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지푸라기! 대답 좀 해봐!2021.05.24.
엘리시아가 이벨리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조곤조곤 교육을 시작했다.
“아가. 누가 결혼이라던가, 부인이라던가, 그런 같잖은 것을 지껄이거든…….”
“그건 좋은 거 아니에요?”
“……물론 좋은 거지. 물론 아름다운 거긴 한데, 우리 아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안 돼. 하여튼 누가 그런 말을 꺼내거든, 저번에 알려준 급소를 차버리렴.”
“급소! 나 알아! 소- 으읍-.”
배운 것을 표현하려던 작은 꼬맹이의 입을 엘리시아가 재빠르게 틀어막았다.
“그 단어는 어디 가서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고 했지?”
“엄마가 가르쳐 줬는데!”
“……우리 아가가 기억하기 쉽게 가르쳐 준 거지.”
거짓이었다. 명백한 실수였다. 휴고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엘리시아는 실상 입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실제로 대(對) 마족 전략을 지휘할 때의 엘리시아는 황제 칼라일과 휴고조차 얼어붙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니 어린 딸에게 치근덕대는 사내놈들을 떠올리다가, 적나라한 용어를 사용할 뻔한 것도 과거의 입버릇에 기인한 실수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황급히 선회한 것이었다. 뱉고 나니 선회한 단어가 어쩐지 더 이상하기는 한데, 어쩌겠는가, 이미 딸 앞에서 말실수를 해버렸는데. 엘리시아는 본인이 실수한 것을 휴고와 아들들에게 들킬까 봐 이벨리아의 입단속을 아주 철저하게 했더랬다.
“…….”
“…….”
아르칸과 세드릭이 시선을 마주치다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현명하고 고아하신 어머니께서 아가에게 품위 없는 단어를 가르쳐 주셨을 리는 없지. *** 엘리시아가 잠시 2층으로 올라간 사이. 아르티나 기사단의 입버릇을 고친 휴고가 돌아왔다. 연무장으로 향했던 그 많은 기사들 중 휴고의 뒤를 따라서 공작저로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련을 빙자한 일방적인 구타는 제아무리 맷집 좋은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연무장 바닥을 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응접실로 돌아오자마자 휴고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두 아들의 표정이 나름대로 심각했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단어가 뭐야, 아가?”
“오라버니들한테도 가르쳐 줘.”
음. 부인이 우리 아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나 보군. 휴고가 튜닉을 벗으며 무심히 귀를 기울였다.
“비밀인뎅. 엄마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랬는뎅.”
잠이 오는지 반쯤 눈을 감고 옹알거리는 딸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오라버니들한테만 살짝 말해줘. 응?”
별것도 아닌 일에 아르칸이 저리 집착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기에, 이쯤 되니 휴고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그렇다 치고 아르칸은 필요 없는 것에는 일절 무심한, 딱 휴고 본인을 그대로 빼다 박은 성정이었으므로.
“아니야. 비밀이야. 엄마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쉬이- 오라버니들이 꼭 비밀로 지킬게.”
“그래, 말해주면 내일 베이베 과자 챙겨줄게.”
세드릭이 요즘 들어 이벨리아가 가장 빠져 사는 ‘베이베’ 과자를 준다고 한 번 더 어르자 이벨리아가 밀려오는 졸음에 두 눈을 꼬옥 감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진짜로 비밀인데…… 소중한 달걀…….”
뭔 달걀?
“뭐?”
“무슨 달걀?”
꿈나라로 떠나려는 이벨리아의 통통한 볼을 잡고 오라버니들이 한 번 더 묻자 귀찮아진 이벨리아가 고개를 팩 돌리면서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소중한! 달걀!”
“…….”
그 소중한 달걀이 내가 아는 그 소중한 달걀이 맞는가. 진짜 소중한 그것. 귀를 의심한 아르칸과 세드릭이 재차 되물었으나 이미 깊은 숙면에 빠진 병아리는 답이 없었다. 돌아오려던 엘리시아는 제 딸이 약속을 어기고 그녀의 실수를 또박또박 외치는 것을 들었다. 배신자 딸! 비밀로 해달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결국 그녀는 얼굴이 발개져 오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도무지 남편과 아들들을 볼 낯이 없었다.
“……하.”
딸을 방에다가 눕히기 위해 안아 든 휴고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고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그의 딸이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키우는 것. 공녀쯤 되면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작저 내에 이토록 배신자가 많으니 원.
“부인마저…….”
그의 작은 딸은 제 어머니에게 예의를 곁들인 생존법을 착실하게 배워가고 있었다. 냉정하고 이지적이면서도 때론 어딘가 한구석 맹한 어머니의 성정을 꼭 닮아서는. 엘리시아가 어련히 알아서 교정 교육을 해주겠지, 싶어 안일하게 생각하던 휴고는 머지않은 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와 아르티나 기사들 몇을 대동하고 야시장을 구경하던 중. 한 여인을 두고 희롱하는 남자들에게 우다다 달려가 노호한 것이었다.
“네놈들의 소중한 달걀을 깨부숴버리겠다!”
하필이면 번화가에서, 하필이면 후드를 벗고. 비장하게 두 주먹을 꼬옥 쥔 채로. 이를 눈앞에서 본 아가레스와 기사단은 땅을 치며 폭소했다. 단언컨대 아가레스 악마 생에 그리 웃어본 건 처음이었다. 어디서 엉뚱한 말을 배워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위풍당당하게 내뱉는 그 모습은 곱씹을 때마다 웃음을 흘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두고두고 회자할 이벨리아의 정의로운 흑역사였다. ***
“저리 가-!”
어젯밤 자신이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에게 어떠한 충격을 안겨 주었는지도 모른 채, 꿀잠을 자고 일어난 이벨리아가 아침 댓바람부터 꽤액 소리를 질렀다. 어제 아기씨로부터 팽하니 버림을 받아 주군에게 신명 나게 두들겨 맞은 아르티나 기사단은 오늘,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공작저로 왔다. 우리 이만큼이나 때찌를 당했다면서 아기씨로부터 호- 라도 받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붕대로 돌돌 감긴 그들을 본 아기씨는 놀란 병아리처럼 이리 푸드덕, 저리 푸드덕 피해 다니실 뿐이었다. 막상 저렇게 놀라면서 도망을 다니시니 또 놀리는 재미가 있어, 기사단은 좀비처럼 양팔을 앞으로 뻗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이벨리아의 뒤를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아기씨…… 으어어…….”
“아기씨, 저희 아파요…….”
“이브 금지령! 이브 금지령!”
“우리 아기씨…… 끄어어-.”
“카론! 카론! 저 붕대 괴물들을 무찔러라!”
그렇게 30분가량 계속된 추격전은 휴고가 아르티나 기사단원들 사이로 무려 진검을 내던지며 마무리되었다. 오밀조밀 붙어서 서 있던 기사들 정중앙으로 오차 없이 날아 들어와 내리꽂히는 진검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어제 그렇게 훈련을 하고도 아직 부족했나. 황궁에 다녀와서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아이고, 어제 훈련을 호되게 받았더니 안 아픈 곳이 없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다 아프니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 아이고.”
휴고의 한 마디에 기사단은 장난삼아 감아두었던 붕대를 돌돌 풀고는 세상 엄살은 다 부리면서 미적거렸다. 이를 한심하게 지켜보던 집사 하델은 고개를 저었다.
‘저 대형견들…….’
우당탕탕 뛰어다니느라 흐트러진 가구, 카펫, 바닥에 떨어진 붕대들을 치우라고 지시하는 것은 모두 하델의 몫이었다.
‘대체 저것들이 어찌 그런 대단한 무명(武名)을 쌓았는지, 원.’
공작저에서는 몬스터의 눈먼 몽둥이에 맞아서 세상 하직을 해도 수십 번을 했을 법한 가벼운 태도와 둔감한 신경을 가진 주제에. 전장에 나서면 시퍼런 안광을 흘리며 손속을 두지 않고 적을 도륙한다는 그 간극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허구한 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대는 아르티나 기사단은, 공작저를 완벽하게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결벽증 하델에게는 천적이었다.
‘애초에 주인님께서 저것들을 부르신다 하셨을 때 이 한 몸 부서져라 막았어야 하는 것을.’
하루에도 수십 번 밀려오는 회한. 바닥에 떨어진 붕대를 주우며 오늘도 반복하던 차였다. - 쨍그랑!
“앗, 컵이 깨졌다.”
“아이고, 우리 아기씨,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위험하니 잠시 앉아 계시지요. 제가 잘 정돈해두겠습니다.”
“미안해. 내가 컵을 떨어뜨렸어.”
“당치도 않습니다. 떨어진 컵이 잘못했지요.”
- 쿠당탕!
“헉, 의자가 넘어갔다.”
“이 못된 망아지들이! 당장 나가십시오! 그 거대한 몸 간수가 안 되면 들어오질 말란 말입니다!”
방금 아기씨가 컵을 깨신 걸 우리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컵을 깨고 나니까 하델이 어떻게 대하는지도 분명히 봤는데. 기사단의 입이 삐죽였다.
“뭐야, 하델 왜 우리한테만 그렇게 소리 꽥 질러?”
“그래, 아기씨한테는 어디 다친 곳 없냐고 물어보면서. 왜 우리한텐 안 물어봐?”
“당신들 때문에 저택이 다치고 있지 않습니까. 나가십시오. 어서!”
“하델, 이러면 나 진짜 서럽다?”
“그래, 나도 진짜 속상하다?”
“여자친구 없다고 우리한테 이러면 정말 서운하다?”
하델이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존댓말 해줄 때 당장 나가.”
*** 이벨리아의 외출을 돕는 비비안은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동대륙으로 다녀오신 일수는 고작 보름 남짓일진대, 체감상으로 몇 년은 흐른 듯했다. 후작가 이상의 영애들만 착용할 수 있는 보라색 드레스 위에 흩뿌려진 황금색 머리칼은 밤하늘의 별과도 같았다. 고귀함을 상징하는 보랏빛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분은 우리 아기씨밖에 없을 것이라고 비비안은 장담했다.
‘언제 이리 크셨나.’
첫 생일을 축하해드렸을 때, 맑게 웃으셨던 그날이 고작 얼마 전만 같은데. 이 부족한 것의 손길이 조금만 더 아기씨께 닿을 수 있도록, 천천히 자라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주책맞게 자꾸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감추고 비비안이 이벨리아의 머리를 빗어 내린 뒤 자수정으로 만든 보석 핀을 끼워주었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하는 향유를 막 바를 무렵, 휴고가 방문을 두드렸다.
“다 되었나.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일견 가벼워 보인다 해도 칼라일은 황제. 하루 일정이 아주 빼곡하게 짜여 있었다. 사절단원들은 오전에 보고를 올리고 함께 점심을 들기로 하였기에 늦어선 곤란했다. 휴고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루하게 치장하는 시간을 참느라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이벨리아가 폴짝 뛰어서 문을 열어젖혔다.
“아빠! 이 드레스 어때요?”
드레스 어떠냐는 듯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도는 딸이 사랑스러웠다. 휴고는 아직 솜털처럼 가벼운 딸을 번쩍 안아 들며 답했다.
“우리 딸이 더 예쁘다.”
“나 이제 무거워서 이렇게 번쩍 들면 아빠 팔 아야 하는데.”
두 팔로 목을 폭 감싸며 칭얼거리는 말에, 휴고는 그저 웃었다. 아마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혹은 영겁의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의 딸이 안기에 무거운 존재가 되는 일은 없을 터다. 아무리 자라더라도,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그에게는 품에 안고 얼러야 할 어린아이일 테니까.
“아빠, 나도 황제 폐하한테 말씀드려도 돼요?”
“그럼.”
이벨리아는 또 자기 나름대로 사절단원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어깨를 한껏 올리고서 나 이-따만큼 잘했다며 자랑을 하고 싶었다.
‘아르티나의 충성을 잃고 싶지 않다면 듣고 가라지.’
조금 전까지 황제의 빠듯한 일정을 고려하던 휴고는 쉽게 말을 바꿨다. 황제의 바쁜 일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무거웠던 충성심은 작은 딸이 태어남과 동시에 딸의 무게보다 가벼워졌다. 카론 또한 아르티나 기사단의 정복으로 갈아입은 채 이벨리아의 방문 앞에 시립하고 있었다.
“카론. 카론.”
“예, 아기씨.”
“나도 황제 폐하께 보고드릴 거야.”
1층 계단으로 팔랑팔랑 뛰어 내려가며 이벨리아가 카론에게 자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절단 보고가 되겠군요. 어떤 보고를 하실 예정이십니까.”
“전부 다!”
아마 먹고 자고 놀고 오신 것뿐일 터인데. 그 누구보다 큰일을 해낸 것처럼 콧대가 바짝 올라선 아기씨의 행태에 카론은 별말 없이 웃음을 흘렸다. *** 루드비히는 이른 새벽부터 연무장에서 검을 내리긋다가, 집무실을 서성거리다가, 종국에는 궁 안 이곳저곳을 괜스레 돌아다니며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지 살폈다. 한마디로, 단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이는 어젯밤에 이미 사절단의 귀국 사실을 들은 탓이었다.
‘오늘 오전에 보고를 위해 방문한다 했는데.’
그리고 그가 아는 땅 도둑은 이런 자리에 빠질 자가 아니니 아마 뽀르르 달려와 자랑을 할 터였다.
‘해 뜬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서성거리고 있으니 시간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애꿎은 사절단원들의 느린 걸음을 탓했다.
“사절단원들의 보고가 오늘 오전이라 하지 않았나?”
“예, 전하.”
“해야 할 보고가 산더미일 터인데 이리 늦게 와서야.”
“송구하오나 전하, 아직 아홉 시도 채 안 되었습니다.”
“…….”
루드비히가 애꿎은 시계 초침을 노려보았다.
‘아니 잠깐. 이 시계는 왜 아까랑 바늘 위치가 똑같아?’
고장이 분명하다. 루드비히가 위엄 있는 손짓으로 시종장을 불렀다.
“이 시계, 아무래도 고장 난 것 같으니 새것으로 가져오도록.”
“송구하오나 전하, 시계는 지극히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루드비히가 민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감춰 물었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시계 초침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평소에는 그토록 잘 가던 시간이 배는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무슨 말만 하면 자꾸 송구하다며 고개를 조아리는 시종장을 보기도 민망했다. 그리하여 결국 무엇이라도 해보고자 검을 들고 다시 나온 연무장. 항상 생각을 비우기 위해 휘두르던 검이, 오늘만큼은 굳이 사색을 비우지 않고 담아냈다.
‘궁금해. 네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왔는지.’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의 첫 여행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제국의 황태자로서 사절단원들의 업무 성과를 알 의무가 있으니까. 그런데, 단지 궁금증 때문에 내가 이토록-.
“…….”
늘 한 치의 흐트러짐 없던 루드비히의 검 끝이 사선으로 빗나갔다.
‘사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왔는지는 비밀기지에서 들어도 늦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녘부터 참을 수 없도록 초조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 대륙에 네가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토록 비밀기지를 드나들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보고 겪었는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가 손 밖으로 빠져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또르르 굴러간 것처럼 불안해서, 허전해서, 목이 타서. 그래서.
“…….”
감정을 담은 검이 몇 번 머뭇거리다가 결국 발치로 던져졌다. 땅 도둑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댈 곳이 없는 것이, 고민은 혼자 떠안는 것이, 그 모든 것이 명제처럼 당연했는데. 이제는 그때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에게 곁을 준다는 것에. 뻔질나게 비밀기지를 드나든 것은 그 때문일 것이었다. 어쩐지 늘 그랬던 것처럼 작은 친구가 무언가를 오물거리면서 ‘안녕, 식량 도둑!’하고 반겨줄 것 같아서. 오렌지주스, 금낭화, 쿠키 등을 하나하나 가져다 놓는 바람에 오두막의 작은 테이블을 가득 차게 만든 것도 이 때문일 것이었다. 먼 여정을 다녀온 그의 친구가 돌아왔을 때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찬 비밀기지를 보고 행복감을 느꼈으면 해서. 그래서 내게 비밀기지가 이토록 소중한 것처럼 너 또한 앞으로도 그 장소를 아껴주었으면 해서. 멍하니 서 있던 루드비히가 지금까지 그의 검을 받아내던 수련용 짚 인형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정상이 맞나?”
수련용 짚 인형은 대답이 없다. 눈가 쪽 지푸라기가 일어난 것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루드비히가 짚 인형의 어깨를 잡고 짤짤 털었다.
“지푸라기! 대답 좀 해봐!”
“저……전하? 사절단원들이 왔습니다만…… 혹시 뭘 하고 계시던 건지……?”
시종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영민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짚 인형을 왜……. 루드비히의 얼굴에도 민망함이 스쳤다. 내 위엄. 되찾아야 한다.
“……짚 인형이 참 고생이 많아. 내 검을 의연하게 받아내어 치하하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