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나는 청혼도 못 받아?2021.05.27.
“짚 인형을요……?”
“뭐. 뭐가 잘못됐나? 황태자 된 도리로…… 됐다.”
민망함에 횡설수설하던 루드비히가 애써 위엄을 그러모으며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에 묻은 지푸라기를 재빨리 탈탈 털어내며. 태어나 뭔가에 이렇게 얽매인 적이 없는데. 루드비히는 혼란스러웠다. ***
“전하. 조금 천천히 걸음하셔도…….”
“무슨 소리. 오래도록 고생을 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마음이야 후다닥 달음박질을 하고 있었으나, 루드비히는 종종걸음을 걸으며 제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정복을 갖추어 입고 급히 걷는 그 표정은 평소와 같이 의연하여 그의 초조함을 눈치채는 이는 달리 없었다. 황제와 루드비히가 가장 상석에 앉아 알현을 허가하자 사절단원들이 알현실로 들어와 예를 올렸다. 어두운 빛의 정복들 사이에서 톡 튀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쫄랑쫄랑 걸어오는 이벨리아는 제법 시선을 끌었다.
‘앗, 식량 도둑이다!’
이벨리아는 상석에 앉은 루드비히와 눈이 마주치자 비밀기지에서 하던 것처럼 한 손을 반짝 들어 인사를 하려다가.
‘아차, 목 뎅강 조심.’
황제와 사절단원들을 의식하였는지 마치 볼이 가려워 긁으려고 했던 것처럼 볼을 매만지며 얌전히 내려두었다. 이를 알아챈 루드비히가 실소를 머금자 이벨리아가 웃지 말라는 듯 남몰래 슬쩍 노려본 것은 덤이었다. 황제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어제 늦은 저녁 복귀했다고 들었네.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았을 것은 내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나, 사절단의 성과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성과가 적지 않습니다. 급히 보고드릴 사항들도 있었으니, 이리 자리를 마련해주심에 깊이 감읍할 뿐입니다.”
지금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친우가 아니라 엄연한 군주와 신하의 관계. 극상의 예를 갖추어 화답한 휴고가 황제 곁에 시립해 있던 시종에게 간밤에 작성한 두터운 보고서를 내밀었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어 몇 장 넘기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이걸 언제 작성했나?”
“어젯밤에 작성했습니다만.”
“어젯밤에 복귀한 것 아니었나?”
“예. 뭐 잘못된 점이 있습니까?”
“……사람답게 좀 살아봐, 공작.”
어젯밤 늦게 귀환해놓고 이렇게 두터운 종이 뭉치를 완성해 태연히 건네는 그 태도가 가히 이 제국의 워커홀릭이라고 칭할 만했다.
“이 자리에서 더 물을 것도 없겠군. 읽어보고 따로 대면토록 하지.”
“그러시지요.”
칼라일의 시선이 사절단원들을 천천히 훑었다.
“자, 모두들 고…….”
고생했다 한마디 치하하고자 함이었건만.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는 반짝이는 눈 하나가 보였다.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게 과히 반짝인다.
“음. 마무리하기 전에. 혹시 공녀도 따로 보고할 것이 있나?”
핫, 내 차례! 이벨리아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 환히 웃었다.
“직접 보고드릴 기회를 얻어 영광입니다, 폐하.”
“그래, 우리 공녀도 아주 큰 성과를 얻어왔다지? 사절단원으로서 어떤 업무를 했는지 자세히 보고해보거라.”
“바쁘진 않으신가요, 폐하?”
“공녀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없어도 내어야지.”
공작이 저리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찌 공녀의 보고를 지나칠 수 있겠나. 칼라일의 시선이 휴고를 향했다. 황제의 오랜 친우는 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하르벤타 제국에서 특히 맛있게 먹었던 것, 자연 그대로였던 후원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에르카디아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하르벤타의 황제 폐하께 직접 진상도 하였습니다.”
“공녀가? 무엇을?”
“후원에서 잡은 뱀을요. 황제 폐하께서 뱀 모가지를 잡고 아주 즐거워하셨습니다.”
‘이상하다? 하르벤타의 황제는 뱀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공녀가 진상(珍賞)을 한 것이 아니라 진상을 부리고 온 것은 아닌가…….’
“또 친구도 사귀었습니다! 이샤트와 아드니엘. 둘 다 저랑 같은 나이인데, 뱀과 유령을 아주 무서워하는 귀여운 겁쟁이예요.”
‘하르벤타의 황태녀는 장군감으로 소문이 자자한데 겁쟁이라? 공녀가 소드마스터와 대악마, 용을 위시하여 겁을 준 것은 아닌가…….’
그 친구들과 고민 상담을 해주고 돈을 번 일, 바닥에 소금을 뿌리다가 넘어져서 황궁 복도를 난장판으로 만든 것 등도 빼놓지 않고 자랑했다. 맑은 눈과 청량한 목소리로 잇는 이야기는 황제 이하 그 자리의 모든 관료들의 귀를 서서히 매료시켰다. 그들에게는 정치와 암투로 가득 찼던 방문이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자리로 다가왔단 것이 신선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진 이벨리아의 자랑이 끝나자 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사절단원들에게 물었다.
“이거, 아무래도 가장 큰 성과를 얻어 온 사절단원은 공녀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제가요?”
사절단원들은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으로써 긍정을 표했다. 이벨리아가 얻어온 것은 사람. 국가 간의 교류에서 돈, 보석, 영토, 항구, 그 어느 것보다도 얻기 어려운 것. 이벨리아가 에르카디아 제국에 있는 한, 두 제국은 현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도 보다 쉽게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릴 적 맺은 진득한 인연은 쉬이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지배자들 사이의 정치는 때로 사심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냥 먹고 자고 싸고 놀다가 왔는데…….’
그랬는데 모두가 잘했다 칭찬하니 얼떨떨하면서도 뿌듯하다. 칭찬받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뱀을 선물해서인가보다. 나름의 이유를 찾고 나니 헤실헤실 웃음이 풀려나왔다.
“아, 하르벤타의 황자가 뭐 혼인이나 부인이나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고?”
황제가 지나가는 어조로, 그러나 그 눈에는 예리함을 담고 물었다. 황가의 일원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약혼으로 관계를 다져놓는 경우가 많으니 하르벤타의 황자가 이벨리아에게 혼담을 넣는 것도 영 없을 법한 일은 아니었다. 어젯밤에 기사들을 두들겨 패느라 청혼 이야기를 듣지 못한 휴고도, 사실은 아까부터 바로 이것이 묻고 싶었던 루드비히도 귀를 쫑긋 세웠다.
“아, 맞다. 오라버니들 말로는 청혼을 한 거래요! 그렇지만 싫어! 라고 말했어요.”
“…….”
“…….”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게 지금 그렇게 해맑게 얘기할 내용의 것이 아닌데?
‘감히, 어떤 쭉정이가 내 딸을.’
정적 끝에 의미가 와 닿자 휴고의 살기가 알현실을 덮었다.
‘감히, 타 제국의 애송이가 우리 제국의 보물을.’
황제가 지금 당장 통신구를 연결하라 소리쳤다.
‘감히, 시뻘건 황자 놈이 내 친구를.’
루드비히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는 처참하게 바스러졌다.
어화둥둥 바라보던 아빠와 아빠 친구와 그냥 친구의 분위기가 급변하자, 다들 왜 이러지, 싶은 이벨리아가 불붙은 집에 기름을 부었다.
“나는 청혼도 못 받아?”
그 말에 돌아보는 휴고와 루드비히, 칼라일의 눈이 마치 지옥을 헤치고 나온 악귀와도 같아 이벨리아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못 받는다.”
“지금은 안 돼!”
“그대는 아직 아가다, 공녀.”
다 같이 들기로 했던 점심 식사는 그대로 파투였다. 황제는 사절단원들을 모두 물렸다.
“가만. 이거 오래간만에 하르벤타의 황제에게 연락을 좀 해야겠구먼.”
“경고하시려는 거면 같이 가시죠.”
“경고는 무슨. 협박일세.”
“저는 황태녀에게 그걸 좀 해두어야겠습니다.”
각기 하르벤타 제국과의 연락을 취하고자 황제와 휴고는 황제의 집무실로, 루드비히는 황태자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통신구슬도 그 성능에 따라서 크기가 달라지는데, 하르벤타 제국까지 연결되는 통신구슬은 손으로 들고 다니기엔 적절치 않을 정도로 커서 각 집무실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도 친구도 모두 쌩하니 사라져버리자 알현실에 덩그러니 남은 이벨리아가 한참 눈을 슴벅였다.
“카론, 내가 뭐 잘못했어?”
“……아무래도 다음 마족 토벌은 북부가 아닌 하르벤타 제국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족 때려잡다가 실수로 황족을 때려잡으면 그것참 안타깝겠군요. 카론 또한 분노에 찬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대답은 아니었다. *** 황제의 집무실. 칼라일과 휴고는 하르벤타 제국의 황제 세필리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오! 이게 누구야! 잘 돌아갔…….”
세필리아가 미처 안부를 묻기도 전, 고개만 까닥한 휴고가 다짜고짜 공격을 던졌다.
“황자 간수 잘 좀 하시지요. 예로부터 주제를 모르는 황족은 단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다른 제국 황제라고 휴고가 애써 없는 예의를 긁어모은 협박을 하였다면.
“그 제국 황자는 벌써 부인이 어쩌고저쩌고 한다던가? 응? 그것도 우리 제국의 공녀한테? 에잉, 문란해가지고는. 쯧쯧.”
칼라일은 그 성질머리 그대로를 쏟아부었다. 황자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세필리아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잘 먹고 잘 놀고 돌아가 놓고 도착하자마자 연락해서 이게 웬 행패란 말인가. 그럼에도 세필리아의 만면에는 미소가 번졌다.
“……우리 황자가 공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말이지.”
“그 웃음 집어치우게, 황제.”
“흐흐.”
“정식으로 혼담을 넣는다면, 선전포고로 잘 둘러 알아들겠습니다.”
“뭐, 애들 일이야 커가면서 애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는가. 공녀가 우리 황자 좋다면 그대들이 뭐 어쩔 것이야.”
이것 참. 내가 아들 농사 한번 잘 지었구먼. 우리 황자가 아주 그냥 보는 눈이 제대로 박혔어. 칼라일과 휴고의 경악 어린 표정을 무시한 채, 세필리아가 통신구 연결을 끊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 한편 황태자의 집무실. 루드비히는 황태녀 이샤트에게 연락을 취했다. 통신구에 연결을 의미하는 붉은 불빛이 반짝이자, 루드비히가 변죽을 올리지 않고 다짜고짜 본론을 내뱉었다. 단도직입적인 것은 어른들이나 루드비히나 매한가지였다.
“그대의 동생이 우리 제국의 공녀에게 부인이 되어 달라 했다더군.”
언짢음을 가득 담고 동생 관리 좀 잘하라며 일갈하려던 찰나. 이샤트의 고운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아니, 이 새끼가?”
“……?”
“걱정 말도록. 주제 모르는 동생은 엉덩이를 걷어차 줄 터이니. 내 동생과 혼인하기엔 이브가 너무 아까워. 그렇지 않나. 이브는 예쁘고 용감하고 따뜻하니까.”
“……의외로 말이 좀 통하는군. 확실히 그렇지.”
“동의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대도 사람 보는 눈은 있군.”
“짧은 기간 동안 이를 알아챈 것을 보니 그대 역시 인재 보는 눈이 밝군.”
이 자식, 뭘 좀 아는 자식이야. 통신구를 통해 마주친 어린 지배자들의 눈빛이 신뢰를 담았다.
“그대는 이브랑 친한 친구인가?”
“음. 그렇지. 심지어 비밀기지도 함께 쓰고 있으니.”
“비밀기지? 비밀기지를 이브와 함께?”
“뿐만이 아니다. 이브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동무였지.”
“와, 진짜 부럽다.”
살짝 으스대니, 이샤트의 목소리가 부러움을 담뿍 담아냈다.
“아, 사실 이브가 만들어준 빵도 먹어봤지. 아주 맛있더군.”
“공녀가 빵도 만들어 주다니! 둘이 진짜 친하구나!”
루드비히의 얼굴이 슬슬 통신구 쪽으로 기울었다.
“하나만 더 자랑하자면, 뭐 별것 아니긴 한데, 난 이브의 집에도 가본 적이 있다.”
“우와! 그 정도면 거의 뭐 영혼의 단짝 그런 거 아니야?”
“흠. 흠.”
이샤트가 순수하게 쿵짝짝 장단을 맞춰주자 루드비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황태녀로군. 아주 경우가 바른 이야.’
사사로운 감정에 심히 휘둘리고 있는 황태자 루드비히의 마음속에서 이샤트에 대한 호감도는 상당히 빠르게 자라났다.
“그,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에르카디아 제국을 한번 방문하도록. 내 절친한 친구를 환대해 주었으니, 나 또한 섭섭함 없이 대접하도록 하겠다.”
“그래! 이브랑 같이 보면 더 좋겠다!”
“이브는 워낙 바쁜 몸이지만, 내가 절친한 친구로서 잘 이야기해 보겠다.”
“고맙다, 이브의 절친한 친구!”
통신을 끊고 만족스럽게 웃은 루드비히는 지난 보름간의 습관처럼 비밀기지로 향하려고 일어서다가 멈칫했다. 아, 알현실에 땅 도둑 혼자 어리둥절하게 서 있을 터였다. 가벼웠다. 집무실을 나와 알현실로 돌아가는 그 발걸음도, 땅 도둑이 없는 동안에는 묵직하게 들어차던 호흡도. 오늘 아침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스치는 공기에서 문득 이를 깨달은 루드비히의 발걸음이 일순 멈추었다. ……무겁다. 새삼 너의 존재가 무거웠다. 관계란 상대에 따라 미세한 먼지에 비유되기도, 때로는 중력에 비견되기도 한다 들었건만. 발걸음마저, 공기마저 달라지게 하는 그 존재의 무게는 그 어떤 저울로도 감히 잴 수 없으리라.
‘내가 네 곁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루드비히가 조소했다. 곁은 무슨. 실상 나는, 네 발치 아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