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맛있어, 세상에서 가장2021.06.07.
이벨리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휴고와 엘리시아는 황급히 물을 찾았다.
“컥- 물을 가져오너라!”
“물…… 아니 차!”
그렇게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두 장군을 쿠키 하나로 초토화한 이벨리아는 아장아장 방으로 돌아왔다.
“역시 다들 좋아하네!”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은 정말 좋은 거야! 뿌듯하게 웃은 이벨리아가 카시스 후작이 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두 친구에게도 선물을 주기 위해 비밀기지로 갈 참이었다.
“엔리르. 자? 나 비밀기지 갈 건데!”
“코오- 도로롱- 코오- 도로롱-.”
평소 같으면 함께 가자며 신나게 날아올 엔리르가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심지어 이벨리아의 침대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자는 척을 했다. 무려 코까지 도롱도롱 골아가면서.
‘저 똥 먹기 싫어…….’
그 속내도 모르고 잘 자라며 이불을 덮어준 이벨리아는 남은 쿠키들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았다. 엔리르가 잠을 자서 심심하다는 이유로 엉겁결에 불려 나온 운디네가 쿠키 위를 살랑살랑 유영했다.
[그건 누구 줄 거야?]
“아가 토끼랑 식량 도둑!”
[안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왜 때문에?”
바구니 한가득 쿠키를 채우면서 갸웃거리는 어린 계약자를 보며, 운디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악마에게 줘봤자 버려질 것이 분명했다.
[악마는 단 거 안 먹어. 그들은 선천적으로 단것을 좋아하지 않아.]
특히 그런…… 그런 쿠키면 더더욱.
[그리고 그 황태자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먹으면서 살았을 텐데.]
무려 이 제국 차기 지존의 자리에 오를 자가 아니던가. 아마 이 순간에도 제국의 온갖 산해진미가 식탁 위로 바쳐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저 개똥 같은 쿠키를 가져다준다니. 운디네는 제 계약자가 상처받길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 계약자가 만들어서 가져다준 쿠키라고 하더라도 버려질 게 분명해.’
운디네가 종알거리자, 쿠키 바구니의 리본을 엉성하게 묶던 이벨리아의 손이 살짝 늦춰졌다. 생각해보니 그렇긴 했다. 여태 아가 토끼가 ‘나는 단것을 안 먹으니 꼬맹이 많이 먹어.’라고 말하는 것을 수십 번 듣지 않았던가. 게다가 식량 도둑네 집에 가서 먹은 마들렌이나 쿠키들은 정말 맛있긴 했었다. 그것에 비하면 자신이 만든 쿠키는 형태가 약간 빈약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이 내가 준 쿠키를 싫어할까?’
그렇진 않을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친구들을 보아온 믿음이 있다. 모양이 조금 이상하더라도, 설령 맛이 조금 없더라도, 친구들은 아주 좋아해 줄 것이 분명했다.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일축했다.
“아마 둘 다 좋아할 거야!”
[…….]
친구들에게 선물할 생각에 방방 뜬 어린 계약자에게, 운디네는 차마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재차 말하진 못했다. *** 하르벤타 제국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비밀기지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 새록새록 꽃들이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방문한 비밀기지는 여전히 고요하고 따스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일상 속. 늘 그대로 남아 찬란한 비밀기지는 공유자들 모두에게 마음 한편의 위안이었다. - 푸드덕. 언제나 그렇듯 커다란 매, 라르고가 이벨리아의 방문을 알리고자 주인에게로 날아갔다. 워낙 거대한 몸집인지라, 날갯짓을 하자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벨리아는 인사하고자 습관처럼 올리던 손을 휙 내렸다.
“흥! 앙칼진 매. 나도 인사 안 해, 이제.”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조류한테 맨날 무시당하고도 인사하는 바보는 아니란 말이지. 혹시 친구들이 와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벨리아는 아가 토끼도, 식량 도둑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피곤한데. 조금 자고 있으면 금방 오겠지.’
쿠키를 만들며 열심히 노동했으니 따뜻한 러그 위에서 낮잠을 자고자 오두막 문을 벌컥 열었는데.
“에엥?!”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각종 간식거리와 꽃이 가득 놓여 있었다. 금낭화 꽃, 오렌지 주스, 초콜릿이 가득 박힌 쿠키, 기묘하게도 여전히 따뜻한 닭꼬치 등등. 전부 이벨리아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한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가져다 둘 사람이 없는데……? 내 비밀기지가 또 털린 건가, 혹시?”
한 번 털려본 전적이 있던 비밀기지이기에 걱정이 먼저 차올랐으나. 잠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만일 비밀기지가 침입자에게 털린 거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테이블이 가득 차 있을 이유가 없다.
“내가 아주 착하게 살아서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인가, 그럼?”
어쨌든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생각이 길어지면 손해다. 커다란 눈을 슴벅거리던 이벨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닭꼬치를 들어 입에 가져갔다. 냠. 한 조각을 크게 빼서 오물오물 씹고 있는데 뒤에서 오두막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숨 가득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무거나 입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앙냥, 식냥 도둑!”
이벨리아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들어서 인사했다. 소꿉친구에게 시선을 돌려 인사하기에는 테이블 위에 시선을 홀리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것 좀 봐. 산타 할아버지가 전부 두고 갔나 봐!”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둔 건데.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어린이한테만 와.”
“난 착한 어린인뎅.”
“그리고, 혹시 나쁜 사람이 올려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거나 입에 넣고 죽는지 사는지 보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으으. 잔소리. 알아. 알지만 여긴 우리만 쓰는 비밀기지인걸.”
혹시 닭꼬치를 빼앗을까 남은 조각들을 한입에 앙 물어 삼킨 이벨리아가 툴툴댔다. 음식에 몰래 탄 독을 먹어 생사를 넘나든 경험이 있는 루드비히로서는 타당한 참견이었으나 이벨리아가 듣기에는 그저 과한 걱정에 불과했다.
“긍데 이거 진짜 누가 둥 거지? 아직 따뜻한뎅.”
“하…….”
세상 어느 귀족이 입에 음식을 가득 물고 웅냥냥거리면서 말을 해. 고위귀족답지 않은 태도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 앞에선 제법 똑 부러지는 작은 친구가 그의 앞에서만 이토록 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알기에 만족스럽기도 했다.
“혹시 식량 도둑이 올려둔 거야?”
누가 올려둔 것인지를 묻는 친구에게, 루드비히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땅 도둑이 언제 먹어도 따뜻하도록 닭꼬치에 보온 마법을 걸라고 이크리안을 달달 볶아서 놓아둔 것이었음에도 제대로 생색 한번 내지 못했다. 평소 귀족들에게 하는 것처럼 ‘네놈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서 내가 했다’라는 식으로 가볍게 툭 던지면 될 터인데. 왜인지 쑥스러웠다.
‘전부 보잘것없어 보여.’
막상 이벨리아의 앞에 서니 친구를 생각하면서 약 보름 동안 그가 하나둘씩 모아 놓은 선물들이 다 하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제비가 집 짓는 것처럼 그냥 이것저것 막 모아둔 것 같잖아.’
마냥 아쉬움이 들었다.
‘더 좋은 것으로, 더 귀한 것으로 구해다 줬어야 했는데.’
루드비히가 대답이 없자 이벨리아는 고개를 한 번 크게 갸우뚱하고는 이번에는 오렌지 주스로 손을 뻗었다. 닭꼬치와 마찬가지로 보랭 마법이 걸려 시원한 오렌지 주스에 손이 닿자마자, 루드비히의 것보다 훨씬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말고 이거.”
이벨리아의 것보다 곱절은 커다란 손이 곧바로 오렌지 주스를 강탈하고는 새 오렌지 주스를 쥐여 주었다.
“토끼!”
자신이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안겨준 아가레스가 거만한 표정으로 루드비히를 내려다보자, 루드비히 또한 차가운 홍안으로 아가레스를 노려보았다.
‘저걸 확 그냥. 내가 조금만 더 커봐라, 진짜.’
빠르게 자라기를 이토록 염원하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검술을 더 연마하고 전장에 나가서 몸도 더 단단하게 만들고 키도 훨씬 커지고 나면 제일 먼저 저 자식을 손봐줄 것이다. 서늘한 분위기에 두 친구를 번갈아 보던 이벨리아는 조막만 한 손으로 이마를 턱 짚었다. 이젠 친구들의 눈빛만 봐도 알았다.
‘또. 또 싸우겠네.’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났는데 입씨름하는 것은 사양이다. 조련사 이벨리아가 작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단호하게 끊어냈다.
“어허, 그만해. 둘 다 먹을 거야.”
이벨리아는 양팔에 오렌지 주스 한 병씩을 안고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향하는 곳은 햇볕이 따스하게 비추는 돗자리 위. 오늘은 바위보다 푹신푹신한 풀이 느껴지는 돗자리 위가 더 마음에 들었다. 작은 친구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파악하자마자, 루드비히가 무심한 표정으로 앞서 나가 돗자리에 붙어 있는 나뭇잎과 풀을 깨끗하게 털어주었다. 아가레스는 보다 편안히 앉으라는 듯 커다란 담요를 두 번 접어 깔아주었다. 혹시 추울까 덮을 담요는 따로 챙겨 두는 것도 잊지 않고.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이제는 관행처럼 익숙해진 배려였다.
“으응- 좋다. 오랜만이야, 내 비밀기지.”
이벨리아가 담요 위에 엎드려 쭈욱-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내’ 비밀기지라는 말에 이제는 루드비히도 반박하지 않았다. 작은 친구가 없으면 이 장소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으므로. 루드비히가 손수건을 꺼내 이벨리아의 입가에 묻은 닭꼬치 소스를 슥슥 닦으며 청했다.
“어젠 너무 조금밖에 못 들었어. 하르벤타에 다녀온 얘기 좀 더 자세히 해줘.”
“어제 다 말했는데!”
“그럼 천천히 다시 말해줘. 또 듣고 싶어.”
“그래!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 또 말해도 행복할 거야.”
턱을 괴고 엎드린 채로 두 다리를 동당 동당 흔들면서, 이벨리아가 하르벤타 제국 체험기를 졸졸 읊었다. 아가레스는 나무 기둥에 기대 작은 친구를 내려다보면서, 루드비히는 어제 미처 묻지 못했던 것들을 물으면서, 편안히 재회의 시간을 즐겼다. 친구들을 마주하는 이벨리아의 웃음이 햇살처럼 빛났다.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들. 항상 내 편에 서 줄 친구들. 언제든 달려와 줄 친구들. 내가 지켜주어야 할 친구들.’
어린아이는 두 친구의 배려를 마음 깊이 새겼다. 깨어지듯이 내리는 빛. 그 빛이 비치는 두 친구는 마냥 눈부셨다. ***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지는 시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는 이벨리아에게 루드비히가 작은 바구니 두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야?”
“아, 맞다!”
오랜만에 식량 도둑을 만나서 재잘대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거 선물이야! 내가 만든 쿠키!”
이벨리아가 바구니 두 개를 달랑 들어 각각 루드비히와 아가레스의 앞에 톡 놓으며 말했다.
“네가…… 만든……?”
“만들었다고? 직접?”
“응! 내가! 내가!”
좀체 놀라는 일이 없는 두 친구의 눈이 커진 채로 자신에게 향하자, 뿌듯한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곧게 폈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눈이 같은 의미를 담고 마주쳤다.
‘먼저 열어보도록. 솜털.’
‘나는 연장자를 공경한다. 열어봐라, 악마.’
‘젊은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어른의 미덕이지. 열어보라니까.’
‘인간보단 악마의 정신력이 더 좋지 않겠나.’
왜인지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서로 미루던 악마와 소년은.
“얼른 열어봐!”
작은 친구의 독촉에 결국 바구니를 덮은 하얀 천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맑은 봄바람이 하얀 천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개똥인데.’
‘개똥이군. 좋은 선물이야.’
“짠! 바나나 쿠키야!”
환장하겠다. 쿠키란다. 이게. 두 지배자가 한 손에 바구니를, 한 손에 흰 천을 든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친구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이벨리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둘 다 아무 반응이 없네…….’
아무래도 아까 운디네가 한 말이 맞나 보다. 그래도 조금은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시무룩해진 이벨리아가 어물어물 말했다.
“운디네가 말해줬는데, 토끼는 단것을 먹지 않는대. 악마는 원래 그렇대. 그래도 아스한테도 주고 싶어서 만들었어.”
어린 친구의 눈꼬리가 처량하게 내려가자, 난데없이 선물 받은 똥 모양 쿠키에 당황하던 아가레스가 여상히 말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답게 표정 관리는 빠르고도 능숙했다.
“잘못된 정보군. 악마는 단것을 즐긴다. 이런 선물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 너무 감격해서 내가 잠깐 고장이 난 거였어.”
한 종족의 입맛이 고위 악마의 선언 하나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흥. 악마가 단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일 것인데.”
“상식이라…….”
부정하는 루드비히를 향해 아가레스가 느리게 읊조렸다. 생략된 뒷말을 이해한 루드비히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세계를 꿇어앉히는 자다. 피조물을 담는 그릇이 세계일진대 저자는 그 그릇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으니, 저자의 존재 자체가 질서에 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앞에서 상식을 논하는 것은 의미 없음이 분명했다.
“생각해보니까 토끼는 여태까지 나한테 단 거 다 먹으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네가 워낙 단것을 좋아하니까 양보한 거였지. 우리는 친한 친구니까.”
아가레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아직 의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작은 친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퍽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루이는 좋은 것만 먹고 자라서 이런 건 안 먹을 거래. 운디네가 그랬어.”
“네가 만들었다며.”
“응. 내가 만들었지.”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음식이네.”
그러니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훌륭한 요리고.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쿠키를 한 입씩 베어 물었다. 둘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맛이 있든, 맛이 없든, 그들의 답은 한 가지였다.
“맛있어.”
“세상에서 가장.”
다른 답이 나올 일은 없을 터였다. 설령 그들의 작은 친구가 극독을 삼키라 던져준다고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