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다 내놔. 아기씨 드리게.2021.08.19.
“저열하군.”
루드비히와 함께 비교적 뒤편에서 행군하던 아가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저 작태. 하다못해 우리 꼬맹이도 도움이 되겠답시고 정령 몇 마리를 붙여뒀는데. 다 큰 저들은 뭘 했길래 저리 뻔뻔히 요구하고 앉았지?”
“힘이 없으니 별수 있나.”
“힘이 없으면 기를 노력이라도 해야지. 우리 연약한 꼬맹이는 힘이 있어서 밤낮으로 정령서 파며 공부하나? 하여간 인간들이란.”
‘걔 정도면 인간치곤 힘이 차고도 넘치는 편이지.’
이 악마는 인간 능력에 대한 직시가 영 부족하다. 자기가 마기를 팍팍 날리고 검기를 팍팍 쏟아낸다고 모든 종족 기본값이 그 정도인 줄 크게 착각하고 있다. 괜히 얄미워진 루드비히는 눈앞의 이 악마를 좀 골려주자고 마음먹었다. 문득 손목에 묶어둔 손수건이 떠오른 그는 마치 여기 보라는 듯 팔을 걷어 올리고 머리를 매만졌다. 누가 봐도 손수건을 자랑하려는 모양새였다.
“크흠. 큼.”
헛기침까지. 그런데도 아가레스가 자신의 손목을 보지 않자, 루드비히는 손목에 묶인 손수건을 풀어 흐르지도 않은 땀을 닦는 척을 했다. 제법 요란하게 휙휙.
“채신머리없긴. 얌전히 닦아라.”
티를 있는 대로 내고 있음에도 아가레스의 표정은 경멸에 그쳤다.
‘눈치 더럽게 없네!’
결국 루드비히는 손수건을 아가레스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가 소처럼 달려들길 원하는 건가?”
“이거 예쁘지.”
“손수건이 다 손수건이지 무슨 이쁘고 자시고.”
“여기 잘 봐봐.”
“뭘 보라는…… 가만.”
아가레스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흰 손수건 가장자리에는 작은 친구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주 삐뚤빼뚤 형편없는 솜씨를 보아하니 작은 친구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수놓은 것으로 보였다.
“설마……!”
루드비히의 입가가 높게 올라갔다. 황태자의 거만한 미소를 본 제국민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더욱 큰 함성을 질렀다. 실상은 악마를 한 방 먹였다는, 그리고 악마는 땅 도둑으로부터 손수건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확인으로부터 기인한 미소였지만.
“그대는 이런 거 못 받았지?”
명백히 놀리는 말투였다. 아가레스의 잇새에서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이브가 며칠 전에 직접 황궁에 들르더니 주고 가더군. 어디선가 전쟁터에 나가는 소! 중! 한! 친! 구! 에게는 제 이름이 수놓인 손수건을 주는 거라고 읽었다면서 말이지.”
이 제국 작은 국본(國本)의 어깨가 뿌듯하게 올라갔다. 보통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잘도 돌아갔다.
“내게는 주었는데 그대에겐 주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뭐, 뻔하지.”
제국민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손을 흔드는 루드비히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반비례하여, 아가레스의 표정은 마치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대악마의 강림이라고 해도 의심할 자 없을 정도로 흉흉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손수건이 다 손수건이라고 했나? 무슨 이쁘고 자시고가 있냐고 했던가? 이브가 준 건데?”
“으쁘.”
“뭐?”
“으쁘드그.”
자신은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꼬맹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준 선물이라 하더라도, 감히 그것을 깎아내릴 생각은 단 한 톨도 들지 않았다. 작은 친구의 손에서 나온 모든 것은 그에게도 가치 있으니까. 그러나 이가 꽉 악물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것 치곤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표정인데.”
“지금 여기서 인마전쟁 2차전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면 입 다물어.”
그때였다. 아가레스의 머리 위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이봐! 악마!]
물색으로 반투명한 물고기 하나가 통통한 몸체와 긴 꼬리를 휘저으며 그의 위를 휘돌고 있었다.
“뭔데.”
[헉. 펴……평소보다 더 사악해 보이네……. 무서워…….]
“뭐냐고.”
“이자는 지금 상당히 저기압이다. 이해해라, 정령.”
“넌 닥치고.”
[아니, 난 그냥 심부름 온 건데……. 우리 병아리가 이거 악마한테 주라고 해서……. 근데 이렇게 차갑게 쳐다보면 나 꽁꽁 얼어서 얼음의 정령이 돼버릴지도…….]
“이브가?”
물의 정령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갑던 시선이 곧바로 온기로 물들었다. 그 간극에 운디네는 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이거 아무래도 또라이가 따로 없네. 감히 밖으로는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응. 이거 주랬어.]
운디네가 꼬리에 매달고 있던 물건을 아가레스의 손 위에 톡 떨어뜨렸다.
“이게…….”
[호부(護符)야. 가지고 있으면 재액을 막아준대. 거기 달린 실은 병아리가 직접 꼬아서 달아둔 거야.]
동그란 원 모양의 은 조각.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음각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평안을 기원하는 오색 실이 꼬아져 있었다.
“……직접 꼬았다고?”
[응. 내가 봤어! 병아리가 직접 실을 구해서 조물조물 꼬았어!]
“직접, 직접…….”
되뇌던 아가레스의 표정이 단번에 환희로 물들었다. 조금 전 대륙을 정복하러 온 사악한 대악마 같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 병아리가 그러는데, 이거 원래 일찍 주려고 했었는데 예쁘게 꼬느라고 조금 늦었대. 근데 하나도 안 예뻐.]
운디네가 키득키득 웃었다. 솔직히 루드비히에게 준 손수건에 수놓인 이름도, 아가레스에게 준 호부에 꼬아둔 실도, 어느 하나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하긴 어려운 솜씨였다. 아가레스가 손에서 마기를 빼고 운디네의 꼬리를 휙 잡아챘다.
“안 예쁘긴 뭐가 안 예뻐.”
[힉! 놔, 놔줘!]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아가레스가 운디네를 거꾸로 들고 탈탈탈 털었다. 말 아래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악마가 정령 잡네!]
“혹시라도 이브에게 안 이쁘다는 소리는 뻥긋도 하지 마. 이 자식이랑 내가 아주 좋아했다고 전해. 알았어?”
[정령은 거짓말을 안……!]
“이게 거짓말로 보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도 운디네가 바라본 눈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손수건과 호부가 예쁘다는 하찮은 사안에 왜 이렇게들 진지한 거야? 운디네는 당황했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받은 게 없어서 심술 한 번 부려봤어!]
쌩하니 빠져나온 운디네는 훌쩍이며 어린 계약자의 곁으로 돌아갔다.
[저 무식한 악마 같으니라고! 훌쩍…… 진짜 서러워서 내가…….]
*** 그렇게 토벌대가 성문 밖으로 나서 행군하기를 나흘. 간간이 나타나는 몬스터에, 아직 다 풀리지 않은 날씨로 쉽지 않은 행군이었으나 종군하는 기사들과 병사들 그 누구도 군기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보다 어린 소공작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앞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보다 작은 그 등을 보고 따르자니 아주 잠시 한눈을 파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정지!”
아르칸이 오른손을 들자 한 치의 오차 없는 척- 소리와 함께 군홧발이 멈춰 섰다. 눈앞엔 커다란 갈림길이 있었다. 아르칸은 북서쪽, 휴고는 북동쪽 진영을 맡기로 했다.
“지휘권을 쥔 첫 토벌인데, 아버지 도움을 받아서야 제가 면이 안 서는데요. 그냥 북동쪽 국지전도 제게 맡기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다른 진영으로 가지 않느냐. 게다가 네 친우가 매번 하는 말도 있지. 객기 부리다 황천길 간다고.”
“객기가 아니라 호기일 정도로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투기로 형형하게 빛나는 어린 아들의 눈을, 휴고가 깊게 바라보았다.
“실전은 다르다, 아르칸. 조공을 바쳐 주공을 성공시킬 줄 알아야 하며, 다친 병사를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사람의 목숨보다 그 깃발의 가치를 높이 삼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
“그리고. 악마는 다르다. 마물이나 마족이라면 몰라도, 72 악마는 그 위를 차지할 때까지 오랜 세월 격을 쌓아 올린 놈들이야. 네 한걸음에 네 목숨뿐만이 아니라 네 뒤에 선 모든 병사의 목숨도 함께 달렸음을 명심하거라.”
아르칸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매번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끓어오르는 혈기에 가볍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옆에서 유심히 듣던 세드릭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안부를 묻고, 안전을 빌고, 다독이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가레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휘저었다.
“혹시 마족들이 알 까서 세력 불릴 때까지 기다리는 중인가? 그렇다면 좀 더 기다리고.”
그제야 시간을 제법 잡아먹었다는 것을 안 아르칸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레스가 아르칸과 세드릭의 말고삐를 잡아채며 휴고에게 말했다.
“신파는 그만 찍도록. 이 두 놈 목숨은 붙여 놓을 테니까.”
“이 두 녀석도 전쟁을 배우긴 해야 하니…….”
“아, 알았다고. 딱 죽기 직전에만 끼어든다고.”
공격적인 말투에 보통 때 같으면 인상을 찌푸리고 한마디 했을 휴고가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이봐, 악마.”
“또 뭐.”
“잘 부탁한다. 그리고…….”
고맙다. 동쪽 갈림길로 향하는 뒷모습, 그를 훑고 지나오는 바람에서 작은 감사 인사가 들려왔다. 아가레스는 손안에 쥔 호부를 만지작거리며 입매를 올렸다. 그 위에 꼬아둔 오색실은 아까워서 감히 만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감사 인사는 이미 차고 넘치게 받았다. 그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이 두 머리통을 평생토록 지키게 되더라도 기꺼울 것만 같았다. *** 아르칸, 세드릭, 아가레스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국지전은 제법 치열했다. 가장 앞서 검을 휘두르는 아르칸의 곁에서, 알렉이 쌍검을 들고 춤을 추듯 날아다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하나라도 더 베.”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로 마물들을 거의 다지다시피 하는 헤롤드가 입안에 고인 피를 퉤 뱉으며 타박했다.
“아니, 나야 벨 게 끊이질 않아서 좋기는 한데, 이것 좀 봐.”
알렉이 눈앞에 선 마물의 팔 하나를 베어냈다.
“봐봐라?”
오래 지나지 않아 잘린 환부에서 보글보글한 거품이 끓더니 팔 하나가 다시 자라나는 것이 아닌가.
“엥?”
“신기하지. 다시 자라나. 보글보글하더니 다시 자라나.”
알렉이 장난치듯 여기저기를 베었다가 재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와중에도 뒤편으로 달려드는 마물들의 목을 한 번에 베어내는 손속은 늦추지 않은 채로.
“목을 잘라야만 멈추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원래 마물들이 이렇게 재생력이 좋았나?”
심각한 상황임에도 진정 궁금하다는 듯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이내 쪼그려 앉아 마물의 시체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연구까지 한다.
“흐음…….”
알렉이 달려드는 마물 하나의 앞에 자신의 왼팔을 뻗어두었다. 거대한 늑대 형상 마물의 손톱이 팔을 깊게 긁고 지나갔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안 되네. 봐봐. 나는 재생 안 되는데.”
“이 미친놈! 뻔한 걸 확인하려고 팔을 내줘?”
“난 이 땅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나 했지. 아쉽네. 더 재밌어질 수 있었는데.”
“잠깐. 이 새끼 정신은 지금 이승에 있는 거 맞나? 야, 너 우리 아기씨 연관어 하나만 말해봐.”
“검술 못해. 하여튼 기분이 나쁘잖아. 이 못생긴 마물들이 감히 나보다 재생력이 좋아? 건방지게?”
아기씨 특징을 정확히 짚어내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은 이승에 있는 듯한데, 대체 어느 핀트에서 기분이 나쁜지 헤롤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족 재생력이 인간보다 빠른 게 대체 왜 기분이 나쁘냐고. 돌연 알렉의 눈이 음산한 안광을 머금더니, 쌍검이 더욱 빠르게 춤을 췄다.
“그 재생력 우리 아기씨 줘. 톡 치면 넘어질 우리 병아리에겐 재생력이 필요해.”
알렉이 멍한 표정으로 유유자적 지나가는 발걸음마다 마물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줄 수 없는 재생력을 내놓으라며 협박하는 작태가 뻔뻔했다.
“저, 저 미친 새끼. 내가 저딴 거랑 편을 먹고 지금-!”
“아하핫- 관둬. 전쟁터에서 저놈을 이해하는 일은 평생이 가도 없을 테니까.”
경악하는 헤롤드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드웬 역시 신난다는 듯 웃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근데 이거 잡아가면 아기씨가 좋아하실까? 보글보글 살아나는 마물? 아하하핫!”
“……널 이해하는 일도 평생이 가도 없을 거다.”
“엇, 그거 좋아 보인다 너희! 그거 내놔. 우리 아기씨 드리게!”
늑대 마물의 등 위에 안장처럼 얹어진 뾰족한 가시 다발들은 기사들이 마물들에게 쉬이 다가갈 수 없도록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저걸 우리 아기씨 가져다드리면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 강해지시겠지. 드웬이 눈을 빛내며 냉큼 달려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늠하던 헤롤드가 동조했다.
“그건 좋은 생각이네. 하는 김에 그거 가죽도 벗겨봐. 아기씨 외투 지어드리게!”
“으하핫- 알았어, 헤롤드. 근데 저기 우리 소공작님께 마물들이 달려간다!”
“엉? 저 잡것들이!”
헤롤드의 손에서 마치 부메랑처럼 바스타드 소드가 날아갔다. 훙훙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검에 마물들조차 고개를 움츠렸다.
“오! 신기술?”
드웬이 놀라며 물었다. 아르칸 주변으로 달려드는 마물들을 죄다 베어내고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온 바스타드 소드를 보며, 헤롤드가 씩 웃었다.
“음. 이 신기술 맘에 들어. 이름하여…… 바스타드 소드는 돌아오는 거야!”
거대한 검이 다시 한번 창공을 날았다. 부메랑처럼.
“가서 아기씨 앞에서 보여드려야지! 정원의 나무를 죄 베어내면 아기씨가 대단하다 칭찬해주시겠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아르티나 기사단을 지켜보던 아가레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는 미친놈들이다.
“……우리 꼬맹이 정신 상태의 근원을 엿본 기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