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대들의 사랑이 나의 자랑2021.09.09.
엘리시아는 구름을 뚫고 솟구치는 용틀임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가히 장관이라며 박수칠 광경이었다.
“누가 봐도 알겠네요. 아주 정확히 알겠어요.”
“크흠.”
“우리 아가는 힘을 숨기는 것과는 늘 인연이 없군요.”
“인간들이 좋아한대서 한 건데…….”
“때로 인간들은 힘을 숨기기도 하지요. 불필요한 관심을 받기 싫어서요.”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실부터 시작해서 귀족들까지 얼마나 개떼처럼 몰려들지 아주 뻔했다. 이벨리아는 아직 어린아이이니 모든 일은 아르티나 공작저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고, 처리해야 하는 이는 바로 엘리시아 자신이었다. 초청장, 초대장, 아카데미의 입학 권고서, 교수직을 준다는 추천장, 황실의 전속 정령사로 임명한다는 임명장 등등-. 수없이 들이닥칠 문서를 철벽 방어할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업무량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엘리시아의 눈치를 슬쩍 본 엘라임이 화살을 애꿎은 이프리트에게 돌렸다.
“이게 다 이프리트 때문이다. 불의 왕은 예로부터 뭐 하나 제대로 해낸 적이 없었지.”
이프리트가 들으면 억울해서 뒤집어질 핑계였다. 그러나 엘라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의 하급 정령인 카사를 불러냈다.
“네 왕에게 가서 전해라. 네놈의 충고를 들었다가 내 계약자의 소중한 이에게 된통 혼났으니, 곧 정령계로 돌아가 그 꼴같잖은 영역의 불을 모두 물에 잠기게 해준다고.”
매번 두 정령왕 사이에서 등골 터지는 작은 새, 카사의 눈이 울상을 지었다.
“예, 왕이시여.”
일단 명하신대로 날아가긴 하는데, 그렇다고 감히 하급 정령이 불의 정령왕께 ‘물의 정령왕께서 우리 영역을 다 때려 부순대요!’라고 전할 수는 없었다. 전령 새 경력이 적지 않은 카사는 곧이곧대로 전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정령계로 뽈뽈 날아가던 작은 불새는 엘라임의 전언을 순식간에 순화시켰다.
[이렇게 전하면 되겠다! ‘조언을 해주신 덕에, 물의 왕께서 계약자의 소중한 이에게 관심을 듬뿍 받으셨다고 합니다. 정령계로 돌아오시면 불의 영역에 물을 선물하시겠다고 합니다.’]
완벽해! 카사는 작은 부리로 삑삑 만족스럽게 웃으며 파닥파닥 날갯짓했다. *** 공작저는 엘리시아의 주도와 엘라임의 도움 아래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사방에 낭자했던 혈흔은 맑게 빛나는 물방울이 쓸고 지나가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깨져 흩어진 유리 조각들은 손짓 한 번에 허공으로 떠올라 한구석에 착착 쌓여갔다. 생존자들은 직접 관을 짰다. 관을 만들기 위한 목재는 공작저 지하에 항상 쌓여 있었다. 무가의 특성상 언제 어느 때 전사자가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도울게.”
“아이고, 아기씨. 고운 손 다치십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이벨리아도 옆에서 작은 손으로 어설프게나마 거들었다. 그러자 엘라임 역시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세밀하게 움직이는 물줄기로 목재를 다듬었다.
“관은 저쪽으로.”
사망자들은 가장 좋은 목재로 만들어진 관 속에 뉘어 볕이 잘 드는 정원으로 옮겨졌다. 모든 관 위에는 아르티나 가문의 깃발이 둘렸다. 가주인 휴고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면, 이들은 아르티나 공작 가문의 사유지인 묘지에 안장될 것이다. 십수 개의 관을 찬찬히 바라보던 엘리시아가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마치 관에 누운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하델. 유족들에게는 관례대로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남은 모든 식솔이 평생 생활하는 데 부족함 없게 신경 쓰고. 그대가 직접 가서 전하게.”
“예, 마님.”
애도하여, 유족들의 앞에는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전하는 이는 하위 귀족들도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는 대귀족가의 집사였다. 고작 돈으로 슬픔이 가라앉지는 않겠으나, 가문을 지킨 이들에게 깊은 마음으로 건네는 예우였다. 이벨리아는 사흘 밤낮을 울어버리겠다는 말을 지키듯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비비안을 비롯하여 익숙한 이들의 죽음은 고작 아홉 살의 아이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흐앙- 비비아안- 으아앙-.”
“쉬이-. 이 작은 몸 어디에 이리 많은 눈물이 들어 있을까.”
짧은 인간 생, 그로부터 오는 희로애락을 엘라임으로서는 전부 이해할 순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어린 계약자가 이리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보자니 마음이 아파왔다. 혹시라도 이벨리아가 실신할까, 엘라임은 예의주시하다가 적절한 시간에 맞추어 작은 입에 물을 졸졸 흘려 넣어주었다.
“자. 물 마시고.”
“꼴깍. 으앙-!”
“옳지. 한 모금 더 마시고.”
“꼴깍. 으앙-!”
엘리시아는 상처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공작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재건과 치료 등을 모두 신경 썼다.
“부상자들은 모두 의무실로 데려다 두고, 비교적 중상인 자들은 2층 의무실로 올리거라. 공작가 주치의로는 손이 부족하니, 황궁에 의료진 지원을 요청하도록.”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벨리아 역시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로 흩어진 장난감들과 가구들을 주섬주섬 주워 치웠다. 눈물로 흐려진 눈 때문에 인형 옆에 누운 엔리르도 인형인 줄 알고 덥석 집었다가 깜짝 놀라 힘을 뺐다.
“훌쩍, 저기, 엘라임. 엔리르는 언제 괜찮아질까요?”
엘라임이 엔리르를 일별하며 답했다.
“새끼 용이로군요. 가진 존재력을 전부 끌어다 쓰는 바람에 탈진한 것뿐이니, 잘 쉬게 두면 알아서 털고 일어날 겁니다.”
“칼에 베이기도 했는데…….”
“명색이 용 정도 되면 옅게 베인 걸로는 드러눕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제야 안심한 이벨리아가 반파된 소파 위에서 부드러운 시트를 뜯어내어 엔리르를 그 위에 두고 커튼을 덮어주었다.
“그런데 왕님……, 아니 엘라임은 왜 저한테 말을 높이세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운디네랑 저는 친구인데, 엘라임은 운디네의 아빠 같은 분인 거잖아요.”
운디네와 친구라는 말도, 엘라임과 운디네의 관계를 주종이 아닌 가족에 비유하는 것도. 모두 이 계약자의 따뜻한 마음을 짐작게 했다. 전생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사상에 엘라임이 애틋하게 웃었다.
“내 계약자는 존중받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누구에게라도 그러하며, 나 또한 예외는 아니지요.”
보호자도, 친구도, 가족도 아닌 계약자는 오로지 나 하나이니, 차별성을 두고 싶다는 말은 내뱉지 않고 삼켜냈다.
“이브. 내가 인간계에 오래 머물면 계약자의 몸에 무리가 갑니다. 평소라면 더 오랜 시간 머물 수 있겠으나, 지금은 그대의 몸이 좋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벌써요……? 저 아직 괜찮은데.”
이벨리아가 아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음번엔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또 불러주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이벨리아가 그제야 작게 웃음을 띠며 끄덕였다.
“그럴게요.”
잊지 않고 이벨리아의 입에 물줄기를 졸졸 흘려 넣은 엘라임이 이내 물로 화해 흩어졌다. 허공에 동실 떠오르는 물방울의 잔재가 따뜻했다. 손으로 건드리며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고마워요, 나의 맹약자.”
포근한 온기가 이벨리아의 온몸에 머물다 사라졌다. 작은 몸 곳곳에 남아 있던 타박상은 모두 치료된 채였다. ***
‘내 계약자는 따뜻하기도 하지.’
차오르는 마음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돌아오자마자, 누군가 엘라임의 멱살을 휙 잡아챘다. 달빛을 닮은 은빛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렸다.
“계약했어? 했어?”
“알아 뭐 하게.”
“했네! 묘하게 웃는 이 표정 좀 봐! 이 자식이 계약을 해버렸어!!”
정령계에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사위가 어둑해지며 일순 번개가 번쩍였다. 하급 정령들은 제각기 영역으로 돌아가 몸을 숨겼다.
“환생을 도와줬으면 다야? 첫 인장을 찍은 것도 모자라서 냉큼 가서 계약까지 하고 와? 넌 상도덕도 없냐?”
“내 계약자가 나를 불렀다. 네가 아닌 나를 불렀다고.”
“그 아가가 뭘 안다고 널 불러!”
페르세스의 손을 탁 털어내며 엘라임이 거만한 표정으로 으쓱였다.
“운디네가 정령서를 펼쳐 내가 나온 페이지를 보여줬다고 하더군.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부르라고.”
“우, 운디네가?”
“하급 정령 교육 한번 잘 시켰지. 누구 애들이라 이리 똑똑한지 몰라.”
엘라임이 주변을 휘돌던 운디네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페르세스가 마침 곁을 슬슬 날아가던 실프의 날개를 휙 잡아챘다.
“너희들은 뭐 한 거야! 왜 내가 나오는 책 안 보여줬어! 제일 예쁘고 제일 강하고 병아리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애꿎은 실프에게 화풀이하지 마라. 다 네 정령 교육이 잘못된 탓을.”
“나도 계약할 거야!”
“무슨 수로. 이벨리아가 널 불러야 계약할 수 있는데, 안 불렀잖아. 너.”
맞는 말이다. 반박할 수 없자 페르세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트로이가 낮게 웃으며 페르세스를 위로했다.
“페르세스, 진정해. 음…… 그래. 네 계약자는 가장 오래된 고대수잖아.”
“그러니까! 넌 나무랑 계약한 내 심정을 몰라. 말을 못 한다니까? 의사소통하려면 뿌리의 움직임을 집중해서 봐야 하는 그 심정을 모른다고!”
“반면 엘라임의 계약자는 이벨리아지.”
“너 지금 나 놀리냐?”
으르렁거리는 페르세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로이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인간계에 머무르려면 필연적으로 계약자의 자연력을 일부 끌어오는 수밖에 없어. 너는 고대수의 자연력을, 엘라임은 이벨리아의 자연력을.”
“뻔히 아는 사실을 왜…… 아니, 잠깐.”
트로이가 씩 웃었다.
“엘라임은 제 계약자를 생각해서라도 현현하는 빈도를 조절해야 할 텐데, 페르세스 넌 아니잖아? 지닌 자연력으로 치자면 고대수를 넘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까.”
페르세스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래! 계약자가 될 수 없다면 언니로서 아이의 곁에 있어 주면 되지! 가만 보자……. 온화하고 차분한 언니 쪽이 좋겠지? 야, 엘라임. 너는 어떤 컨셉 잡고 왔냐?”
“컨셉은 무슨.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왔다.”
“아, 지금 구라쟁이 컨셉이야?”
“이게!”
“그만. 그만. 아이를 만나지 못하도록 지옥 끝까지 묻어버리기 전에 그만.”
언제나 그렇듯 트로이가 둘 사이를 중재했다.
“엘라임, 인간 계약자는 우리 모두 바라는 바잖아. 그 역동적인 삶에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이 저주 속에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니까. 페르세스가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는 가.”
“흥.”
엘라임이 몸을 돌려 물의 영역으로 돌아가려 하자, 트로이가 덧붙였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계약자인데 설마 이렇게 툴툴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진 않았을 거잖아. 알려줘. 우리도 만일 인간 계약자를 만나게 되면 써먹게.”
살짝 고민하던 엘라임은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인간 계약자 하나 없는 것들이니 자비를 베푼다는 마음이었다.
“……말했다.”
“응?”
“존댓말 했다고.”
“존댓마알? 예의 없기로는 악마 저리 가라는 네가?”
“아. 아. 상상해버렸어. 아. 소름 돋아. 아. 진짜 싫어.”
이프리트와 페르세스가 무진장 싫은 것을 목도한 것처럼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트로이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계약자에 단단히 미쳐버린 정령왕 컨셉이구나?”
“…….”
“그거참 미친놈 같고 효과 좋겠다!”
*** 그리고 그날, 아무도 잠들지 못한 밤. 이벨리아는 검은 원피스를 입었다. 등 뒤의 지퍼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비…….”
항상 곁에서 단장을 도와주던 비비안을 부르려다 두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이제 비비안은 없다. 혼자 끙끙대며 지퍼를 올린 이벨리아는 머리에 검은색 리본도 달았다. 그리고선 몇 없는 검은색 로퍼를 신고 혼자 정원으로 나섰다.
“……다 불타버렸네.”
가장 예쁜 꽃들로 고르고 싶었건만. 악마들의 손에 화단이 전부 불타 있었다. 성한 꽃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벨리아는 작게 땅의 정령을 불렀다.
“노움.”
코를 찡긋대며 나타난 고깔모자 쓴 난쟁이가 빤히 이벨리아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꽃을 몇 송이만 피게 해줄 수 있을까?”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백양으로……. 아니, 아니야.”
멀리 뜬 달을 응시하며 잠시 고민하던 이벨리아가 다시 노움에게 부탁했다.
“동백꽃으로 부탁할게. 복숭앗빛 동백꽃으로.”
난쟁이가 고깔모자를 벗고 그 안에서 씨앗을 탈탈 털어 땅에 묻자, 곧바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더니 꽃이 한 아름 열렸다. 이벨리아는 달빛 아래 탐스럽게 핀 동백꽃을 몇 송이 따 손에 고이 쥐었다. 제 몸만큼 커다란 꽃들을 가득 안은 채로, 정원에 놓인 수많은 관에 천천히 다가갔다. 관 위에는 가문의 깃발과 함께 전사자의 성명과 생전 아끼던 유품들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관 위엔 검이, 누군가의 관 위엔 목걸이가. 그리고 비비안의 관 위엔 그 어느 날 이벨리아가 주었던 벚꽃잎으로 만든 반지가. 이벨리아는 가장 왼쪽에 놓인 관 앞에 섰다. 그 속에 누운 자의 이름을 불렀다. 관을 한 번 쓰다듬고, 그 위에 복숭앗빛 동백꽃 한 송이를 두었다. 얼굴을 되새기고, 이름을 기억하고, 평소 건네고 싶었던 말을 마음속으로 한참 건넸다.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조금 옮겨 다음 관 앞에서도 똑같이 반복했다. 그다음 관 앞에서도, 또 그다음에서도. 중간쯤 오자 어슴푸레 동이 터 올랐으나, 아이만의 애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리가 아플 법도 하고 날이 추울 법도 하나, 전혀 티 내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그렇게 새벽을 꼬박 보내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고 돌아선 작은 어깨 위로 흐린 달빛과 옅은 태양이 함께 내려앉았다. 관을 뒤로하고 흔들림 없이 걷던 이벨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속삭였다.
“나는 그대들에게 사랑받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해.”
복숭앗빛 동백꽃에 담긴 꽃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