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바알의 부재2021.07.12.
지금은 감히 그 누구도 데퐁트 후작의 앞에서 금제탑을 운운하지 않는다. 오래간만에 듣는 직언에 당황할 법함에도, 후작은 긴 고민 없이 답했다.
“모든 연금술의 뿌리는 금제탑이니 그렇게 오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하지만,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각하.”
잠시의 침묵. 미미하게 위로 솟아 있던 후작의 입꼬리가 돌연 아래로 내려갔다.
“과거 본질을 잃은 금제탑에 제가 얼마나 분노하였는지, 인마전쟁에서 낱낱이 드러난 실상에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각하는 아시지 않습니까.”
입매를 한 번 쓸어올린 후작이, 휴고에게 바투 붙어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이 말했다.
“대군을 이끌고 금제탑을 토벌한 것이 바로 접니다. 금제탑을 짓밟고, 불을 지르고, 연금술사들을 끌어내 목을 치고, 그 목들을 폐하 앞에 진상한 것이 바로 저란 말입니다, 각하.”
후작의 손가락이 마치 그날로 되돌아간 것처럼 살짝 경련했다.
“각하께서 마족들과 혈전을 벌이시는 동안, 저는 제 친우의 피를, 스승의 피를 이 손에 묻히고 돌아왔단 말입니다.”
휴고의 금안이 진위를 판단하듯 번뜩였다. 크게 뜨인 후작의 눈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하나의 군대가 모두 목격자이기도 했고. 그들의 진술은 후작의 말과 모두 일치했다. 후작이 금제탑을 토벌했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
“제국 모두가 아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감히 누구도 제 앞에서 금제탑을 운운하지 않음은 익히 아실 겁니다.”
“…….”
“전 그들의 연금술을 따르지 않습니다. 혹 결계석의 출처를 묻는 목적이시라면, 그 점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지요.”
휴고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북부에 맞닿은 금기의 협곡에 금제탑 출신 연금술사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건가.’
명민한 눈으로 표정과 몸짓을 살피던 휴고가 후작을 지나치며 서늘하게 충고했다.
“그대의 확답이 앞으로도 변함없기를 바라지.”
*** 마계는 제법 평화로웠다. 지금 제3 악마 밧사고의 눈앞에서 잔혹한 순위 결정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평화로운 축에 속했다. 일부 일족이 다른 일족을 잡아 삼키고자 일어나는 혈투, 하위 악마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신청하는 결투, 그것들은 마계의 일상이나 다름없었었으니까. 72위 악마와 65위 악마의 악에 받친 전투는 마왕의 옥좌 양옆에 선 이들에게는 별 감흥 없는 이벤트 중 하나였다.
“승패가 결정되었군. 이긴 쪽이…….”
제4 악마 가마긴이 황망한 표정으로 밧사고를 돌아보자, 밧사고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지금 서 있는 쪽이 72위인지 65위인지를 물으려는 거라면 관둬. 내가 알 리 없잖아.”
가마긴이 피투성이로 서 있는 악마에게 턱짓했다.
“그렇다는군. 넌 몇 위냐?”
“72위였습니다.”
“이젠 네가 65위다. 나가봐.”
순위 결정전이 치러지는 거대한 공동. 승자는 두 발로 걸어서 문을 나갔고, 패자는 시체가 되어 끌려나갔다. 청소부라 불리는 집행자들에 의해 운반되는 시체를 보며 밧사고가 안타깝다는 듯 한탄했다.
“왜 나한텐 아무도 결정전을 신청하지 않을까? 제대로 몸 풀어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데.”
“내가 3위 자리 한 번 탐내보길 원하나?”
키득 키득, 상당히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밧사고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밧사고의 고유 능력은 예언. 인간계에서는 예언의 귀공자라는 예명으로도 유명했다. 밧사고의 어두운 동공 깊숙한 곳이 번쩍 빛을 발했다.
“내가 예언 하나 할까?”
“안 궁금한데.”
“딱 2분 만에 죽을 거야.”
“네가?”
“네가.”
긴 미래는 보지 못하지만 짧은 미래에 대한 내 예언은 제법 정확하지. 밧사고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비어 있는 왕좌를 손으로 쓸었다.
“우리 폐하 보고 싶다-!”
그러다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왕좌 옆에 꿇어앉아 팔걸이에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요즘 너무 자리를 자주 비우셔. 기다리는 수하 속 타는 건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꽤 많은 곳을 다녀오시는 것 같던데.”
“고유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실 줄은 몰랐지 뭐야. 역대 그 어느 왕도 생각지 못했을걸.”
“그런 고유 능력을 지닌 것도 그분 하나시니 당연하지.”
밧사고가 왕좌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일견 왕좌에 앉은 자를 잡아먹으려는 사냥개 같은 모양새. 그러나 밧사고가 고위 악마 중에서도 비견할 데 없는 충성을 바치고 그 대가로 가장 견고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내가 예언 하나 할까?”
“아니.”
“할래. 왕께서 몇 번 더 다녀오시면 동(東)마계의 지배자는 목이 떨어질걸!”
마치 근엄한 장군처럼 팔짱을 끼고 단단하게 서 있던 가마긴이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
“그렇지 않아도 마계의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앉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 왕께서 즉위하실 때에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지. 건방져.”
“폐하의 고유 능력이 아니었다면 처리도 난감할 뻔했는데. 역시 우리 폐하야!”
자부심에 뿌듯해지던 밧사고의 얼굴이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뵙고 싶은데, 예언으로 아무리 엿봐도 아직 오실 기미가 없네. 앗, 먼지!”
밧사고가 옷소매로 왕좌를 뽀득뽀득 닦기 시작했다.
“가마긴. 나중에 왕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왕좌를 뽀득뽀득 닦았다고 꼭 말씀드려. 나 없는 곳에서.”
“…….”
“가마긴. 또 왕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얼마나 뵙고 싶어 했는지도 꼭 말씀드리고.”
“…….”
“응?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예언 하나 할까? 지금 대답하지 않는다면 2분 만에 네 목이 바닥으로…….”
“됐다. 그만해. 잘 전달 드릴 테니까. 네가 없는 곳에서.”
“좋아! 그러면 왕께서는 나를 더 귀애해주시겠지!”
희열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밧사고는 왕좌를 정성스러운 손길로 닦아냈다. *** 마계의 동쪽 영역. 의도한 적 없고 욕심도 없으나 존재하다 보니 자연히 영토의 주인이 되어버린 아가레스는 앞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수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여기 있나.”
“제가 주군 곁에 있지 그러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택은.”
“……옷소매로 창틀 먼지까지 뽀득뽀득 닦고 왔습니다.”
땅콩 때문에 별걸 다 한다. 마르바스가 분한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길 이토록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에 만나면 그 빛나는 머리를 꼭 한 번 쥐어박을 테다.’
“내일도 가서 옷소매로 바닥 먼지까지 잘 닦아라.”
“……예, 예.”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기어이 축객령을 받고서야 주군의 집무실로 들어온 목적을 상기해낸 마르바스가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주군. 주군. 요즘 영 이상합니다.”
“뭐가.”
“바알 말입니다.”
마왕에 대한 정보는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나 그냥 흘려넘기기에는 어딘지 찝찝하기는 했다. 아가레스가 더 말해보라는 듯 바삐 서명하고 있던 깃펜을 내려두었다.
“요즘 상당히 자주 자리를 비운다더군요. 인간계에 나간 것도 아닌 것 같고, 마계에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붙여둔 눈들이 있지 않나. 뭐라던가.”
“그것이, 바알의 고유 능력이 이동 아닙니까, 주군. 이리저리 휙휙 사라져버리는 통에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방도가 없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능력 없는 것들을 길렀나.”
아가레스의 음성이 서늘해지자 마르바스가 곧바로 송구하다는 듯 부복했다. 냉엄한 시선이 꿇어앉은 수하의 위에 머물다가 떨어졌다. 인간계에도 없고, 마계에도 없다라……. 마왕의 자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이니 왕좌를 싸고돌아도 모자랄 터인데.
“혹시 다른 차원이라도 가서 놀고 있는 걸까요, 주군?”
악마들은 차원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 정설. 천성이 지배를 탐하는 악마들을 타 차원으로 이동하게 두어서야, 무고한 희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에 당연한 제재였다. 아가레스는 마르바스로부터 빼앗은 레몬 사탕 두 알을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바알의 고유 능력이 차원의 이동에까지 미치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알로서는 이미 정상의 자리에서 지배하고 있는 이 마계를 두고 다른 차원을 휘젓고 다닐 이유가 없다.
‘아무 이유 없이 나돌아다닐 리가 없을 텐데.’
어렴풋하게 그려지면서도 영 잡히지 않는 답에 아가레스가 답답하다는 듯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었다.
‘대체 뭐지.’
그러기를 한참. 고심하던 아가레스의 입매에 순간 비소가 걸렸다. 이를 본 마르바스가 곧바로 두 팔로 제 얼굴을 감싸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주군? 무섭게 왜 갑자기 웃으십니까……?”
아가레스로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변화가 너무도 확실하지 않은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하들이 바알에 관한 것을 보고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무감정하게 넘겨버렸을 그였다. 설령 바알이 그의 목을 베러 오고 있다는 보고라고 하더라도. 굴레 또는 멍에나 별반 다름없던 삶이었으니, 바알이 계략으로 그를 위험에 빠뜨리면 흥미로 웃었을 터이고, 무력으로 그를 압도하면 해방감으로 기꺼이 숨통을 내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바알의 일거수일투족에 과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젠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한때 하룻강아지 같았던 마왕은 이제 제법 대단한 지배력을 지니게 되었다. 지배하는 힘이 곧 일신의 힘이 되는 마족. 마왕의 능력을 덮어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하는 이야기였으나, 만에 하나라도 바알의 세력이 그의 어린 친구에게 티끌만큼의 위협이라도 가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가레스는 긴 생 처음으로 다른 악마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아가, 바알과 대적하다가 자신이 소멸하는 일도 없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착한 우리 꼬맹이는 아주 슬퍼할 테니까.’
아가레스는 긴 생 처음으로 자기 목숨 소중한 줄도 알게 되었다. 모시는 주군의 태도 변화를 느낀 것은 마르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주군 눈빛이 달라지셨다!’
마르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가레스에게 종알거렸다. 흡사 둘도 없을 일을 목격한 자의 모양새로.
“맙소사, 주군. 웬일로 제 보고에 그리 관심을 다 기울여 주신답니까? 그동안은 바알이 뭘 했다고 해도 일절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서?”
“관심을 기울일 때도 된 것 같아서.”
무심한 어조에도 마르바스는 아가레스의 책상 쪽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디면서 환하게 웃었다.
“인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실 그동안 제가 주군께 보고를 드리나, 벽에다가 보고를 드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
“제가 집에 돌아가서 벽을 주군이라 생각하고 보고를 읊으니, 거 참 신기하게도 똑같더군요!”
“…….”
“주군께서 벽만큼이나 반응이 없으셨다- 이 말이지요!”
“벽에 대고 이리 촐싹거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벽보다 내가 대하기 쉬운가.”
과하게 신이 나서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 마르바스가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고 하면 저를 벽에 박아버리실 거잖아요.”
“벽과는 달리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
마르바스가 큼, 큼, 헛기침하며 주제를 돌렸다.
“여하간, 주군께서도 약간 신경이 쓰이기는 하시는 거지요?”
“신경이 쓰이긴 하지.”
“조금은 걱정도 되시고요?”
“걱정?”
그딴 말랑한 감정은 무슨. 비웃으려던 아가레스는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멈춰 세웠다. 걱정. 걱정. 지나치게 생소해서 반사적으로 부정하긴 했으나, 생각해보니 맞는 것도 같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바알이 혹시 그의 눈을 피해 작은 꼬맹이에게 해를 가할까 불안하고 신경 쓰였다.
‘이게 바로 걱정이로군.’
새로운 감정을 습득한 아가레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맞는 것 같다.”
“역시, 주군께서도 걱정하고 계셨군요.”
마르바스가 돌연 감동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아가레스가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동시에 마르바스 또한 생략된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이브를.”
“저를.”
침묵이 흘렀다. 아가레스와 마르바스가 다시 한번 동시에 반문했다.
“……너를?”
“……그 땅콩을?”
아가레스가 둘도 없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눈썹을 살짝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를 왜.”
“그럼 주군께서 그 땅콩은 왜요!”
마르바스의 동공이 질투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머릿속에 통통한 볼로 타파스를 오물오물 삼키던 이벨리아가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얄밉다. 얄밉기 짝이 없다. 오랜 기간 모셔온 주군의 총애를 한순간에 빼앗긴 악마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
‘다음에 만나면 팔을 그냥…….’
아니, 잠깐.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아직 어린 인간인데.
‘그럼 다음에 만나면 발목을 확…….’
아니, 잠깐. 이것도 너무하지. 레몬 사탕도 줬는데. 그것도 두 개나.
‘그렇다면 다음에 만나면 딱밤을…….’
아니, 잠깐. 내 손가락은 인간 몸에 구멍 내기 딱 좋은데. 그 땅콩은 좁쌀만 하니까 이건 좀 위험하지. 잔혹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는 대악마는 작은 땅콩에게 알맞은 복수를 하기 위해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잔인하고 무서운 악마 체면이 있지. 주군의 총애를 모두 빼앗기고도 가만둘 수는 없다.’
매서운 눈을 또르르 움직이던 마르바스는 이윽고 결심했다.
‘좋아. 다음에 만나면 그 돼지 같은 볼때기를 쭉 잡아 늘여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