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곳이 무덤이 되더라도2021.08.30.
이벨리아가 태어난 이후 처음이었다. 하델은 작은 주인의 명을 무시했다. 들쳐 매어진 채로 등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도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외려 더욱 빨라질 뿐이었다. 일평생 전장을 떠돈 기사단 역시 상황 파악이 제법 빠르다. 그들도 직감했다. 아기씨 목숨 하나 구하는 것이 이곳에서 벌어질 일 중 가장 긍정적인 일이 될 것이란 걸. 몰려드는 마물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악마 둘 앞에서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만용이다. 혼란 속에서도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카론보다 실력이 떨어져 악마의 발을 잡기 어려운 몇몇 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이벨리아가 갈 길을 뚫었다.
“길을 뚫어라!”
“아기씨를 보호해!”
비록 악마를 상대하기엔 무리라고 하더라도 명색이 아르티나 기사단. 비교적 하위의 마물들 따위 개미 떼처럼 몰려들더라도 처리에는 무리 없었다. 고작 네 명의 기사가 뒷문을 통해 공작저 안까지 밀고 들어온 마물들을 전부 베어냈다. 짧은 시간 이루어진 사체의 산. 그것을 지나 뒷문을 열던 기사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이게 무슨!”
무언가에 걸린 듯 몸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막. 뚫고자 몸을 부딪치자 마치 비눗방울처럼 오색으로 빛나다가 이윽고 다시 투명해진다. 몸을 가져다 박아도, 검을 휘둘러도 마찬가지. 물리력이 먹히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다시 힘껏 베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사들은 절감했다. 주군이나 단장님이 계시면 모를까. 여기 있는 누군가의 힘으로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러니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 그 누구도 이 공작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 기사들의 뒤를 따르던 하델, 비비안. 그리고 반대편을 지키던 엘리시아까지. 모두가 아연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곳 그 누구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자 없으나, 이벨리아의 도주로마저 막혔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때였다. 앳된 목소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서 있던 사람들 위로 내리꽂혔다.
“다들 뭘 멍하니 서 있어! 검 들어!”
힘이 빠진 하델의 어깨 위에서 바동바동 발버둥 쳐서 내려온 이벨리아의 표정은 제법 엄했다.
“도주로 하나 막혔다고 넋 놓고 주저앉아버릴 거야?”
“아기씨…….”
“제대로 검을 쥐고 고개 들어. 죽더라도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죽지 마!”
이벨리아가 비비안의 단검을 잠시 빌려 응접실 한쪽 진열장 유리를 깨뜨렸다. 팔을 긁어내는 날카로운 파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에 놓여 있던 화려한 검을 낑낑대며 꺼내 들었다. 네 살 생일선물로 받았던 보석검. 오라버니들이 선물해줬던 검이다. 당시엔 어디 쓸 데도 없는 것을 뭐 하러 선물해줬는지 속으로 구시렁대면서 진열장에 처박아뒀건만, 아직 진검을 받지 못한 이벨리아가 가진 유일한 진검이라곤 이것뿐이었다. 검을 뽑아 몇 번 휘둘러보는데, 자신에게 모여드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벨리아가 주변을 쓱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들 봐?”
“아기씨 진검 못 다루시지 않나 해서…….”
“뭘 당연한 걸 물어?”
“예?”
“폼이지, 폼! 어쩌면 지금 모습이 음유시인들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럴 수도 있겠죠……?”
“다들 멋지게 전해지는데 나만 수련용 목검을 들고 있었다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이걸 들고 있으면 내가 가장 멋진 검을 들고 있었다고 전해지겠지.”
이벨리아가 씩 웃으며 화려한 검집을 흔들어 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태평한 농담은 잔뜩 긴장한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굳은 몸을 풀어지게 했다. 그들은 어린 주인의 배려를 마음 깊이 새겼다. 애써 분위기를 풀고자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모든 이들의 시선은 곧게 앞을 향했고, 각자 무기를 쥔 손에는 단호함이 서렸다. 그렇게 다잡은 마음으로 밖의 사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를 잠시. - 저벅, 저벅. 저택의 문 바로 앞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걸음걸음이 대기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리고도 묵직했다. 그들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벨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죽지 마. 아무도. 나 사흘 밤낮을 와앙 울어버리려니까.”
*** - 쾅! 단 한 번의 굉음. 옅게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부서진 문과 두 인영의 실루엣이 보였다. 공작저를 지키던 이들은 다시금 무기를 고쳐 쥐었다. 문이 부서지면서 습한 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바람을 타고 들어온 짙은 피 냄새가 공작저를 가득 메웠다. 밖을 지키던 기사들과 호위병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밖을 보지 않아도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이였다.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 중 하나가 손을 올려 뒷문 쪽을 가리키며 키득 웃었다.
“나 혹시 몰라서 결계석을 가지고 와서 던져놨었는데. 이거 잘한 것 같지?”
인간의 몸에 부엉이의 머리. 불타는 검을 들고 거대한 늑대 위에 올라탄 악마. 이명, 불화의 후작. 63위 안드라스(Andras). 인간 사이 불화 외엔 모든 것이 불만스러운 파괴자가 자화자찬했다. 그러자 표범의 모피를 둘러맨 채로 오른손에는 기다란 투창, 왼쪽 어깨엔 커다란 매를 올려둔 짙은 피부의 악마가 답했다. 무언가 불안한 듯 두 검지를 끊임없이 맞부딪치면서.
“자……잘했어. 저것들 도망가면 고, 고, 곤란해. 아르티나 핏줄 중 가장 약한 것들부터 노, 노, 노리라고 하셨잖아. 저 꼬맹이와 부인 죽이고 가, 가야 해.”
이명, 표공(豹公) 64위 악마 플라우로스(Flauros). 수렵에 특화된 악마가 긴 창을 한 번 휘둘러 피어오른 먼지를 날렸다.
“거봐. 내가 결계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저 꼬맹이가 도망칠 수도 있었잖아. 뒷문으로.”
“다, 다행이다. 이 기회에 정, 정리하지 못하면 고, 고, 곤란해.”
그들의 무기, 옷, 형상, 말투 등 특징을 유심히 살피던 엘리시아는 기억해냈다. 각 63위와 64위의 악마. 각자 떨어져 있을 때는 그 위(位)에 맞는 힘을 내나, 둘이 함께 있을 때는 가진 힘의 배를 내는 특징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엘리시아는 검지를 까닥이며 이를 악물었다.
‘개 같네, 진짜.’
시너지 효과 없어도 죄다 죽어 나갈 판국에, 하필 쳐들어온 두 악마가 협동 공격에 강해 시도 때도 없이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것들이라니.
“자, 자, 자, 어디 보자아-.”
플라우로스가 공작저 내의 이들과 천천히 시선을 맞부딪혔다. 느리게 닿아오는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아먹을 포식자의 것이었다. 눈을 떼는 순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아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데.
“다들 시선 마주치지 마!”
엘리시아가 눈을 살짝 비켜 플라우로스의 어깨를 바라보며 다른 이들에게 경고했다.
“일정 시간 이상 마주치면 저 악마의 지식이 강제로 전이된다.”
오랜 세월 존재한 악마답게 방대하고도 잔혹한 편린. 그것이 한꺼번에 강제로 전이되면 대부분 인간은 발광하다가 죽고 만다. 플라우로스의 특기였다.
“으응? 이거 서, 서, 섭섭하게.”
시선 한 번으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얼마나 편리한데. 저 여자 인간이 폭로하는 바람에 쓸 수 없게 되었다. 악마의 미간이 불쾌함을 나타내듯 좁아졌다.
“저 여자가 아르티나의 안주인인가 보네. 우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기분 나쁘게 말이야.”
물의 정령사라고 들었는데, 내 불보다 뛰어날까. 중얼거리며 안드라스가 들고 있던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응접실 왼쪽 벽이 순식간에 불에 타기 시작했다. 검은 벽에 닿지도 않았고, 벽은 화염에 내성이 있는 자재로 건축되었으나, 화염을 주로 다루는 악마의 권능 앞에선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불이 옮겨붙는 속도는 빨랐다. 공작저에 머문 이들의 얼굴에 짙은 주황색 그늘이 졌다.
“크으. 금색 벽을 태우는 불꽃이라니. 환상의 예술작품이다! 어때? 응?”
안드라스가 검 끝으로 벽을 가리키며 킬킬 웃자 플라우로스가 팔꿈치로 어깨를 쿡 찔렀다.
“자, 장난치지 마. 방해가 있기 전에 빠, 빨리 처리해야 해.”
“칫. 그건 그렇지. 여긴 수도니까.”
“너, 너는 못 미더워. 내가 하, 하지.”
플라우로스가 천천히 창을 어깨 위로 들었다. 대는 청동으로, 끝은 돌로 되어 있는 창. 현대의 무기라기보다는 문명이 제대로 발달하기도 이전에 사용하던 구시대의 무기였다. 거대한 창이 무거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왔다. 이벨리아의 시선으론 궤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에 귀가 아프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쯤. - 퍼억. 터져 나오는 선혈이 눈앞을 물들였다.
“아……?”
1초를 수십 겹으로 나눈 것처럼 찰나였다. 이벨리아는 얼굴에 뜨겁게 와닿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몸 어느 곳도 아픈 곳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내 피는 아닌데.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천천히 닦아냈다. 이어 시선이 천천히 올라간다. 제발, 아닐 거라는, 그러지 말라는 애절함을 가득 담고. 바람을 배반하듯, 시야에 갈색 머리칼이 물결쳤다. 익숙한 머리색이다. 또 익숙한 뒷모습이다.
“비……비비안?”
비비안은 천천히 고개 돌려 자신의 아기씨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피가 울컥 올라왔으나, 역류하는 선혈을 다시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서.
“아기씨…….”
감히 말하건대, 나의 보물, 나의 의미, 감히 가슴으로나마 낳은 딸. 작은 주인께서 보잘것없는 내 노년을 가득 환하게 해주었으니, 나 또한 적어도 작은 기댈 곳 하나 되어 드리고 싶었건만. 어린 주인에게 쇄도하는 창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기사들이 달려와 막기엔 너무 멀었고, 그나마 아기씨 바로 곁에 서 있던 자신밖에 없었다.
“비비안!!”
사태를 파악한 듯 경악 어린 얼굴. 푸른 눈은 금세 눈물로 가득 찼다. 깊게 어린 절망.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벌린 입. 이벨리아를 키워온 비비안으로서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뚝……. 착하시지, 우리 아기씨.”
우리 아기씨. 귀한 아기씨. 왜 저리 슬프게 보실까. 그 목숨과 이 몸뚱어리 맞바꾸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을 영광인데. 나는 이 죽음 하나 안고 신나게 춤을 추며 저승길로 향할 수 있을 것인데. 비비안의 손이 천천히 이벨리아의 얼굴에 와닿았다.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는 손길이 애달팠다.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꼭. 성년이 되시는 날에…… 제 무덤 앞에 아기씨 닮은 꽃 한 송이 놓아 주시고…….”
말을 미처 다 잇지 못하고 힘없는 몸이 천천히 스러진다. 두 손 뻗어 받쳐보려 했으나,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함께 넘어지고 만다. 아직 따뜻하나 생기 없는 얼굴을 이벨리아가 황망히 더듬었다.
“아…… 아…….”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물 때문인가. 그렇다기엔 고인 것이 떨어지질 않았다.
“비비안……. 비비안…….”
그렇다면 이 상황을 외면하고 싶음인가. 포기하고 싶음인가. 일순 비비안을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과 맺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기 있는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먹던 일, 기사들과 뛰어놀던 일, 우는 자신을 하녀들이 달래주던 일, 집사와 글자 공부를 하던 일…….
“안 돼.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생각이 닿자 이벨리아는 떨리는 작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아직. 아직 여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있다. 다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인으로서 서 있어야 했다. 내 안위를 위해 이곳에 남은 이들이, 적어도 내 무너진 모습에 목숨 던지게 할 수야 없다. 딛고 선 이곳. 무덤이 되더라도, 최소한 투지 한 자락으로 덮인 무덤이어야 했다. 다시 꽃피울 씨앗 하나 뿌려둔 땅이어야 했다. 두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발을 살짝 앞으로. 턱은 아래로 살짝 당겨 시선은 정면. 배운 대로 자세 잡으며 이벨리아는 속으로 되뇌었다. 비비안. 받고 싶다 했던 그 꽃. 힘껏 싸우다 저승 가는 길에서 하나 꺾어 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