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 빙구가!2021.05.13.
닷새째 아침, 사절단이 귀국하는 날까지 겨우 이틀이 남아 있었다. 방을 같이 쓰면서 더욱 친해진 이샤트와 이벨리아는 연무장에서 함께 검술 수련을 하기도 했다.
“감동이야…….”
“뭐가?”
“내 검술을 보고 웃지 않은 사람은 이샤트가 처음이야…….”
“공녀의 검술이 뭐? 잘하기만 하는데.”
‘이 제국 황태녀 안목이 심히 걱정이군.’
그러다 검술 수련이 지겨워질 때면 아가레스와 엔리르의 호위 하에 황궁 밖으로 나서 하르벤타의 일상적인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휴고는 아가레스를 데려온 자기 자신의 결단력에 감탄해야만 했다. 저 혼자였더라면 넓은 황궁을 뽈뽈뽈 헤집고 다니는 딸을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 자명했다. 얌전히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때려 부수며 다니고 있으니 더더욱. 한편 고아한 악마는 이벨리아가 사고를 치는 것을 절대 막지는 않았다. 사고 칠 것을 다 치게 두고 이벨리아의 신체나 정신에 해가 된다 싶으면 그제야 딱 ‘이벨리아만’ 구하는 식이었다.
“제발 그대의 소중한 친구를 구하는 김에 내 황궁도 좀 구해주면 안 되겠나?”
“내가 왜?”
“그럼 황태녀와 황자만이라도 좀 살펴주면 감사하겠는데?”
“우리 꼬맹이한테 말해봐. 난 이브가 시키면 해.”
황제가 안달하든 말든, 남의 황궁이나 남의 자식들은 무너지든 다치든. 악마에겐 모두 제 알 바 아니었다. 그러니 작금의 사태도 아가레스에게는 마냥 흥미롭기만 했다.
“좋아, 이렇게 돈을 잔뜩 벌어서 귀국길에 선물을 사 갈 거야.”
이벨리아가 호기롭게 외쳤다.
“근데 왜 굳이 공녀가 돈을 벌어?”
“어제 아드니엘이 그랬거든. 선물은 스스로 번 돈으로 사는 거래.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그 결과, 돈이라면 휴고나 아가레스로부터 말 한마디로 뜯어낼 수 있을 터였으나, 굳이 스스로 돈을 벌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인 것이었다. 이샤트 역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의 황태녀인 내가 있어야 장사가 잘될걸? 같이 해! 대신 수익금은 반으로 나눠!”
“그랭!”
그리하여 두 꼬맹이는 커다란 상자를 끌어다가 그 속에 쏙 들어가 앉은 다음 팻말을 써 붙였다. [단돈 5크론에 고민을 해결해드립니다!] 5크론이면 이벨리아와 이샤트가 먹는 고급스러운 밥 한 끼 사 먹기 힘든 금액이었으나,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만 보고 자란 두 꼬맹이는 이렇게 하더라도 금방 부자가 될 것으로 크게 착각했다.
“자, 엔리르는 이거 물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거야.”
엔리르 전용으로 자그마한 팻말을 만들어 주자, 엔리르는 성공적인 호객행위를 위하여 팻말을 입에 야무지게 물고 앞으로 폴짝폴짝 뛰어나갔다. 이벨리아와 이샤트는 엔리르에게 수익금의 1할을 떼어주기로 했다.
“그럼 나는?”
엔리르와 마찬가지로 팻말을 손에 든 황자 아드니엘이 황망하게 물었으나,
“너는 뭐. 뭐 어쩌라고.”
이샤트는 당당하게 동생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가량 티격태격하며 앉아 있었을까. 제국의 황태녀와 타 제국의 공녀가 무려 비루한 상자에 들어가 <고민 상담소>를 열었다는 소식은 시녀들의 입을 타고 황궁 내에 널리 퍼졌다. 황궁 사람들은 일곱 살짜리가 진행하는 고민 상담이 얼마나 효율적일지 기대감을 안고 속속 모여들었다. 능력 좋기로는 유명한 아르티나의 공녀에다가, 총명하기로는 비견할 데 없다는 황태녀 전하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오, 첫 번째 손님!”
어린 종자가 다가와 상자 앞에 앉았다. 장차 기사가 되기 위해 정식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 ‘종자’는 이제 막 아홉 살 언저리로 보였다. 평민인 종자의 시각에서 무려 황태녀님과 공녀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마치 진리와도 같은 무게였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밤에 종종 부모님의 앓는 소리가 들려요. 아무래도 어딘가 편찮으신 것 같은데, 제가 걱정할까 봐 그런지 말씀을 안 하세요. 치료비가 어느 정도 필요한지 알아야 돈이라도 벌 텐데요.”
이런. 주변에 서 있던 시녀들과 시종들, 그리고 아가레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악물었다. 어린 종자의 부모님은 동생을 잉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계심이 분명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벨리아에게로 향했다. 제법 노련한 표정으로 턱 하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품새가 의외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법도 해 보였다. 이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보다는 질문으로.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
“아뇨, 저는 기사를 지망하고 있으니 검술에 보다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면 검술 실력은?”
“……아직은 형편없습니다.”
마치 도 닦는 도사처럼 한동안 눈을 꼬옥 감고 흐음- 소리를 내던 이벨리아가 이내 눈을 반짝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해답을 내놓았다.
“너 때문에 앓아누우신 거야.”
“예?!”
미처 예상치도 못했던 이유에 종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생각해보자니 타국의 어린 공녀님 말씀이 맞았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그저 흘려들었는데,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무려 아르티나 가문의 아가씨이다. 하시는 말씀이 틀릴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린 종자가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시종과 시녀들의 고개가 땅을 향해 있었다. 심지어 타국의 공녀님 옆에 선 훤칠한 마법사는 커다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참담함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참고 있음이 명백했다. 어린 종자의 입에서는 끝내 침음이 터져 나왔다.
“아, 어머니…….”
그렇게 이벨리아는 되지도 않는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어린 종자 하나를 갱생의 길로 이끌었다.
“자, 다음!!”
이샤트가 역시 내 친구 대단하다는 듯 이벨리아를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그, 제가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연인에게 보석을 선물했어요. 그런데 연인이 그것을 보고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뭔가 잘못된 걸까요?”
비교적 젊은 청년 시종의 고민을 듣자마자 모든 시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어릴 적부터 궁으로 들어와 황제 폐하를 모시던 젊은 시종은 연애가 처음임이 분명했다. 세상에, 로맨틱해라. 감동의 눈물이지!
“세상에!”
어린 공녀와 황태녀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오자 구경꾼들은 이번엔 제대로 된 해답이 나오겠군, 싶어 웅성거리던 것을 멈추고 주목했으나.
“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보석을 선물한 거야……?”
이샤트가 툭 뱉어낸 말에 이벨리아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영 꽝이었다. 정답과는 180도 틀린 방향으로 상당히 쿵짝이 잘 맞는 황태녀와 공녀였다. 그렇게 두 아이는 한 시종을 절망의 길로 이끌었다. 이쯤 되니 아무도 이벨리아와 이샤트의 고민 상담소에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해가 질 때까지 이벨리아와 이샤트가 번 돈은 단돈 30크론.
“……내 생각으론 이건 되게 적은 돈인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과자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다섯 봉지 정도.”
대실패. 돈을 버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제힘으로 돈을 벌어본 경험이 처음인 이벨리아는 세상 시무룩한 표정으로 상자를 철거했다. 엔리르에게 3크론, 이샤트에게 13크론을 주고 나니 고작 14크론이 남았다.
‘이걸로는 방금 들어가 있었던 상자나 살 수 있을 텐데. 어쩌지…….’
고민하던 이벨리아는 동전을 양손에 꼬옥 쥐고 휴고의 방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아빠. 이거 제가 처음으로 번 돈인데.”
“우리 아가가?”
“고민 상담해서 번 돈인데. 동전이 무려 열네 개!”
“음?”
“반짝반짝 빛나는 크론이 자그마치 열네 개!”
“……?”
“다시 찾아오지 않는 기회! 동글동글 예쁜 크론이 열네 개! 금화 열네 개와 바꿔 드립니다!”
기적의 투자법. 사기나 다름없는 거래.
“금화 열네 개라. 싸군.”
그러나 휴고에게 있어서 ‘딸이 처음으로 번 돈’의 가치는 금화 수백 개보다도 높았기에, 이 말도 안 되는 거래는 흔쾌히 성사되었다. ***
“짠! 금화 열네 개! 크론 한 개를 금화 한 개에 팔았지!”
“와, 공녀! 공녀는 사업 수완이 대단하군!”
꼬맹이는 자랑스러워하고, 황태녀는 대단하다며 추켜세운다.
‘이건 또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가레스가 한숨과 함께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이벨리아와 이샤트, 아가레스가 금화 몇 개를 짤랑대며 황궁 통로를 지나던 중. 반대편에서 보석이 알알이 박힌 흰색 드레스가 눈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황태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갈색의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 늘어뜨린 실비아가 이샤트에게 먼저 예를 올린 후 아가레스와 이벨리아를 향해서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몸에 밴 예법은 그 자체가 정석이라 부를만했다.
“이 저녁에 황궁에는 무슨 용무인가.”
“다름이 아니라, 마법사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아버님을 따라 이리 들렀습니다.”
사사로운 이유의 황궁 출입은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나, 대국의 공녀쯤 되니 일개 문지기들이 함부로 막아서기도 곤란한 측면이 있기는 했다. 그것도 옆에 공작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 더더욱.
“저, 제가 보낸 서신을 혹시 못 보셨는지…….”
눈꼬리를 아래로 내린 채 처연히 위를 올려다보는 실비아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곱긴 했으나, 아가레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였다. 그에게 남은 감정이라고는 무료함과 흥미, 절대적으로 상반된 두 가지뿐. 그 외의 것들은 마치 오래된 돌이 풍화작용에 의해 서서히 깎여나가듯이 침식된 지 오래였다. 물론 그의 모든 것에 작은 친구는 예외였지만. 여하간 안쓰러움, 예의, 동정. 그 모든 감정을 그에게는 대입하기 어려웠으니, 이따위 시시한 치정극 또한 무료하기만 할 뿐이었다.
“보았다. 가치가 없어 답하지 않았을 뿐.”
이벨리아를 향할 때는 흥미와 따스함으로 가득 차 있던 금안이 실비아를 향하니 애초에 아무것도 담은 적이 없는 듯 공허하게 건조했다.
“곧 귀국하신다 들었습니다.”
아가레스는 작은 친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공녀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자그마한 머리가 맹렬히 굴러가고 있나 보다. 아가레스의 입매에 초승달 같은 웃음이 걸렸다. 냉담하던 얼굴에 조각처럼 걸린 그 웃음이 실비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이었다. 더 이상 답하지 않고 지나쳐가려는 아가레스의 옷자락을 실비아가 한 손 가득 쥐었다. 이번에 놓치면 더 만날 기회가 마땅치 않음을 잘 알기에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잠깐……!”
“…….”
아가레스의 발걸음 소리가 서늘하게 그치고, 불쾌함을 내리누르는 듯 오른손이 한 번 꽉 주먹 쥐어졌다가 펴졌다. 허하지 않은 접촉은 달갑지 않다. 이 인간이 제법 거슬렸다.
‘덮어놓고 없앨 수도 없고.’
아가레스는 인간들의 상관관계와 생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본디 관심 없었던 것들이나 작은 꼬맹이와 친해진 이후 애써 책도 읽어보고 여러 사료도 찾아보며 익숙해진 터. 이곳에서 저 공녀에게 무력을 행사하거나 더 나아가 생을 거두는 경우 곤란해지는 것은 이벨리아였다. 어떻게 처리할까.
‘일단은 참고 차후 사고사로 위장을 하는 것이 좋을까.’
아가레스의 머릿속에 이벨리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생각들이 스쳐 가던 찰나. 이벨리아가 실비아의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겹쳐 올렸다.
“제 친우에게서 손을 떼세요, 공녀.”
이벨리아가 저보다 한참 큰 실비아를 향해 작은 얼굴을 올려 눈을 맞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가레스가 살짝 눈을 크게 뜬 채로 어린 친구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힘 있게 울리는 작은 친구의 맑은 목소리가 어둡던 내면을 걷어냈다.
“두 분의 관계가 진정 친우라면 공녀님께서 마법사님의 의사에 관여할 권한은 없어 보입니다.”
안 그래도 거슬렸다. 실비아가 눈만 살짝 내리깔아 이벨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시가 돋친 듯 뾰족한 어조였다.
“아스의 의사에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친구로서 배려할 뿐이지요.”
실비아의 어조에 날이 서 있으니 덩달아 이벨리아도 나름대로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대꾸했다. ‘내 친구가 싫어하잖아’를 돌려서 던지는 말이었다.
“아스…….”
궁금했던 이름이 작은 공녀의 입에서 달콤하게 흘러나오자 실비아가 저도 모르게 이를 읊었다. 당연하게도, 작은 공녀는 저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보다. 한편 그 읊조림을 들은 이벨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들어.’
애초에 제 친구가 싫어하는데 이 여자가 왜 자꾸 앞을 알짱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스라는 애칭도 자신에게 허락된 것인데.
‘예전에 엄마가 그랬었지. 모든 이들에게 무르게 대하면 그건 내 주변 사람들을 해하는 칼날이 될 거라고.’
이벨리아는 그 말에 공감했다. 여기저기 퍼주다가 제 것을 탈탈 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제 친구를 불쾌하게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아가레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벨리아가 선수를 쳤다.
“공녀, 그 이름은 제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친구 사이에서 부르는 애칭이지요.”
“그것 또한 이분께서 허락하실 일-!”
실비아가 언성을 높여 말을 잇자 아가레스가 단호히 말을 끊어냈다.
“내 모든 결정은 이 아이의 의사에 따른다.”
“하지만, 잠깐 대화를……!”
“아뇨, 공녀.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향하던 곳이 있어서요.”
더 이상 소모적인 입씨름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벨리아가 살짝 묵례하고 앞서 걸어가자 아가레스가 작은 친구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잠깐, 실비아를 지나치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가레스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읊조렸다. 성큼성큼 앞서 걸어 나가던 이벨리아는 미처 듣지 못하였고, 그보다 뒤에 처져 있던 이샤트는 희미하게 들은 날 선 경고였다.
“……다시는 저 아이의 앞에서 언성을 높이지 말도록.”
휘감는 살기는 진정이었기에 실비아는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하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
“신기하네.”
이샤트가 이벨리아의 뒤로 바짝 따라붙으며 감탄을 뱉었다.
“뭐가?”
“날 처음 만났을 땐 내가 나쁘게 말해도 웃기에 상당히 맹하거나, 눈치가 없거나, 뭐 그런 줄 알았거든. 좋은 것이 좋다는 주의인 줄 알았지.”
이벨리아가 그렇지는 않다는 듯 작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감정을 다 배제하고 보면 실비아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은 이벨리아도 알고 있었다. 너무 냉정하게 날을 세웠나 싶어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소중한 친구가 우선이었다.
“흠, 좋지 뭐. 높은 자리에 앉은 이가 너그러우면 사람들은 손뼉을 쳐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자르려 들거든.”
이샤트의 조언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이벨리아가 휙 하니 몸을 돌리고서 아가레스를 향해 또박또박 경고했다.
“토끼. 따라 해 봐. 싫어요. 안 돼요. 꺼져요.”
“전부 네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말인데.”
아가레스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려 웃으며 나른하게 답했다. 누군가는 마땅히 얼굴을 붉히고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매력적인 미소가, 지금의 이벨리아에게는 영 바보 같기만 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웃기는!
“이 빙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