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네 가벼운 바람은 내 간절한 염원2021.08.05.
살롱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엘리시아는 이벨리아를 위로했다. 아르티나 가문이라면 기꺼워할 일이라고. 제국을 위해 가장 앞에서 달린다는 것은 영광된 일이라고. 우리가 칼을 들지 않으면 뒤에 선 농민들이 농기구를 들어야 할 테고, 어린아이들이 돌을 쥐어야 할 거라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과거사를 모두 들은 뒤다. 이벨리아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누군가 앞장서서 지키지 않는다면 제2의, 제3의 베르타샨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벨리아는 공작저 앞까지 마중을 나온 아르칸에게 말 그대로 돌진했다. 씩씩거리면서 쿵쿵 걸어오는 품새. 본인은 아마 본인이 코끼리만큼 위협적인 줄 알 테지만 아르칸과 기사단이 보기에는 털을 부풀린 뱁새만치 하찮아 보였다.
“오라버니!!”
“우리 아가, 잘 다녀왔어?”
뻗어오는 손을 휙 뿌리치자 아르칸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아가가 왜 이렇게 심통이 났을까? 살롱에서 누가 괴롭혔나?”
다정한 어조에도 씩씩거리며 노려보기만 하자 아르칸이 무릎을 낮추고 여동생을 폭 안았다.
“무슨 일이야, 아가? 내가 뭘 잘못했어? 응?”
답삭 안아오는 품과 따뜻한 토닥임에 단단히 따지고자 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서러움이 그득 들어찼다. 내가 걱정이 없긴 왜 없어. 험한 곳 갔다가 우리 오라버니 다치면 어떡해. 혹시라도 다시는 못 보게 되면 어떡해. 내 능력은 사실 한 개도 안 뛰어나.
“오라버니- 저, 전…… 히잉…… 저언…….”
이벨리아가 울먹임에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서 유심히 듣던 이들이 뒷말을 추측했다. 우리 아가의 마음 읽기로는 세상에 자신을 따라올 자 없다는 자신감으로.
“전……? 아, 우리 아가는 전병이 먹고 싶어서 우나 보네.”
세드릭이 태연하게 으쓱이며 주변에 시립한 하인들에게 전병을 가져오라 손짓했다.
“전……? 아, 우리 아기씨는 전설의 동물이 보고 싶으셔서 우시나 보네.”
아르티나 기사단은 전설의 동물 같은 소리를 하며 잡으러 가자! 으쌰거렸다. 이벨리아의 작은 입술이 삐죽댔다. 이 바보들이! 오랜만에 닭똥 같은 눈물을 좀 구슬피 흘려보려 했건만 그조차 영 도와주질 않는다.
“아니! 오라버니 전쟁에 나간다며!”
이벨리아가 훌쩍이며 이잉 소리쳤다. 그제야 바쁘게 전병과 전설의 동물을 찾던 입들이 일순 가라앉았다. 잠깐의 정적 후. 이내 조금 전보다 훨씬 태연한 어조들이 말을 이었다. 마치 옆 마을에 마실이라도 가는 것 마냥.
“아, 난 또 뭐라고. 우리 아기씨한테 전설의 동물을 어떻게 잡아다 드려야 하나 고민했네.”
“아. 전쟁 얘기였구나. 혹시 내가 아까 먹은 전병이 마지막이었을까 봐 조마조마했네.”
“갑자기 울어서 놀랐잖아, 우리 아가.”
왜 이렇게 다들 태평해? 왜 나만 이렇게 심각해? 우리 오라버니가 전쟁에 나간다니까? 다들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이벨리아의 눈에 다시 호수 같은 눈물이 들어찼다.
“쉬이. 우리 아가 뚝. 아르티나에게 전쟁터란 꽤 익숙한 곳이지. 우리 가문은 전쟁터에서 꽃피운 가문이니까.”
아르칸이 여동생의 등을 쓸어내리며 씨익 웃었다. 진정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웃음이었다.
“걱정해주는 건 아주 고맙지만, 우리 아가가 태어난 순간에도 나는 검을 들고 있었어. 이날을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했고.”
심지어 당사자인 오라버니까지, 다들 아무것도 아닌 듯 말하는 이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알고 있었음에도 자기만 쏙 빼놓은 것도 아주 못됐다. 사실 그게 가장 서운했다. 순둥한 눈이 사납게 올라갔다. 이벨리아가 몸을 비틀어 아르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그럼 왜 나한테는 아무도 말 안 해줬어?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가 이걸 다른 집안사람 입에서 듣게 만들어?”
‘……이런, 우리 아가 진짜 화났다.’
선봉장으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던 아르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쩌지.
“당연히 말해주려고 했지. 아가가 놀랄까 봐 맛있는 음식하고 디저트가 있을 때 예쁜 촛불을 켜놓고 조용히 말해주려고 기다린 거였어.”
“무슨 기념일이냐고! 생일이냐고! 웬 촛불이야!”
“아니, 우리는 그냥 아가가 너무 속상해하면 안 되니까…….”
진짜였다. 어떻게 전달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어리고 마음 고운 동생은 이 세상 걱정은 홀로 다 떠안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릴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잔뜩 심통 난 이벨리아에게 오라버니의 해명은 변명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씨근거리던 이벨리아는 몸을 뒤틀어 아르칸의 품에서 빠져나와 휙 등을 돌렸다. 흥!
“이브…….”
“저기, 아가야. 사실 나도 따라가는데…….”
세드릭이 어물어물 덧붙이자 이벨리아의 눈과 입이 배신감으로 크게 벌어졌다.
“어, 어딜? 설마 큰 오라버니 따라서 간다는 말은……?”
“그게, 응. 나도 이제 참관을 하러 갈 때가 되기는 했…….”
이벨리아가 세드릭의 정강이를 작은 발로 퍽 찼다. 모래가 튀기듯 간지러운 수준이었지만 여동생의 눈치를 보아하니 아파하지 않으면 더욱 심통을 낼 것 같다.
“아이고, 아야.”
세드릭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아픈 척하며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작은 오라버니마저! 다 똑같아!”
재빠르게 방으로 달리는 등 뒤에서, 아르티나 기사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엑- 우리 아기씨 화나셨다. 도련님들 때문에 화나셨다.”
이벨리아가 휙 돌아서서 발을 콩 굴렀다. 아주 위협적으로. 모랫바닥에 작은 발자국이 폭 패였다.
“너희 멍멍이들도 다 똑같다고!”
“……!”
“……!”
이벨리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제 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다 미워! 아까 살롱에서 기사단 편 괜히 들어줬다. 저것들은 나한테 이런 중요한 일도 말 안 하는데! 이벨리아는 지나치게 무거워 평소에는 들고 다니지 않는 목걸이를 돌렸다. 우리 집안에 배신자만 우글대니, 비밀기지로 도피해야 했다. *** 제 기분도 모르고 날씨만 좋다. 기분이 울적할 때는 좋은 날씨조차 얄미운 법이다. 이벨리아가 잔디밭 위에서 발을 한두 번 콩콩 굴렀다. 에잇. 에잇.
“훌쩍-.”
아까 울먹대느라 삐질 흘러나온 콧물을 미처 다 닦지 못하고 와버렸다.
‘오라버니 옷자락에라도 닦고 오는 건데.’
손수건이나 휴지가 있나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래도 다 쓰고 채워놓지 않은 것 같았다.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나뭇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막 코로 가져다 대려던 찰나.
“지지. 어릴 적이랑 변함이 없네.”
누군가 나뭇잎을 위로 휙 올려 잡아 뺐다. 알싸한 박하향. 익숙한 향이었다. 이벨리아는 고개를 위로 꺾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토끼이-.”
눈이 마주치자마자, 호선을 그리고 있던 악마의 입매가 급격하게 굳었다. 눈은 살얼음과도 같은 예기를 담았다. 작은 친구의 목소리가 울먹거리고 눈에는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유일한 친구 앞에선 늘 그렇듯 무릎은 쉽게도 땅에 닿았다.
“무슨 일이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주인을 공격한 이에게 이를 세우는 사냥개처럼, 원인을 찾아내어 목덜미를 물어 챌 것 같은 기색이었다. 다부진 몸 주위엔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 훌쩍. 이벨리아의 코가 다시 삐질 나오자 악마는 작은 숨을 뱉어 어둡게 휘도는 기운을 흩어냈다. 우선 작은 친구를 달래는 것이 급선무인 듯했다. 아가레스가 손수건을 꺼내 들고 이벨리아의 코에 가져다 댔다. 손수건 따위는 본디 소지하지 않던 물건이나 작은 친구가 워낙 무언가를 잘 흘리고 묻히니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자, 흥-.”
“흐응-.”
“옳지. 한 번 더 흥-.”
“크응-.”
잘도 푼다. 그 작은 행위도 대견하다는 듯 악마의 눈은 웃음기를 띤다.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가자 이벨리아는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 앞으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그 손길에 짜증이 가득해서 악마는 다시금 물었다. 다급히 추궁하여 원인을 알아내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부드럽게.
“무슨 일이길래 우리 꼬맹이가 이렇게 화가 났을까?”
때로 달래는 듯한 말투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법. 이벨리아의 입술이 다시금 삐죽였다.
“우리 오라버니들이-.”
“오라버니들이?”
“전쟁에에-.”
“응, 전쟁에.”
“간대애-.”
“음, 전쟁에 간대-?”
날카롭게 벼리고 있던 악마의 기운이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전쟁이라. 난세는 아니라 하더라도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은 시대. 고위 귀족들이 참전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그’ 아르티나 가문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게다가 작은 꼬마 친구 덕분에 종종 아르티나 공작저에 드나든 아가레스도 아르칸과 세드릭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검술 훈련을 하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적어도 그저 그런 전장에서 전사할 위인들은 아니다.
“근데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한 거 있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가레스가 다급히 맞장구를 쳤다.
“말을 안 했어? 그럼 안 되지.”
“그럼 안 되는데 말을 안 해서 나는 몰랐어.”
“우리 꼬맹이만 모르게 하고 나빴네.”
“응. 나빴어. 흐엉- 으아앙-.”
아가레스는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뚝 그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속상하다면 실컷 울어도 괜찮다는 듯 가만히 도닥여줄 뿐이었다. 그 배려가 따뜻했다. 다정한 친구의 품에 답삭 안겨서 눈물 찔끔 콧물 콸콸 쏟던 이벨리아는 제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진정하고 돌 위에 주저앉았다. 바다 빛 눈매는 여전히 세상 처량하게 아래로 처져 있었다. 간헐적으로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라버니들이 검술을 잘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야.”
“그렇지. 걱정이지.”
작은 친구의 우는 표정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것 중 하나였다. 발갛게 부어오른 작은 친구의 눈매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보자 어떻게 달래지 싶던 고민은 금세 날아갔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군.’
작은 친구는 가족들이 안전하길 원하고, 악마는 그걸 이뤄줄 충분한 힘이 있다.
“꼬맹이. 나 엄청 센 거 알지.”
이벨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는 겸손해야 하니까 내가 자랑은 안 했는데, 나보다 센 악마는 찾기 힘들거든.”
“……?”
그건 알지만 갑자기 왜 이래? 이벨리아의 작은 고개가 갸우뚱 넘어간다. 그를 마주하던 아가레스가 설핏 웃었다.
“내가 따라갈게.”
“……?”
“혹시 네 오라버니들이 위험해지면 내가 다 혼내줄게.”
“하지만 토끼는 마족들이랑 같은 편인데-.”
토끼가 강한 것은 잘 알았다. 과거, 카론을 패배하게 했던 붉은색 악마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온 것만 보아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토끼 역시 악마인걸. 머뭇대는 작은 친구에게 아가레스가 답했다. 망설임 없는 시원한 대답이었다.
“굳이 편 가르기를 하자면 내 편은 너밖에 없는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아서.
“하지만 토끼도 위험해질지 모르는데…….”
“그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고.”
“그치만 토끼가 다치면 나는 아주 슬플 텐데…….”
“그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돌 위에 앉은 이벨리아의 앞, 한쪽 무릎을 꿇고 위를 올려다본 채로 악마가 속삭인다.
“함께 지키게 해줘.”
달래듯, 허락해달라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
“너에게 소중한 것은 내게도 소중하니까.”
부디 밀어내지 말라는 듯 얽어매는 따스한 금빛 눈. 내려다보던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당찬 포부를 밝힌다.
“나 금방 강해질게. 금방 강해져서 내가 모두 지켜줄게.”
‘……나를 가진 것도 네 능력인데. 네 가벼운 바람은 곧 내 간절한 염원이라는 것을 왜 몰라줄까.’
목까지 차오른 말을 악마는 뱉지 않았다. 네가 너의 방식대로 강해지고 싶다면 나는 그를 도우면 그뿐. 너를 안주하게 할 권리도, 나아가게 할 권리도 감히 나에게는 없다. 원하는 방향으로 걷도록 앞을 비워주고 뒤를 막아주는 것. 그것이 긴 시간 끝에 만난 유일하고도 작은 친구를 지키는 그의 방식이었기에.
“-기대할게.”
역시. 뒤로 구속하지도, 앞으로 밀어내지도 않는 친구의 말에 아이는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