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모든 것은 너의 뜻대로2021.05.10.
사흘째 저녁에는 예정대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사절단이 머무르는 기간은 길지 않았기에, 환대와 환송을 겸하는 연회였다. 에르카디아 제국의 연회는 연회장 한가운데 춤을 추는 무대가 있고, 벽 쪽에 핑거푸드가 준비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하르벤타 제국은 달랐다. 연회의 주역들은 애초에 춤을 추지 않았다. 대신 무희들이나 무사들이 부채춤 또는 칼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 음식 또한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시종들과 시녀들이 날라 순차적으로 놓아주었다. 즉, 이어지는 화려한 공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맞춰진 연회였다. - 둥. 둥. 둥.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연회의 막을 연 것은 기가 막히게도 코끼리였다.
“세상에, 코끼리라니.”
“저 동물은 귀하기도 귀할뿐더러 제어가 쉽지 않을 텐데요.”
단연코 귀빈들이 많은 이런 연회에서 선보일 동물로는 적절하지 않았기에, 사절단을 비롯하여 동대륙 귀족들 역시 웅성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 분위기를 느낀 황제가 아가레스를 바라보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코끼리를 대령하지 않으면 내 멱을 따버릴 기세니 별수 있나.’
환경상 서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대령하라는 아가레스의 말에 따라, 황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코끼리 두 마리를 공수하여 화려하게 막을 연 참이었다. 때로 동대륙에선 말 대신 코끼리를 타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기에, 잘 훈련받은 코끼리는 허공에 매달린 붉은 천을 코로 감아 풀어 내리며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내었다. 점차 커지는 북소리는 연회의 웅장함을 한층 배가시켰다. 한편 이벨리아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런 생물은 난생 처음 본다. 동대륙으로 오던 길에 만난 오크보다 눈앞의 코끼리가 훨씬 몬스터에 가까워 보였다. 이벨리아는 옆에 앉은 아가레스의 옷자락을 짤짤 흔들며 소리쳤다.
“괴물이다! 괴물!”
“괴물 아니고 코끼리야. 동물.”
“전설의 동물이야? 우리 엔리르처럼?”
울상을 짓고 물어오는 내용이 퍽 신선했다. 이벨리아를 만나고서야 아가레스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인 줄 알게 되었다.
“서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이야. 동대륙에서는 귀하기는 해도 찾기 어렵진 않지.”
“그러면 코는 왜 저렇게 길쭉하대?”
“코로 음식을 먹거든.”
“코로 흥- 마셔서? 그러면 코가 막힐 텐데……. 코를 풀 때 음식도 같이 나오면 어떡해.”
순간적으로 이 꼬맹이가 무슨 말을 하나 생각하던 아가레스가 입매를 쓸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 정말 좋았다.
“코에다 집어넣는 게 아니라, 코로 집어서 입에다 넣지. 바나나 가지고 가서 줘볼까?”
“아니야. 나를 코에다 넣어버릴 것 같아.”
아가레스의 제안에 이벨리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겁을 먹은 건지, 새로운 충격에 놀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표정이었기에, 휴고도 나직하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코끼리가 들어가고 무사들이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짧은 애피타이저의 뒤를 이어 메인 음식이 차려졌다. 모든 참석자의 상에는 갖가지 꼬치구이가 정갈하게 올랐다. 이벨리아의 기호대로 살짝 덜 익힌 고기들이 가지런히 꽂힌 꼬치구이는 양고기,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파, 마늘 등. 꼬치에 꽃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조리 다 꽂아다 둔 느낌이었다.
“와아! 꼬치구이!”
“우리 아가가 가장 좋아하는 꼬치구이라. 동대륙 대접이 제법 괜찮군.”
“자, 꼬맹이. 내 것도 먹어.”
입맛을 다시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 야밤중에 황제의 집무실까지 쳐들어가서 꼬치구이를 내놓으라고 협박한 보람이 있었다. 노곤하게 풀린 황금빛 눈이 작은 친구의 오물거리는 두 뺨을 바라보는데, 친구가 꼬치를 먹는 방식이 이상했다.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 꼬치를 먹을 때마저 드러나는 줄은 몰랐는데. 양고기 먹고, 파는 퉤. 소고기 먹고, 마늘은 퉤.
“…….”
“…….”
“아가. 이거 한 입만 먹어볼까?”
“꼬맹이. 이거 먹어야 키가 크지. 평생 그렇게 꼬맹이로 살 거야?”
내로라하는 무희들이 휴고와 아가레스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내며 춤을 추었으나, 정작 뜨거운 시선을 받는 그들은 이벨리아가 흘린 야채를 주워 제발 한 입만 먹어보라면서 살살 달래는 중이었다.
‘부러워.’
마찬가지로 상석에 앉아서 그 광경을 본 실비아는 마음이 쓰렸다.
‘아니, 불쾌해.’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부러움은 질투심이 되어 흘렀다. 처음에 가졌던 우호적인 감정마저 열등감이 덮어버렸다.
‘저런 응석받이가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아르티나 공작과 저 뛰어난 마법사는 죽고 못 살아서 안달이다. 게다가 황태녀 전하와 황자 전하마저도 저 아이의 뒤를 살살 따라다니시는 것이, 뭐에라도 홀려버린 모양새였다. 그렇게 실비아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이벨리아만 뚫어져라 쳐다보자, 아가레스의 시선이 실비아에게 닿았다.
‘눈 돌리지.’
관심 두지 말라는 경고의 시선이었으나, 이를 받은 실비아는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드디어 날 바라봤어. 계속 바라보고 있어.’
실비아의 얼굴이 차츰 붉어지는 것을 보고 아가레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알코올 반응인가. 호흡곤란이나 심장마비의 전조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호르몬 반응만 아니면 상관없지.’
설렘, 떨림, 사랑. 그 모든 것과 거리가 먼 악마는 쉽게 고개 돌려 다시 제 꼬맹이가 흘린 파 조각을 주워들었다. *** 대연회장에는 끝도 없이 꼬치구이가 날라져 나왔다. 이쯤 되니 에르카디아 제국의 사절단원들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어코 한 사절단원이 속마음을 입 밖으로 뱉었다. 물론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도록 작은 귓속말로.
“지금 우리를 엿 먹이는 거야, 아니면 환대하는 거야?”
“코끼리까지 데려다가 이런 연회를 여는 걸 보면 환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리 꼬치구이만 먹이는 걸 보면 엿 먹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이제 속이 다 울렁거려.”
“제발 누가 좀 꼬치구이 말고 다른 음식을 달라고 해봐. 엉?”
동대륙 황제로서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벨리아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제대로 환대하지 않으면 황제의 목을 따겠다는 대악마의 으름장을 들었으니, 제 목숨과 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꼬치구이를 내놓는 수밖에. 그리하여 황제는 사흘 내내 다양한 종류의 꼬치구이를 식사로 대접하였고, 이젠 연회장에서까지 각종 꼬치구이가 날라져 오고 있는 상황. 사절단원들이 이를 두고 고단수 엿 먹이기인지 심각히 고민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공녀. 혹시 꼬치구이 이외에 특별히 더 먹고 싶은 것이 있는가?”
드디어. 사절단의 눈이 반짝였다. 자, 우리 마스코트, 어서 다른 음식을 말해. 모두의 기대를 양어깨에 떠안은 이벨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두 손에는 여전히 꼬치 하나씩을 손에 꼬옥 쥔 채였다.
“생선하고, 떡하고-.”
아이고, 우리 마스코트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생선하고 떡? 그래, 꼬치만 아니면 그게 어디냐! 생선! 떡!
“-번갈아서 끼운 꼬치!”
“…….”
“생떡생떡…….”
지옥에서 올라온 음식인가. 사절단원 중 한 명이 먹던 꼬치를 휙 내팽개쳤다. 아,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희미한 목소리가 사절단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살려줘…….”
“아니, 차라리 죽여줘…….”
***
“맛있었어, 꼬맹이?”
“응! 맛있었어! 꼬치가 최고야!”
그냥 번갈아서 끼워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어린아이여서 그런가. 볼이 빵빵하게 차올라 만족스럽게 웃는 게 퍽 마음에 들어, 아가레스 역시 이 연회에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다.
“그건 왜 챙겼어? 이따가 먹으려고?”
“아니, 이거 엔리르 가져다줄 거야.”
“……아, 그 용이 있었지. 먹을 거라면 환장하던데 왜 안 왔대?”
“여긴 인간이 많으니까. 아직 인간이 싫대.”
이벨리아의 손에 구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에게 각종 몹쓸 짓을 당했던 어린 용이다. 비록 이제는 제 누나가 된 이벨리아 역시 인간이라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모든 인간에 대한 인상이 한 번에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린 용은 대다수 인간을 향해 깊은 적개심을 보였다. 황제와의 단독 알현을 위해 돌아서며, 휴고도 꼬치에서 미리 빼 챙겨두었던 고깃덩이 몇 개를 건네주었다.
“아가. 이것도 그 용 주고. 먼저 돌아가 있거라.”
“공작도 설마 그 용 주려고 몰래 챙긴 건가?”
“……우리 아가가 아끼는 용이니까. 그뿐이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꼬치란 꼬치는 다 섭렵하고 엔리르 줄 음식도 야무지게 싸서 연회장을 나가는 이벨리아와 아가레스의 앞에 길지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법사님.”
“……?”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슈테인 공작가의 실비아라고 합니다.”
연회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는지 머리를 반만 묶어 청초하게 늘어뜨린 실비아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눈이 달린 인간이라면 누가 봐도 혹할 법한 우아한 인사에도, 아가레스의 시선은 아래, 작은 꼬맹이를 향했다. 기어코 디저트를 손으로 들고 나와 와앙- 무는 바람에 통통한 볼에 크림 한 덩어리가 묻어 있었다. 아가레스는 살짝 몸을 굽혀 검지로 크림을 닦아 제 입으로 가져갔다. 크림과 볼의 경계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 다 말랑하고 부드러워 입가에 웃음이 매달린 것은 평소와 같았다. 아가레스와 이벨리아 사이에서는 전혀 사심 없는 깔끔한 행위였으나 실비아는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핥는 아가레스의 붉은 혀가 선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내 무심한 시선이 실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알려줄 이름이 마땅히 없으니 지금처럼 부르도록. 그대가 나를 부를 일도 없을 것이고.”
아무리 서대륙에 소속된 마법사라고는 하나, 타 제국 공녀를 향한 적절한 언사는 아니었다. 오만한 말투에 익숙지 않은 실비아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황제 폐하나 아버지 앞에서도 고개를 조아리지 않던 자이니 내가 나서서 훈계할 수도 없는 일이지.’
또한, 제 아버지조차 말을 높였던 상대에게 자신이 하대를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짧은 생각 끝에 실비아는 존대를 택했다.
“……잠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요. 연회장에서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저택 후원에 간단한 차를 준비해두라 일렀습니다.”
실비아는 제법 적극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르벤타 제국에서 실비아의 눈에 차는 귀족 영식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위가 지위이니만큼 아무하고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또 사랑 없는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 권위와 면을 세워주고, 데리고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고, 다른 영애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해줄 수 있는 사람.
‘이 마법사 정도면 차고 넘치지.’
저 공녀를 보는 따뜻한 눈빛이 제게 닿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었다. 그 따스함을 기대하며 시선을 올리자마자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뭐야…… 차가워.’
황금색이 저렇게 차가울 수가 있는 색이던가. 여태 보아온 사내의 눈빛이 환영인가 싶다가도, 다시 어린 공녀에게로 닿는 황금빛 잔상은 손을 대고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공녀를 향할 때만 저런 눈빛을…….’
그 괴리감에 실비아는 입술을 악물어야 했다. 한편 이쯤 되니 아가레스도 눈치챘다.
‘빌어먹을 호르몬 반응.’
그는 겪어본 적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시선을 받는 것은 늘 달갑지 않다. 자연히 평소보다도 더욱 무정한 음성이 뱉어졌다.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겠으나, 내게는 다른 것을 담을 여유가 없다.”
“혹여 연인이-.”
“그보다 소중한 게 있어서.”
싸늘할 정도로 끊는 어조였지만 아가레스에게 실비아의 감정은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밤바람 아래 그의 어린 친구를 더 세워두고 싶진 않았다. 한편 이벨리아는 남은 빵을 베어 물며 아가레스를 한 번, 실비아를 한 번 바라봤다.
‘대충 알겠네.’
제 아가 토끼의 언사가 아주 예의 없었으나,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했으므로 타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 토끼 감정이 우선이지.’
친애하는 친구가 싫어하는 것이라면 나서서 막아주어도 모자랄 판에, 가서 짝짜꿍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추워. 얼른 가자. 죄송하지만 공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몸이 많이 허약하여.”
이벨리아가 실비아를 지나쳐 폴랑폴랑 뛰어가자 아가레스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시린 밤공기에 홀로 남은 실비아의 두 손이 세게 주먹 쥐어지고 두 눈은 무언가를 참아내듯 감겼으나, 아가레스도, 이벨리아도, 제 사람이 아닌 자들에게는 실로 무심했다.
“으앗-.”
아직은 어색한 하르벤타 제국의 예복이 발에 걸려 이벨리아가 휘청이자 아가레스가 곧바로 몸을 낮추어 받아냈다.
“뛰면 안 되겠다. 자꾸 넘어지려고 해.”
“뛰고 싶으면 뛰어도 돼. 잡아줄 테니까.”
모든 것은 너의 뜻대로. 아, 실비아는 입술을 감아 물었다. 한눈에 보아도 매력적인 사내가 만들어내는 말은 진정으로 실비아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위험하니까 뛰지 말아라, 위험하니까 조심해라, 그런 말이 아니었다. 애정을 가장하여 보호라는 명목으로 울타리 속에 넣어 가두는 것이 아니었다. 뛰어도 된다. 넘어져도 괜찮다. 잡아줄 테니까. 누군가의 의사를 그보다 더 존중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저 사내가 어린 공녀를 아끼는 방식은 그 누구라도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미치도록 부러웠다. 갈급하게 탐이 났다. 치솟는 질투심을 어찌 내리눌러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실비아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