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네가 일평생 딛고 설 곳2021.07.29.
일견 사람 좋은 웃음을 내걸고 있던 후작부인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사교계에 수십 년 몸담은 노련함으로 서둘러 태연함을 가장하였으나, 함께 있던 부인들 또한 잔뼈가 굵은 자들이다. 대다수는 후작부인의 진노를 능히 짐작했다. 후작부인도 그럴진대 눈앞에서 무언가를 빼앗긴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세레스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분이라니요?!”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자애로움과 온화함을 유지하는 것이 사교계의 덕목이다. 이를 지키지 못하는 부인들은 상류계급의 태를 갖추지 못했다고 손가락질 받았으며, 영애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세레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아직 가슴으로는 깨닫지 못할 나이. 세레스가 소리를 높였다. 저기는 우리 자리인데! 항상 그래왔는데!
“영애, 잘 아시다시피 살롱의 주최자는 후원금을 기준으로 정해지며-.”
“우리 가문보다 후원금을 많이 낸 가문이 있다고요? 누군데요?”
주변에 선 귀부인들이 귀족의 덕목에 반하는 세레스의 행태에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내부에서 알력다툼을 하는 것을 차치하고, 일단 같은 집단 내에 속한 자가 자신들의 격까지 떨어뜨리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최다 후원자의 가문과 후원금액은 기밀로 다뤄집니다. 주최자께서 살롱에 참석하신다면 어느 분인지 확인 가능하십니다만, 그렇지 않으신다면 달리 확인하시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게 누구냐고 묻잖아요!”
끝내 고함에 가까운 다그침이 이어졌다. 일시적으로나마 절대자로서 군림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살롱이었다. 황족도 아르티나도 출입하지 않는 곳. 그러나 주최자가 변경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마저도 누릴 수 없다는 선언. 허영을 먹고 사는 세레스에게는 잔인한 선고였다. 데퐁트 후작부인이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귀부인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 퍽 불쾌함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 좋지 않다. 후작부인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루브르 백작부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부인. 잠시 옆방에서 보지.”
백작부인이 얕게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따랐다. 세레스 역시 이를 갈다가 제 어머니의 곁으로 걸었다. 루브르 백작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살롱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기에 부득이 후작부인을 막아서기는 했지만, 그녀라고 명실상부한 세도가와 이렇게 껄끄러운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데퐁트 후작부인은 맞은편에 앉아 감히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는 백작부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백작부인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얕게 배어 나올 즈음. 후작부인은 세련된 클러치 안에 들어 있던 보석 주머니를 툭 던졌다.
“후원금을 더 내겠네. 지금.”
후작부인은 이 일을 그다지 크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뻔했다. 재력으로 붙자면 데퐁트 후작가를 넘을 가문은 없다 해도 무방했다. 이 정도 보석 주머니라면 주최자의 자리를 다시 빼앗아 올 수 있음은 자명했다.
‘적어도 우리 귀한 딸이 이 살롱 안에서 울상을 짓게 만들 수야 없지.’
보석 주머니는 후작가의 명성을 대변하듯 제법 묵직했다. 슬쩍 열어보니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그러나 주머니 안을 확인한 루브르 백작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보석들을 모두 후원하시더라도 주최자의 자리에 앉으실 수는 없습니다, 부인.”
“……지금 가진 보석은 이것이 전부이네만, 후작저에 가서 추가로 보내도록 하겠네.”
“주최 당시 후원금을 기준으로 주최자가 정해지는 것이므로, 만일 추후 변경이 있을지라도 이번 주최자는 변함이 없어야 옳습니다.”
후작부인은 장미꽃 물을 곱게 칠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명백히 규정이 있다는 데야 마구잡이로 협박할 수도 없었다. 지위는 사교계를 지배하는 데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충분한 조건은 아니었다. 사교계의 서열은 반드시 지위의 서열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교계에는 사교계만의 법칙이 있다. 무작정 지위로 찍어 누른다면 앞에서야 고개를 조아리더라도 뒤에서는 모두 칼을 겨누는 곳.
‘훗날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을 우리 딸을 위해서라도 그것은 좋지 않지.’
후작부인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과연 노련했다.
“그런가. 엄연한 법칙에 예외를 둘 수야 없지. 시간 내주어 고맙네.”
“어머니!”
어머니가 제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세레스는 직감했다. 오늘 살롱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막을 방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세게 주먹 쥔 손은 피가 돌지 않아 새하얘졌다.
‘어차피 살롱의 실권은 우리에게 있어. 누군진 몰라도 허울뿐인 상석에 앉아보라지.’
관성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 하루 주최자의 자리를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쌓아 올린 자리가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신 살롱에 얼굴을 비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해주겠어.’
세레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감히 내 자리를 빼앗은 것에게 망신을 줄 방법쯤이야.’
어려서부터 후작저 내에서 갖은 술수를 부려온 세레스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십여 가지는 능히 떠올랐다. 앳된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
“다들 거의 참석하셨는데, 아직도 주최자의 자리가 비었군요.”
“참석하지 않은 가문 중 유력한 가문이 어디죠?”
유력한 주최자로 예상했던 카시스 후작 가문도, 이세르나 백작 가문도 모두 참석해 있다.
“혹시 아르티나-.”
“아르티나 가문이야 워낙 살롱에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여태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셨는걸요.”
“그래요. 설령 참여하신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다른 가문들이 누적한 후원금 이상을 한 번에 쾌척해야 저 자리에 오르실 수 있는걸요. 아무리 아르티나라고 하더라도 그건 무리 아니겠어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추후 어떤 가문이 사교계를 휘어잡을 것인지 그 편린을 볼 수 있는 사건이었기에. 데퐁트 후작부인과 후작영애가 자리로 돌아왔음에도 조용한 속삭임들은 가실 줄을 몰랐다. 한편 주최자의 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엘리시아로부터 이미 들은 카시스 후작부인과 렐리안은 논란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내 친구, 내 영웅.’
렐리안은 단상 위에 놓인 빨간 벨벳 소파를 잔잔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 이브는 꼭 동화 속의 여왕님 같으니까, 예쁜 티아라를 쓰고 저 위에 앉으면 아주 잘 어울릴 거야.’
렐리안은 창백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살짝 입술을 물었다.
‘배워둔 마법도 곧 보여줘야지. 아마 나보다 더 기뻐해 줄 거야. 분명 놀란 표정으로 크게 손뼉을 쳐주겠지.’
작고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렐리안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선선한 웃음이 번졌다. 그를 주최자의 자리를 빼앗긴 데퐁트 후작가문에 대한 비웃음이라 곡해한 세레스는 죽일 듯 렐리안을 노려보았다. 조용히 끓어오르는 추측과 그 위에 오고 가는 날 선 시선 속에 분위기가 과열된 그때. 살롱드메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맑은 목소리가 뜨거운 분위기 위로 똑 떨어졌다.
“미안합니다. 조금 늦은 것 같군요.”
참석자 서로를 향하던 시선들이 즉각 문을 향해 돌아갔다. 시야에 꽂히는 이는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와 물빛 머리칼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명실상부 이 제국 제일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아름다움보다 스스로 쟁취한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자. 제일미(第一美)라는 수식어보단 불세출의 전략가라는 칭송이 더욱 잘 어울리는 자. 현 공작과 단둘이서 베르타샨을 해방한 이후 인마전쟁의 마지막까지 직접 전쟁을 누빈 자. 아르티나라는 뒷배경이 없더라도 ‘엘리시아’ 그 이름 넉 자만으로 이 살롱을 지배하기에 전혀 부족함 없었다. 부인들은 탄복하며 고개를 숙였고 영애들은 선망의 눈을 반짝였다. 자리를 지키던 모든 이들은 살롱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공작부인이 돌연 참석한 이유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부인의 옆에 딱 달라붙은 아이는 그저 호기심으로 참석하였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아니었기에. 외부활동이 잦지 않은 아르티나 공녀를 마주해본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 그 존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저분이 공녀님이시로군.’
‘제법 많이 자라셨는걸.’
이제 여덟 살이 되었다고 했나. 풍문으로 누군가 그 귀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을, 능력에 경애를 바치는 것을 듣기는 하였다. 하지만 소문이란 늘 진실을 부풀리는 법이니 어느 정도 과장이 보태졌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소문이 진실을 따라가지 못하였을 줄이야.’
‘……조금 더 자라시면 능히 사교계를 휘어잡으시겠어.’
굽이치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원피스는 공녀를 감히 꺾을 수 없는 화왕(花王)처럼 보이게 하기도, 감히 우러르지 않을 수 없는 태양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상상하지 못했던 자극은 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법. 자리한 모든 이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여 살롱드메는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공녀님.”
정적을 깬 것은 렐리안. 대외적으로 공녀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알려진 후작영애였다. 대내적으로 따지자면 악마, 황태자, 이제는 용까지 함께 이벨리아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두고 경합 중이었지만.
“오랜만이에요, 카시스 영애.”
사석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지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까지 그리할 수야 없다. 작은 빌미마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테니까. 렐리안은 이벨리아의 손을 마주 잡고 오늘 옷 참 예쁘다며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이벨리아 역시 당장 달려가 ‘오늘 나랑 저녁 먹을래?’라며 기웃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직 원숙하지 못한 어린 영애들은 멀리서 쭈뼛대기만 할 뿐 감히 다가와 말을 걸지 못했으나, 능란한 귀부인들은 렐리안 덕분에 풀어진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공작부인, 이리 기별 없는 참석이라니요.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셨다면 제 여식도 함께 데려왔을 텐데요!”
“공녀님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이럴 수가, 벌써 이렇게 많이 자라셨다니…….”
“공작부인,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제 여식도 공녀님과 같은 나이인데 어쩜 이리 차이가 나는지.”
“좋게 봐주어 고맙군요.”
부드러운 화답이었으나 감히 누구도 얕보지 못할 위엄이 흘렀다. 부모를 공략하려면 자식 칭찬이 답임에도, 엘리시아는 그리 들뜰 만큼 무르진 않았다.
“공작부인, 단상에 마련된 자리로 오르시지요.”
루브르 백작부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두 손바닥으로 단상 위를 가리켰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향하는 발걸음이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듯 자연스러웠다. 생애 모든 순간 포식자로 살아온 이벨리아 또한 마찬가지. 어린 영애들은 이벨리아를 흘끗대며 생각했다. 짙붉은 색 소파 위 그보다 밝은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황금빛 머리를 풀어 헤친 저 모습이 마치 당장이라도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압도적이라고. 단상 위 가장 붉은 의자. 그 앞에 선 엘리시아는 천천히 살롱 내부를 둘러보았다. 시선은 읽기 쉽다. 제아무리 감추어도 이 제국 최고의 지장(智將) 반열에 오른 엘리시아의 눈을 피할 순 없다. 경탄, 경애, 존경, 탄복. 그리고 시기, 질투, 적의, 분노. 이 자리에 서면 늘 따라붙는 감정이요, 시선이다. 익숙하다. 담담히 감내해 넘긴 엘리시아가 그녀의 어린 딸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잘 봐두렴, 내 아가.”
네가 일평생 딛고 설 곳, 바로 이 지배자의 자리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