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르티나의 이름값2021.08.02.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주최자의 자리에 앉은 엘리시아가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고아한 음성을 던졌다. 기실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삼켜두었던 것이었다.
“주최자의 자리는 내 것이 아니라 내 딸, 이벨리아의 자리입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참석자들을 천천히 훑었다. 잘 들어두라는 듯.
“다만 아직 나이가 어린지라 사교계 데뷔 즈음까지는 내가 대리하도록 하지요.”
이벨리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엥. 이건 못 들었던 말인데.’
이거 뭔가 문학 읽고 토론한다는 이 모임에서 발 뺄 수 없게 된다는 말인 것 같은데. 헤롤드의 말대로 적당히 해보다가 미련 없이 발 빼려던 이벨리아는 속으로 탄식했다.
‘내…… 내 백수의 꿈……!’
황제 폐하도 어머니도 다들 내 꿈을 응원한다고 했으면서! 막상 잘 먹고 잘 놀고 싶다고 하니 스승을 붙여주질 않나, 살롱에 데려오질 않나, 방해꾼들이 따로 없다.
“그럼, 시작할까요?”
아마도 유서 깊은 제국 역사상 최초. 채 성년이 되지 못한 주최자의 탄생에 참석자들은 놀라움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빌어먹을 아르티나.’
주최자의 자리를 가장 질투하고 미워하던 상대에게 빼앗겼다. 세레스는 미처 분노를 다 삼키지 못했다. 초연한 얼굴의 제 어머니와는 정반대였다.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세레스는 아직 어릴 뿐만 아니라 후작저 안에서는 마치 왕처럼 군림하였으니까. 빼앗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 모든 걸 빼앗고도 태연한 이는 곧바로 적으로 인식된다.
‘오늘 어디 두고 보라지.’
세레스는 작은 흠이라도 잡아 이벨리아를 망신 주기 위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샅샅이 훑어내렸다. 그러다가 시선이 머리 위에 다다랐을 때. 황금빛 머리칼 위에 얹힌 머리핀을 보고는 눈을 크게 홉떴다.
‘모리안……!’
세레스가 그토록 구하고자 애썼음에도 손에 쥐지 못한 물건이다. 가닿지 못했던 보석이 저 공녀의 손엔 그리 쉽게 들어가 있다니. 그 격차가 마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잡지 못할 지위임을 내포하는 것만 같았다. 세레스는 더욱 기분이 상했다. 공녀가 하르벤타 제국의 사절단으로 다녀온 뒤 하르벤타의 황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하더니, 아마 그들로부터 얻은 물건인가 보다.
‘하르벤타의 황태녀와 황자가 공녀에게 아주 쩔쩔맨다던데.’
바로 그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공녀가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며 그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지. 세레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퍽 난제였다.
‘저 꼬맹이의 대체 어디가 특별해서? 공녀라는 지위를 빼면 별 볼 것 없는 응석받이에 불과한데.’
주최자의 자리를 빼앗긴 자신을 주변의 영애들이 모두 비웃는 것만 같았다. 세레스는 분한 마음에 속을 까맣게 태웠다. 주최자인 엘리시아가 살롱드메의 시작을 고했다. 얇지 않은 책 한 권이 이번 토론의 주제였다.
“다들 아실만한 유명한 고전이죠. 자유롭게 의견 나누도록 해요.”
늘 그렇듯이 선을 넘지 않는 분분한 의견이 오가고, 대화가 과열될 양상을 보이면 엘리시아가 중간에서 적당히 중재했다. 이벨리아는 커다란 푸른빛 눈으로 그 광경을 조용히 담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어린 영애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세레스는 아래에서 이벨리아를 올려다보며 살짝 이를 갈았다.
‘……마음에 안 들어.’
저 해사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세레스는 아주 쉬운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살롱드메, 지식을 교환하는 장. 이벨리아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알린다면 저절로 망신살이 뻗칠 것이었다. 심지어 세레스는 오늘 살롱드메를 위해서 책을 몇 번이고 탐독하지 않았던가. 저 어린 공녀 하나쯤 울상 짓게 할 질문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기대되는 마음으로 세레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공녀님.”
누군가를 특정하여 질문을 건네는 것은 자칫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 있기에 흔치 않은 일이다. 살롱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열띤 토론이 멈추고 모두가 주목하자 세레스는 한층 더 득의양양해졌다.
“이 소설은 귀족들과 평민들의 전형적인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드높은 위엄과 적당한 아량을 가지고 아랫것들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귀족의 자세죠. 특히 소설 속 피츠윌리엄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
이벨리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단정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작은 두 손. 그중 오른손 검지가 느리게 까닥였다. 엘리시아와 친분이 있는 귀부인들은 모두 눈치챘다. 어린 공녀가 고심할 때 나오는 버릇이 공작부인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침묵이 길어졌다. 세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속으로 코웃음 쳤다. 더 말을 보탤 필요도 없었다. 그저 공녀가 한 자락 대답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소문을 부풀리는 것은 호사가들의 일이니까. 참석한 귀부인들과 어린 영애들의 낯빛에도 실망한 기색이 흘렀다. 영민하다는 소문도 있었고,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진실이었나 보다. 민망해지는 분위기에 다른 귀부인이 화제를 돌리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맑은 목소리가 방을 울리는 것이 먼저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영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부끄러울 일은 아니십니다. 공녀님께서는 오늘 처음으로 살롱에 참석하셨으니까요. 시작이 늦었다면 더 노력하면 될 일…….”
“소설 속의 피츠윌리엄은 신분 외에는 아무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아요. 실력이 없는 위엄은 폭정에 불과하고, 그 뒤의 아량은 위선일 뿐인걸요.”
사실 바로 어제 엘리시아와 토론했던 내용이다. 현명한 어머니는 어린 딸의 생각도 깊이 존중했고, 귀담아들었다. 어휘력이 부족하기에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멋들어진 표현으로 정리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엘리시아의 질문은 날카로운 데가 있어, 이벨리아가 다양한 시각으로 문제를 보도록 이끌었다. 그렇기에 이벨리아는 신이 나서 자기 생각을 재잘댔더랬다. 세레스의 질문 따위. 이 제국 최고의 지장이라 불리는 자신의 어머니와 어제 토론한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공녀님. 귀족과 평민의 관계는 절대적인 수직관계입니다. 실력이 없는 위엄이라도 그들은 따라야 하며, 그 뒤의 아량에는 감읍해야 하죠.”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경작하는 농민들, 유통하는 상인들, 이 담장 너머 길거리의 모든 평민들로부터 귀족들은 세를 받지요. 매년 세금까지 바치는 마당에 없는 존경심이 절로 생겨난답니까?”
“그렇다면 귀족들이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평민들에게?”
“작게는 가정이 평화로울 수 있고, 크게는 나라가 부강하여 평온할 수 있도록. 불한당으로부터 신변과 재산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귀족들이 그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은 무궁무진하죠.”
“…….”
“대가를 건넬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평민들 등골이나 빼먹고 산다면, 그것이 기생충이지 어디 귀족인가요.”
예상과 달리 받아치는 말이 날카롭다. 논리적으로는 반박하기가 영 어려워지자 세레스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기생충이라뇨? 지금 여기 계신 다른 귀족 가문들을 모두 비난하시는 건가요?”
“이 자리 어느 가문이 이를 당연히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문은 아주 잘 알겠네요.”
천진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 생각보다 엄한 말투로 다그친다. 딱 제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는 말투에 세레스의 속은 화산이 터진 것처럼 부글거렸다. 엘리시아가 묘한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굳이 끼어들 필요도 없겠군.’
자칫 어린 딸의 위신을 깎을 만한 일이 벌어지면 나서서 막으려던 엘리시아는 소파에 더욱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자신의 딸은 이런 자리에 익숙지 않다. 화려한 얼굴 뒤 서로를 헐뜯는 신경전에 면역이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똑바로 찔러오는 창에는 쌈닭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맞서는 것이 바로 이벨리아. 저 후작영애는 한참 잘못 짚었다.
‘이 자리에서 내 딸을 망신 주고 싶었다면 제 어머니의 화술이라도 배워왔어야지.’
귀부인들의 눈빛이 흥미로 반짝였다. 오늘 살롱에서 있었던 일은 말이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수도 내 모든 귀족들에게 전해질 터였다.
“이 책에 대한 토론은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다음 책으로 넘어가 볼까요.”
엘리시아의 말에 조금 전의 책보다 조금 얇은 책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이벨리아는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가장 좋아하는 내용의 책이었다. 기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아르티나 기사단을 아끼는 이벨리아의 입장에서야 흥미로운 책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멍멍이 기사단이랑 책 속의 멋진 기사단이랑은 영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이전 책보다는 가벼운 주제다. 물 흐르듯 편안한 분위기에서 토론이 이루어졌다. 한 귀부인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감상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결국 모두 전사했다는 결말이 너무 속상해요.”
“기사들은 모름지기 주인을 위해 죽음도 불사함이 옳죠. 그게 존재 이유니까요.”
세레스가 콧대 높여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회색빛 눈은 감상을 표한 귀부인이 아니라 이벨리아를 향한 상태였다. 이전의 논쟁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나 보다. 이벨리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푸른 눈이 차가운 빛을 띠고 번뜩였다. 너 잘 걸렸다, 생쥐.
“기사들은 도구가 아니에요. 주군이 앞서 달리느라 뒤를 미처 보지 못할 때 그 등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역으로, 기사들의 앞에는 늘 주군이 있는 것이 당연하죠.”
“특이한 관점이시네요. 기사도의 제1계율이 ‘주군으로부터 그대의 서약을 신뢰받게 하라’인걸요. 공녀님의 말씀은 기사도에 어긋나는걸요.”
“기사들은 10계율이 있으나 주군을 얽매는 계율은 없죠.”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그 말은, 주군의 의무는 굳이 계율로 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백하고도 간단하다는 겁니다.”
“그게 뭐죠?”
“기사들로부터 받은 서약을 욕되게 하지 말라.”
세레스가 침묵했다. 애초에 무가의 공녀에게 기사도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기사들 앞에 나서지 않는 주군을, 위험이 생기면 기사들을 팽개치고 도망갈 주군을 모신다는 것은, 기사들에게도 모욕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르티나 가문은 무가(武家)입니다. 가문의 기사단이 왜 그리 강하다 칭송받는지 생각해보시면 제 관점이 맞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나이가 어려 표현하는 어휘는 그다지 멋들어지지 않았으나 가진 소신이 뚜렷하다는 점은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 모두가 파악했다. 상석을 올려다보는 영애들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 저 정도면 차기 사교계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동아줄로 여겨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세레스의 인상은 그와 반비례하여 어두워졌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파헤쳐보면 공녀가 그리 선망받을 이유도 없는 꼬맹이라는 것을. 영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아, 무가. 그렇죠. 역시 달라도 뭐가 다르네요.”
그래서 입이 미처 제어되지 않았다. 적어도 공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은 봐야 했다. 눈물을 흘려도 좋고.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화를 버럭 내다가 뛰쳐나가버리면 최상이었다. 세레스는 입에서 나올 말을 날카롭게 갈았다.
“이번 마족 토벌의 선봉장이 소공작님이라죠?”
아직은 대외비. 아마도 몇몇 고위 귀족들만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벌써 열여섯이 된 아르티나 가문의 장자, 아르칸이 처음으로 지휘권을 잡는 토벌이었다. 지금까지는 한 발 뒤로 빠져 배우는 역할이었다면 이번엔 가장 앞서 말을 달리는 선봉장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지 바다 빛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이벨리아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
평온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작은 가슴이 밭은 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세레스의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 들어찼다.
‘역시. 아직 공녀는 모를 줄 알았어.’
공작가 사람들이 공녀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잘 안다. 아끼기에 더욱 알리기 쉽지 않았을 사실. 아직 성인도 채 되지 못한 오라비가 검 한 자루에 기대어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
“소공작께서 비록 아직 성인이 채 되지 못하셨다고는 하나, 공녀님의 말씀대로 아르티나 가문은 ‘무가’니까요. 홀로 전쟁에 나가는 오라버니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치켜세우는 척 가시를 박는다. 아니, 가시가 아니라 대못 수준이었다.
‘이런. 이브에게 이렇게 알려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는데.’
느긋하게 지켜보던 엘리시아가 작게 혀를 찼다.
“영애가 이리 함부로 떠들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후작부인.”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후작부인이 겉으로 보기엔 진정 죄송스럽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으나 이미 충격을 받을 대로 받은 이벨리아의 감정을 구제할 길이 없다. 세레스 역시 제 어미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 마치 정말로 실언했다는 듯 한 번 더 에둘러 못을 박았다.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저는 그저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하신 나이에 대군을 이끄는 선봉장으로서 출정하신다는 것에 탄복하였을 뿐입니다. 공녀님 말씀대로 명망 높은 무가의 장자시니만큼 걱정은 없으실 것으로 생각되어서…….”
“하.”
엘리시아가 서늘히 웃으며 한 마디 일갈하려다 말고 제 딸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런 것을 배우라고 데려온 자리이니 일단은 대처를 본 후 결정할 생각이었다.
“토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미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급박하게 숨을 들이쉬는 바람에 살짝 올라선 어깨가 내려오질 않았다.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던 시선은 살짝 아래로 내려졌다.
‘어쩐지, 어쩐지. 이상했어. 요즘 평소보다 격한 훈련을 하더라니. 매일 아침 훈련이 끝나면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더니. 그게 전부 출정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어.’
오라버니의 강함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이 전쟁에 나간다고 함에야 마냥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무릎에 내려둔 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한 마디가 맴돈다.
‘마족. 마족 토벌.’
내 친구 토끼는 정말 강한데. 우리 오라버니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내 친구 토끼만큼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런데도 토끼만큼 강한 마족들하고 싸우러 가는 걸까. 기어코 아랫입술이 이에 물리고 푸른 눈에는 글썽글썽 눈물이 들어찼다. 예상치도 못한 소식을 이리 자비 없이 듣다니. 이리 아무렇지 않은 소식처럼 전달받다니.
‘그래. 오라버니 가지 말라며 추하게 울고 화내 봐. 그게 너와 아르티나에 대한 환상을 박살 낼 테니까.’
세레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아이를 향한 선망의 시선이 실망으로 바뀌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모두가 가닿지 못해 애를 태우는 공녀의 실체가 한낱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흡-.”
이벨리아가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직 어려도, 목소리가 떨려도, 막연한 두려움에 떨어도. 아르티나는 아르티나, 이벨리아는 이벨리아였다. 지배자의 천성을 타고나 자란 환경이 더욱 공고하게 한 자. 무너질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가장 먼저 집으로 갔다가 비밀기지로 가야지. 비밀기지로 가서 내 친구 토끼한테 다 털어놓으면서 울어야지. 이 자리에선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인 이벨리아가 목에 힘을 주고 선언했다.
“같이 갈 거야.”
좌중이 더 깊이 침묵한다. 이어 어린아이의 투정이라 치부한다. 그러나 곧이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음을 절감한다.
“내가 못가도 내 정령들은 함께 갈 수 있으니까.”
훌쩍- 젖은 숨을 들이마시며 하는 말이었으나 드러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저 작은 공녀의 한마디에 제국군에는 결코 작은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정령들 몇이 합세하게 되었다는 것.
“…….”
“…….”
잠시간의 침묵 뒤. 아이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글썽거렸던 눈물은 이내 말라 있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이어 턱이 평소와 같은 각도로 살짝 들어 올려진다. 끝이 짧은 하대가 자연스럽다.
“그대 말대로야, 영애. 나는 걱정하지 않아.”
푸른 눈에 가득 담긴 것은 태생이 내린 압도적인 오만함. 시린 바다 빛 눈이 세레스에게로 내려가 꽂힌다.
“아르티나의 이름값을 우습게 봐선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