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전우애는 개나 줘라2021.05.20.
휴고는 냉엄한 시선으로 기사단을 훑다가, 바득 이를 갈았다. 몸에 좋고 맛도 좋다고 외친 자들 사이에 휴고가 그토록 신임해 마지않는 기사단장 에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저 미친개들의 단장인데 정상일 리가 없긴 했다.
‘시끄럽게 미친 것과 조용하게 미친 것의 차이인가.’
휴고가 당장이라도 사달을 낼 것처럼 위협적인 걸음으로 기사단의 지척까지 왔으나, 지금 기사단에게는 주군의 기분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며칠 만에 본 아기씨로부터 하르벤타 제국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에 정신이 온통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잡으신 뱀은 어찌하셨는지, 혹시 누가 괴롭히진 않았는지, 감히 누가 집적대지는 않았는지. 묻고 답을 들을 것이 한가득이었다. 기사단이 이벨리아 주변에 쪼르르 앉았다.
“아기씨가 고아 드셨습니까?”
“아아니, 하르벤타 제국의 황제 폐하께 선물로 드렸지! 몇 마리 더 잡아서 이샤트랑 아드니엘도 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이고, 대견하셔라!”
“용감하시고 심성도 바르셔라!”
우리 아기씨가 뱀을 때려잡아 타 제국 황제에게 선물로 올렸다니. 세상 기특해서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소중한 아기씨를 바라보느라, 기사단은 평소라면 기민하게 느꼈을 주군의 기운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그 때문이었다. 뒤에서 살벌한 기세를 뿜어대는 휴고의 심문에 냉큼 답하는 우를 저지르고야 만 것은.
“……뱀탕 좋아하나.”
“아, 뱀탕 좋죠, 주군. 말이 나오니 또 당기네.”
이벨리아의 앞에서 재롱을 떨어대던 알렉이 입맛을 다시며 자백했다.
“뱀술은.”
“크으- 전쟁터에서 밤에 먹는 뱀술은 낮에 전사한 자도 살아 돌아오게 하는 맛이죠.”
헤롤드가 혀를 차 똑- 소리를 내면서 술잔을 털어 마시는 시늉을 해 보이자, 이벨리아가 헤롤드를 따라 똑- 소리를 냈다.
“똑-. 뱀술 똑-.”
‘……기억 일부만 지우는 마법 없나. 새끼 용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휴고 일생에 지금만큼 마법이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꽃밭이어야 마땅할 제 딸의 머릿속에서 되지도 않는 뱀타령을 지우고 싶었다.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가득 차 있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들이 진짜…….
“……연무장으로.”
“예에?!”
“지금요?!”
이 시간에요? 아기씨랑 더 놀고 싶은데? 기사들의 얼굴에 무진장 싫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네놈들이 얼마나 지껄여댔으면 이브가 뱀술 뱀탕 타령을 하면서 뱀을……! 다들 집합.”
“억.”
기사단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언젠가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 주군께 들키면 혼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기씨가 뽀르르 달려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실 때면 할 말 안 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줄줄이 읊어댈 때부터. 뱀타령도 개중 하나였다. 우리 귀한 아기씨에게 가르쳐드리려고 의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세세히 말씀드리다 보니 어쩌다가 나온 얘기였을 뿐이었다. 아기씨가 배앰-? 하고 고개를 갸웃, 눈을 반짝, 몸을 동동 깜찍한 반응을 보이시기에 약 100여 분간의 전쟁 얘기 중 뱀 얘기가 80분을 차지하게 된 것뿐. 그러니 기사단은 퍽 억울했다.
‘주군께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리고 항변해야겠다.’
그렇게 아기씨의 반짝이는 얼굴에서 눈을 떼고 주군을 바라보니.
‘주군 표정이 적장 목 치기 직전의 표정이다.’
그제야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생존본능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기사단이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이건 설명을 드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동료를 팔자.’
‘팔아야 산다.’
조용히 눈을 마주치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외쳤다.
“뱀타령은 단장님!”
“뱀탕과 뱀술은 알렉과 헤롤드입니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는 오히려 뜯어말렸습니다!”
“아니…… 다들 분명 아기씨 관심 끌어보겠다고 색색깔 뱀을 다 얘기해놓고…….”
“그래! 거기 너, 너는 뱀탕에 후추를 두 숟갈 넣어야 맛있다는 말까지 했으면서!”
알렉과 헤롤드, 에딘이 원망 어린 눈으로 전우들을 훑었으나 시선을 받는 기사들 중 그 누구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았다. 전우애 따위 개나 줘라. 전쟁터에서는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아르티나 기사단의 전우애는 주군의 처벌 앞에서만은 모래알처럼 바슬바슬 허물어졌다. 그 광경을 보던 휴고가 더욱 열이 받은 건 당연지사. 단정히 묶인 크라바트가 신경질적인 손짓에 거칠게 풀어졌다.
“연대책임. 전부. 집합.”
“아, 아니, 주군…….”
뭐라 더 스스로를 변호해보고자 했건만. 한 음절, 한 음절 뚝뚝 끊어지는 주군의 서릿발 같은 음성과 차디찬 금안을 보자니, 더 버티다가는 아기씨가 계신 바로 이 자리에서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을 것이 자명했다.
‘도……도와주세요, 아기씨.’
‘살려주세요, 아기씨.’
‘저희랑 같이 즐거워하셨잖아요, 아기씨.’
마지막으로 이벨리아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 보았으나,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작은 아기씨의 표정은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라는 듯 동글동글 맑았다.
“왜들 그렇게 봐? 다들 이 마들렌이 먹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고, 제발 자비 좀…….’
“안 돼. 마들렌 안 줘. 돌아가.”
기사단의 마지막 희망은 영 눈치가 없었다. *** 연무장에서는 검을 맞부딪치며 대련을 하는 소리라기보다는 퍽퍽 주먹다짐을 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밤공기를 타고 어렴풋이 소리가 들려오자,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대단해. 우리 아빠도 대단하고 기사단도 대단해.’
이렇게 늦은 밤까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지.
‘나도 본받아야 해. 나도 아르티나니까.’
기사단이 후드리챱챱 맞고 있는 줄은 모르고 다들 훈련을 하러 갔다고 생각한 이벨리아는 아빠와 기사단을 기다리며 응접실 소파 위에 몸을 동글게 말고 앉았다.
“자. 아가 코코아.”
“자. 아가 쿠키.”
아르칸과 세드릭이 각자 코코아와 쿠키를 양손 가득 들고 와 이벨리아에게 건네주더니, 둘이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두 형제 모두 남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엔리르의 앞에 슬며시 밀었다. 귓가가 살짝 붉어진 채로.
“용. 너도 먹어. 이건 네 것.”
“이것도 먹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쿠키야.”
“나……?”
“흠. 흠. 아까 우리 아가한테만 얘기한 것 같은데. 용, 너도 잘 다녀온 걸 봐서 기……기쁘다!”
세드릭이 볼까지 새빨개져서는 끝을 후다닥 마무리했다.
“흥. 그……그쯤이야. 나는 위대한 용인데.”
엔리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쿠키를 머금은 입은 씰룩이고 귀는 쫑긋 서고 꼬리는 빠르게 살랑댔다. 날개는 파닥파닥 경쾌하게 움직였다. 아르칸이 두 동생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가. 하르벤타는 어땠어? 누가 괴롭히진 않았어?”
“응, 아무 일도 없었어. 이샤트랑 아드니엘이랑 아주 재미있게 놀았어! 황제 폐하의 정원에서 뱀도 잡으면서!”
하현달이 떴던 그날 밤, 암살자들이 들이닥쳤던 일을 이벨리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가레스가 워낙 조용히 처리하기도 했고, 엔리르는 기민한 감각으로 지붕 위에서 일어난 칼부림을 모두 감지했음에도 굳이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르벤타 제국 귀족들 중 쇄국(鎖國)을 추구하는 이들이 벌인 이 사달을, 휴고는 협상에 제법 유리한 카드로 사용했다. 이를 제국 간의 문제로 공론화시키지 않는 대신 관세를 대폭 줄여줄 것과, 하르벤타 인근 해역의 항로를 개방할 것을 요구한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일 언젠가 이벨리아가 하르벤타 제국으로의 망명을 원하거든 이를 허가해달라는 요구도 덧붙였고, 요청은 모두 받아들여졌다. 여하간 이벨리아는 여정 중의 어두운 이면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기에, 이토록 해맑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며 웃을 수 있었다.
“연회는 어땠어?”
“커다란 코를 가진 코삐리가 나왔어. 괴물같이 커다랬어. 코로 밥을 먹는대.”
“코삐리가 아니고 코끼리. 밥은 입에 맞았어?”
“웅. 생선하고 떡하고 끼운 꼬치도 먹었지! 엔리르는 고기를 먹었어.”
“우리 아가 아주 큰일을 하고 왔구나. 잘 먹고 잘 놀고.”
아직 짧은 두 다리를 동당거리며 냉큼냉큼 대답하는 여동생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두 오라버니의 입매에는 짙은 웃음이 걸렸다. 세드릭이 이벨리아 몰래 아르칸에게 턱짓하자,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입에 마시멜로 하나를 넣어주며 태연히 물었다. 사실 앞의 질문들은 지금 이 질문을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 황자가 우리 아가한테 귀엽다느니, 예쁘다느니, 이런 말을 하진 않았어?”
고위 귀족쯤 되면 타 제국의 정세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본 소양. 당연히 아르칸과 세드릭 또한 하르벤타의 황태녀와 황자가 이벨리아와 동갑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웅, 그런 말은 안 했어.”
‘음. 다행이군.’
‘그 황자 보는 눈이 영 없어서 안심이야.’
아르칸과 세드릭이 안도의 눈빛을 마주했다. 혹시 하르벤타 제국에서 혼담이 들어오더라도 아버지가 단칼에 거절하실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웬 쭉정이가 우리 막내한테 들이댔다면 느껴지는 불쾌함은 매한가지였으니까. 이벨리아가 두 손으로 꼬옥 쥐고 있던 코코아를 호로록- 빨아들이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 하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부인이 되어달라고 했어.”
“…….”
“…….”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핑퐁처럼 곧장 답해주던 두 오라버니가 조용했다. 이상함을 느낀 이벨리아가 고개를 들고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한 박자 늦게, 아르칸과 세드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빽 소리를 질렀다.
“뭐?!”
“이 새끼가?!”
작은 오라버니는 그렇다 치고, 큰 오라버니가 이토록 큰 소리를 내는 것은 기억 속을 더듬어 봐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벨리아가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뭐라고 대답했어!!”
“평소처럼 그랭! 이런 건 아니지?!”
아르칸이 이벨리아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덕분에 아직 한참은 작은 이벨리아의 눈이 아르칸의 눈과 같은 선상에서 마주쳤다.
“에헤헤-.”
오라버니가 높이 들어주는 것이 마냥 즐거워서 이벨리아가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으나, 그 맑은 웃음을 본 오라버니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썩어 들어갔다.
“검 챙겨라, 세드릭.”
“감히 우리 아가한테 부……부인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고작 제국의 황자 주제에……!”
“우리가 없는 새에 청혼을 하다니. 비겁하기 그지없군.”
“대가리 새빨갈 때부터 알아봤는데……! 청혼이라니!”
정작 아드니엘은 이벨리아가 뱀을 때려잡는 것을 보고 ‘부인이 되어줘’라고 말했던 것조차 잊어버렸다. 소심한 아드니엘의 눈에는 당찬 이벨리아가 멋있어 보였고, 그 감정이 그렇게 표출된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청혼서를 보내 달라고 한다거나, 반드시 이벨리아와 결혼을 하고 싶다거나, 그런 진지한 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형제에게 이는 알 바 아니었다. 소중한 여동생의 면전에서 감히 금기어를 꺼낸 것만으로도 응징할 이유는 충분했다. 한편 엘리시아는 하녀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이벨리아가 좋아하는 크림수프를 손수 데워오다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청혼-?!”
지금 수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시아는 그릇을 대충 바닥에다가 툭 내려두고 빠른 걸음으로 딸에게 다가갔다. 사방으로 튄 수프를 하녀들이 신속한 손길로 닦아냈다.
“청혼이라니, 우리 이브에게? 누가?”
“하르벤타의 황자가요!”
세드릭이 빨개진 얼굴로 빽- 답했다.
“어머, 세상에!”
아르칸은 불안한 눈으로 어머니를 살폈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이벨리아의 친구들에게 너무 관대하신 경향이 있었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좋다고 하시면 어떡하지.’
사실 하르벤타의 황자 정도라면 뭇 영애들에겐 없어서 못 구하는 혼처긴 했으니, 만에 하나라도 어머니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면…….
‘우리 아가가 커가면서 황자랑 짝짜꿍 만나는 일이 많아질 것이고…… 나중에 진짜로 혼약하게 된다면 하르벤타로…….’
“그 시뻘건 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떠나 버리겠…… 예, 어머니?”
“그 여자는 예전부터 천지 분간을 못 했지. 악마한테 뒤를 잡혀 뒤통수 깨질 뻔한 걸 내가 몇 번이나 구해줬는데, 이제 와서 감히 내 딸을 넘봐?”
엘리시아가 특유의 고상한 어조로 막말을 쏟아부었다. 딸이 다 커서 하는 선택권을 함부로 박탈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되었다. 절대로. 아직 저리 어린데 청혼은 무슨 얼어 죽을 청혼이란 말인가.
“어머니…… 지금 하르벤타의 황제 폐하가 아니라 황자를 말씀드리고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그런 여자의 아들이니 또 오죽하겠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어머니는 처음 본다.
“예전에 마족들을 잡을 때 하르벤타까지 싹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아르칸과 세드릭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하르벤타 황가 것들은 머리카락이 죄다 시뻘게서, 마족으로 착각했다며 베어버릴걸.”
“콜록!”
인간 모습으로 쿠키 안에 박힌 초콜릿을 열심히 빼먹던 엔리르가 쿠키를 내던지고 황급히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나는 마족이 아니야! 용이다!”
“누가 뭐래?”
붉은 털을 날개로 애써 가리고 이벨리아의 뒤로 꽁꽁 숨어드는 어린 용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엘리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그이도 알면 가만있지 않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