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황위에 누가 더 어울리는지2021.08.12.
제국 전역이 대대적인 토벌 준비로 한창이었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을 토벌로 여겼으나 그런 가벼움은 사라진 지 오래. 일선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속속들이 도달하는 흉보에 대응하여 바쁘게 돌아가는 제국과는 달리, 외려 비밀기지는 평온했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작은 친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조심하고 있는 탓이었다. 루드비히가 오렌지주스 통을 내려두면서 실수로 초콜릿 통을 퍽 쳐버리자, 아가레스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일별했다.
‘조심 좀 해. 우리 꼬맹이 기분 안 좋은 거 안 보여?’
‘……주우러 가고 있잖아.’
악마가 엄한 눈빛으로 일갈하는 이유가 작은 친구 때문이라면 더 할 말은 없었다. 루드비히는 저 멀리 날아간 초콜릿 통을 집어 살금살금 이벨리아의 곁에 가져다 두었다. 돗자리에 대자로 뻗어 누워 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앙 받아 물던 이벨리아는 무심결에 초콜릿 통으로 손을 뻗으며 종알종알 며칠 간의 일을 읊었다.
“나 오라버니들이랑 화해했어.”
“잘했어. 아주 무섭게 화를 냈다면서?”
“응. 저번에 내가 아주 매섭게 화를 내고 비밀기지로 와버려서 아마 오라버니들 심장이 철렁하고 쿵 했을 거야. 그래서 용서해줬어.”
매서워 봤자다. 악마와 황태자의 머릿속엔 작은 병아리가 날개를 위협적으로 활짝 편 후 눈을 사납게 올리고 삐약삐약하는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둘은 같은 의미를 담은 시선을 마주치고는 다급히 호응했다.
“아주 무서웠겠네.”
“심장이 철렁했겠어.”
이벨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떡 일어서 앉았다. 오렌지주스를 좀 따라 먹을 심산이었다. 그때.
“앗!”
바람이 스치며 세워둔 물병이 툭 쓰러졌다. 큰일을 앞두고 물병이 쓰러지면 좋지 않은 일이 닥친다는 미신이 있다. 이벨리아는 황급히 물병을 꼿꼿하게 세워두었다.
“퉤퉤퉤!”
부정적인 미신을 막아 준다는 주문까지 퉤퉤 외치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토록 별것 아닌 현상조차 부정적인 쪽으로 연관되는 것을 보아하니, 전쟁이란 것이 사람을 얼마나 좀먹는지도 알 만했다. 아가레스는 그 긴박한 퉤퉤퉤가 마냥 웃겨 피식 웃었다. 퉤퉤퉤, 입안으로 한 번 굴려보면서. 잠시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던 아이가 중얼거렸다.
“내 소중한 사람들과 악마가 전부 가버리네.”
내가 애지중지 아껴온 사람들과 악마인데 말이야. 작은 전쟁 한 번 터졌다고 한순간에 사방으로 떠나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푸른 눈동자가 허탈함을 가득 담았다. 삽시간에 어깨가 폭 내려앉은 작은 친구를 보며,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머리를 도닥였다.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지.”
홍안은 곧게 이벨리아를 담았다. 지키고자 하는 그 소중한 이가 바로 너라는 듯. 아르칸과 세드릭의 안위를 위해 출정하는 아가레스 역시 고개를 낮게 숙여 어린 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고.”
“…….”
이벨리아는 문득 속이 뜨거워졌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출정하는 모두가 그랬다. 앞장서서 달리는 이유는 영광, 작위, 전공(戰功), 그런 같잖은 사리사욕이 아니었다. 우정, 애정, 충정. 부디 당신만은 안온하길 바라는 염원의 발로였다. *** 모처럼 제국 유수의 귀족들이 넓은 회랑에 모여들었다. 황제가 주로 사용하는 알현실이 아니라, 황궁 내 가장 드넓은 회의실을 개방하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심각한 주제만큼이나 참석한 이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누군가는 진정 제국의 미래를 우려하고 있을 터였고, 누군가는 혹시 참전의 순서가 자신에게 돌아오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터였다. 상석에서 황제가 떨어뜨린 음성은 신료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내용은 모두가 익히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도 일국의 황제로부터 당하는 확인사살은 뜬소문과는 결이 달랐다.
“악마라니…….”
“최근 국지적인 토벌에서 악마가 현현한 적은 손에 꼽았는데 이것 참…….”
“몇 위의 악마랍니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웅성거리다가 누군가 물었다. 황제에게 물은 것은 아니었으나 대답은 황좌로부터 떨어졌다.
“전해지는 형상을 기록과 대조해본 결과, 19위의 괴완공(怪腕公)으로 확인되었다.”
황제의 말에 깊은 침음이 흘렀다.
“괴완공이라면…….”
“이매망량을 망라하여 다룬다는 악마 아닙니까.”
72좌의 악마 중에서도 그 위(位)에 따라 강함은 천차만별이다. 하위의 악마를 기대하였는데. 20위 내의 악마에다가 그 악명 높은 괴완공이라면 없던 용기도 사그라들 마당이다. 귀족들의 눈알이 바쁘게 돌아갔다. 혹시 내가 출정 명령을 받게 되진 않겠지? 혹시 여기 자원할 사람 없나? 아니, 상대가 19위의 악마라는데 누가 자원을 하겠어? 죽으러 제 발로 걸어가는 것이나 진배없는데. 다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와중. 침묵 가득한 회랑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단 네 명이 유일했다. 칼라일, 휴고, 카시스 후작, 데퐁트 후작. 속내야 어떻든 일선에서 제국을 이끄는 자들이다. 고위 악마의 위명에 잠식되지 않을 정도의 격과 경험은 갖추고 있었다. 오시하며 입매를 비틀어 올리던 칼라일이 최전방에서 날아온 공문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제국의 광영을 위해 출정할 자는 누구인가.”
귀족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걸렸다가는 제 목숨 부지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살아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사병을 잃을 것이 자명한 싸움. 권리에 조아리고 의무를 기피하는 자들의 시선이 천천히 한곳으로 모였다. 일견 거만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자에게로.
‘이건 항상 아르티나의 일이었는데.’
‘가주도 검의 끝을 보았다고 하는 데다가, 기사단까지 출중하니…… 당연히 아르티나가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가문이 가봤자 개죽음당할 뿐인데. 그럴 바엔 아르티나 가문이 서는 게 합당하지. 희생도 가장 줄일 수 있고 말이야.’
기실 세 부자의 출정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으나, 휴고와 세드릭의 출정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아르칸이 선봉을 맡는다는 것 역시 살롱에서의 일을 전해 듣지 못한 이들은 미처 모르는 사실이었다. 의미가 뻔한 귀족들의 시선을 보며 칼라일이 시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 친우이자 전우를 전쟁터에 밀어 넣는 저 뻔뻔한 작태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백작이 염치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백작의 영지는 올해 흉작이라 영지민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백작의 얼굴에는 번들번들한 기름때가 껴 있었다.
“송구하오나, 상대가 고위 악마라면 공작 각하 정도는 되어야 대적이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누가 총대 메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은 백작의 의견이 참으로 타당하다며 입을 모았다. 칼라일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번에 말을 이었다.
“공작이 다 뭔가.”
“예?”
“아르티나 공작가는 고위 악마가 현현한 이번 토벌전의 선봉장으로.”
그가 똑똑히 들어두라는 듯 신료들의 면면을 살폈다.
“공작이 아닌, 소공작을 내세웠다.”
“……!”
“……!”
소공작! 소리 없는 경악이 회랑을 채웠다. 고위 악마를 상대해야 하는 토벌전에 공작이 아닌, 아직 성년도 채 되지 못한 소공작이 지휘권을 잡다니.
“여기 모인 그대들이 어떻게 하면 출정에서 빠질까 고심하는 시점에, 아르티나는 가주도 아닌 소공작이 선봉장으로 자원했다는 말일세.”
칼라일은 자원이라는 두 단어에 특히 방점을 찍었다. 명백히 비꼬는 말임에도 자리에 앉은 귀족들의 마음속에는 부끄러움보다 안도감이 들어찼다. 다행이다. 아르티나가 목숨을 걸고 선봉을 맡아준다면 남은 귀족들은 물자 등으로 적당히 지원하는 시늉만 하면 되리라. 이번 차례도 넘겼다, 그런 생각이 회랑에 낮게 깔린 때였다. 누군가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폐하. 부디 소인도 참전할 수 있도록 허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작이 직접?”
황제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반문함과 동시에, 휴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리에 있는 귀족들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연금술은 확실히 강한 힘을 발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였으나, 근접전에는 큰 효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데퐁트 후작은 주로 결계석, 방어석, 약물 등을 만들어서 지원했었는데.
“분전 지역인 금기의 협곡 즈음에서 연금술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공작 각하야 마족들을 상대함에 제 도움 따위 필요로 하지 않으시겠으나, 연금술의 흔적이라면 제가 가서 직접 보는 것이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납득이 간다. 연금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당에, 흔적을 볼 줄 모르는 무인들만 우르르 몰려가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은 자명했다. 이유는 합당했다. 칼라일은 흔쾌히 허가했다. ***
“이게 말이 됩니까!”
에르트 백작은 감히 이 제국 황태자의 책상을 쾅 내리쳤다. 불경의 끝을 달리는 행동이었으나, 루드비히는 눈썹만 슬쩍 올릴 뿐 꾸짖지는 않았다.
“저번 토벌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참전하셨으면, 이번엔 마땅히 황자 전하께서 다녀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분노한 충복 앞에서 루드비히는 외려 담담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새삼.”
“하루 이틀도 아닌 일에 왜 매번 그리 태연하십니까! 하루 이틀이 아니면 분노하실 때도 좀 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저만 화나는 겁니까? 예?”
“분노하면 뭐가 달라지나.”
태평하게 깃펜을 놀리는 어린 주군을 대신하여, 에르트 백작이 쥐고 있던 편지를 퍽 내동댕이쳤다. 황비에게서 온 편지였다. 홧김에 던져버린 편지를 주워들면서, 에르트 백작은 다시 분노했다. 「네 동생은 아직 어리잖니. 누군가 참전해야 한다면 형으로서 네가 참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 착한 내 아들, 황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부디 무사히 금의환향하길.」 이번 토벌전에 명목상으로나마 황족이 하나쯤은 참전하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황비는 곧바로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달려갔다. 물론 자기 편의 귀족들과는 모두 입을 맞춰둔 후의 일이었다. 아직 에드윈은 어릴 뿐만 아니라, 황자의 참전보다야 황태자의 참전이 모양새가 훨씬 나을 거라고. 황비의 치맛바람과 황자 측의 줄을 잡은 다수 신료의 탄원이 있었다. 루드비히가 현재의 에드윈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에 북부로 쫓겨나듯 시찰 다녀온 것을 생각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루드비히는 이에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황제로서는 황태자 스스로가 싫다며 나서면 몰라도, 순응하듯 반응 없는 후계자를 내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황자가 아닌 황태자의 출정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그가 고개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비밀기지에 언제쯤 방문하면 땅 도둑 친구를 바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좋게 생각해.”
“이 상황에서요? 전하 전사하라고 온 황궁이 등을 떠미는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루드비히는 에르트 백작의 손아귀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편지를 집어 벽난로 속으로 던졌다.
“백작.”
“예!”
“내가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예?”
“나는 황제가 되고 싶어.”
“그야 당연하지요……?”
“그동안은 목숨 부지를 위해 앉아야 했던 황위라면, 이젠 지킬 것이 생겨 욕심이 생겼단 말이야.”
“…….”
“그런데, 그대도 알다시피 나에겐 지지 세력이 없지. 아르티나나 카시스와 같은 유수의 가문들은 내가 아닌 황가에 충성하고.”
곁에 놓인 체스판 위, 루드비히는 ‘킹’을 집어 손으로 굴렸다.
“데퐁트를 떠안기에는 영애를 황후로 맞이해야 할 것이니 독을 함께 삼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외에 도움이 될 가문들은 황비와 그 친정인 이세르나 백작가의 줄을 잡고 있지.”
“하지만 전하…….”
“나는 그대의 생각보다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어. 그리고 그대의 생각보다 내 처지는 처참하네.”
세간에선 평했다. 정쟁에 따른 지지 세력 하나 없이 압도적인 왕재만으로 황태자의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고. 그러나 누구도 모를 것이었다. 그 뒤 얼마나 많은 발버둥이 그를 지탱했는지. 평탄하지 않은 처지는 그대로였으나, 크게 달라진 것 하나가 있었다. 등 떠밀려 가던 그때와는 달랐다. 어쩔 수 없이 떠나던 그 길과도 달랐다. 살고자 선택했던 그 날과도 달랐다. 지킬 것이 있으니, 지키기 위한 전장에 걸어 들어가는 것조차 기꺼웠다.
“그러니 똑똑히 기억하도록 몇 번이고 다시 보여줘야지.”
검은 왕관을 쓴 킹이 허공에 던져졌다가, 이내 루드비히의 손안에 떨어졌다. 피맺힌 왕관을 홀로 움켜쥔 소년이 웃었다.
“황위에 누가 더 어울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