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왕을 소환해볼까?2021.08.16.
“아가, 뭐 해?”
“우리 아기씨, 뭐 하십니까?”
“누나, 뭐 해?”
다들 걸음을 멈추고 한마디씩 묻는다. 그만큼 이벨리아가 두꺼운 책에 파묻혀 주변을 모두 잊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기사단이 마들렌을 꺼내 살살 흔들어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헤롤드와 드웬은 의아하다는 듯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우리 아기씨가 뭘 잘못 드셨나?”
“벼락이 우리 아기씨 머리를 콩 쳤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에 맞으셨나?”
오라버니들과 엔리르를 비롯해 기사단까지 주변을 알짱거리자, 이벨리아가 커다란 도화지 위에 크게 글씨를 써서 옆에다가 척 놓아두었다. 악필도 그런 악필이 없던 글씨는 해를 거듭할수록 알아볼 수 있을 정도까지 가닿았다. 「이브 책 읽는 중. 아무도 방해하지 말 것.」
“세상에, 우리 아기씨가 책을 저리도 열심히……!”
“맙소사.”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덩치들이 놀라며 수군거리는 것이 영 거슬리는 와중에, 알렉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결정타를 날렸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나 보다……. 아아, 어머니. 저도 인제 그만 어머니 곁으로…….”
이것들이! 참다못한 이벨리아가 마치 파리를 쫓듯 파닥파닥 손을 휘저으며 빽 소리쳤다.
“하델-! 이 멍멍이들 좀 다 내쫓아!”
후다닥 달려온 충실한 집사는 들고 있던 쟁반을 마구 휘둘렀다.
“이 못된 망아지들! 우리 아기씨 이제야 책에 흥미 좀 붙이시는데 응원은 못 할망정 방해들입니까!”
“아니, 나는 그냥 내일 이 세상이 망해버리나 해서…….”
“알렉 경은 세상이 망하는 걸 못 볼 겁니다.”
“왜?”
“그 전에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죽기 싫으면 나가요! 다 나가!”
텅. 은색 쟁반이 알렉의 머리에 장렬하게 부딪혔다. ***
“어휴. 저택에 철든 사람이 아무도 없어.”
결국, 번잡스러운 응접실을 피해 방으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읽고 있던 두꺼운 책을 부드러운 카펫 위에 턱 내려놓고 엎드렸다. 쌀쌀한 바람에 흰 커튼이 휘날렸다.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표지를 비췄다. 황금을 녹인 물로 음각한 제목이 화려했다. 「갈드라보크 카발라. 지은이 파라켈수스.」 아주 오래전부터 정령학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한 이 책은 다섯 살 생일선물로 받은 정령서였다. 당시에는 글자가 너무 어려워 조금 뒤적이다가 스튜 받침 정도로만 사용했지만, 이제는 볼 때가 된 것 같았다. 자아가 생긴 후부터 늘 정령과 함께였으니 내용이 생소하기는 해도 거부감은 없었다. 이벨리아는 최근 낮이고 밤이고 이 책을 끼고 살았다.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잤으니 열정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해줄 만했다. 책을 펼침과 동시에, 또 무슨 사고를 치는지 열어둔 창문을 통해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왔다.
“……비밀기지에 가서 읽을까?”
잠시 고민한 이벨리아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가도 또 방해꾼들이 있겠지. 그것도 둘씩이나. 그냥 여기서 봐야겠다.”
그렇게 몇 시간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니, 어딘지 익숙한 페이지가 보였다.
“응? 이거 전에 운디네가 보여줬던 건데!”
이벨리아가 제파르에게 당해 쓰러진 뒤 정신을 차리고 운디네를 불렀을 때. 운디네는 이 책을 들고 뽈뽈 날아와 딱 이 페이지를 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왕의 존함을 부르라면서. 무려 이 세상 모든 물을 다스리는 분이라고. 이 제국 전역에 비를 내릴 수도, 해일을 일으킬 수도, 모두 말려 사막으로 만들 수도 있는 분이라고.
“…….”
부르는 데 따르는 대가도 들었다. 당시에는 질색하며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소 같으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일. 그러나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간다는 지금에 와서는 이 힘이 간절했다.
“이 정령을 소환하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조막만 한 손이 페이지를 한번 쓸었다.
“엄청 세다고 했으니까. 아마 분전 지역 하나쯤은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
그러면 우리 아빠도, 오라버니들도, 루이도, 토끼도 모두 다치지 않을 거야. 이벨리아의 눈이 맑게 빛났다. 대가는 얼마든 치러도 좋았다. 작은 목소리가 페이지 가장 앞머리에 크게 쓰인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엘라임?”
큰맘 먹고 불렀건만, 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혹시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나 있나 해서 너른 방을 한 번 쭉 돌아보았으나 매한가지였다.
“엘라임님? 왕님?”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나는 정령술의 천잰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책을 뒤적거리던 이벨리아가 깨달은 듯 손뼉을 쳤다.
“아! 소환문! 소환문을 안 외웠네! 검에는 기합이 있고 마법에는 주문이 있고 소환에는 소환문이 있는 법이지!”
큼, 큼. 비장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각오를 더하고자 눈도 꼬옥 감았다. 한참 앞에서 보았던 소환문쯤은 기억하고 있었다.
“창공과 대지, 물과 불. 모든 근원이 자리한 천칭 저편에 나 홀로 방랑하니. 영을 증거로 제시하여 감히 그대에게 동행을 청한다. 그대, 홀로 천칭을 받치는 자여.”
느낌이 온다. 왜인지 살랑 바람이 분 것도 같다. 이제 눈을 뜨면 앞에 멋들어진 정령왕 할아버지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 엣헴. 하고 물어보겠지? 한껏 기대한 이벨리아가 오른쪽 눈부터 살짝 떴다. 열어둔 창문에서는 쾌청한 바람이 불었다. 펼쳐둔 정령서 페이지의 끄트머리가 바람에 살랑 흔들렸다.
“뭐야!!”
바다 빛 두 눈이 모두 부릅떠졌다. 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엘라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뒤에서 왕의 어깨를 꾹꾹 마사지하던 늑대 형상의 상급 정령 일레스트가 화들짝 놀라 앞발을 허우적댔다. 방금 앞발의 말캉한 젤리 부분으로 누른 것이 영 별로셨나 보다.
“죄……죄송합니다!”
지레 겁먹어 고개를 조아리는 일레스트를 향해, 엘라임이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이내 소환진의 형상이 눈앞에 떠올랐다. 반색하며 당장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하였건만. 소환진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옅게 빛나다가 푸시식 가라앉았다. 제대로 소환하려는 건 줄 알고 한껏 무게를 잡으며 등장하려 했는데. 엘라임이 한껏 기대하던 선물을 눈앞에서 빼앗긴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 때가 아닌가 보군…….”
슬쩍 눈치를 보던 일레스트는 다시 앞발을 올려 어깨를 조물조물 눌렀다. 작은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엘라임. 엘라임님. 왕님. 감히 제 이름을 부르다가 한껏 무게를 잡은 목소리로 소환문을 외는 소리까지. 아이가 조금 큰 이후로는 혹여 실례가 될까 사용하지 않던 물의 거울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평화로운 방,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바람, 흔들리는 커튼, 푹신한 러그, 달콤한 코코아. 살피던 엘라임은 납득했다. 왜 소환진이 도저히 응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는지, 그 이유를 알 만도 했다. 정령을 소환함에 있어서는 일신의 자연력을 희생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상급 정령에만 이르러도 웬만한 인간의 목숨 하나 앗을 정도의 자연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왕에 이르면 적당한 자연력, 적당한 의지로는 어림도 없다. 왕을 현현 시키는 대가로 가진 자연력의 대부분을 소진하겠다는, 그것이 설령 목숨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의지. 아이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소환되어도 그만, 되지 않아도 그만. 아직은 그 정도의 의지인가.’
원하는 것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자 고개를 갸웃대다가 크게 실망해서 입술을 삐죽이며 책을 턱 덮는 모습이 비쳤다.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작게 ‘엘라임?’ 외치는 목소리가 애매한 간절함을 담았다. 약한 소환진이 재차 떠올랐다가 휙 가라앉았다. 아이를 닮은 황금빛이 사그라드는 것이 퍽 아쉬웠다. 그 잔상을 매만지며, 엘라임이 허탈함을 삼키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아니지, 아이야.”
*** 수도 전역은 사방위를 지키는 성벽과 성문으로 보호받고 있다. 수도와 그 밖의 경계선인 만큼 보통 때라면 제법 한산한 곳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북(北)문 앞.
- 와아아아!!!
흡사 거대한 태풍이 부는 것과 같은 함성이 공기를 세게 뒤흔들었다. 토벌하러 떠나는 일부 귀족들과 휘하 사병들, 황실 기사단만으로도 일대를 장악할 인원이다. 여기에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제국민들까지 합쳐지니 성문 앞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토벌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작년 초겨울이나, 겨울의 출정이 패착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따라서 3월 초, 바로 오늘이 출정일로 택해졌다. 창공에 가장 높이 휘날리는 것은 단연 황가의 깃발이나 전쟁과 토벌이라는 주제 하에서만큼은 더욱 위세를 떨치는 깃발이 있다. 제국민들이 푸른 하늘에 쨍하게 빛나는 황금빛 깃발을 가리키며 외쳤다.
“공작 각하다!”
“아르티나 가문의 깃발이다! 기사단이야!”
늘 여유롭고 가벼운 태도를 고수하는 기사단은 가문의 깃발 아래에서만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내버려도 아깝지 않을 이 깃발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아군의 희망이 되어야 하고, 적군의 두려움이 되어야 하는 그 무게를.
“각하! 각하! 부디 이번에도 제국에 승리를!”
“악마가 현현했다던데, 괜찮을까?”
“예끼, 이 사람! 각하께서 직접 출정하시는데 그깟 악마가 무슨 걱정이란 말이야!”
제국민들은 아르티나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거 들었는가? 이번 토벌전의 선봉장이 공작 각하가 아닌 소공작님이라는 걸!”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제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긴가민가했으나, 오늘 눈으로 보기에도 이 행렬의 가장 선두에 선 자는 소공작이었다.
“아직 성년이 채 되지 못하셨다던데…….”
“우리 아들과 같은 나이이신데 말이야.”
대다수 제국민들이 안전한 내성(內城)에 머무를 때 그들을 대신해 사지로 나가는 모습이 강건했다. 아르티나 가문의 일원 중 무려 셋이나 출정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다시 한번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휴고의 말을 닮은 아르칸의 흑마는 천천히 앞으로 행군했다. 그때였다.
“소공작님!!”
한 노인이 대뜸 아르칸의 말 앞으로 몸을 내던졌다. 아르칸의 군마가 놀라 앞다리를 높게 치켜들었다. 좌우에 있던 아르티나 기사 둘이 검집으로 노구를 막아냈으나, 노인은 몸부림치며 연신 아르칸을 불렀다. 말을 진정시키며, 아르칸이 손짓으로 기사들에게 놓으라고 신호했다. 적의 간자일 수도 있으나 그 경우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제국민이 맞다면 감히 출정 행렬을 막은 이유가 있을 터였다. 기사들이 놓자 노인은 곧바로 아르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붙이며 절을 올렸다.
“소공작님!”
“말하라.”
“소공작님, 제 아들이 석 달 전 분전 지역으로 출정한 기사입니다!”
“…….”
“부디, 부디 제 아들의 생사를 좀 알아봐 주십시오. 통 연락이 닿지 않아…….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아이입니다. 어릴 적 어미를 잃고 이젠 아비까지 잃은 제 손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비를 찾고 있습니다. 소공작님. 높으신 분께 감히 염치없는 부탁이나, 제발, 제발, 생사만 좀 알아봐 주십시오. 이름은 사쿰입니다! 사쿰!”
노인이 땅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함성이 멎었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아르칸은 높은 말 위에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국민들의 눈이 벌겋게 빛났다. 곁에 있던 제국민들이 덩달아 외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신호탄을 쏘아 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소공작님! 제 아들은 그 땅에서 마물의 손에 찢겨 전사했습니다! 부디 제 아들의 복수를!”
“저리 비켜 봐! 소공작님! 그 마을에 우리 아버지가 살고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를 수도로 좀 데려와 주십시오! 소공작님!”
아르칸의 눈앞이 핑 돌았다.
“소공작님! 저는 마하의 난민입니다! 제 고향을 그것들이 짓밟았습니다! 부디 마하를 되찾아주십시오!”
출정하는 이들에 대한 기대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다른 가문들은 대체 무얼 하고 매번 아르티나만 선봉에 서는 거야!”
의무를 외면한 귀족들에 대한 분노.
“왜 겨울이 다 지난 지금에서야 출정하는 거지? 더 일찍 출정했으면 내 아들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제국민을 외면한 황실에 대한 원망.
“내 자식을 해친 그것들을 찢어 죽여!!”
소중한 이들을 살해한 적들에 대한 복수. 감히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설 용기는 없는 자들. 제국의 광영보다는 일신의 안위가 중요한 자들. 출정하는 자들의 승리를 빌기보다는, 자기 땅을 지켜주길, 자신 대신 죽어주길, 자기 가족들의 복수를 해주길 염원하는 자들. 제국민들의 민낯이다. 저열했다. 참으로 비겁했다.
“……그렇군.”
그러나. 그 변변치 못한 바탕에도 불구하고. 성년을 앞두고 굳건히 선 아이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르칸의 시선이 저 멀리 선 여동생을, 어머니를, 어린 용을 담았다. 어느 하나 외면할 수 없는 바람이었고, 감정이었다.
“……그러마.”
보호를 원한다면 보호를. 복수를 원한다면 복수를. 분노를 원한다면 분노를.
“내가 그리 해주마.”
나에게도 있으니까. 사랑하는 이들이. 저들이 잃은 사랑하는 이들이, 어쩌면 내 사랑하는 이들이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