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왕의 하나뿐인 맹약자2021.09.02.
기사 몇이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며 두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굳이 어느 쪽으로 가라, 어느 방식으로 공격해라, 그런 합은 맞추지 않아도 충분했다. 아르티나 기사단. 적지 않은 세월 등을 맡기고 싸운 전우들이었다. 친우의 단편적인 움직임만 보고도 어떤 공격을 가할 것인지, 어느 곳을 공격할 것인지, 어떻게 지원을 해야 가장 효율적일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대외적 명망이 높다 한들 단 내에서의 실력 차이는 천차만별. 에딘, 헤롤드, 알렉 같은 괴물들이 있는가 하면, 카론같이 눈에 띄는 성장을 하고 있는 기사도 있고, 그 아래를 받쳐주는 기사들도 있는 법이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기사들이 출진 중이고, 그 외 많은 기사가 공작저 밖을 지키다 전사한 상태다. 남은 기사들의 합공은 두 악마를 압박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내리꽂히는 검을 손쉽게 피하면서, 비비안에게 창을 던졌던 플라우로스가 혀를 찼다.
“에이, 어, 어, 엉뚱한 인간이 맞았네.”
안드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들어 올리면서 키득 웃었다.
“잘난 척하더니. 기회 끝! 이번엔 내 차례!”
서늘한 검신에서 검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지옥에서 점화해 온 것이라 해도 의심 없이 믿을 정도로 이질적인 색이었다. 불이 옮겨붙지 않는 소재인 공작저 벽면에서 여전히 몸집을 키우고 있는 화염을 보아하니, 통상적인 불이 아님은 분명했다. 이벨리아의 눈앞으로 검이 내려꽂히기 바로 직전이었다.
“운다인.”
검을 집어삼키고도 충분할 정도의 물보라가 높이 일었다. 엘리시아가 소환한 운다인이 허공에 세차게 흐르는 폭포를 만들어냈다. 콰드드득, 섬찟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포가 안드라스의 검에서 불길을 걷어냈다. 화염을 잃고 떨어지는 검은 이벨리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카론이 받아냈다. -콰앙. 악마의 권능을 제한 검이라고 하더라도, 그 완력만으로도 일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눈앞의 이 상대다. 카론은 저릿한 팔의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너, 너도 실패했네! 다시 내, 내 차례!”
플라우로스가 손가락질하며 비웃자 안드라스가 신경질을 내며 바닥에 엉망으로 굴러다니던 장난감 하나를 세게 걷어찼다. 이벨리아는 자주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형편없이 부서지는 것을 느리게 시선 돌려 마주했다.
“정령사. 정령사. 빌어먹을 정령사! 난 정령사가 정말 싫어! 저 역겨운 기운!”
화르르, 검이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플라우로스가 옆에서 내 차롄데, 하고 중얼거렸으나 분노한 안드라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검이 내려꽂히려던 순간.
“엥? 잠깐!”
휘두르던 악마의 팔은 짙은 물안개에 막혀 내려오지 못했다.
“뭐야, 뭐가 내 팔에 달라붙었는데!”
안드라스가 패악을 부리는 찰나의 순간을 노련한 장군인 엘리시아는 놓치지 않았다. 악마가 한눈판 사이, 그녀는 진작에 운다인에게 안드라스의 뒤를 잡으라 명해두었다. 이를 미처 알지 못한 악마가 팔을 뒤틀었으나, 명징한 형체 없이 안개로 화한 운다인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너, 너는 항상 그렇게 더, 덜렁대.”
허공에서 돌로 만든 창을 무한히 꺼내 끊임없이 기사들에게 던지고 있던 플라우로스가 안드라스의 팔 아래 매달린 물안개를 향해 투창했다. 힘이 일 점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공간 자체를 찢어버리는 창이기에, 형체 없는 운다인이라고 할지라도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운다인-!”
엘리시아가 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 시야에 잡히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간 창이 운다인의 몸체를 꿰뚫었다.
“쿨럭.”
안드라스의 팔을 막던 자리에 옅게 나타난 형체가 물방울이 되어 사라짐과 동시에 엘리시아의 입에서 짙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캬르릉.”
이를 사납게 드러내고 덤벼든 엔리르 역시 목덜미를 잡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엄마! 엔리르!”
이벨리아가 엔리르의 목을 누르고 있는 플라우로스를 향해 달려들며 실라페를 불러냈다. 풀빛 바람을 몰고 나타난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플라우로스의 손을 할퀴고 허공으로 날아올라 세차게 날갯짓했다.
“저, 저, 저게! 덜 자란 주, 주제에 중급 정령을 다뤄?”
깊이 팬 상처에 플라우로스가 손을 털어내자 엔리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내 영창 없이 떠오르는 푸른 마법진. 악마를 상대로 가장 큰 효과를 낸다는 빙계 마법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두 악마에게 내리꽂혔다. 그러나 짙게 발산하는 마기에 깨져나가고. 허공에서 파닥이던 두 날개는 다시 안드라스의 손에 붙잡혔다. 악마가 의아하다는 듯 엔리르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뭐야? 주문도 외우지 않고 마법을 막 쓰네?”
엔리르가 몸을 크게 뒤틀며 입을 벌려 브레스를 내뿜었다. 두 악마는 근거리에서 날아오는 불덩이를 향해 거슬린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브레스를 피하는 데 여념 없는 사이. 연이어 허공에서 푸른 빛을 내뿜는 마법진 십수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뭐야.”
“이, 이거, 뭐야?”
경악한 악마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엔리르를 바라봤다. 어린 용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신호라도 된 듯, 허공에 뜬 마법진에서 거대한 우박들이 두 악마를 집어삼킬 듯 쏟아져 내렸다. 미처 충돌을 피하지 못한 가구들이 사정없이 부서져 나가고, 튼튼한 광물로 만든 바닥도 엉망으로 패였다. 비틀대던 기사들도, 속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던 엘리시아도, 마법진을 피해 실라페를 잠시 뒤로 물린 이벨리아도. 옅은 희망을 담고 뿌옇게 이는 미세한 얼음 입자들 사이를 응시했다. 누군가 작게 읊조렸다. 해치웠나. 허공에서 파닥이던 엔리르의 날갯짓이 일순 멈췄다. 날갯짓이 멈춘 것이 먼저였는지, 엔리르의 복슬복슬한 등을 벤 검이 먼저였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엔리르!!”
툭, 떨어지는 어린 용을 이벨리아가 달려가 받아냈다. 어린 용은 흐린 눈으로 은인을 바라봤다. 갚을 은혜가 태산 같은데. 지닌 힘이 약해 나무 한 그루만큼도 채 갚지를 못했다. 미안하다, 날 내려달라, 어떻게든 해보겠다, 말하려 했으나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기실 검에 베인 상처가 크진 않았으나, 아직 어린 육체임에도 주어진 존재력을 뛰어넘는 마법을 대량으로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용의 마법을 파훼한 대가로 수 없는 생채기를 입은 두 악마가 이벨리아의 품에 안긴 엔리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저게 무슨 존재지?”
“요, 용이군. 이 정도 마법을 영창 없이 퍼부을 존재는 용밖에 어, 없지. 저것도 죽여야 해. 더, 더 자라기 전에.”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플라우로스의 앞을 이벨리아의 실라페가 가로막고, 접근치 못하게 하려는 듯 날카로운 바람을 퍼부었다. 허공을 날며 피부를 찢어낼 듯 칼바람을 퍼붓던 실라페에게 검과 창이 동시에 쏘아졌다. 두 악마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실라페가 바람으로 화해 흩어졌다. 이벨리아의 입에서도 선혈이 흘러내렸다. 자비 없이, 악마의 공격은 역소환된 실라페가 있었던 자리를 뚫고 빗발쳤다. 카론이 실라페를 대신해 이벨리아의 앞에 자리했다. 쏟아지는 검격을 모두 쳐낸 카론이 두 악마 사이에 끼어 분투했다. 이 자리에서 카론 외에 잠시라도 두 악마를 막아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서, 서, 성가셔.”
제법 잘 버텨내는 카론과 다시금 정령을 소환하려던 엘리시아, 중상을 입었음에도 칼을 부여잡는 기사들과 사용인. 그것들을 둘러보던 플라우로스가 수백 개의 창을 꺼내 들었다.
“빠, 빨리 끝내지 않으면 고, 곤란하겠어.”
수렵에 특화된 악마에게 눈앞의 인간들이란 울타리 안에 갇힌 사냥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창이 모두 허공으로 비상했다. 사각은 없었다. 비상한 창들은 빙글빙글 돌며 사방으로 퍼져 공작저 내 사람들을 둘러쌌다. 하나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팔이 저릿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창. 저걸 전부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끝이었다. 최후를 목도하자 공작저는 오히려 고요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벨리아를 향했다. 굽히지 않는 아이는 여전히 의연하게 서 있었다. - 콰드드드득.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사용인들과 기사들. 엘리시아와 엔리르.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외려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이곳, 그들이 지켜야 할 단 한 사람의 앞. 이젠 완연한 주인이 되어버린 이벨리아의 앞으로. *** 멍하니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이벨리아의 작은 코에 비릿한 혈향이 훅 스쳤다. 누가 살았는지,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쓰러진 모두가 피투성이였으나, 이벨리아는 조금의 찰과상을 입음에 그쳤다.
“아…….”
아직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가장 의지할 대상을 찾았다.
“아……아빠.”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오라버니…….”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온기는 없었다. 아빠는 없다. 오라버니들도 없다.
“토끼. 토끼야……. 루이. 흐으. 루이.”
아무도 없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작은 몸 가득 절망이 담겼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손으로 가슴께를 두드렸다. 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눈을 마구 비볐다. 몸이 마구 떨려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고개 숙인 채 손으로 짚는 차디찬 바닥. 비극을 즐기듯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키득대는 웃음. 끈적하게 흘러 손끝에 닿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에 이내 깨닫는다.
‘여긴 나밖에 없어. 아무도 안 와. 나밖에 없다고.’
뭐든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도 좋아. 지금 해야 해. 이대로 다 죽게 둘 순 없어. 이건 나 때문이야. 내가 이들의 주인인데도 힘이 없기 때문이야. 불러냈던 실라페가 역소환되면서 속은 엉망진창이었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읽었던 정령서에 역소환 직후 다시 소환이 이뤄지면 끔찍한 고통이 따른다고 했으나 그 또한 알 바 아니었다.
“운…….”
운디네를 부르려던 입술이 멈칫했다. 얼마 전 보았던 정령서. 영민한 아이는 떠올린다. 뭐든 지킬 수 있댔어. 어느 날 들었던 조언. 기로에 선 아이는 기억했다. 모든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한 존재랬어. 소환의 대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그깟 것 얼마든. 몇 번이고 내어줄 수 있다.
“…….”
방에서 읊어보았던 거창한 소환식은 기억나지 않았다. 예를 갖춘 문장도 뱉을 경황이 없다. 줄 수 있는 것은 이 육체를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간절함 뿐이었다. 밭은 숨으로 내뱉는 것은 한 마디 고귀한 존재의 지칭. 그 대가로 거는 것은 생명.
“엘라임.”
도와줘. 응답해.
“엘라임.”
제발.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당신밖에 없어.
“엘라임-!!”
혈관을 돌던 온몸의 피가 일순 얼어붙었다. 익숙하게 휘돌던 숨이 더는 폐로 닿지 않았다. 감히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아득한 주시가 느껴지고. 법칙에 따르지 않는 자를 그 틀 안에 들여야 하는 세계가 불쾌한 듯 아이의 작은 몸을 옭아맸다. 숨 한 자락까지,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상실감. 책에서나마 접해본 소환 실패의 징조 같았다.
“안 돼, 안 돼……. 제발…….”
모든 게 끝났다는 깊은 절망에 허공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찰나. - 쏴아아아. 시야가 온통 일렁이는 물로 뒤덮였다. 차가운 바닥을 짚은 손가락 사이로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물이 쓸려나가고 들어차길 반복했다. 대양(大洋)이 공작저 내에 갇힌 것처럼 짙푸른 물이 휘몰아친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었다. 에르카디아 제국, 수도 전역에 충만한 생명력이 감돈다. 수도를 중심으로 위로, 아래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존재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먼 곳에 자리한 바다가 맥동한다. 구름이 맑은 물로 화해 떨어지고, 산천초목이 기쁜 듯 울었다. 온 자연이 대륙 전역에 위대한 존재의 현신을 알렸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가장 작은 맹약자.”
“…….”
눈물 젖은 얼굴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과거 엘라임이 남겨 두었던 자리, 눈 아래에서 짙게 빛나는 물의 인장. 존재하는 모든 물의 정령들이 왕의 새로운 계약자를 향해 자세 낮추어 경의를 표하니-. 고귀한 존재의 맹약자. 왕의 하나뿐인 계약자. 물의 대리자. 혹은, 대정령사. 바야흐로 이 대륙 유일한 존재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