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 땅콩 강적이군2021.06.24.
경고를 준 이후에도 아르티나 기사단과 자신의 수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분명 그의 시선을 피해 또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르티나 기사단은 그의 소속이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 군말 없이 잘 따르는 마르바스는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날 잡아서 제대로 족치던가 해야지.’
오늘은 꼬맹이의 기분이 우선이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아가레스는 애써 무시하며 다음 방의 문을 열었다. 새콤한 포도 향이 코를 찔렀다.
“여긴 와인 창고. 물론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혹시 네가 와인을 즐기는 어른이 될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몰라 준비한 방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부족한 것은 없었으면 해서. 나중에 그의 친구가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했을 때, 준비된 것이 없어 내주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속상한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또 언젠가 그의 친구가 원한다면 종류별로 천천히 따라 시중을 들어주며 취향을 찾아주고 싶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까마득한 천장까지 채워둔 와인 보관함에는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는 귀한 와인들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헉.”
“여긴 천국인가.”
아르티나 기사단 내 대표 주당 알렉과 헤롤드의 눈이 번쩍 불을 뿜었다. 그들이 마르바스의 어깨를 밀치고 앞으로 슬슬 걸어갔다.
“이거…… 설마…… 네 오블리 토니 포트?”
“이거 대륙에 다섯 병밖에 없는 건데!”
“악마. 이거 한 모금만 먹어보자. 응?”
“내가 방금 한 말은 귓등으로 들었나. 우리 꼬맹이 다 크면 줄 거라니까.”
“아니. 우리 아기씨는 와인 안 좋아하실 거야. 내가 알아. 와인은 쓰고 텁텁하잖아. 우리 아기씨는 단것을 좋아하신다니까. 어차피 안 드실 거 미리 한 입만 먹어보자. 딱 한 입만! 아끼다 똥 돼!”
알렉이 아가레스의 소매를 꽉 붙들었다. 아가레스가 질색하며 팔을 털어냈다.
“질척대지 마라.”
“아아- 형니임!”
“그래! 우리 아기씨 구해줬던 그날부터 늘 형님이었지! 형님!”
진한 보랏빛 마기가 불쾌한 기분을 대변하듯 심상치 않게 일렁였다. 제 몸에 닿은 헤롤드와 알렉의 손을 당장이라도 쳐낼 것만 같았다. 한편 헤롤드와 알렉은 일전에 아가레스가 날린 마기가 아르티나 공작저의 벽 한쪽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죄송.”
“손 뗐음.”
혼신의 애교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두 기사가 방향을 바꿔 이벨리아에게 간청했다.
“아기씨. 나중에 어른이 되셔서 이 창고를 여시게 되면 저희도 꼭 불러주셔야 합니다?”
“저 악마랑 단둘이 와인을 드시게 둘 순 없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고요.”
분명 기사도 중에는 ‘음주 가무에 현혹되는 것을 경멸하라’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과히 현혹된 것을 보아하니 우리 기사단은 기사도를 밥 말아 먹었나 보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와인 창고의 문을 닫아걸었다. 설령 다시 열게 되더라도 저것들을 부를 마음은 일절 없었다.
‘내가 뱀술 때부터 알아봤어.’
*** 2층이 용도에 따른 각종 방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3층은 모두 이벨리아의 개인 방이었다.
“여기는 네 방.”
“저기도 네 방이고.”
“아. 여기도.”
“내 방이 왜 이렇게 많아?”
얼떨떨한 이벨리아가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간결했다.
“테마가 다르니 기분에 따라 골라 써.”
“…….”
“왜. 부족한 게 있나? 방을 몇 개 더 늘려 줄까?”
“……행여라도 그러지 마.”
내가 지금 친구 집에 집들이를 온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잠에 빠져 꿈속에 온 걸까. 방 하나하나가 상상을 뛰어넘어 현실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벨리아는 한참을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멍한 기분에 마음속으로 읊조리던 의식의 흐름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으나,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 친구 토끼는 거지인 줄 알았는데.”
“나도. 비밀기지에서 맨날 빈둥대길래 거지인 줄 알았는데.”
엔리르가 파닥파닥 날아 쫓아다니며 답했다.
“루이네 집보다 훨씬 예쁘다.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악마는 있고.”
“나도 예쁜 집을 지어서 누나한테 선물할게.”
그렇게 하염없이 돌아다니다가 마르바스를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무례한 감상을 내뱉기도 했다.
“잉, 악마 잔디 머리 색깔이 이상해!”
“저게!”
*** 저택에는 너른 연무장도 갖추어져 있었다. 아직 검술에는 큰 소질을 보이지 않으면서 욕심만 많은 어린 친구를 위해 만들어 둔 것이었다. 연무장으로 나서는 길. 엔리르는 파닥파닥 날아 아가레스의 어깨에 안착했다.
“이봐. 악마.”
“꼬리 살랑대지 마라. 거슬린다.”
바삐 움직이던 꼬리가 딱 멈췄다. 엔리르가 토실토실한 앞발로 아가레스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악마. 악마.”
“말해. 뭐.”
“어떻게 부자가 됐어?”
자본주의에 감격한 어린 용이 눈을 반짝였다. 아가레스가 픽 웃었다.
“왜 묻는데.”
“누나가 오늘 엄청 많이 웃었어. 나도 저택을 지어서 선물하고 싶어.”
“저택은 내 것 하나로 족해. 넌 다른 거 선물해.”
곰곰이 생각하던 어린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같은 선물이 두 개인 것보다야 여러 가지 선물이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선물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해. 난 돈이 없어. 하르벤타 제국에 갔다가 누나한테 받은 3크론이 전부야.”
“주머니에 공기를 담아서 선물해. 아마 주머니 사는 데 3크론을 다 써야 할 테니.”
“그건 싫어. 악마,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줘.”
“……내가 살다 살다 용한테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
“너희 종족 잘하는 거 있잖아.”
“뭔데?”
“산 구석에 처박힌 큰 동굴을 찾는다. 온갖 함정과 몬스터를 깔아둔다. 인간들로부터 보석을 약탈한다. 동굴에 처박아 둔다.”
“그렇게 하면 부자가 돼?”
“그렇게 천 년만 해 봐.”
귀찮아서 대충 던진 답을 냉큼 물어버린 순진한 어린 용이 파드닥 날아갔다.
‘집에 돌아가면 깊은 산 속 동굴부터 찾아봐야지.’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을 본 작은 용의 꼬리가 바삐 살랑댔다. *** 엔리르가 돌아오자 이번에는 헤롤드와 알렉이 아가레스의 옆에 찰싹 붙어 그 와인 맛 좀 보게 해달라 졸랐다. 덕분에 카론과 이벨리아, 엔리르, 마르바스는 몇 걸음 뒤에서 걸어야만 했다. 예쁜 저택,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마냥 신이 난 이벨리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걷자, 그 행태가 영 얄미운 마르바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시비를 걸었다.
“야, 땅콩.”
“잔디.”
“땅콩.”
“잔디.”
“덜 익은 땅콩.”
“썩은 잔디.”
썩은 잔디? 마르바스가 미간을 콱 찌푸리고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한입에 콱 잡아먹어 버린다, 땅콩.”
“한 손에 콱 잡아 뜯어버린다, 잔디.”
청량한 목소리로 도무지 한 번도 지지를 않는다.
“어우, 진짜 이걸 콱!”
“아유, 진짜 이걸 냠!”
뭐야. 냠은 뭔데. 서열이 최우선인 마계에서, 그리고 거대한 사자의 모습으로 휘젓던 전장에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찢어 없애버렸던 마르바스였다. 그에게 눈앞에서 알짱알짱 쫑알쫑알하는 이 작은 땅콩은 손가락 아래 박힌 가시 같은 느낌이었다. 주군께서 이런 저택까지 지으신 것으로 보아 이 인간을 제법 총애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또 함부로 저 조그만 머리통을 콩 쥐어박을 수도 없다. 주먹 쥔 손을 몇 번 움찔대던 마르바스가 씩 웃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땅콩. 너 사자 무서워, 안 무서워.”
“사자 무서워!”
“사자 무서워?”
그러면 사자로 변신해서 크왕 놀라게 해주지! 마르바스는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즐기는 모습은 보통 인간의 몇 배는 되는 사자. - 펑. 전쟁터에서 마르바스의 사자형 모습을 본 적들은 모두 덜덜 떨며 주저앉았기에, 이번에도 같은 모습을 기대하며 한껏 입을 벌리고 이벨리아를 위협했다. - 크르렁. 커다란 앞발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모래를 튀기는 것은 덤이었다.
“사……사자가 엄청 커다래…….”
처음에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주춤거리던 이벨리아는 이내 마르바스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 아하하하-!!”
“……크르릉?”
“사자가- 사자가- 사자로 변했는데도 머리 위만 여전히 잔디 색깔이야-! 아하하하- 되게 웃기게 생긴 사자다!”
사자로 변해도 내 머리 위만 잔디색이었어? 그건 미처 몰랐다. 마르바스가 위엄을 되찾고자 위협을 가했다. 사자의 거대한 몸통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웃지 마! 내가 이래 봬도 자타공인 대악마로서-!”
“사자 머리 위에 잔디가 자랐네! 곧 있으면 꽃도 열리겠어! 아하하하!”
“…….”
종국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쳐대는 어린 땅콩 때문에, 마르바스는 이후로도 한동안 사자의 모습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머리 위만 잔디색일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부끄러워서. 또 정수리에만 난 잔디색 털을 보고 다른 악마들이 웃을까 봐.
*** 자칭 검사 이벨리아는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연무장 바깥쪽에 세워진 목검들 사이에서 가장 짧은 목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잔디! 결투다!”
“기다리던 바다!”
마르바스 또한 가장 기다란 목검을 들고 씩- 웃었다. 아까 받은 치욕을 만회할 기회다.
‘넌 죽었어. 땅콩.’
헤롤드와 알렉, 카론은 연무장 돌계단에 앉아 마르바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기씨랑 똑같이 노네, 저 악마.”
“우리 아기씨 일곱 살인데.”
“사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악마일 수도.”
“나잇값 못한다는 말이 바로 이때 쓰는 말이구나.”
엔리르도 거들었다. 한편 마르바스에게 이만 마계로 꺼지라는 명령을 날릴 법도 했을 아가레스는, 의외로 마르바스가 이벨리아의 선물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였을 때 이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선을 넘는 행동이나 발언을 한다면 그것이 작은 친구에게 닿기 전에 제재할 뿐 마르바스를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물론 마르바스를 아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에 있어서 모든 기준은 어린 친구였으니. 그저 마르바스와 티격태격하는 작은 친구는 그다지 불편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덤벼라! 나는 대륙 최고의 검사!”
“……네가?”
“-의 딸이다!”
이벨리아와 마르바스가 목검을 들고 마주했다. 마르바스는 감히 주군이 아끼시는 땅콩을 때릴 생각은 없었다. 오는 검만 대충 막아낼 생각이었다.
‘내 몸을 한 번도 스치지 못할 작은 땅콩한테 비웃음이나 좀 날려줘야지.’
주군께서 마르바스만 인지할 수 있는 전음을 날려 명령하시기 전까지는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그냥 맞아라.’
마르바스의 다부진 몸이 흠칫했다.
‘잠깐, 검이 날아오고 있는데 이걸 그냥 맞으라고요, 주군?’
- 따악!
“으악! 아니, 주군!”
“뭐야, 치사하게 아스 부르기 있어? 나도 우리 아빠 부른다?”
마르바스가 잔혹한 명령을 하달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벨리아가 목검을 들고 마르바스를 팡팡 때렸다. 눈먼 검이 더 무섭다고, 하필 맞으면 아픈 부위만 골라서 잘도 팼다.
“아! 야, 야, 잠깐!”
“결투에 잠깐이 어딨어? 한눈팔면 죽음뿐이다!”
“아! 너는 모르는 어른들의 사정이 있다고!”
“결투에 사정은 금물! 사정을 팔다간 죽음뿐이다!”
“항복! 항복!”
절대적인 주군의 명령 때문에 막지도, 피하지도, 그렇다고 감히 주군이 총애하는 땅콩을 때리지도 못한 마르바스는 결국 이벨리아의 앞에서 항복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후후. 꿇어라, 약한 악마!”
허리에 손을 착 얹고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작은 친구를 보며 아가레스의 입매도 잔잔하게 올라갔다. 겨울이 다가와 약간은 서늘한 바람이 작은 친구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날렸다. 그의 영역 내에서 평온함을 느끼는 작은 친구가 기꺼웠다.
‘잘 웃네.’
마르바스를 마계로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하나. 마르바스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웃는 작은 친구가 보기 좋아서.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땅콩, 이렇게 막 때리기 있어?”
“패배한 잔디의 말은 듣지 아니한다!”
“패배한 거 아니거든?”
“우우- 잔디는 졌지만 잘 싸우지도 못했어.”
“진짜 실력 한번 보여줘?”
“패배한 잔디의 비겁한 변명도 듣지 아니한다!”
아무리 마르바스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아도 이벨리아는 팔짱을 끼고 팩하니 고개를 돌려버릴 뿐이었다. 대악마 마르바스로서는 혼을 내지도, 괴롭히지도, 고문을 하지도, 때리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이런 일은 처음이라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이 땅콩 강적이군.’
마르바스 기준 처치 곤란한 적군 순위에서 이벨리아는 최상위권에 안착했다.
‘땅콩 주제에 마왕 바알과 동급이야.’
아가레스는 목검을 하늘로 쳐들고 ‘꿇어라! 주제를 알아라!’를 외치는 작은 친구와 그 앞에서 씩씩대는 마르바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재롱을 잘 떠는군. 우리 꼬맹이 전속 하인으로 적당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