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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잡았다, 요놈 (66/323)

66화: 잡았다, 요놈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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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35133324.jpg“그러면 잘 외워두기라도 해! 못할 것 같으면 나한테 와서 이르던가!”

16549735133328.jpg‘이 꼬맹이가. 누가 뭘 못해서 안 한 줄 아나.’

내 잔혹한 상상의 편린만 보더라도 까무러칠 뽀시래기 주제에. 씩씩대던 이벨리아가 엄지를 살짝 입으로 물며 고개를 저었다.

16549735133324.jpg“아냐. 아스 잘못이 아니야. 내 아가 토끼는 마땅히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

얼씨구?

16549735133324.jpg“연약한 토끼니까. 내가 잘 지켜줘야 해. 내 토끼니까.”

절씨구?

16549735133324.jpg“한 번만 더 내 토끼 괴롭혀봐라. 아주 그냥 물어뜯을 거야.”

16549735133328.jpg‘바람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조막만 한 게 누굴 지켜준다고.’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아가레스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띄워졌다. 마냥 무르지 않아서 좋았다. 마냥 상냥하지 않아서 좋았다. 세상 앞에 선 작은 병아리가 날 선 칼을 벼려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 칼이 쓰이지 않도록 그를 비롯한 모든 주변인이 검과 방패가 되어줄 터이나, 스스로가 강한 것과 주변의 보호에만 안주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

16549735133328.jpg‘그렇게 네가 조금 더 자라면.’

그는 스스로 목줄을 걸어 그 끝을 저 작은 손에 쥐여주게 될 것이었다. 어긋나지 않을 선연한 직감이었다. 한없이 작으면서도 모든 것을 똑바로 보며 맞설 작은 친구의 등을, 그는 그 어떤 것이라도 더하여 받쳐주고 싶었으니. 그의 진명(眞名)을 알려주고 저 맑은 피 아래 예속될 날. 머지않을 그 어느 날이 벌써 기꺼웠다. *** 엿새째, 사절단의 하르벤타 제국 방문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휴고와 사절단원들은 미처 대면하지 못하였던 하르벤타 제국의 주요 인사들과 담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쁜 어른들과 달리 한가한 이벨리아는 아가레스와 함께 황궁을 구경하다가 후원으로 향했다. 이벨리아가 황제로부터 받은 금패를 손에 들고 다니다 못해 목걸이처럼 만들어 목에 달랑달랑 걸고 다니는 바람에 황궁 탐험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연한 풀 냄새만 가득했던 후원에 오늘은 진한 장미 향이 자리하고 있었다.

16549735133355.jpg“공녀로군.”

후원에는 장미가 피어 있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 향은 황제, 세필리아로부터 흐르는 것일 터였다.

16549735133324.jpg“하르벤타 제국의 영원한 홍염을 뵙습니다.”

이벨리아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어 드레스 끝자락을 조막만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어린아이가 애써 어른들의 인사를 흉내 내는 것이 잔망스러워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16549735133355.jpg“공녀가 이 장소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16549735133324.jpg“참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우리 집에도 만들고 싶을 만큼요.”

그 말에 아가레스는 후원의 모든 것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만들고 싶다면 만들어 줘야지. 아가레스의 충실한 수족, 마르바스의 고생길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었다. 이벨리아의 후한 칭찬에 웃는 황제의 표정은 그린 듯 아름다웠고, 그만큼 인위적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입꼬리는 그 외에 다른 각도는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항상 같은 형태를 유지했다. 어린아이의 특권이랄까. 타제국인의 특권이랄까. 하르벤타 제국의 모든 사람이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때 이벨리아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가면 같은 웃음 뒤에 억누른 비탄을. 썩어 문드러진 고목 같은 그 내면을.

16549735133324.jpg“폐하, 고민이 있으세요?”

이벨리아는 슬금슬금 황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마 에르카디아의 황제 앞에서라면 어려웠을 것이나, 눈앞의 아름다운 황제는 제 주군은 아니기에 더욱 쉬이 나온 행동이었다. 이샤트의 것보다 조금 더 붉은 황제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황제가 찰나의 침묵을 거쳐 고요히 입을 연 것 역시 이벨리아가 제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터놓을 수 없는 무게이나 타국의 어린 공녀에게야 괜찮으리라. 황제는 기대 없이 가볍게 말문을 텄다.

16549735133355.jpg“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들 하지. 제왕학 첫 페이지에 기술된 가장 근간인 명제라, 이를 깨닫지 못하면 왕도를 걸을 자격조차 없다고.”

16549735133324.jpg“…….”

16549735133355.jpg“어찌 그리 잔인한지. 제왕의 길을 걷는 첫걸음부터 그 흔한 우는 소리조차 못하게 틀어 막아버린 게지.”

황제가 낮게 웃었다.

16549735133355.jpg“틈을 보이지 말라, 감정을 내비치지 말라……. 그 모든 가르침을 따랐음에도 때로는 얹힌 책무가 왕관의 영예보다 무겁구나.”

잠깐의 정적. 황제의 신발 위에 메마른 낙엽 하나가 내려앉았다.

16549735133355.jpg“아직 어린 그대에게는 어려운 얘기였나.”

아마도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제법 심오할 터였다. 작은 공녀는 아직은 책무 없이 권리만을 누리고 있을 나이이니. 이벨리아가 바람을 타고 날갯짓을 하는 나비에게 시선을 두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16549735133324.jpg“아니요, 저도 알아요. 책무. 저는 우리 가족들도, 기사단도, 친구들도, 모두 지켜줘야 해요.”

살짝 눈썹을 올린 황제가 이벨리아의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16549735133324.jpg“그럴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아니에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죠.”

아는 척인 줄, 애써 내비치는 강한 척인 줄 알았건만. 오밀조밀 자그마한 눈썹에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고, 앙다문 입매에는 무게를 아는 진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일견에 황제는 알아챘다. 이 작은 공녀는 제 딸인 이샤트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짐을 두 어깨 가득 지고 있다는 것을. 작은 공녀와 가벼운 이야기나 나누려던 황제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이의 의지를 듣고 말을 잇는 황제의 얼굴에 더 이상 가벼운 웃음은 없었다.

16549735133355.jpg“그 작은 어깨에 많이도 지고 있구나.”

16549735133324.jpg“그래도 무겁지는 않아요. 다들 함께 받쳐주니까. 어쩌면 뭔가 지고 있다 자부하는 것도 사치일지 모르겠어요.”

의자에 떨어진 나뭇잎을 만지작거리며, 이벨리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16549735133324.jpg“황제 폐하도 분명 그 무게를 같이 들어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16549735133355.jpg“…….”

더 멋진 말로 위로를 건네고 싶었는데. 아이가 할 수 있는 언어표현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황제가 침묵하자 이벨리아가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날렸다. 드러난 눈동자가 쓸쓸했다. 제국의 황제란, 그런 자리였다. 홀로 제국을 떠받치고, 짊어지고, 끌어가야 하는. 침잠한 눈을 본 이벨리아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 벌하지 않을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한 위로의 몸짓이었다.

16549735133324.jpg“이샤트와 아드니엘도 있고요.”

16549735133355.jpg‘글쎄, 과연 황태녀와 황자가 나의 아군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황제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피비린내 나는 황좌 다툼에서 아군과 적군을 솎아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내 이어지는 아이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의문을 담고 이벨리아를 향했다.

16549735133324.jpg“그리고 저도 있고요.”

16549735133355.jpg“……?”

16549735133324.jpg“옷감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아요.”

16549735133355.jpg“……옷깃.”

16549735133324.jpg“……네, 그거요. 저는 곧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가끔 하르벤타에 놀러 올 수도 있고, 또 동그란 마법 구슬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어요.”

작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나 유심히 듣던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늘 유지하던 그 일정한 각도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간 웃음이었다.

16549735133355.jpg“아하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16549735133324.jpg“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고민이 있으면 마법 구슬로 연락하세요. 제가 또 고민 상담에는 그게 있거든요. 일견……견…….”

16549735133355.jpg“일가견.”

16549735133324.jpg“네, 그거요.”

얼마 전에 이 작은 공녀가 열었던 고민 상담소에서 오가던 상담은 참으로 형편없다고 들었는데, 지금의 황제에게 작은 아이가 내뱉는 말이 오답이든 정답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때로 고민이란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씻겨 내려가는 것이니, 진지한 얼굴로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청자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완벽했다. 제 몸에 밴 피비린내를 감추기 위해 쏟아붓는 독한 장미 향은 늘 두통이 일게 했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그 향이 거슬리지 않았다. 마치 위로하듯 옆자리를 지키고 앉은 작은 아이는 따스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함께 바람을 맞아주는 침묵에서 배려를 읽을 수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이벨리아를 고요히 응시하는 악마에게 닿았다.

16549735133355.jpg‘알 것 같군.’

겪어보니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이의 어느 면이 저 초연하던 지배자를 이 땅에 잡아 매두었는지를. *** 사절단의 귀국일, 항상 황제인 어머니의 위엄을 따르려 무던히 노력하던 이샤트는 체통을 모두 벗어던지고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1654973521944.jpg“가지마아- 흐어엉-.”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녀에게 친구가 있어 봐야 누가 있겠는가. 모두 이샤트에게는 단정한 몸가짐을 강조하고, 업적을 기대하고, 고개를 조아려왔으니. 이샤트는 격식 차릴 것 없이 편히 뛰어놀고 장난치고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친구의 단맛에 푹 빠져버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고, 이벨리아의 물건들이 한쪽 가득 차 있던 자신의 방이 오늘따라 굉장히 허전했다.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보이는 그 공백에 이샤트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더랬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잠이 들었던 친구가 먼 타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마치 세기의 이별을 하듯 세상 서럽게 울어 젖히는 이샤트를 따라 이벨리아의 커다란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16549735133324.jpg“으아앙- 이샤트으-.”

어린아이들의 감성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어른들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얼싸안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만난 지 일주일 된 거 아니었나, 너희. 그렇게 두 꼬맹이가 훌쩍거리면서 서로를 보듬고, 손을 잡고, 부디 건강 하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 저세상 텐션으로 난리 난리를 치는 동안 휴고도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16549735219448.jpg“극진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또 뵙도록 하지요.”

실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환대였음이 분명했다. 제 딸에게 황금패를 건네준 것도, 황태녀와 함께 방을 쓰도록 허락한 것도, 무려 코끼리까지 데려와 성대한 연회를 열어준 것도. 황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고의 지척까지 와서 작게 속삭였다. 휴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16549735133355.jpg“이제야 하는 말이네만, 그 극진한 환대, 사실 안 하면 저자가 멱을 따버리겠다고 해서 말이야.”

휴고는 황제의 턱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지 않고도 ‘저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황제의 멱을 따버린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뱉을 수 있는 자가 한 존재밖에 더 있겠는가.

16549735219448.jpg“……대신 사과드리지요.”

16549735133355.jpg“그런 말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고. 자네 딸, 정령술에 조예가 깊다더니 실은 테이머가 아닌가? 어째 스치는 존재마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로 만드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휴고의 시선도 오른쪽을 향했다.

1654973521944.jpg“아이고오- 세상 사람들- 내 친구가 날 버리고 떠난답니다-!”

이샤트는 여전히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통곡하고 있었고,

16549735247354.jpg“이브, 가지 마. 이거 줄게. 봐, 네 머리만큼 커.”

아드니엘은 대왕 마들렌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이벨리아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었다. 내 머리가 크다는 거야, 아니면 내 머리만큼 커다란 마들렌이라는 거야. 이벨리아가 훌쩍이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16549735133328.jpg“뚝. 꼬맹이, 뚝. 내가 다시 데려다줄게. 응?”

황제의 멱을 따버린다 협박하던 악마는 어쩔 줄을 모르고 눈물방울을 연신 닦아주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딱 주인한테 버림받은 개와도 같았다.

16549735247362.jpg“아르르릉-.”

누나가 울자 털을 바짝 곤두세운 엔리르는 차마 여태 함께 놀아준 이샤트에게 이를 세우지는 못하고 만만한 아드니엘을 향해 이를 딱딱 부딪치며 위협하고 있었다.

16549735219448.jpg“…….”

16549735133355.jpg“…….”

휴고가 쉬어본 적 없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제국을 널리 보살피는 공작의 머리로도 저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왜들 저러는 것인지 이해하긴 어려웠다. 영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전장을 휘젓는 것보다, 딸 육아가 훨씬 난해했다. *** 귀국길의 이벨리아는 상당히 얌전했다. 휴고에게 빌린, 아니 반쯤은 강탈한 돈으로 이것저것 선물을 사서 보따리에 가득 담은 뒤부터는 입을 삐죽 내밀고 데친 시금치인 양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사귄 이샤트와 아드니엘이 쉽게 만날 수 없는 아이들임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서러웠다. 귀환길에 오르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함께 놀던 재미있던 시간이 아쉬웠다. 아가레스는 연신 아랫입술을 쭈욱 내밀고 훌쩍대는 꼬맹이가 보기 안쓰러워 지나가다가 보이는 간식거리란 간식거리는 모두 사 모아 입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귀환길에 들뜨고 꼬맹이 하나만 울적하던 사절단이 에르카디아 제국 수도에 도착한 것은 아홉 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저녁. 이 시각에 황궁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무례였기에, 사절단은 다음 날 아침에 황제를 알현하기로 하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공작저의 지척까지 다다라서야 오랜만에 가족들과 기사단을 만날 생각에 이벨리아의 기분이 반짝 살아났다.

16549735133324.jpg“훌쩍…… 우리 집이다!”

16549735133328.jpg“이제 좀 기분이 풀렸어? 동대륙은 내가 언제든 다시 데려다줄 테니까, 그만 속상해하고.”

꼬맹이의 표정에 생기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웃음 지은 아가레스는 허리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16549735133328.jpg“비밀기지에 나 놀아주러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작은 친구와 함께한 첫 여행이 끝난 것은 심히 아쉬웠지만, 그래도 비밀기지라는 장소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돌아섰다. 무려 보름 만에 귀환한 주인을 위해 공작저에는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고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칸과 세드릭은 휴고가 저택의 문을 열기도 전에 이를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16549735275169.jpg“이브!”

16549735275175.jpg“우리 아가!”

훅 밀려들어 오는 오라버니들 특유의 냄새에 이벨리아의 작은 코가 발름거리고 추욱 내려가 있던 어깨는 바싹 위로 올라왔다.

16549735133324.jpg“오라버니이-!”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아르칸에게 오도도 달려가 몸통 박치기를 했다. 이제 열다섯이 된 아르칸은 휴고의 장대한 기골을 닮아 또래보다 키도 크고 몸도 단단했기에 미세한 휘청임도 없이 이벨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16549735275169.jpg“잘 다녀왔어, 우리 막내?”

하르벤타 제국도 좋았지만 역시 따뜻하게 안아주는 오라버니들이 있는 공작저가 최고였다. 이벨리아는 아르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끄덕끄덕 긍정을 표했다.

1654973527519.jpg“장하다, 우리 이브. 아주 큰일을 했구나.”

한달음에 달려 나온 엘리시아도 이벨리아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혹시라도 하르벤타의 황제 폐하가 제가 친 사고를 어머니에게 알렸을까 바짝 긴장했지만, 두드리는 손이 부드러운 것을 보아하니 그렇지는 않은가보다. 이벨리아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우당탕탕. - 콰장창.

16549735133355.jpg“아이고, 우리 아기씨다!!”

16549735133355.jpg“아기씨가 돌아오셨다!!”

우리 아기씨 언제 돌아오시나 싶어 근처를 배회하던 아르티나 기사단도 우르르 몰려왔다. 덩치가 큰 기사들이 물소 떼처럼 우르르 몰려오니 앞마당 여기저기에 세워둔 여러 집기가 넘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16549735133324.jpg“기사다안-!!”

이벨리아가 바르작바르작 아르칸의 품에서 내려와 기사단을 향해 짧은 두 팔을 뻗고 달려가자 가장 앞서서 달려오던 카론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받아냈다. 주군과 함께 가셨으니 아무 일도 없이 돌아오실 것을 잘 알면서도 카론을 비롯한 아르티나 기사단은 보름간 밤잠을 설쳤다. 이 대륙에 계시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금방 달려가서 우리 아기씨를 구해낼 텐데. 타 대륙이라는 어감에서 오는 상당한 거리감이 그들을 못내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6549735133355.jpg“우리 아기씨 그새 어른이 다 되어 돌아오셨네!”

16549735133355.jpg“하이고, 늠름해지신 것 좀 봐!”

미친개라는 별칭과는 달리 그들의 아기씨 앞에서만은 한없이 약해지는 아르티나 기사단이 맺힌 눈물을 훔치고 부둥부둥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대견하실 수가 없었다. 그런 기사단을 흘끗 바라본 휴고가 두 아들이 깍듯하게 건네는 인사를 고갯짓 한 번으로 받아넘기고 그리웠던 부인의 입술에 가벼운 버드키스를 남기던 찰나였다. 어깨너머로 제 딸이 위풍당당하게 자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49735133324.jpg“그럼! 커다란 뱀도 잡았지!”

물 흐르듯 이어지던 휴고의 몸짓이 뚝- 급작스럽게 멈추었다. 맞다. 저 개새끼들하고 매듭지을 일이 있었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나는 소리가 음산했다. 오랜만에 아기씨를 보아 마냥 신난 기사단은 평소 같았더라면 기민하게 알아채었을 주군의 살벌한 기운을 미처 느끼질 못하고, 우리 아기씨 참 기특하다며 소리 높여 외쳤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참으로 해맑았다.

16549735133355.jpg“세-상에, 우리 아기씨가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뱀을 잡으셨구나!!”

16549735219448.jpg“…….”

휴고의 눈이 시리도록 날을 세웠다. 잡았다, 요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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