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내가 살 수 있을 리 없잖아2021.08.26.
두 진영 모두에서 악마의 목을 날리는 순간 실질적으로 이 국지전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본디 전쟁이란 수장을 잃은 잔당의 처리도 무시할 수 없는 법. 아르칸과 세드릭의 전장에서는 두 형제가 가장 앞에서 잔당 마물들의 거점과 야영지를 부수고 다녔으며, 함께 출정한 헤롤드와 알렉, 드웬 역시 신이 난 듯 칼춤을 추고 다녔다.
“이봐. 악마. 손에 든 그건 뭐야? 온종일 만지작거리네?”
헤롤드가 애검에 진득이 묻은 피를 사방으로 털어내며 물었다. 혹시 피라도 튈까, 아가레스는 윽, 소리를 내며 호부를 양손으로 꼭 잡아 감싸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야생의 곰이 따로 없군.”
“우워엉. 그래서 그건 뭐라고?”
“호부다. 재액을 막아 준다는.”
“호부? 푸하핫- 악마 주제에 무슨 그딴-.”
“이브가 줬지.”
“-효과가 엄밀히 검증된 소중한 물건을 들고 다니는지! 품격을 아는 악마로군!”
“우리 아기씨가 주셨다고?”
“아기씨가?”
“그래, 근데 그걸 아기씨가 주셨다고?”
전장에 있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피 칠갑을 한 채로 옹기종기 몰려들었다. 비위생적인 광경에 평소 같으면 눈살을 찌푸렸을 아가레스는 오늘만큼은 이 관심이 달가웠다. 수려한 입매가 씩 올라갔다. 마치 황제의 명을 받은 잠행 귀족이 귀족 패를 들어 올리며 ‘출두요!’를 외치는 모양새로, 아가레스가 호부를 높이 척 들어 올렸다.
“이 실은 이브가 직접 꼬았다더군.”
“아기씨께서? 그 작은 손으로?”
“실도 직접 구했다 하던데.”
“아기씨께서? 그 작은 발로 걸어서?”
“오와아아-!”
“우와아아-!”
자신들은 받지 못한 호부가 악마의 손에 있으니 영 시무룩하면서도, 아기씨가 만들었다는 말에 어쩔 줄을 모르고 호부 곁을 빙빙 맴돌았다. 그 반응은 아가레스를 아주 만족스럽게 했다. 그렇지. 무려 직접 실을 꼬아 만든 호부라니. 이름을 수놓은 손수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
“기분이다. 저기 숨은 암살자들은 내가 처리하지.”
아가레스는 암살자들이 은신해 있던 곳을 눈으로 정확히 짚었다. 보랏빛 마기가 짙게 한 번 퍼져나가자, 토벌이 끝날 때를 기다려 아르칸의 목을 칠 심산으로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마치 원숭이 떨어지듯 우수수 나무에서 떨어졌다. 헤롤드, 알렉을 비롯한 아르칸까지도.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잔당 소탕이 끝나면 처리하려고 그냥 둔 것들이었다. 은신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실력이기에 부린 여유였다. 마침 병사들도 지나치게 지쳤겠다, 대악마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헤롤드가 나름의 감사를 표했다.
“이야. 도련님을 노리는 암살자를 처리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우리 아기씨가 참 좋아하시겠는걸.”
“……시체 처리도 담당하도록 하지.”
“세상에. 도련님을 노리는 암살자를 처리한 다음 시체까지 치운 것을 알면 우리 아기씨는 호부 잘 줬다고 정말 기뻐하시겠어.”
“……마침 군량이 거의 다 떨어졌으니 사냥도 좀 해오도록 할까.”
“……?”
“……?”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 헤롤드와 알렉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기씨를 들먹이자 악마는 한없이 관대해졌다. 아니, 좋은 말로 해서 관대해진 것이지 이건…….
‘이 악마. 호구인가?’
‘호구였나?’
순식간에 거대한 흑표범 하나를 잡아 와 야영지에 쿵 내려두는 것을 보고, 아르티나 기사단은 확신했다.
‘호구 맞네. 호구 토끼네.’
*** 북동쪽 진영은 북서쪽보다 빠른 속도로 마무리되었다. 일선에 나선 자가 휴고와 루드비히이니 그럴 법도 했다. 토벌 내내 휴고와 함께 앞서 달리던 루드비히가 하나 남은 마물의 이마에 화살을 박아 넣으며 말했다.
“공작. 오늘따라 손속에 가차 없는데.”
“빨리 귀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제국과 병사들을 생각하시는 그 심정이 참으로 고매하군.”
“무슨. 부인과 딸이 보고 싶습니다.”
“음?”
“아. 입 밖으로 나왔습니까.”
제국과 병사들은 다 개나 줘라. 빨리 돌아가는 이유에 다른 것들은 하등 없었다. 달을 따다 바쳐도 부족할 부인과, 별을 따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딸이 보고 싶을 뿐. 휴고를 따라 북동쪽 진영으로 파견된 아르티나 기사단장 에딘이 휴고의 군마 앞에 부복했다.
“각하. 남은 진영은 없다는 정찰대의 전언입니다.”
나흘 밤낮을 제대로 쉬지도 않고 격파한 보람이 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정리가 끝난 것을 보아하니. 일렬로 선 병사들의 얼굴에는 짙은 환희가 찼다. 자신들의 손으로 이 제국을 지켰다는 뿌듯함.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거한 녹봉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휴고는 병사들의 얼굴을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여기 있는 이들보다는, 출정식 때와 달리 이젠 이곳에 없는 이들을 기억하면서. 휴고 나름의 간결한 추모였다. 휴고가 말에서 내려 일부 병사들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대들 덕분에 에르카디아는 하루 더 버텼다.”
공치사는 늘 그렇듯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귀환한다!”
노을 지는 하늘 위. 피를 머금은 금빛 깃발이 드높이 휘날렸다. 블라고 산맥, 북동쪽 국지전. 종결. *** 아르칸이 이끄는 부대 역시 마지막 거점에 다다랐다. 인권 없이 우리 안에 잡혀 있던 포로들을 풀어준 뒤. 아르칸은 모든 진영을 지나며 물었던 것을 다시 물었다.
“사쿰이라는 자, 있나?”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표하던 자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저…… 소공작께서 사쿰은 왜 찾으시는지요?”
“부탁을 받았다.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그대가 사쿰인가?”
“……사쿰은 일주일 전에 전사했습니다. 아버지와 자식들에게 유언을 전해달라고 하면서요.”
“……그렇군.”
일주일. 딱 일주일. 그가 늦었다.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받았으나 대군을 이끄는 사령관답게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 봐야 그에게 목숨을 맡기고 선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다. 슬픔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사쿰의 유언과 유품은 제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높은 분께서 이리 신경 써주심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
아르칸은 말없이 돌아섰다. 짙은 노을이 젊은 사령관의 어깨에 짐처럼 내려앉았다. 블라고 산맥, 북서쪽 국지전. 종결. *** 블라고 산맥의 북동쪽은 금기의 협곡과 가장 맞닿아 있는 곳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아직도 피로 젖은 곳. 어둠과 별반 차이 없이 짙은 색의 펜던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펜던트 옆에는 이제는 사멸되어 오로지 금제탑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고대 문자가 적혀 있었다. 「당시의 화마를 기억하라」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이가 펜던트를 손에 쥐며 답을 남겼다. 「너 자신이 신임을 알라.」 *** 한편 출정식으로부터 나흘 후. 토벌대가 막 분전 지역에 도착했을 무렵. 전방에선 생사가 오가는 전투가 연일 벌어지고 있음에도 수도는 평화로웠다. 엘리시아와 엔리르, 카론을 비롯한 일부 아르티나 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공작저 역시 마찬가지. 비록 몇 해 전, 악마 제파르가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이 제국 내에서 수도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대마법사인 카시스 후작을 비롯해 황실 기사단까지 수호하고 있으니, 이를 뚫기도 하늘의 별 따기요, 뚫더라도 누구 하나 해하고 도망가기도 쉽지 않음이다. 이에 휴고 또한 공작저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북부로 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벨리아는 절실히 깨달았다. 수도가 이리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 누구의 희생 때문인지.
‘내 세상은 모조리 전쟁터로 떠나버렸는데 이 세상은 평소와 똑같네.’
이벨리아는 보들보들한 엔리르를 폭 끌어안고 종알거렸다.
“괜찮겠지? 아무도 안 다치겠지?”
“당연하지. 다들 강하잖아.”
엔리르가 말랑 통통한 앞발로 이벨리아의 손등을 꾹꾹 눌렀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토벌이 있을까?”
“그럴 거란다.”
엘리시아가 곁에 앉아 시무룩해진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큰 토벌을 처음 겪다시피 하는 어린아이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인간사는 유구하지. 고작 백 년 언저리를 사는 인간의 시야로는 담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있단다. 때로는 공조와 화합이, 때로는 대립과 반목이. 어느 시대에는 재건과 회복이, 어느 시대에는 멸망과 파괴가. 마치 시대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것들은 흐름을 타고 반복된단다.”
작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입을 삐죽 내미는 딸의 얼굴을 고운 손으로 펴주며, 엘리시아가 다독였다.
“아가, 20여 년 전에 있었던 인마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양 측의 막대한 희생 탓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일 뿐. 언제고 다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니란다.”
“다시요……?”
“그래. 우리 세대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니 가능하다면 내가 건재한 시대에 시작되길 바랐건만. 시기를 보아하니 주역은 우리가 아닌 너희가 될 것 같구나.”
엘리시아는 세 아이 중 그녀와 가장 닮은 아이를 눈에 깊이 담았다.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 아이들.
“그때가 되면, 아가.”
현명한 어머니는 어린 딸을 위해 가진 모든 지혜를 틈틈이 알려주었다.
“적을 만들지 말거라. 백 명의 아군은 한 명의 적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만일 네가 적을 만들어야 한다면,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밟아버리렴. 너와 적이 된다면 어떤 것을 감내해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주고, 어중간하게 기어오를 여지조차 주지 말거라.”
“엄마, 그러면…….”
이벨리아가 반문하려던 그때였다. - 쾅! 공작저의 가장 바깥쪽 대문에서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잠시의 정적 후. - 쾅! 쾅! 다시금 거대한 충격이 가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쿠르릉, 돌벽이 무너지는 굉음이 뒤를 이었다. 엘리시아와 이벨리아, 엔리르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영문 모르고 입을 벌릴 때, 거의 일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엘리시아는 곧바로 검을 들고 정령을 불러냈다.
“엄마……?”
저택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아르티나 기사단의 단원 하나가 저택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오른손으로는 피가 솟는 환부를 막은 채.
“마……마님. 아기씨. 어서……!”
“무슨 일이냐. 왕국 잔당군인가.”
말을 끊고 묻는 엘리시아 또한 왕국 잔당 따위가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모를 희망에 묻는 것뿐이었다. 자리에서 털썩 쓰러지는 기사는 엘리시아를 애써 현실에 붙박아두었다.
“악마입니다, 마님.”
“……수는.”
기사의 목소리에 절망이 들어찼다.
“……둘입니다.”
*** 엘리시아는 질끈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근 시간 내에 토벌대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출정한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막 분전 지역에 도착해서 첫 전투를 시작했을 터. 저택의 인원들로 악마 둘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저택에 남은 이들은 몇 명의 아르티나 기사단원과 나, 어린 용뿐. 하나라면 몰라도 둘은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황궁 또는 카시스 후작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인가. 악마 둘이 문 앞까지 쳐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무슨. 몰살이 빠를 터. 엘리시아의 영민한 머리는 그 외에도 십수 가지의 가능성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중 최선의 수를 뽑아냈다.
“하델, 비비안, 엔리르. 이브를 데리고 황궁으로 가거라. 어서.”
“예, 마님.”
지금껏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그저 집사인 줄로만 알았던 하델이 정장 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역으로 쥐는 손놀림이 단검에 제법 익숙한 것으로 보였다.
“가시지요, 아기씨.”
비비안 역시 마찬가지. 항상 온화하게 웃던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머리를 쪽지던 비녀를 빼내었다. 폭포수같이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대강 쓸어올린 중년의 여성은 이벨리아의 등을 뒷문 쪽으로 떠밀었다.
“미안하네만, 카론 경. 그대는 여기 남아 시간을 끌어줘야겠네.”
“물론입니다, 마님.”
이벨리아가 황궁까지 도망가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야 했다. 한 명의 기사, 한 명의 사용인이라도 더 검을 들어야 하는 상황. 응접실에 모여 있던 하인들과 하녀들 역시 모두 무기를 쥐었다. 들어본 적 없는 자의 어색함 따위는 없었다. 표정에 두려움을 띄우는 이도 역시 없었다. 이곳은 아르티나. 제국 제일의 무가.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는, 나아가 무기에 익숙지 않은 이는 여기 없다.
“잠깐! 안 가!”
이벨리아가 작은 발로 버티고 서서 크게 외쳤다.
“가셔야 합니다, 아기씨!”
악마가 둘이면 승산이 없다. 시간문제일 뿐, 어차피 여기 있는 모두는 잘 쳐줘야 전멸이다. 저택 밖에서 나는 창칼 소리는 숨 한 번 내쉴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저 소리가 완전히 끊기면 저택 밖은 몰살. 악마들은 내부로 들어올 터였다. 출정하신 주군과 도련님들께 만에 하나라도 불상사가 생긴다면, 공작가의 적통 후계자는 이 작은 공녀님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하델과 비비안은 필사적으로 이벨리아를 끌고 가려 했다. 엘리시아가 힐끗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일갈했다.
“도망치거라, 이브. 어서.”
“안 가!!”
“……나도 안 가.”
어린 용의 작은 발아래에도 환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용에게 번거로운 영창은 필요 없다. 차가운 빙계 마법이 마법진 위에서 넘실거렸다. 아직 힘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어린 용. 그렇다 하더라도 받은 은혜를 저버릴 정도로 사리를 모르진 않는다.
“나도 같이-!”
“용서하십시오, 아기씨.”
기어코 하델이 이벨리아를 둘러업었다. 이벨리아가 충실한 집사의 어깨를 내리쳤다.
“놔! 하델! 놔! 여길 도망쳐서 살아남는대도 그건-!!”
잇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가시가 되어 자신을 찔렀다. ……내가 살 수 있을 리 없잖아. 눈앞에서 엄마를, 엔리르를, 카론을, 기사들을 모두 잃고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발버둥 치는 이벨리아의 이마에 엘리시아가 짧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 아가. 내 딸. 사랑한다.”
“엄마!!”
“가거라, 하델.”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밖에서 들리던 단 하나의 창칼 소리가 뚝 그쳤다. 사위가 적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