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체스판의 킹, 이벨리아2021.04.26.
“아가. 이만 일어나야지.”
하르벤타 제국에는 아직 겨울의 입김이 닿지 않았기에, 이벨리아는 따뜻한 온도, 적당히 얇고 폭신한 이불을 한껏 만끽하며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으웅…… 도넛…….”
이벨리아가 잠꼬대로 도넛을 읊자 구석에 놓인 방석에 널브러져 있던 엔리르가 귀를 쫑긋 세우며 발딱 일어섰다. 도넛?! 어디?! 그 모습을 본 휴고가 실소를 머금었다. 제 딸이나, 제 딸의 동생이라고 자칭하는 새끼 용이나.
“꿈이구나. 아주 좋은 꿈이었는데…….”
눈을 비비며 비척비척 일어난 이벨리아는 휴고의 품에 안겨 운디네를 불러냈다.
“운디네에-.”
요즘 이벨리아의 보모정령이 되어버린 운디네의 오늘 용도는 ‘샤워 정령’이었다. 퐁, 작은 소리를 내며 나타난 운디네가 이벨리아의 머리 위를 불만스러운 듯 휘돌았다.
[병아리, 너 뭔가 굉장히 착각하나 본데, 내가 목욕을 돕기 위한 그런 하잘것없는 정령이 아니라고.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땅히 전쟁에 나서라거나 마족을 처치하라거나 하는 위대한 임무가 주어-.]
똑똑-. 그만 종알거리라는 듯, 휴고가 들어오면서 반쯤 열어두었던 문을 아가레스가 두어 번 두드리자 운디네는 곧바로 비실비실 떨어져 내렸다.
[-지는 것보다는 우리 병아리 샤워 정령이 낫지. 응. 나는 샤워 정령이야. 샤워 정령.]
저 악마는 아무리 봐도 너무 무서워. 너무 손속이 잔인해. 그제는 나를 손수건 위에 탈탈 털어서 병아리 손을 닦아주기도 했다고. 운디네는 군말 없이 이벨리아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 주고 머리를 감는 것을 도와주었다.
[자, 새끼 용 너도!]
“새끼 용 너……?”
엔리르가 날개를 펼치며 한 번 느리게 따라 읊자, 운디네가 곧바로 정정했다.
[새…… 아니, 어린 용님.]
아주 옛날엔 용들과 정령들의 왕이 자주 계약을 맺곤 했다. 즉, 운디네같은 하급 정령이야 한 손가락으로도 깔아뭉갤 수 있는 종족이 바로 용이다. 운디네는 엔리르에게 커다란 물 폭탄 하나를 투하해주며 생각했다.
‘우리 병아리 근처에는 다 무서운 것들밖에 없어. 악마랑 용이 다 뭐야.’
제 처지가 서글펐다.
‘제일 먼저 만난 건 난데……. 서러워…….’
*** 샤워가 끝난 후 두꺼운 수건으로 몸을 둘둘 감고 곧바로 이불에 뛰어들어 몸을 녹이지 않아도 되는, 그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다. 유아용 승마 옷으로 갈아입고 쫄랑쫄랑 걸어 나온 이벨리아에게, 아가레스가 수프 그릇을 밀어주며 물었다.
“꼬맹이, 어제 좋은 꿈 꿨어?”
비록 내가 만든 것이지만, 만월이 네게 달콤한 꿈을 가져다주었으면 좋으련만.
“응. 커다란 도넛을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꿨어. 내가 못 참고 도넛을 잡아먹는 바람에 떨어졌지!”
“……?”
네가 숲속을 거닐거나,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달에 가서 토끼를 만나거나, 뭐 그런 종류의 달콤한 꿈을 생각했는데.
‘하늘을 나는 도넛을 먹다가 뚝 떨어진 것도 네게 달콤했으면 됐다.’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생각하는 것마다, 꾸는 꿈마다 다채롭고 신선하여 아가레스는 선연하게 웃었다.
“토끼야, 나 도넛이 먹고 싶어.”
“잠시만.”
주변에 도넛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대답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아가레스와 이벨리아. 지배자인 악마와 아직은 어린 친구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작은 친구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악마는 곧바로 응했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수프 그릇을 천천히 다 비워낼 때 즈음 도넛을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자, 우리 꼬맹이 도넛.”
“도넛! 고마워, 토끼!”
“충실하군. 잘했다, 보모.”
“닥-.”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툭 내뱉는 휴고에게 닥쳐, 라고 말하려던 아가레스는 초롱초롱한 이벨리아의 눈망울을 보자마자 말을 급격히 선회했다. 우리 꼬맹이는 좋은 것만 듣고 자라야 하니까.
“……닭도 원한다면 구해다 줄 수 있다.”
의도를 알겠다는 듯 휴고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눈앞의 고위 악마는 생각보다 자신의 딸 앞에서 쩔쩔매는 듯했다.
‘소환해서 복종 계약을 맺은 사역마(使役魔)라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누구는 평생 가도 하나 부리기도 어려운 존재들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있다. 또 심지어 긴 일생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존재들은 그 앞에서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납작 엎드리고 있다.
‘사실 내 딸은 정령사가 아니라 테이머가 아닐까.’
휴고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 숙소를 나서니 하르벤타 제국의 황실 기사단원 스무 명이 사절단의 호위를 위해 배속되어 있었다. 기실 아르티나 공작이 있는 이상 그들의 호위는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타 제국의 사절단원을 맞이하는 데에는 항상 적당한 허례허식이 필요한 법이었다.
“하르벤타 황실 제2기사단장, 아얀 히페리온입니다. 귀 사절단의 첫걸음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롤드만큼이나 거대한 덩치의 제2기사단장은 강자 앞에서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승부욕을 애써 감추고 휴고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궁까지 가시는 길은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기쁘게 받아들이지. 고맙소.”
표면상으로는 사절단과 그들을 맞이하러 온 기사단의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면을 살피자면 두 대제국 고위층 간의 만남이었다. 이 순간부터는 단순한 읊조림도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할 수 있음은 물론. 사소한 예절 하나까지도 자국을 깎아내리지 않도록 각별히 신중하여야 했다. 마냥 화기애애할 수는 없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중한 가면을 쓴 그 아래로는 쉬이 떨칠 수 없는 경계의 시선이 얽혔다. 그때.
“에췽! 흐에췽!”
콜록, 콜록. 팽팽한 긴장감 사이를 뚫고 자그마한 재채기 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하르벤타 제국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사절단과 기사단의 엄중한 대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잡음이었다.
“합-!”
이벨리아도 심각한 분위기인 것을 알기는 알아서 자그마한 두 손으로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좋지 않은 타이밍에 튀어나온 재채기와 기침으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민망해진 이벨리아가 볼을 발갛게 붉히고 변명했다.
“도넛 위에 하얀 가루가 코에 들어가서…….”
팽팽하던 공기가 일순 탁- 하고 풀렸다. 끊어질 듯 말 듯 했던 고무줄을 작은 마스코트의 재채기 한 번이 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르벤타의 기사단원들도 사절단 사이에 섞인 자그마한 아이가 제 얼굴만 한 도넛을 두 손에 꼭 쥔 채 얼굴을 붉히고 웅얼거리자 더 이상 긴장된 분위기를 이어갈 여력을 잃었다.
“저기, 도넛 줄까요?”
쭈뼛쭈뼛 다가와 도넛이 든 상자를 내미는 아이는 천진했다. 애써 그러모은 경계심을 붙잡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고맙습니다.”
하르벤타 황실의 제2기사단장 아얀이 슬며시 웃으며 이벨리아가 내민 도넛 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얀의 커다란 손이 초콜릿이 가득 묻은 도넛 쪽으로 다가가자 이벨리아가 흠칫 어깨를 떨더니 도넛 상자를 품 안으로 꼬옥 끌어안고 몸을 살짝 모로 돌렸다.
“흐잉-.”
자기가 먹으라고 줘놓고 자기가 거부하는 모양새.
“……?”
“……초코 맛은 빼고요.”
그건 내 거야.
“이거 드세요.”
제일 맛없는 거. *** 황실 기사단과 함께 길을 떠난 지 사흘. 그 고결하다는 하르벤타 제국 황실 기사단은 이벨리아의 둘도 없는 리액션 전담 부대가 되었다. 사정을 논하자면 이랬다.
“나는 검을 쓸 줄 알아요!”
이벨리아가 번쩍 외친 말을 어린아이의 허세이겠거니 싶어 피식 웃어넘겼던 기사들이, 결국 검술을 보고는 자지러지게 웃고 말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우……웃어? 내 검술을 보고?”
모처럼 검술을 보여주었는데 모든 기사가 주저앉아 땅바닥까지 쳐가면서 웃어젖히는 것이 아닌가. 이벨리아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토실토실한 두 뺨을 한껏 부풀리고 세상 처량하게 상처받은 눈으로 울먹거리고 말았다. 그 마음을 풀어주고자, 지고하다는 하르벤타 제국의 황실 기사단은 타 제국에서 온 어린 사절단원의 장단을 자진모리로 최대한 맞춰주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오는 길에 오크를 무찔렀어요.”
“그것참 용맹하군요!”
무찌르긴. 잡아먹으러 가다가 되려 자기가 잡아먹혔으면 몰라.
“그리고 아가 시절에는 친구를 괴롭히는 악당을 혼내준 적도 있고요.”
“역시 딱 보이는 대로 정의롭고요!”
지금도 충분히 아가인 것 같은데. 검술로 인해 땅바닥으로 추락한 위엄과 명성을 되찾고자 애써 무용담을 늘어놓는 작은 아이는 퍽 귀여웠기에, 하르벤타의 황실 기사단은 수도로 향하는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우쭈쭈, 대단하다고 추켜올려주니 축 늘어졌던 어깨와 눈망울이 점점 뿌듯하게 치솟는 것이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에르카디아 제국의 황제가 일부러 이 어린 공녀를 사절단원으로 보낸 건가.’
‘그렇다면 제법 좋은 선택이었군.’
어린아이를 앞세워 경계심을 풀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하고 많은 아이 중 하필 이 아이를 선택하여 보낸 것은 주효했다. 그렇게 에르카디아 제국의 사절단원들은 하르벤타 황실 기사단의 비호를 받으며 막힘없이 황궁까지 다다랐다. 그 어느 때의 공식적인 교류보다 훨씬 따스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 하르벤타 황궁의 문을 통과한 시간은 밤 9시.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약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말 위에서 아가레스에게 기대어 재잘대던 이벨리아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가레스의 팔 위에 걸터앉아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편 사절단이 곧 도착한다는 기별을 미리 받은 하르벤타 제국의 황제와 고위 대신 몇몇은 황제의 알현실에 모여 있었기에, 휴고를 비롯한 사절단원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황제를 대면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아르티나 공작.”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는 둥, 오늘 길이 힘들지는 않았냐는 둥, 인사치레는 없었다. 황제는 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그녀가 저 자리에 앉기 위해서, 황좌는 그녀의 머리칼 색보다 더 붉은 피를 머금어야만 했다. 알현실 내부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 탓일 터.
“하르벤타 제국의 영원한 홍염을 뵙습니다.”
휴고는 살짝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한 말투로, 아주 미세하게 묵례하며 화답했다. 에르카디아 제국 사절단 대표인 휴고는 곧 황제 칼라일의 얼굴이었다. 눈앞의 저 여인이 비록 드넓은 동대륙을 지배하는 황제라고는 하나, 휴고의 황제는 아니었다. 과한 의전을 보이면 역으로 에르카디아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휴고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재미없는 성정은 여전하군, 그래.”
“…….”
“한때는 그래도 전우 아니었나, 우리?”
“…….”
“대답 좀 해주면 안 되나? 응? 이것 참, 차라리 칼라일을 대하는 게 더 쉬울 정도니, 원.”
금을 봐도, 여자를 봐도, 돌 같기가 한결같다던 저 아르티나 공작을 흔들 수 있는 소재가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황제의 시선이 아가레스에게로 향하고, 악마의 품 안에서 살랑이는 황금빛 머리칼에 닿았다.
“보아하니 아르티나의 공녀로군. 그 유명한.”
이벨리아가 입에 오르자 무례를 넘어 불손하다고 보기에 충분한 기운이 황제의 알현실을 덮었다.
“제 여식에게는 관심 거두시지요.”
표면적으로 정중한 어조는 날카로운 경고를 담았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그대인데.”
객관적으로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황제가 미려하게 웃으며 황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몸짓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표범의 몸짓과도 같아, 사절단원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대.”
황제가 드높이 이어진 계단에서 한 걸음씩, 걸어 내려왔다. 높지 않은 구두 굽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선명했다.
“내게 오는 것이 어떠한가.”
피비린내를 애써 감춘 장미의 잔향이 퍼져나갔다.
“거절합니다.”
구두 굽의 마찰음이 멎는 것과 동시에, 딱딱한 음성이 칼로 자르듯 떨어졌다. 황제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을 울렸다.
“그대를 내 충신으로 삼고 싶은 관심은 차고도 넘치나, 그대를 공략한다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예리한 시선이 새근새근 숨을 내뱉는 어린아이에게로 가닿았다. 서대륙 제일의 검, 그의 아내인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령사. 그리고 어린 나이에 이미 명성이 동대륙까지 닿은 두 공자. 필경 평범하지는 않을 저 새끼 여우를 비롯하여 이 세상 어떤 존재라도 위압할 특유의 기운을 가진 고위 악마.
‘모든 것이 패로 치자면 최상.’
전란의 시대를 헤쳐 한 제국의 황좌를 움켜쥔 자였다. 황제, 세필리아의 뛰어난 두뇌와 직감은 정보의 극히 일부분만 가지고도 실체를 간파했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패가 저기, 평온하게 안긴 저 작은 소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공녀의 마음만 잡으면 나머지 패들은 모두 자연히 따라오지 않겠는가.’
요요한 미소가 차게 번졌다. *** 환대라면 환대였다. 예년의 사절단도, 그 이전의 사절단도, 이토록 늦은 시간에 황제가 직접 맞이하는 경우는 없었으니. 침의로 갈아입은 황제는 화장기 없이도 붉은 입술을 손으로 느리게 쓸며 시종장에게 황금색 패를 건네었다.
“공녀가 일어나면 이 통행패를 건네도록.”
“하오나 적국의 공녀에게 이 통행패는…….”
“에르카디아와 하르벤타의 문제가 아니다. 이 대륙이 지금과 같기 위해서는 그 공녀가 필요하다.”
시종장은 떨리는 손으로 패를 받았다. 하르벤타의 황족만이 지닐 수 있는 금색 통행패. 이 황궁 내부의 극비 장소만을 제외하고는 하르벤타 제국 그 어디라도 마음껏 통행할 수 있는 신분패였다. 황족이 아닌 자가 이 패를 지닌다는 것은 국빈을 넘어 황제의 직접적인 비호를 받는다는 의미.
“에르카디아의 황제가 굳이 공녀를 사절단으로 보낸 의미도 바로 그것이겠지……. 이 능구렁이 같은 자. 그것도 주변에 저런 존재들을 줄줄이 딸려서.”
“미천한 소인은 감히 폐하의 의중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사옵니다.”
꽤 아끼는 시종장이다. 황제가 붉은 과실을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이 대륙은 항상 혼란스럽지. 평화? 그딴 건 우리 두 제국의 손에 달린 게 아니다.”
“하오시면……?”
“1차 인마전쟁 때 활개 쳤던 금제탑, 그 연금술사들이 과연 모두 사라졌을까? 스러진 수많은 왕국의 잔당군은? 또 마족은 어떠한가?”
“…….”
“만일 이들과의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동대륙이나 서대륙의 군세만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나.”
한 모금, 쓰디쓴 와인을 머금으며 황제가 물었다.
“모든 것은 홍염의 위세 아래 짓밟힐 것-.”
“입에 발린 말은 되었다. 현실을 똑바로 보도록.”
서늘한 일갈에 시종장의 입이 다물렸다. 마족의 출현이 잦아지고 간간이 악마들까지 깽판을 치고 있었다. 인간들이 과거의 전쟁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마족들도 그러했다. 금제탑 하에서 과거 용과 비견될 정도의 이능을 뽐내던 연금술사들이 모두 죽었을 리도 없었다. 어딘가에서 재건을 꿈꾸고 있을 것이 자명했다.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스러진 왕국의 잔당들은 어떠한가. 여전히 하르벤타의 국경지대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분명, 장담치 못한다.’
시종장의 등허리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나이가 지긋한 시종장은 그 시절을 온몸으로 겪었다. 알기에 느껴지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특히 마족들과의 전쟁은 더더욱.’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충돌이다. 쉬이 누군가의 승기를 장담할 수는 없음이 당연했다.
“그대도 잘 알겠지. 칼라일과 나, 아르티나 공작이 손을 잡았던 그 시절조차, 동(東)마계의 지배자가 돕지 않았더라면 이 모호한 종전마저 어려웠을 것이다.”
“…….”
“동대륙과 서대륙의 군사력뿐만이 아니야. 더 많은 것이 필요해.”
이를테면 정령, 마계 내부에서 우리를 도울 고위 악마, 그 외에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르티나 공녀는 황제로서 탐이 나는 패이기도 하지만.”
입가에 흐른 붉은 와인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는 자태가 고혹적이었다.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자이기도 하지.”
남은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은 후, 황제가 빈 잔을 바닥에 툭 하니 던졌다. 굴러와 발아래에 닿는 와인 잔을 주워들며 시종장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전쟁은 곧 거대한 체스판이라지.’
적막 속, 버릇처럼 입매를 매만지던 황제는 흐리게 웃었다.
‘킹이 내가 아니라 그 공녀일 수도 있겠어.’
그 아이는 이미, 제 발등에 입이라도 맞출 것 같은 충성스러운 말들을 판 위에 올리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