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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나는 왜 할아버지가 없어? (70/323)

70화: 나는 왜 할아버지가 없어?202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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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벨리아와 노닥거리면서 점심을 먹고 황궁 후원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려던 루드비히의 계획은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별 없이 선황제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손자를 보고 싶다고.

16549736156784.jpg“선황제?”

이벨리아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대자 루드비히가 설명했다.

16549736156788.jpg“내 할아버님.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시지.”

16549736156784.jpg“……!!”

뭐에 그리 놀랐는지, 이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16549736156784.jpg“루이 할아버지가 있어?!”

16549736156788.jpg“누구나 다 있는 할아버지가 있는 게 그리 놀랄 일인가.”

그의 땅 도둑 친구는 그 말에 더더욱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왜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선황제를 뵈러 가는 루드비히는 미련이 남은 듯 계속 뒤를 돌아보았으나, 땅 도둑은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루드비히는 가까운 시일 내에 땅 도둑과 비밀기지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 휴고의 무릎에 앉아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이벨리아의 시선은 줄곧 바깥을 향해 있었다.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신사에게 닿았다가, 손녀에게 줄 작은 머리핀을 사는 할머니에게 닿았다가.

16549736156784.jpg“아빠, 루이는 할아버지가 있대요.”

16549736156805.jpg“음. 그렇지.”

휴고가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뜬금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있는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어린아이의 생각은 시도 때도 없이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다가 하는 것이니 휴고는 이것 또한 곧 새로운 흥밋거리에 묻혀 사라질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16549736156784.jpg“응, 생각해보니까 렐리안도 할아버지가 있었어.”

그런데 마차가 공작저 앞에 부드럽게 멈추어 설 때까지 ‘할아버지’에 대한 딸의 집착은 계속되었다.

16549736156784.jpg“아빠, 아빠의 아빠는 어디 계세요?”

16549736156805.jpg“우리 아가가 조금 더 크면 얘기해주마.”

두루뭉술하게 넘기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나, 그의 딸은 꽂혀도 단단히 꽂힌 모양이다. 공작저로 뽀르르 들어간 이벨리아가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이면서 재차 물었다.

16549736156784.jpg“엄마, 엄마의 엄마는 어디 계세요?”

휴고와 엘리시아가 난감하다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잘못을 모르는 발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될 예정이었다.

16549736156784.jpg“나는 왜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없어요?”

나만 없어. 나만 할아버지 할머니 없어. 하기에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피해갈 수가 없었다. 저리 눈을 반짝이는 딸은 지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면 세상 온 동네에 ‘나는 할아버지가 없는데 왜 없는지 모르겠다’라며 짹짹거리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16549736156805.jpg‘언젠가는 우리 아가도 알게 될 일이기는 한데…….’

16549736170946.jpg‘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말해주는 게 낫겠죠.’

엘리시아가 낮은 한숨을 쉬며 휴고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휴고가 딸을 무릎에 앉혀 어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럽고 여상한 목소리였다. 그 어두운 내용과는 상반되는. 이벨리아는 몰랐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첫 만남이었다. *** 비극의 땅, <베르타샨>. 그 문언 그대로가 가장 잘 어울리는 땅이었다. 한때 베르타샨 백작 가문이 다스리던 영지. 지칭하는 말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수식언은 하나같이 비참한 것들뿐이었다. 가장 먼저 희생된 땅, 무력한 땅, 패배한 땅……. 그리고 선대 아르티나 공작부부의 생이 스러진 땅. 휴가 겸 둘도 없는 친우를 만난다며 베르타샨 영지로 잠시 여행을 떠났던 부모님은 그대로 그 땅에 잠들었다. 그들이 만나러 갔던 친우, 베르타샨 백작부부와 함께. 가신들이 그토록 보지 못하도록 막았던, 돌아온 부모님의 시신은 처참했다. 마족들에게 당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린 소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무려 사흘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시신을 뇌리에 박아 넣었다. 먹지도, 자지도, 울지도 않고 고요하게 서서. 고작 아홉 살의 나이였다. 다른 선택지 없이 반강제로 공작위에 오른 소년은 그날 이후 무려 일곱 해를 미련만 남은 악귀처럼 검을 휘둘렀다. 해가 져도, 달이 떠도.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벼락이 내리쳐도. 그렇게 어느 어두운 밤. 달보다도 밝은 검기를 발현해낼 수 있게 된 그때. 기록되는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기쁨 따위는 자각할 새도 없었다. 그가 검을 수련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으니까. 아버지의 시신과 함께 돌아온 검 한 자루만을 허리에 차고, 어린 소년은 망설임 없이 향했다. 그의 부모가 무참히 살해당한 바로 그 땅, 이제는 마족들의 것이 되어버린 그 땅. <베르타샨>으로. *** 단신으로 흘러온 소년을 향해 쇄도했던 마족들은 모두 소년의 발아래에 흐르는 핏물이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족의 피를 뒤집어쓴 소년의 초점 없는 황금색 눈동자는 일말의 생기도 없었다. 소년의 정신은 일곱 해 전 바로 그날에 돌아가 서 있었다. 현재이면서도 과거에 홀로 서서 다시 한번 온몸으로 울음을 토해내면서.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그때. - 바스락. 풀숲 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났다. 소년의 검은 본능적으로 그곳을 베었다.

1654973617095.jpg“아!!”

마족의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음성. 터지는 비명소리는 앳되었다.

1654973617095.jpg“이 새끼, 무슨 짓이야, 너.”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는지 어깻죽지에만 얕은 자상을 입은 소녀가 으르렁대며 소년의 턱 밑으로 검을 들이댔다.

1654973617095.jpg“…….”

소년은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 소녀의 검을 멀리 쳐냈다. 범상치 않은 실력에 소녀가 눈을 휘둥그레 뜬 것도 잠시. 소녀의 눈이 소년의 황금색 눈과 얽혀들었다.

1654973617095.jpg‘뭐야, 이 돌멩이 같은 눈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인가.’

소녀는 생각했다. 얘는 인간이 아닌 악마가 분명하다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분노든, 절망이든, 기쁨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감정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 소년에게서는 그것들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1654973617095.jpg“악마인가.”

1654973617095.jpg‘누가 누구보고 악마래. 그 얼굴에 피부터 닦고 말하지.’

그녀가 생각하던 것을 소년이 먼저 입 밖으로 내자 당황을 넘어서 어이가 없긴 했으나, 그 물음에서 역으로 소년이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1654973617095.jpg“인간인데?”

1654973617095.jpg“여긴 마족이 지배하는 땅이다. 인간은 없어.”

1654973617095.jpg“본디 인간의 땅이었지. 이곳의 지명을 알아?”

찬찬히 소녀를 살피던 소년은 인정했다. 소드마스터란 무릇 타인의 기운을 살피는 데에는 도가 튼 자. 소녀는 인간이 맞았다. 그리하여 소년은 순순히 답했다. 귀찮기는 했지만.

1654973617095.jpg“비극의 땅.”

1654973617095.jpg“왜 그 명칭이 붙었는지도 알고 있어?”

모를 리 없었으나 더 대꾸하기 번거로워 소년이 침묵하자 소녀가 대신 말을 이었다.

1654973617095.jpg“여긴 베르타샨 백작가문의 영지였지. 백작을 비롯해서 모두가 죽었으니 이제는 멸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알려지지만.”

소녀가 침을 한 번 삼켰다.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먼저 비극의 주인공임을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소녀는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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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3617095.jpg“……휴고.”

1654973617095.jpg“성은?”

1654973617095.jpg“아르티나.”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도, 나와 같은……. 따라붙는 수식어가 싫어서, 두려워서, 아직 그 끔찍한 날을 잊지 못해서,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이름이 소녀의 입에서 쉽게도 흘러나왔다.

1654973617095.jpg“엘리시아 베르타샨.”

다음 공격지를 가늠하던 휴고가 그제야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소년과 소녀는 그 피바다 위에서, 그들의 부모가 스러진 바로 그 땅 위에서, 한참을 서로 마주했다. 이제는 괜찮나. 살아갈 만하나. 아직도 그날이 아파 몸부림치지는 않나. 실은, 온몸을 조각내는 듯 그립지 않나. 그 모든 위로와 공감 따위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딴 언어를 입에 담지 않아도 서로가 가장 잘 알았다. 괜찮지 않을 것이었고, 죽지 못해 처연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었고,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었고. 실은, 뼈에 새겨지도록 그리울 것이었다. 내가 그러하듯이. 너도.

1654973617095.jpg“……방해는 마라.”

그렇기에 돌아가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 내가 그럴 수 없듯이. 너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휴고가 검을 들고 마족의 본거지 안으로 향했다. 엘리시아가 나란히 걸으며 받아쳤다.

1654973617095.jpg“너야말로.”

  *** 그렇게 열흘 하고도 닷새였다.

1654973617095.jpg“저쪽이라니까, 바보야. 이거 딱 봐도 방진(方陣)이잖아. 눈만 돌멩이인 줄 알았더니 머리도 돌머리야?”

1654973617095.jpg“그러는 너는 내가 없었으면 눈먼 몽둥이에 맞아도 몇 번은 맞아서…….”

1654973617095.jpg“어어, 저거 도망간다! 얼른 저거 먼저 잡아! 저게 이 일대 대가리야!”

1654973617095.jpg“대가리…….”

1654973617095.jpg“가자! 아니, 가라!”

1654973617095.jpg“혼자?”

1654973617095.jpg“같이 가 줘?”

1654973617095.jpg“……다녀오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휴고와 천재적인 군략을 짜내는 엘리시아. 그들은 출중한 능력으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약진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가 되었고,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더라도 서로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다.

1654973617095.jpg“배고프다. 저 마족 머리 구워 먹으면 안 될까?”

1654973617095.jpg“……대체 우리 아버지는 널 뭘 보고…….”

1654973617095.jpg“왜, 아저씨가 뭐라고 하셨는데?”

1654973617095.jpg“아무것도 아니다.”

미세하게 발개진 휴고의 귀를 보고 엘리시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1654973617095.jpg“나한테는 너랑 혼약하면 어떻겠냐 하셨는데.”

1654973617095.jpg“……사……사슴! 방금 지나가는 걸 본 듯한데 잡아오겠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가는 휴고의 뒷모습을 보며 엘리시아가 장작을 몇 개 더 태워 넣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1654973617095.jpg“여기 사슴 없는데.”

  *** 아르티나 공작이 사라졌다는 것을 들은 당시의 황제가 기사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베르타샨 해방이 아닌, 아르티나 공작의 생사 확인이 목적이었다. 파견된 황실 기사들은 휴고와 엘리시아를 처음 마주한 그 순간을 평생토록 잊지 못했다. 처절한 피바다 위. 처연한 눈동자는 피를 뒤집어썼음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베르타샨 주둔 마족 우두머리, 무려 72 악마 중 하나의 목을 베어 한 손에 들고 있는 소년, 그리고 그 사체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 주변에 마족들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있음에도 소년과 소녀는 동요 하나 없었다. 그들은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공작과 어린 소녀에게 가슴 깊이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꼈다. 소름이 돋고 목이 침잠하여 감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1654973617095.jpg“으음- 돌아왔네, 드디어. 이제 집은 안 남았지만.”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까지 작은 소녀가 얼마나 많은 울음을 홀로, 속으로 삼켰을지는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과거 베르타샨 백작가가 거주하던 성은 폐허가 되고 이제는 성터만 남아 있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진 돌 위에 아주 어릴 적 엘리시아가 남긴 낙서가 남아 있었다.

1654973617095.jpg‘내 방을 이루던 돌인가 봐.’

엘리시아가 손끝으로 머금었다. 유년기의 흔적은 잔인한 짓밟음으로 모두 사라졌지만 기억은 여전했다. 가족들의 온기는 느낄 수 없지만 추억은 남았다. 엘리시아의 시야에 이번에는 불에 그을린 돌이 들어왔다. 거센 화마, 그 속에서 영지민들을 지키고자 소리치고, 칼을 휘둘렀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올랐다. 든든했던 그 뒷모습 옆에는, 자신들의 영지가 아니었음에도 함께 맞섰던 선대 공작 부부가 있었다. 엘리시아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잡힐 듯 선연한 그날들이 그리웠으나 끝내 울지는 않았다.

1654973617095.jpg“근데 이 영지는 그러면 어찌 되는 건가?”

파견된 기사 중 하나가 옆에 선 기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본디 멸문하면 영지는 국고로 환수되나, 이 경우는 애매했다. 모두 사망한 줄 알았으나 아직 엘리시아가 살아 있었으니, 엘리시아가 차기 베르타샨의 가주직을 이을 것인지에 따라 영지의 소유주가 달라지는 것이다. 부서진 돌에 걸터앉아 성터를 바라보며, 엘리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1654973617095.jpg‘가주직을 이어받으면 베르타샨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

평생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의, 형제의, 영지민의, 그 울분을 홀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겠지.

1654973617095.jpg‘그렇다고 이어받지 않으면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그건 싫다. 내 가족의 흔적이 남은 유일한 곳이니까. 낙서가 새겨진 돌과 불에 그을린 돌. 엘리시아는 두 개를 천천히 쓸었다. 나 오랜 시간 힘들었는데. 복수를 위해 여태 살아왔는데. 이제 조금만 편해지면 안 될까.

1654973617095.jpg‘사실 가주직을 이어받고 싶지 않아. 난 쉬고 싶어.’

그러면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원통해하실까. 어머니께서 화를 내실까. 아니,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니까. 원하는 길을 걸으라고. 어느 길을 택하든 아빠가 뒤에 있다고.

1654973617095.jpg‘어쩌지. 어떡하지.’

고민은 많았지만 선택은 곧바로 이루어져야 했다. 영주 없는 땅을 황실이 가만히 놀릴 리가 없었다. 가주직을 이어받고 이 영지를 하사받든, 가주직을 포기하고 이 영지를 버리든.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정반대의 두 길 위에서 엘리시아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휴고는 폐허가 된 성터에 그의 검을 꽂아 넣었다.

1654973617095.jpg“이봐.”

1654973617095.jpg“……?”

1654973617095.jpg“어떤 선택을 하든 베르타샨은 네 것이다.”

1654973617095.jpg“무슨-.”

1654973617095.jpg“네가 가주직을 이어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리 만들 테니.”

1654973617095.jpg“…….”

1654973617095.jpg“원하는 길을 걷도록. 그날까지 이 땅은 아르티나가 맡는다.”

휴고의 선언은 엘리시아에게 세 번째 길을 보여주었다. 휴고의 배려는 ‘시간.’ 베르타샨이 곧바로 국고로 환수되는 것을 막고 엘리시아에게 천천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준 것이었다. 휴고는 잘 알고 있었다. 쉽사리 짊어지기 어려운 그 무게를. 직접 그 길을 걸어온 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엘리시아가 가주직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아르티나의 가신으로 받아들여 이 땅의 소유권을 넘겨주겠다고. 공작가문 정도라면 뛰어난 가신에게 영토 한 둘쯤 하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된다면 엘리시아는 멸문한 베르타샨을 일으켜야 한다는 짐은 벗어두고 아르티나의 가신으로서 영지를 관리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책무는 벗고 소망은 이루게 되리라. 아르티나의 날개 밑에서. 아르티나의 비호를 등에 업고. *** 수도로 돌아오는 길, 엘리시아가 물었다.

1654973617095.jpg“아무리 공작가라고 해도 빈 영지를 흡수하여 관리하는 것은 황제 폐하와 쉽지 않은 거래를 해야 하는 일일 텐데. 왜 나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

휴고의 대답은 간결했다.

1654973617095.jpg“같은 길을 걷지 않았나. 그대와 나는.”

1654973617095.jpg“…….”

엘리시아는 문득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늘 코에 맴돌던 피비린내가 옅어졌다고. 베르타샨이 뒤로 멀어졌기 때문일까. 복수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란히 달리는 말머리 때문일까.

1654973617095.jpg“그래도 내가 짊어질 짐이었는데.”

거절하기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많이 힘들었으니 이제는 잠시 기대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바람소리에 흘려가도록 작게 투덜거렸다. 뛰어난 청력으로 이를 잡아낸 휴고가 웃었다. 일곱 해 만에. 그리고 말했다.

1654973617095.jpg“때론 누군가와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핏빛으로 얼룩진 나의 과거에, 나의 현재에, 바로 그 자리에. 그대가 나타남으로써 내가 그러했듯이. *** ‘나 왜 할아버지 없어?’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가만히 들은 이벨리아는 엘리시아의 무릎 위에서 꾸물꾸물 내려와 방으로 혼자 올라왔다.

16549736156784.jpg“흐아아앙- 히끅- 으아앙-.”

문을 닫고 침대에 털썩 엎드린 이벨리아는 이불을 돌돌 감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엄마랑 아빠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 나는 그렇게 처절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16549736156784.jpg‘아르티나, 아르티나. 나는 그 무게를 반의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

이 울타리는 그리 가벼이 입에 담을 것도, 그리 쉽게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왜 없냐며 찾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두 물러섬 없이 맞서다 눈을 감았다. 베르타샨 백작 부부는 영지민을 지키기 위해. 아르티나 공작 부부는 제국의 가장 드높은 귀족으로서 제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부모님 역시 세상에 맞서 피와 살을 깎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피운 꽃을 세 남매의 발밑에 아낌없이 뿌려준 것이었다.

16549736156784.jpg“으아앙-.”

내가 모르는 길을, 그 험한 길을, 때로는 다 내려두고 쉬고 싶었을 그 길을. 모든 힘을 다해 부딪치고 깨져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안아주고 싶었다. 마치 슈퍼맨 같았던 부모님의 처절한 일면을 엿본 어린아이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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