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나 이제 살롱에 가!2021.07.22.
봄은 바야흐로 겨우내 위축되어 있던 사교 활동이 가장 왕성히 꽃피는 시기. 아르티나 공작저도 계절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아, 하녀들은 이른 아침부터 상당히 분주했다. 새로운 외출이 늘 달가운 이벨리아는 통통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 아기씨가 벌써 살롱에 출입하신다니…….”
마냥 신난 주인과는 달리 하녀들은 어딘지 안타까운 한숨을 뱉어냈다. 감히 대제국의 공녀님께 가져다 붙일 말은 아니다만, 저 다정한 아기씨가 자라는 매 순간이 아쉬웠기에.
“우리 아기씨가 어딜 가신다고?”
“설마 저 위험한 바깥세상에 나가신다고?”
“결정했다. 우리 아기씨에게 바스타드 소드를 선물로 드려야겠다.”
“이, 이, 유행에 뒤떨어진 안쓰러운 새끼. 요즘 추세는 독화살이지.”
“독화살 드려 봐라. 우리 아기씨 그걸로 자기 손이나 안 찌르시면 다행이지.”
“바스타드 소드는 어떻고. 우리 아기씨 들다가 아이코- 깔리지나 않으시면 다행이지.”
아침 수련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귀한 아기씨 어디로 외출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기사단이 검은색 무복을 입고 옆구리에는 칼을 찬 채 여느 때와 같이 티격태격 주고받았다.
“핫, 기사단 왔당!”
이벨리아는 기사단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 오늘 살롱에 가! 기사단, 난 이제 어른이야!”
덩치가 큰 그들과 최대한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폴짝 뛰는 이벨리아를 기사단은 말 그대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느새 키도 제법 자라시고, 젖살도 조금 빠지시고, 황금빛 머리칼은 등을 덮는 길이로 자라 ‘아가’보다는 ‘어린이’가 된 그들의 아기씨. 시간 위를 걷는 그 모든 걸음이 소중하여 기사들은 감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롤드가 이벨리아의 눈높이에 맞추어 한쪽 무릎을 꿇고 씨익 웃었다.
“가서 영 재미없거든 바로 나오십시오, 아기씨.”
“재미가 왜 없어?”
“살롱은 본래 문학을 읽고 토론하는 장이지요. 지금은 사교의 장이자 견제의 발판으로 변질되었지만요. 어느 쪽이든 아기씨랑 상성이 안 맞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이벨리아가 커다란 바다색 눈을 또르르 굴렸다. 평탄한 어조에 내 욕이 살짝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나 책 읽고 토론하는 거 좋아해. 나도 귀족 영애로서 자질이 충분하다고!”
뱁새처럼 몸을 한껏 부풀리며 항변하였으나 기사단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렁설렁. 아이구 그럼요, 우리 아기씨.
“우리 아가, 한번 안아주고 싶은데 몸이 더러워서 그럴 수가 없네. 잘 다녀오고, 누가 괴롭히면 오라버니한테 와서 이르고.”
오늘따라 거친 훈련을 한 듯 아르칸과 세드릭의 몸은 작은 상처들과 흙먼지, 땀으로 엉망이었다. 몸이 더럽든 말든 환하게 웃으며 안겨들려던 이벨리아의 고개가 갸웃했다. 요즘 들어 영 이상하다. 본래 오라버니들의 수련은 적당한 대련이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그런 말랑한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턱을 바짝 들어 오라버니들의 머리부터, 고개를 약간 숙여 오라버니들의 발까지. 쭈욱 훑은 이벨리아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주변을 빙빙 돌며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건 거의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온 수준인데. 오라버니들이 왜 이럴까. 심지어 같이 나간 엔리르마저 꼬질꼬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짹짹대는 여동생에게 혹여 흙먼지가 묻을까, 한 걸음 뒤로 살짝 물러나며 아르칸이 여상히 답했다.
“세드릭과 이브, 아무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맡게 되었지만, 어쨌든 차기 아르티나 공작이라면 아버지만큼은 검을 써야 할 테니까.”
“그럼 작은 오라버니는?”
“형님이 공무로 바쁘실 테니까 내가 우리 이브를 지켜줘야지.”
걱정 어린 동생의 표정만으로도 형제가 가열하게 수련할 가치는 충분했다. 적어도 그들이 곁에 있는 한 작은 여동생의 눈에서 시름 한 자락 읽히지 않도록, 그들은 세상 풍파를 모두 막아주는 오라버니가 될 의무가 있었다.
“그럼 엔리르는? 엔리르는 가장 아가니까 내가 지켜주면 되는데.”
누나의 시선이 제게로 돌아오자 엔리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냐.”
“왜?”
엔리르가 대답 없이 붉은 눈동자를 오른쪽 옆으로 도르르 굴렸다. 아직은 누나한테 알려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말해줄 수는 없지만, 다 목표가 있었다. 다 이유가 있는 수련이었다. 어린 용의 마음속에는 벌써 몽글몽글 공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자기가 엄청나게 커지고 강해져서, 누나 옆에서 알짱대는 악마도 한 발에 뻥 차버리고, 못살게 구는 황태자도 한입에 왕 물어버리는 달콤한 상상. 악마와 황태자가 네 누나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자신은 문 앞을 든든하게 지키면서 단호하게 검지를 좌우로 젓는 뿌듯한 상상.
“에헤-.”
엔리르는 소리 내어 웃으며 제 키만 한 목검을 소중히 껴안았다. *** 데퐁트 후작가의 금지옥엽 영애, 세레스는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오늘 오후에는 살롱이 개최된다. 그날은 항상 세레스가 주인공이었다. 참석하기 시작한 몇 해 전부터 변함없이 늘. 그러니 기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걸 장신구라고 가져온 거야?”
하녀가 가져온 충분히 화려한 장신구를 땅바닥에 휙 내팽개칠 뿐 하녀의 뺨을 올려붙이지 않은 것은 세레스의 기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 아이가 아직 고위 귀족을 모신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아가씨께 어울릴법한 것으로 내오지 못해?”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를 주운 어린 하녀는 새로운 장신구를 가지러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오늘은 주인의 기분이 좋아 이 정도로 넘어갔으나, 새로이 마음에 쏙 드는 장신구를 달아 드리지 못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어찌 될 것인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작은 주인은 전형적인 고위 귀족이었다. 이는 곧 그들의 주인이 사용인들을 사람이 아닌 사물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흥.”
깡마른 하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세레스는 혀를 찼다. 역시 천한 피들은 뭘 몰라도 단단히 모른다.
“저것으론 부족한 것이 당연하지 않아?”
“그럼요, 아가씨. 부족하기 짝이 없지요.”
살롱은 티파티, 무도회와 더불어 귀족 사교에서 가장 중요한 장.
“살롱은 가진 위세를 모두 뽐내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녀장이 살살 비위를 맞추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세레스는 앞에 놓인 따뜻한 홍차를 우아하게 들이켰다.
‘웬만큼 규모가 있는 무도회와 티파티는 아르티나 공작가 일원들이 시선을 다 빼앗아서 기분이 더러워.’
당연했다. 아르티나 공작 가문은 드높은 권세답게 사교의 장도 선별적으로 출입하였기에 아르티나 가문이 참석한다는 파티는 다들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안달이 날 정도였으니.
‘하지만 살롱은 다르지.’
이상하게도 아르티나 가문은 살롱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여러 추측을 내었다. 그중, 공작부인은 살롱에서 더 쌓을 지식이 없을 정도로 영민하며, 공녀는 그런 공작부인 슬하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굳이 미리부터 입지를 다지지 않아도 정상에 설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살롱은 우리 데퐁트 후작가의 지배 영역이란 말이야.’
후작부인이 마치 공작부인과도 같은 권세를 누리고, 후작영애가 공녀와 같은 허영을 채우는 자리. 그러니 세레스가 굳이 더욱 화려한 장신구를 고집할 법도 했다. 자신이 주인공인 자리에서 감히 다른 영애들이 더 빛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아가씨, 이 장신구는 어떠십니까? 대륙에 몇 없다는 붉은 다이아몬드를 세공하여 만든 머리핀입니다.”
“모리안으로 만든 장신구는 아직도 못 구한 거야?!”
“죄송합니다, 아가씨. 모리안은 하르벤타 제국에서만 아주 소량 생산이 되는 터라…….”
쳇, 세레스는 혀를 찼다. 에르카디아 제국에서는 아예 생산조차 되지 않으니 값어치 높기 이를 데 없는 모리안.
‘그것으로 세공한 장신구를 걸친다면 고귀함이 훨씬 돋보일 텐데.’
물량 자체가 없으니 돈으로 사기도 녹록지 않다. 입을 삐죽이던 세레스가 이내 턱을 높게 치켜들고 한 손을 휙 휘저었다.
“됐어. 그게 없다 해도 오늘 나보다 높이 설 자는 없으니까. 그냥 그걸로 해.”
천성이 오만한 귀족이었다. 그렇기에 세레스는 자신 위에 누군가 군림한다는 것이 참기 어려웠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는 수도 없이 생각했다. 왜 나는 공녀가 아닐까? 왜 우리 가문은 공작 가문이 아닐까? 더 나아가서, 왜 우리 가문은 황족이 아닐까. 입 밖으로 내면 곧 반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세레스는 욕심을 삼킬 줄 알게 되었다. 인내할 뿐 이해하진 못했다. 그녀는 항상 더 높은 권력에 목말랐다.
‘권력이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가장 상석에 앉은 어머니와 자신. 아래 선 자들의 선망하는 시선. 제 발언 하나하나가 가질 힘. 잘 보이고자 지위 막론하고 고개를 깊게 숙이는 복종. 곧 열릴 살롱을 생각하니 다시금 기분이 하늘 위로 둥둥 떠오른다. 세레스는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 엘리시아와 이벨리아가 외출 준비를 마칠 때 즈음 휴고가 귀환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은 시간이었으니 귀환이라기보다는 황궁에 도착했다가 아내와 딸이 보고 싶어 한달음에 돌아왔다고 함이 더 알맞으리라. 1층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휴고는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엘리시아와 이벨리아를 보고 커다랗게 눈을 떴다가, 이내 질끈 감았다.
“……둘 다 외출 금지라고 하면 화내겠지.”
제 아내와 딸은 같은 디자인, 같은 문양을 수놓은 붉은색 드레스를 맞추어 입고 있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귀중했다. 조그마한 바람만 불더라도 휙 날아가 버릴 것처럼 연약하게만 보였다.
아무도 모를 터였다. 일하다가 깃펜을 휙 던져버리고 뛰쳐나오는 바람에 모든 수행원을 당황케 만든 공작이, 아내와 딸 앞을 서성거리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그 긴 다리로 왔다 갔다 하는 아빠를 보고 이러다가 오늘 안에 출발하지 못하겠다 싶은 이벨리아가 냉큼 선수를 쳤다.
“이브 다녀오겠습니다!”
“아가, 가지 말고 아빠랑 놀까?”
“이브 다녀와서 아빠랑 놀겠습니다!”
“그럼 아빠랑 맛있는 곳으로 외출할까?”
“이브 다녀와서 아빠랑 외출하겠습니다!”
살살 구슬려 봐도 처음으로 살롱에 간다며 잔뜩 기대한 이벨리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 예쁜 아가를 어떻게 내보내지. 가다가 괴한을 만나거나, 가서 못된 것들을 만나거나, 몸이든 마음이든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어떡하지.’
엘리시아는 안절부절못하는 휴고와 그 옆에서 함께 서성이는 두 아들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았다.
‘이브가 커가면서 조금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남편과 두 아들의 아가 사랑은 나날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 방증으로 선을 잘 지키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공작이 기어이 부인들과 영애들의 친목 장소인 살롱에 들어가겠다는 선언을 하고 말았으니. 휴고가 하인을 향해 말했다.
“외출을 준비하라. 나도 간다.”
그러나 휴고의 선언은 엘리시아의 스읍- 소리와 함께 단칼에 잘려버리고 말았다.
“아뇨. 저랑 이브 둘만 다녀올 거예요. 당신은 얼른 궁으로 돌아가서 일하시고, 아르칸과 세드릭은 공부하러 올라가야지.”
“아빠는 얼른 궁으로 돌아가서 일하시고, 오라버니들은 공부하거라!”
공작저의 큰 실세가 엄하게 말하자, 작은 실세가 허리에 손을 착 얹고 삐약! 따라 외쳤다. 다 큰 황금용 하나와 덜 자란 황금용 둘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이 공작저에서 엘리시아가 허락하지 않고 이벨리아가 원하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터덜터덜 각자 궁과 방으로 향하는 세 부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벨리아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휴- 다들 저래서야 정말 큰일이야. 언제 철들는지 원.”
옆에서 엘리시아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제 딸을 바라봤다.
“왜요, 엄마?”
“너나…… 아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