은 목소리가 정처 없이 우짖던 기운을 단번에 내리눌렀다. 아가레스의 눈이 그의 목줄 쥔 자에게 곧바로 가닿았다.
“토끼야! 잘 다녀왔어? 왜 혼자 왔어? 다들 어디 있어?”
다다다, 빠르게 달려와 짧은 팔로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잘 다녀왔냐고 묻는 따뜻함.
“다친 곳은 없어? 힘들지는 않아?”
다친 것도, 힘든 것도 자신일 텐데 외려 다른 이를 걱정하는 다정함. 아가레스는 단단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스?”
한참을 내려오지 않는 손에, 이벨리아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