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것들 (73/323)

73화: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것들2021.06.10.

16549736932509.jpg

  에르카디아 제국 황궁, 황태자의 방. 루드비히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에르트 백작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 제국의 작은 지존께서 웬 개똥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셨다.

16549736932514.jpg“그, 그게……?”

16549736932519.jpg“쿠키.”

16549736932514.jpg“……일 리가 없을 텐데요, 전하.”

16549736932519.jpg“생긴 건 이래도 맛은 있다. 내가 먹어본 쿠키 중에 가장.”

16549736932514.jpg“……그럴 리도 없을 텐데요, 전하.”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에르트 백작이 못마땅한 루드비히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16549736932519.jpg“감히 그대의 평가를 받을 음식이 아니다.”

에르트 백작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주군의 표정과 어조가 저쯤 되면 어김없이 일갈이 날아든다. 과도한 일거리로 고통받고 싶지 않으면 꼬리를 내리는 것이 현명했다. 루드비히가 내준 국정 과제를 한가득 들고 돌아온 이크리안 또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집에 돌아가면 똑같은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도 모르고.

16549736932578.jpg“그게 뭡니까, 전하?”

16549736932519.jpg“이브가 준 쿠키다.”

16549736932578.jpg“공녀님께 뭘 대단히 잘못하셨습니까?”

16549736932519.jpg“내가 예뻐서 준 거라던데.”

16549736932578.jpg“공녀님께서 이제 거짓을 말씀하실 수 있는 나이가 되셨군요. 제법 어엿하게 자라셨습니다.”

16549736932519.jpg“……시끄럽다. 보존 마법이나 걸도록.”

16549736932578.jpg“이래 봬도 제가 제법 훌륭한 마법사라. 그런 기초 마법 따위에 할애될 마력이 아닙니다만.”

어언 2년이었다. 그동안 함께 국정을 논한 루드비히와 이크리안은 이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기실 이벨리아가 이크리안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바람에 질투가 나서 괴롭히고자 시작한 관계였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 대해 직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었다. 이크리안에게 루드비히는 충심을 다해 모실 가치가 있는 주군이었고, 루드비히에게 이크리안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은 신하였다. 그러니 이 정도 장난쯤, 루드비히는 너그러이 받아줄 용의가 차고 넘쳤다.

16549736932519.jpg“그대의 충성심은 내 풍족한 금고에서 나온다지 않았나. 이번 봉급에 금화 몇 개 더 얹어주지.”

16549736932578.jpg“마법 계율 제1조. 모든 마법은 중한 정도가 같다. 때에 따라서는 하찮은 보존 마법도 중히 여겨지지요. 역시 전하이십니다.”

16549736932519.jpg‘여우 같긴.’

카시스 후작가 정도면 어디 가서 돈으로 아쉬운 소리 할 가문은 아닌데. 영식이 대체 왜 저렇게 돈에 환장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이크리안을 바라보자, 그가 민망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16549736932578.jpg“우리 렐리안이 제게 마법을 배우고 있는 것은 아직 비밀이라. 렐리안에게 마법서와 마법 도구를 사주는 데 가문의 재산을 끌어다 쓰기엔 어려움이 좀 있습니다. 한데 그게 어디 한두 푼이라야 말이죠.”

16549736932519.jpg“그걸 왜 비밀로 하지? 후작 영애가 마법을 배운다는 걸 알리면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겠나. 카시스 후작가에서는 더더욱.”

16549736932578.jpg“사람마다 숨겨진 패 하나쯤은 손에 쥐고 있지 않습니까.”

16549736932519.jpg“……하긴, 후작 영애 역시 적이 없을 자리는 아니니까. 가진 능력을 다 보이는 것이 껄끄러울 법도 하지.”

16549736932578.jpg“송구하오나,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렐리안은 공녀님의 숨겨진 패 중 하나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16549736932519.jpg“이브의?”

16549736932578.jpg“예. 병약하기로 소문이 난 후작 영애가 마법에 조예가 깊을 줄은 누구도 짐작키 어려울 터이니, 언젠가 공녀님께서 자신을 필요로 하실 때 움직이기가 더욱 쉽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16549736932519.jpg“……얼마가 필요한가?”

16549736932578.jpg“예?”

16549736932519.jpg“이 정도면 되나?”

금화 한 주머니가 손쉽게도 이크리안의 앞에 툭 떨어졌다.

16549736932519.jpg“내 앞으로도 봉급에 금화 주머니를 후하게 얹어주지.”

작은 친구를 위한 배움이란다. 그렇다면 제국 예산이 아닌 사재를 탈탈 털어 지원해줄 의향이 있었다.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잡아챈 이크리안이 씨익 웃었다. 이거면 내달까지 렐리안을 가르칠 기초 마법서와 마법 도구들을 넉넉하게 살 수 있다.

16549736932578.jpg“이 에르카디아 제국에 무한한 광영이 있으라.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전하께옵서 하해와 같은 마음씨로 아랫것들을 굽어살피시니 이 어찌 제국의 경사가 아니라 할 수-.”

16549736932519.jpg“본론만.”

16549736932578.jpg“예, 제가 아무래도 줄을 참 잘 선 것 같습니다.”

16549736932519.jpg“나가.”

  *** 그렇게 에르트 백작과 이크리안을 내보낸 뒤. 루드비히는 책상 아래에서 자신의 손이 닿아야만 열리는 상자 형상의 마도구를 꺼냈다. 보안에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그 마도구는 가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중한 물건이었다. 무려 차기 대마법사 후보자가 직접 보존 마법을 건 쿠키는 그 안에 놓였다.

16549736932519.jpg‘벌써 네 개나 채워졌군.’

그리도 귀중하다는 마도구 속에 보존된 물건은 단 네 개였다. 보물도, 보석도, 황태자의 인장도 아닌 것들. 누군가는 이런 잡동사니를 그 귀중한 마도구 속에 보관하느냐 기함할 것들. 루드비히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처음 만난 날 뒤통수에 맞았던 솔방울, 비 오는 날 건네받은 꽃잎, 햇빛이 좋은 날 체결한 계약서, 봄바람이 흩날리던 오늘 받은 쿠키. 이 제국의 어린 군주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들이었다. 가장 답답한 날. 가장 숨쉬기 힘든 날. 가장 버거운 날. 그래서 기댈 곳이 필요한 날. 잠시 쉬어가는 안식처였다. 그가 마도구 속에 넣지 않은 쿠키들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16549736932519.jpg“……맛있군.”

최측근의 신하들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린 날, 극독에 의해 미각 일부분을 잃은 루드비히에게 이벨리아의 쿠키는 조금 단단하긴 해도 달콤하기만 했다. 너의 해사한 웃음이 생각나서. 분명히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너의 몸짓이 선연해서. 하나하나 담았을 너의 작은 손이 고마워서. 울컥, 여전히 익숙지 않은 무언가가 치받고 올라오는 것만 같아 어린 지배자는 한참 눈을 감았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그보다 깊은 어떤 감정인지, 겪어본 적이 없으니 형언할 수 없어서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 동(東) 마계의 성.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549737016403.jpg“아니, 주군! 이게 무슨 악독한 암살 시도란 말입니까!”

여느 때와 같이 업무 처리 후 보고하러 온 충복 마르바스가 분노를 토했다.

16549737016409.jpg“감히 누가 저런-.”

주군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자 늘 마르바스를 따라 들어오는 로노베 또한 요염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마르바스가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진 신하였다면, 고위 몽마, 서큐버스 로노베는 주군에 대한 색욕이 충성심을 앞서는 자였다. 그녀의 주군은 그 외형만으로도 그녀를 황홀경에 처박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16549737016409.jpg‘약한 인간이나 마족이였다면 꿈속에 들어가 정기라도 취할 터인데…….’

고아하신 주군께서는 도무지 틈 하나 보이지를 않으시니 원. 여하간 위대한 주군의 책상에 놓여 있는 저 요망스러운 개똥은 극악한 암살 시도 또는 주군에 대한 모욕이 분명했다.

16549737016409.jpg“이건 제가 치우지요.”

불경하게도 주군의 몸을 시선으로 스윽 훑은 그녀가 과자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거슬리는 그것을 당장에 치울 심산이었다. 알 수 없는 자가 두고 간 것이라면 주군의 안위를 위해 치움이 마땅했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건넨 것을 주군께서 가지고 오신 것이라 하더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심사가 비틀려 뭉개버리고 싶었으니. 그러나 고운 손이 바구니에 채 닿지도 못한 거리. 아가레스의 의지로 발현된 기운이 로노베의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름대로 고위 악마라고 자부하는 마르바스도, 로노베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속도로.

16549737016409.jpg“꺄악-!!”

한 박자 늦게 고통을 느낀 로노베의 가녀리고 높은 비명이 울렸다. 손에서는 핏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상처 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털썩 주저앉았다. 여느 남성들 같으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감싸 줄 법한 안쓰러운 비명과 아름다운 몸짓이었으나 그녀의 주군은 가벼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주군의 냉혹한 처사에 가슴이 시려 왔다. 의자에 권태로이 기대어 서류를 한 손으로 들고 훑던 아가레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서류를 향한 채, 날카로운 음성만이 오롯이 로노베와 마르바스를 향했다.

16549737016423.jpg“……그 손이 없어져야 가벼이 놀리지 않겠군. 일전에도 경고한 것 같은데.”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담았다. 아무리 고위 악마라고 하더라도 쉬이 받아내기 버거운 기운. 옥죄는 목을 애써 가다듬고 로노베가 바로 무릎을 꿇어 자비를 구했다.

16549737016409.jpg“단……단것은 들지 않으시니 제가 실수를…….”

서늘한 금안이 몸을 낮춘 신하를 향했다. 자신을 흠모하는 신하에게 가차 없는 처분을 하고서도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압도, 무감, 잔혹. 셀 수 없는 오랜 세월 몸에 밴 그의 성정이었다.

16549737016423.jpg‘꼬맹이가 보면 못된 토끼라며 등을 때리겠지.’

무심결에 생각이 작은 꼬맹이에게로 닿았다. 아가레스가 수하들을 물렸다. 수하들의 앞에서 작은 친구를 떠올리기에는 그 편린조차도 아까웠다. 기실 로노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것을 치 떨리게 싫어했다. 입속에 맴도는 그 텁텁함이 상당히 불쾌했다. 보편적인 오미(五味)라고 불리는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중에 그는 유난히 단맛과 신맛을 싫어했다. 그러나 작은 친구가 음식을 건넨 순간부터 그에게는 ‘맛’의 새로운 분류법이 생겼다. 통상 일컫는 다섯 가지 맛이거나, 아니면 작은 친구가 준 모든 맛이거나.

16549737016423.jpg‘이브가 준 선물을 감히 어떤 범주에 분류해 넣을 수는 없으니.’

그러니 그가 싫어하는 단맛에 포함될 리도 없을 터였다.

16549737016423.jpg‘다시 먹어도 나쁘지 않군.’

지나치게 달고, 계란 껍데기가 씹히고, 겉은 타고, 속은 설익은 그 형용할 수 없는 맛이 달갑기만 했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야흐로 너의 정성이고 마음이고 선물이 되었으니.

16549737016423.jpg‘이걸 만드느라 또 얼마나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을지.’

분명 공작저 사용인들이 뒤집어졌을 터다. 꼬맹이 곁에 항상 붙어 다니는 운디네는 대경을 했을 것이고, 어린 용은 함께 봉변을 당했겠지.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그는 마지막 남은 쿠키 하나를 입에 넣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16549737016423.jpg‘먹기 아까워.’

이내 검은색 연기가 쿠키를 감쌌다. 세계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할 힘에 쌓인 쿠키 한 조각은 오래도록 시간의 손때를 타지 않을 것이었다. 서랍 안에 놓여 있던 분홍색 꽃잎과 쿠키를 나란히 두고 바라보자 어딘지 마음이 간지러웠다. 너에게서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것들.

16549737016423.jpg‘내 작은 친구.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니, 어두운 창가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영 어색하다. 내가 웃고 있다니. 아가레스가 입매를 한 번 손으로 쓸었다.

16549737016423.jpg‘꼬맹이를 향할 때 내 표정이 항상 이렇던가.’

이래서야 꼬맹이가 빙구라고 불렀던 것도 퍽 이해가 가는 일이다. 막연하게 추정하는 것과 확실하게 시야에 담는 것은 그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부지불식간에 머리를 맞은 듯, 그는 별안간 자각했다.

16549737016423.jpg‘어색한 것이 어디 웃음뿐일까.’

그는 본디 몰랐던 공포라는 감정도 습득했다. 작은 친구가 다칠까, 혹여 잃을까, 다시 혼자 남을까, 그는 두려웠다.

16549737016423.jpg“이런…….”

밀려드는 깨달음은 마냥 담담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였던 그에게 생긴 유일한 결점. 지킬 것이 없어 대범할 수 있었던 그를 안달 나게 만드는 흠결. 그게 너였다. 고요한 밤. 마계에 뜬 달이 형형하게 빛난다. 지상에 머무는 고귀한 존재가 붉은 달빛에 잔을 맞대었다. 잔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그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심경을 대변하듯 거칠게 입에 머금은 와인이 반쯤은 흘러 일렁이는 목울대를 지나 탄탄한 몸을 타고 내렸다. 쉬이 상처를 낼 수 없는 그의 전신(戰神)과도 같은 근육에 마치 핏줄기처럼 붉은 술이 새겨졌다. 그가 작은 친구 앞에서는 절대 비치지 않을 시린 웃음을 물었다. 만일 당신이 그 아이를 이 땅에 내려 세계에 반하는 내게 목줄을 채우려 한 것이라면, 그 한 수에 찬사를 보낸다. 길었던 당신과 나의 소리 없는 전쟁에 박힌 치명적인 규칙. 전례 없던 약점. 증오스러운 그대의 손길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의 몸을 빌려 닿아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니. 기어이, 순종하는 짐승이 될지니. 이벨리아. 이브. 내 작은 친구. 그 달가운 흠결이여. 네가 끝내 종막으로 항해하는 조타수라면 나는 기어코 부서지는 파도가 되어 너를 좇을 것이었다.

1654973707365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