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2021.08.09.
“황제.”
기척 없이 등 뒤에서 스산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칼라일이 소스라치듯 몸을 떨었다. 팔꿈치로 잉크병을 밀어 작성 중이던 서류들이 모두 검게 물든 것은 덤이었다. 칼라일이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탁탁 털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 기별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악마 특성인가?”
“당연한 걸 두 번 묻는 것은 황제 특성인가.”
태연히 반문하는 악마의 음성이 퍽 얄미워 더 뭐라 하려던 황제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둠 속의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보였다. 공녀 덕분에 일견 인간에게 친화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그 근본이 잔혹하고 냉정함을 잊는다면 좋은 결과가 없음은 자명하다. 황제는 올라가려는 음성을 애써 잡아 누르고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응? 빚은 저번에 다 갚은 것으로 아는데?”
“이번 마족 토벌을 아르티나 가문의 장자가 이끈다고 들었는데.”
“……그거 아직 기밀인데 어디서- 아아, 됐다. 어디서 들었는진 뻔하고.”
손에 묻은 잉크를 휴지로 대강 닦아내며 황제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서 아껴 마지않는 아이가 걱정이 태산이라 아르칸을 출전시키지 말라 요청하러 왔는가? 그건 문제가 아니다만, 아르칸이 성인이 된 후 가질 입지가 제법 위태로울 것-.”
황제가 헛다리를 짚자 아가레스가 망설임 없이 말을 끊었다.
“됐고. 나도 따라간다.”
황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공녀를 아낀대도 설마.
“……뭘 따라가?”
“토벌.”
“……왜 따라가?”
“우리 꼬맹이 걱정 덜어주려고.”
“그대도 마족인데?”
“편 가르기는 의미 없다. 내 편은 이브뿐이라.”
“아니 그래도-.”
“내가 지금 그대 의견 묻는 것으로 보이나, 황제?”
그럼 뭔데. 그럼 왜 왔는데.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눈으로 물었다.
“예의상 통보하러 온 거다. 그댄 그냥 알고만 있으면 돼.”
예의는 얼어 죽을. 기척 없는 침입과 배려 없는 통보. 모두 충분히 예의 없다. 황제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이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폭탄선언을 하면서도 담담하고 잔잔한 저 표정이 얄미워 황제가 툭 내뱉었다.
“그대에겐 안 된 일이다만, 벌어질 국지전이 한 군데가 아니라서 말이지. 아르칸을 따라 세드릭도 참전할 것이고, 공작과 황태자 역시 또 다른 곳으로 출진할 예정이네. 공작은 걱정 안 되는가?”
“……공작을? 걱정?”
아가레스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침묵하던 칼라일이 민망한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음. 확실히 그렇군. 공작이 전사할까 걱정하느니 공작이 벽에 똥칠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 으하하핫!”
“…….”
“흠, 흠. 그대는 참 유머도 모르는군. 웃어본 적이 있긴 한가?”
“…….”
“에잉. 재미없는 악마 같으니라고. 아마 웃어본 적도 없겠지. 그 입꼬리가 그저 돌덩이처럼 그대로 굳어버렸을 것이 분명해. 입이 굳어버려서 하품은 할 수 있는지 몰라?”
아가레스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뒤돌아 걸었다. 칼라일이 황급히 덧붙였다.
“공작은 그렇다 치고, 세드릭은 걱정 안 되나?”
악마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아르칸보다도 약한 세드릭은 전쟁에서 다칠 법하다. 그럼 우리 꼬맹이가 슬퍼하겠지. 가만히 서서 생각하던 아가레스가 물었다.
“아르칸과 세드릭은 같은 곳으로 출진하나?”
“아니. 다른 곳일세.”
“같은 곳으로 붙여놔. 둘 다 내 눈앞에 둬야 우리 꼬맹이 덜 걱정하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귀찮다는 듯 손을 대충 휘저으며 대책을 내뱉는 것이 정말 딱 이벨리아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인 줄……!”
“되게 해. 아니면 내가 황위에 앉아, 되게 만들 테니.”
아가레스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다는 인사 없이 휙 하니 떠나버렸다. 황제가 죄 없는 깃펜을 악마가 사라진 방향 쪽으로 세게 던졌다.
“젠장. 일국의 황제면 뭐 하는가! 저 악마 하나 다룰 수가 없는데!”
제국군에 대악마 하나 추가요! 전례 없는 참전에 황제가 머리를 싸맸다. *** 이벨리아는 엘리시아의 방 안에 앉아 슈크림 빵을 냠 베어 물고 있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더니, 눈에는 차츰 근심이 차올랐다. 슈크림 빵을 앞에 두고는 지은 적 없는 표정이다. 이벨리아의 무릎 위에 배를 내놓고 누워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받아먹던 엔리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누나. 빵이 상했어?”
“아니!”
“그럼 슈크림이 맛없어? 내가 주방장 머리에 박치기하고 올까?”
“내가 그런 거로 이렇게 고민할 사람으로 보여?”
“응, 아니.”
이벨리아는 먹던 빵을 접시에 내동댕이치고는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섰다. 화들짝 놀란 엔리르가 몸을 비틀어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돼지처럼 빵이나 먹으면서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구!”
“어허. 누가 먹을 것을 그리 패대기치라고 가르쳤지? 음식은-?”
“-소중하다!”
엄마한테 엉덩이 맞을라. 이벨리아는 야무지게 쥐었던 주먹을 신속하게 풀고 자리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고선 내동댕이쳤던 슈크림 빵을 냉큼 집어 들어 끝까지 꼭꼭 씹어 먹었다. 이내 곁에 놓인 오렌지주스 한 잔을 시원하게 털어 넣은 후 입에 묻은 빵가루를 탁탁 털어내곤 호다닥 방으로 돌아가 외출을 준비했다.
‘다들 잘하는 것을 하러 떠나니까, 나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해.’
아무리 악마 친구가 따라간다고는 하나, 자리에 가만히 앉아 기도만 올리는 것은 이벨리아 성정에 맞지 않았다.
“가자, 카론!”
“예, 아기씨.”
“황궁에 갈 거야. 루이와 할 말이 있어.”
“모시겠습니다.”
언제부턴가 이벨리아가 외출을 명하면 카론은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 충성스러운 호위 기사에게 작은 주인이 딛는 곳은 의심할 여지 없는 옳은 길이었다. *** 개나리색 원피스를 갖추어 입고 대강 나서려던 이벨리아는 기겁하는 비비안의 손에 잡혀 옷을 갈아입고 긴 머리카락을 정리당했다. 그렇게 털이 잔뜩 뻗친 병아리에서 제국의 공녀와 같은 외관을 갖추고 가문의 마차에 오른 지 약 20분. 공작저에서 황궁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기에 황궁 입구가 보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벨리아가 마차 밖으로 상반신을 불쑥 내밀고 성문 앞 문지기들에게 당당히 외쳤다. 자그마한 손에는 커다랗게 넘치는 신분패도 내밀면서.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러 왔어요.”
황금빛 용이 날아오르는 문양, 그리고 신분패가 없더라도 아르티나 가문의 일원이라 할 수밖에 없는 황금빛 머리칼, 먼발치에서 몇 번 뵌 적 있었던 해사한 얼굴. 재빨리 확인을 마친 문지기들은 곧바로 창을 거두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경비병들도 이를테면 황실에 고용된 국가 공무원. 여느 귀족들이 황실 기사단에 하대하지 않고 경어를 사용하듯, 경비병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귀족들은 거의 지키지 않았지만. 그러니 고위 귀족의 영애쯤 되면 엣헴 거드름 피울 법도 한데, 한낱 문지기에게 그럼 수고하세요! 하며 손을 흔들어주니. 기계적으로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진심을 담아 마차 뒤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황궁 입구를 지나쳐 황족의 집무실과 처소가 모여 있는 궁에 다다라서 또 한 번.
“황태자 전하 알현하러 왔어요!”
그 안을 달려 달려 황태자궁 앞에서 다시.
“씨이. 몇 번째야. 전하 알현이요!”
반복되는 외침에 말이 점점 짧아진다. 황태자궁 안에 들어와서는 ‘전하요!’에 이르렀다. 이벨리아가 기어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다음부터는 앵무새한테 루이 보러 감이라는 말을 가르친 다음 어깨에 얹고 와야겠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 주겠습니다. 송구합니다, 공녀님.”
이벨리아를 안내하던 시종장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비위를 맞추었다. 이 작은 공녀님이 자기 주인의 목줄을 쥐고 있으니, 설령 공녀님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주인의 심사 또한 뒤틀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벨리아는 턱도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표정은 짐짓 근엄했다.
“아니에요, 특혜는 좋지 않죠. 황궁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충신의 첫걸음인걸요.”
‘이럴 수가.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이렇게 생각이 깊으실 수가!’
어린 공녀의 말에 시종장이 입을 틀어막고 감동하기를 잠깐. 말릴 틈도 없이 이벨리아가 황태자의 집무실 문을 발칵 열어젖혔다. 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면서.
“얍!”
잠깐, 방금 특혜는 좋지 않다고……?
“이브 왔다!”
황궁의 법도를 지키신다고……?
“이번 마족 토벌의 기밀인 전략을 내놓아라!”
충신의 첫걸음이라고……?
“땅 도둑 왔군. 뭘 내놓으라고? 마족 토벌 전략?”
불경의 극치를 달리는 태도에 시종장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러나 주인인 황태자 전하께서 무례한 인사와 지나친 요구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 받고 또 들어주고 계시니 더 뭐라고 말할 수도 없다. 기실 황태자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만큼 한두 번 보는 광경이 아니기도 했다. 시종장은 쉽게 현실과 타협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시립했다.
“그전에 이것부터 좀 먹어봐.”
루드비히는 이벨리아가 올 때를 대비하여 미리 공수해 둔 달콤한 코코아와 쿠키 세트를 꺼내어 무려 손수 세팅했다. 지켜보던 시종장은 또다시 경악했다. 스스로 드실 것조차 세팅하신 적 없는 귀한 몸이신데!
“전하! 그런 것은 소인에게 맡기셔야-!”
“됐다. 코코아 타는 솜씨는 자네보다는 내가 나아.”
“암요, 암요, 전하는 무려 코코아 경력 5년 차인걸요.”
“게다가 우리 땅 도둑 입맛이 워낙 까다로워서.”
“그럼요, 그럼요, 우유랑 코코아 가루의 비율은 정확히 2:1이어야 하고 위에는 마시멜로가 적지도 많지도 않게 적당히 띄워져야 하거든요.”
호로록- 커다란 잔을 작은 두 손으로 꼬옥 잡고 우아하게도 마신다. 역시 최고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공녀님을 제 주인이 뿌듯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종장은 생각했다.
‘우리 전하께서 말로만 듣던 호……호구……?!’
공녀님을 아끼시는 줄은 잘 알고 있었으나 저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시종장은 다시 한번 각 궁의 문지기들에게 공녀님을 막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며 이벨리아가 잠시 숨을 고르고 난 뒤였다.
“자, 여기 이번 토벌 전략. 아직 초안이야.”
전술이 적힌 두루마리는 군대를 직접 이끄는 사령관들에게나 하달되는 기밀사항이었으나 이벨리아에게 건네는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도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어린 친구의 전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일전에 작은 친구의 묘책으로 무사히 군량을 조달하지 않았던가.
“고마워. 아직 나는 전쟁에 따라가지 못하니까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군세가 비등하다면 승패는 전술이 좌우하고 열세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전략이라고 배웠으니까. 이벨리아는 루드비히가 준 두꺼운 두루마리를 잉차잉차 들고 루드비히의 책상과 마주 보는 작은 탁자로 가 자리를 잡았다. 장난기 넘치던 조금 전 모습과는 달리, 지도와 두루마리를 펼치고 앉은 이벨리아는 상당히 진지했다. 황금빛 머리칼을 높게 하나로 묶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바다색 눈동자는 그 너머를 보며 빛을 발했다. 끊임없이 입으로 가져다 대던 코코아와 쿠키로도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멋있다.’
고작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까불거리던 것과는 달리 깊이 집중한 그 간극이 참으로 멋있어 보인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어린 친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어두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황태자의 집무실. 루드비히도 결연한 표정으로 상소문을 펼쳤다. 앞에 앉은 작은 친구가 제국과 가족을 지키고자 조그마한 손으로 한껏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없던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 네가 편안히 머무르는 것으로 족할 제국을 만드는 황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