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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황실의 귀보를 얻다 (84/323)

84화: 황실의 귀보를 얻다202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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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리르는 한껏 털을 부풀리고 꼬리를 세웠다. 딱 봐도 누나가 저것들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 어린 인간 둘이 누나를 바라보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그 속에 검은 꿍꿍이가 가득 찬 눈빛이었다. 언짢아진 어린 용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데퐁트 후작의 회색빛 눈이 엔리르에게 향했다.

16549740373757.jpg“이 여우는 공녀님의 반려동물입니까?”

16549740373761.jpg“가족이지요.”

16549740373764.jpg“……훗.”

서늘하게 고개를 돌리니 세레스가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16549740373764.jpg“아, 죄송해요, 공녀님. 고작 여우 새끼한테 가족이니 뭐니 하시는 게-.”

16549740373761.jpg“죄송할 것 없어요. 영애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날카로운 말에도 세레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이벨리아는 며칠 전 제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속으로 읊었다.

16549740373761.jpg‘저 상판대기 한 번만 때려봤으면 여한이 없겠네.’

16549740373757.jpg“공녀님께서 특히 아끼실 만큼, 실로 특이한 여우로군요.”

16549740373761.jpg“털빛이 아름답긴 하지요.”

16549740373757.jpg“그런 의미가 아니라, 느껴지는 기운이…….”

데퐁트 후작의 선뜩한 눈이 외알 안경 너머로 빛을 발했다.

16549740373761.jpg‘아차.’

데퐁트 후작은 연금술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 만에 하나 엔리르를 감금했던 것들이 금제탑의 연금술사들이고, 그들이 엔리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 맞다면…….

16549740373761.jpg‘후작에게 보여서 좋을 것이 없어. 자칫하면 엔리르의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다.’

후작이 엔리르 쪽으로 손을 뻗자, 이벨리아가 대번에 그를 가로막았다.

16549740373761.jpg“죄송하지만, 제 여우가 낯을 좀 가려서 말이지요.”

16549740373757.jpg“그렇다면 손을 대지 않고 가까이서 보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16549740373761.jpg“제 여우는 사냥을 돕는 아이로 키우고 있는지라. 매섭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어서요.”

이벨리아의 지령을 알아들은 엔리르가 눈치껏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16549740373761.jpg“저 이외의 사람들이 근처에 있기만 해도 이를 갈아대고.”

빠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16549740373761.jpg“때로는 순식간에 튀어 나가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하기도 하거든요.”

휙, 작은 털 뭉치가 순식간에 튀어 오르더니, 어느새 세레스의 어깨 위로 올라간 엔리르가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듯 위협했다.

16549740373764.jpg“꺄아악! 저리 가!”

우악스러운 손에 퍽 내쳐졌지만, 엔리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하게 착지한 뒤 이벨리아의 곁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렇게 경고하였음에도 후작이 가느다란 눈으로 계속해서 엔리르를 탐색하고 이벨리아가 애써 뒤로 숨기던 그때.

16549740404052.jpg“공녀.”

반가운 목소리. 이벨리아가 습관적으로 손을 올려 인사를 건네려다가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이벨리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후작 일가도 이 제국의 작은 군주를 향해 예를 갖췄다.

16549740404056.jpg“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루드비히가 마치 날 듯이 빠르게 걸어와 데퐁트 후작의 앞에 섰다. 아직 후작보다는 훨씬 작은 몸집. 그러나 이벨리아는 왠지 모르게 든든해졌다.

16549740404052.jpg“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나.”

16549740373757.jpg“공녀님의 반려동물이 제법 신기하여 여쭤보는 중이었습니다, 전하.”

16549740373764.jpg“전하, 공녀님의 반려동물이 제 목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깜짝 놀라 쓰러질 뻔하였지 뭐예요.”

후작의 말을 이어 세레스가 제 목덜미를 더듬더듬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가녀리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것이……. 이벨리아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16549740373761.jpg‘저것은 이중인격자가 틀림없다.’

아까 엔리르를 퍽 내동댕이치는 것을 내가 다 보았는데.

16549740373764.jpg“정말 무서웠어요. 어찌나 사납게 이를 드러내던지.”

16549740373761.jpg“…….”

이벨리아는 굳이 그게 아니라며 변명하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엔리르의 정체를 아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세레스는 마치 승자와도 같은 웃음을 지으며 루드비히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16549740373764.jpg“전하, 이렇게 뵌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잠시 함께 걷는 것은 어떠실까요? 아름다운 후원을 걷다 보면 놀란 마음도 진정이 될 것 같은데…….”

16549740404052.jpg“미안하지만 영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루드비히가 칼같이 거절하자, 데퐁트 후작이 대뜸 물었다.

16549740373757.jpg“외람되오나 전하, 혹시 그 선약이 공녀님과의 것인지요.”

16549740404052.jpg“그렇네만.”

후작의 표정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일그러졌다. 이내 후작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16549740373757.jpg“충심에서 드리는 간언이오니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새겨주시길 앙망합니다, 전하.”

16549740404052.jpg“무엇인가.”

16549740373757.jpg“전하와 공녀님께서는 아직 정혼자조차 없으신 몸입니다. 게다가 자연히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지위에 계시지요. 이리 사사로이 만남을 이어가시거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담을 나누시는 것은 자칫 두 분 모두에게 흠이 될 수 있음을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언이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 후작의 미간에는 근심 어린 주름이 가득했다.

16549740404052.jpg‘웃기네.’

16549740373761.jpg‘개소리.’

루드비히와 이벨리아는 슬쩍 시선을 마주치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충언으로 가장한 사심은 선을 넘었다. 관계는 제법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닌다. 친구, 연인, 군신. 황가의 일원과 아르티나 공작가의 일원이 친구 또는 군신으로서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이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 환영했지, 견제할 이유가 없는 문제였다.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 데퐁트 후작은 그저 그 모든 관계가 자신의 가문과 맺어지기를 바라며, 이벨리아와 루드비히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어 충언을 빙자한 참언(讒言)을 올리는 것이었다. 아직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후작을 보며, 이벨리아와 루드비히가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말할까? 아니, 내가 말할게. 정도의 의미를 담고.

16549740373761.jpg“후작님의 걱정은 잘 알겠으나,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16549740373757.jpg“……예?”

16549740373761.jpg“혹시 들어보셨는지요. 이번에 왕국 잔당에 의해 포위된 테르담을 해방하는 토벌전.”

16549740373757.jpg“듣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근래의 토벌전 중 가장 중요한 전투이니까요. 그것과 공녀님께서 무슨 관계가 있으신지요.”

16549740373761.jpg“그 토벌전 전략 말입니다. 제법 대단하지 않습니까?”

16549740373757.jpg“……실로 그렇긴 합니다만.”

데퐁트 후작의 대답을 들은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옆에서 루드비히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땅 도둑의 능청스러운 말재간이 꽤 유쾌했다.

16549740404052.jpg“후작도 인정하는 그 대단한 전략을 낸 것이 공녀라. 내 더 물을 것이 있어 황제 폐하의 허가를 받고 공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지.”

16549740373757.jpg“그 전략을 공녀님께서……?”

16549740373761.jpg“어머니께 배운 사소한 재주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어떻습니까. 테르담의 사활이 걸린 사담이 과연 사사롭다 할 수 있을지요.”

16549740373757.jpg“……사사롭다 할 수 없지요. 진심으로 두 분을 우려하는 마음에 그만 오해가 눈을 가렸나 봅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공녀님께도 실례를 범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세레스는 입술을 악물었다.

16549740373764.jpg‘둘이 왜 저렇게 장단이 잘 맞아?’

제까짓 게 뭔데 감히 이 제국의 지존인 황태자로부터 저런 신뢰 어린 눈빛을 받는단 말인가. 드레스 아래로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꼬리가 표독스럽게 올라갔다.

16549740373764.jpg‘공녀는 단지 이 제국에서 가장 위세 높은 가문의 여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서고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걸어가는 루드비히와 이벨리아의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16549740373764.jpg‘내가 공작 영애가 되면, 아니, 공녀가 더는 공녀가 아니게 되면, 그러면 저 자리는 내 차지야.’

지위가 곧 기준이요, 가문이 곧 세상인 세레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16549740373761.jpg“운디네!”

더 이상 회색빛 먼지 덩어리들이 보이지 않자 이벨리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운디네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16549740489259.jpg[계약자!]

16549740373761.jpg“나 여기 손 좀 박박 닦아줘. 물 잔뜩 뿌려서.”

16549740489259.jpg[왜? 똥 만졌어?]

16549740373761.jpg“똥이 내 손을 만졌어.”

데퐁트 영식인 리카드가 손을 잡아채서 입술을 문대지 않았던가. 지지도 이런 지지가 없다. 그 뜨끈한 숨결을 지워내고 싶었다. 운디네가 손을 깨끗하게 닦아주자, 옆에서 손수건을 들고 대기하던 루드비히가 군말 없이 물기를 없애주었다.

16549740373761.jpg“근데 식량 도둑, 업무 중이라며?”

16549740404052.jpg“응. 아니.”

냉큼 자백하던 루드비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바꿨다. 방에서 홀로 서류와 씨름 중인 이크리안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다.

16549740373761.jpg“응, 아니?”

이벨리아가 되물으며 의아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16549740404052.jpg“응, 아니라는 소리지. 쉬는 시간이야.”

16549740373761.jpg“언제까지?”

16549740404052.jpg“내일 아침까지.”

오늘 받아야 하는 서류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에르트 백작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소리였다.

16549740404052.jpg“오늘은 어디 구경하고 싶어?”

16549740373761.jpg“이제 거의 다 봤는데! 내가 안 본 곳 없어?”

어릴 적부터 종종 드나드는 바람에 웬만한 곳은 다 구경하긴 했다. 루드비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없이 앞장섰다.

16549740373761.jpg“어디 가는데?”

16549740404052.jpg“네가 좋아할 만한 곳.”

한동안 걷던 루드비히가 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거대한 문 앞에 서서 엔리르를 슬쩍 돌아봤다.

16549740404052.jpg“용.”

16549740544702.jpg“왜.”

16549740404052.jpg“너 도둑질 하면 감옥에 잡혀간다.”

16549740544702.jpg“용은 도둑질 안 해.”

불과 며칠 전에 휴고의 펜던트를 물어가다가 딱 걸려서 엉덩이를 맞은 용의 발언은 참 신빙성 없었다. 그러나 엔리르는 애써 흥 콧방귀를 꼈다. 루드비히가 피를 한 방울 내서 문 앞에 놓인 작은 제단에 흘리자, 사람의 힘으로는 밀 수 없는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끼이익.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문 안쪽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입이 떡 벌어지고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16549740373761.jpg“이게……!”

16549740544702.jpg“와아…….”

원하던 반응이었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돌린 뒤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얼마 전에 악마 자식이 멋들어진 저택을 세워 재력을 과시했다는 것을 들은 참이었다. 악마의 재력에 소중한 친구가 홀랑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루드비히는 나도 이만큼 재력이 있다, 이런 재력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친구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16549740404052.jpg“마음껏 구경해. 황실의 보물창고야.”

자본주의에 홀린 용이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가장 화려한 왕관 앞에 가서 통통 튀었다.

16549740544702.jpg“……나 위대한 용 안 할 테니까 이거 하나만 가져가도 돼?”

16549740404052.jpg“안 돼.”

16549740373761.jpg“세상에…… 여기도 저기도 다 반짝반짝하잖아.”

황금빛의 향연에 아찔해진 이벨리아가 어질어질한 눈을 두 손으로 덮어 가렸다.

16549740404052.jpg“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 내가 황제가 되자마자 모두 줄게.”

엔리르가 루드비히의 머리 위에 납작 붙어서 앞발을 내려 이마를 톡톡 쳤다.

16549740544702.jpg“황태자, 황태자.”

16549740404052.jpg“왜.”

16549740544702.jpg“이게 다 황태자 거야?”

16549740404052.jpg“내가 황위를 이으면.”

엔리르의 날개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나만 없어. 나만 보물 없어…… 중얼거리는 것이 제법 큰 충격에 빠진 듯했다. 루드비히는 제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엔리르를 들어내 바닥에 대충 던져두었다. 한편 연신 두리번거리던 이벨리아는 어느 보관함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걸어가 물었다.

16549740404052.jpg“마음에 드는 게 있어?”

16549740373761.jpg“이거 정말 예쁘다…….”

목걸이와 팔찌가 세트인 것처럼 보관함에 함께 놓여 있었다. 주변에 더 화려한 보석들이 널려 있었지만, 아무 특징 없이 그저 흰빛으로 시리게 반짝이는 이것이 왜인지 시선을 잡아끌었다.

16549740404052.jpg“땅 도둑, 영 보는 눈이 없네.”

16549740373761.jpg“엥?”

16549740404052.jpg“여기 있는 황실의 귀보(貴寶)들은 모두 가치가 있기는 한데, 그 가치란 것이 금전적인 가치라기보다는 어떤 힘을 담고 있어서 그런 것들이거든. 예를 들자면, 이능이 있는 마도구라던가.”

16549740373761.jpg“그런데?”

16549740404052.jpg“그래서 여기 놓인 다른 보물들은 모두 오랜 유물일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이능들을 가지고 있지. 딱 네가 본 보물만 빼고.”

16549740373761.jpg“뭐야, 이건 아무런 능력도 없어?”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기기는 참으로 영험하게 생겼는데. 그냥 예쁜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건가?

16549740404052.jpg“전혀 없어. 구전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있다고는 하던데, 워낙 추상적인 데다가 단 한 번도 능력이 발현된 적 없으니, 와전된 것이 분명하지.”

16549740373761.jpg“그래도 이게 가장 마음에 드는데……. 이름도 멋있고.”

보석함 앞에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보석의 명칭이 적혀 있었다. 죄업의 해방. 이름을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단번에 말했다.

16549740404052.jpg“이름만 봐도 쓸 데가 없잖아. 인간사 누구나 짓는 죄업을 누가 해방해 줄 것이며, 해방해서 뭘 어쩌게.”

16549740373761.jpg“……그렇긴 하네.”

바로 좌우에 놓인 보물들의 아래에는 이능을 짐작게 하는 직관적인 이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보석이 예쁜 것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점은 더 볼 것도 없이 뻔했다. 그래도 이벨리아는 홀린 듯 보석함을 잡고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맑은 흰빛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16549740373761.jpg“그래도 이게 가장 예뻐.”

정신없이 파닥대며 날아다니는 엔리르의 날개를 턱 잡으며, 루드비히는 이벨리아의 마음을 빼앗은 목걸이와 팔찌를 잘 눈여겨 봐두었다. 사실 이벨리아가 그 어느 것을 마음에 들어 하든,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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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늦은 밤, 루드비히는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부자지간이면서도 일국의 황제와 황태자라는 지위 때문에, 이리 사적인 시간에는 발길을 끊은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그러니 황제가 놀란 것도 당연지사였다.

16549740625107.jpg“황태자, 이 시간에 짐의 집무실에 방문을 다 하다니. 무슨 일이냐.”

16549740404052.jpg“아버지. 사적으로 요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폐하, 또는 부황 폐하라고만 불렀지, 아버지라는 호칭은 영 쓴 적 없던 조숙한 아이였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칼라일은 살짝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황후가 살아 있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감격이었다.

16549740625107.jpg“무엇이든 말해보거라!”

16549740404052.jpg“황실의 귀보 하나를 공녀에게 주고 싶습니다.”

16549740625107.jpg“……귀보를?”

16549740404052.jpg“예.”

16549740625107.jpg“그것은 좀…….”

16549740404052.jpg“어렵겠습니까?”

16549740625107.jpg“아무래도 오래도록 황실의 귀보였던 물건이니……. 이능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가 없고.”

이러실 줄 알았다. 모르고 온 것은 아니었다. 루드비히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폭탄선언을 했다.

16549740404052.jpg“파업하겠습니다.”

16549740625107.jpg“뭐라?”

16549740404052.jpg“저 내일부터 황태자 업무 안 하렵니다. 폐하.”

16549740625107.jpg“아니, 아까는 아버지라 불러놓고!”

황태자의 파업보다는 호칭이 더 큰 문제였다. 칼라일이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었다. 소원했던 아이가 무려 아버지라 불러주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들을지 모르는 말인데. 귀신같이 이를 알아챈 루드비히가 눈을 번뜩였다. 루드비히는 은근히 폐하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16549740404052.jpg“폐하, 소자는 이만 폐하의 집무실에서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평안한 밤 되시길, 폐하.”

미련 없이 휙 돌아서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다급해진 황제가 외쳤다.

16549740625107.jpg“좋다! 주마! 준다고!”

루드비히가 황제를 다시 마주하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친구가 원하던 선물을 줄 수 있게 되었음에 홍안이 맑게 반짝였다.

16549740404052.jpg“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니, 잠깐. 무슨 귀보인지 알지도 못하고 냉큼 약조를 해버렸다. 조용히 닫히는 문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칼라일이 입을 뻐끔댔다. 저, 저, 내가 호랑이를 낳은 줄 알았더니만 여우를 낳았어! *** 이벨리아의 여덟 번째 생일. 공작저에는 황실의 문양이 정교하게 음각된 화려한 상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황제를 지척에서 보필하는 시종장이 직접 이벨리아의 앞에서 상자를 열어 보였다. 별 특색 없이 그저 흰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와 팔찌가 놓여 있었다.

16549740655723.jpg“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고르신 공녀님의 선물입니다. 황실의 귀보 중 하나이나, 황제 폐하께서도 기쁘게 허하셨습니다.”

황실의 귀보를 선물로 하사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아르티나 기사단이 역시 우리 아기씨 대단하시다며 근처로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16549740373761.jpg‘그때 봤던 그 보석이네!’

환하게 웃은 이벨리아가 상자 옆에 놓인 편지지를 펴 보았다. 딱 루드비히를 닮은 정갈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네가 질 그 어떤 죄업이라도 이것이 대신 떠안기를. 생일 축하해, 나의 유일한 벗. - 너의 식량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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