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좋은 꿈 꿔, 이브2021.04.22.
본래 이틀하고도 반나절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에르카디아 제국 게이트까지의 여행은 무려 반나절이나 단축되어 이틀 만에 끝났다. 쓸데없는 짐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벨리아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따라와 주어 말을 재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이트로군.”
“벌써?!”
이벨리아는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사절단 일행이 게이트가 있는 건물에 미처 닿기도 전. 사절단이 일정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게이트 관리자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얼마나 급하게 의복을 갈아입었는지 크라바트는 비뚤어져 있었고, 신발은 짝이 맞지 않은 채였다. 관리자가 사절단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 한지에서 공작 각하와 공녀님을 뵙다니, 평생 새길 가문의 영광입니다!”
게이트가 설치된 마을, 위고는 에르카디아 제국에서도 제법 한적한 지역. 권력과 문화의 중심인 수도와는 꽤 거리가 멀다. 게이트를 지키는 지방 귀족이 중앙 귀족 중에서도 최고위 세력자인 아르티나 공작과 공녀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니, 이렇게 절절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생이 많군.”
“그저 소인이 제국을 위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각하!”
“음. 아주 기특한 게이트로군!”
“저자는 게이트가 아니고 관리자야, 꼬맹이.”
“음. 아주 기특한 관리자로군!”
“아이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공녀님.”
아가레스의 속삭임을 듣고 마치 말실수인 것처럼 잘못을 정정하는 이벨리아에게, 게이트 관리자가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지금 바로 게이트를 사용하고자 하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언제 오실지 몰라 미리부터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관리자를 향해, 휴고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관리자는 한층 더 황송함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게이트 오픈을 지시했다.
“자! 우리 제국을 위해 먼 길 다녀오실 사절단원들께 모두 경례!”
- 척! 일사불란하게 게이트를 열던 관리자 이하 실무관들이 사절단을 향해 왼쪽 가슴에 오른손 주먹을 올려 보였다.
“다녀오겠다!”
맑게 화답한 것은 다름 아닌 이 사절단의 깍두기 마스코트 이벨리아. 그렇게 예상보다 일찍, 사절단원들은 화려한 아치문 속에 찬란한 오색빛깔이 마치 베일처럼 넘실대는 게이트를 마주하고 섰다.
“아가. 이리 온.”
처음 보는 게이트를 홀로 걷는 것을 두려워할까 염려한 휴고가 이벨리아를 안아 들고자 손을 뻗었으나.
“으으응- 나도 아빠랑 같이 걸어갈래.”
이벨리아는 품에 안기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오른손에는 휴고의 손을, 왼손에는 아가레스의 손을 꼬옥 잡고 제 발로 걸었다. 제법 긴 통로를 걸어가야 하는 줄 알고 잡은 손이었으나, 실상 그토록 고대하던 게이트라는 것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빛의 베일 속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갔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니.
“우와아!!”
화려한 튜닉을 입은 채 인사를 건네던 서대륙의 게이트 관리자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갈한 당의를 갖추어 입은 사람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높은 석조건물이 아닌 낮은 목조건물이었다. 정열적이고 화려한 분위기의 에르카디아 제국과는 달리, 하르벤타 제국에서는 단아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물씬 묻어났다. 두 제국은 마치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와도 같이 하나부터 열까지 판이했다.
“……!!”
그 생경한 풍경을 대면한 이벨리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것은 당연지사. 동동 구르는 두 발이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달릴 야생마처럼 보였다.
“두 제국의 화친 아래 이 대륙에 평화가 깃들기를.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게이트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르벤타 제국의 관리자가 모자람 없는 예법으로 사절단을 맞이했다. 흔한 인사치레였기에 모두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으나, 새로운 세상에 넋이 빠진 병아리만이 몽롱한 목소리로 홀랑 대답했다.
“네에-!”
자그마한 입은 살포시 벌리고 커다란 눈은 동글동글 바삐 굴리면서.
“……그, 호위를 담당하실 하르벤타 황실 기사님들께서는 내일 오전에 이쪽으로 오실 예정입니다. 오늘 밤은 이 근처에서 쉬시고 내일 황궁으로 출발하시면 되실 겁니다.”
“네에-!”
“묵으실만한 곳 몇 군데를 소개-.”
“네에-!”
뭘 알고 냉큼냉큼 대답하시는 건가. 이쯤 되니 하르벤타 제국의 게이트 관리자는 에르카디아 제국 사절단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이 영애가 사절단의 대표인가…….’
에르카디아 제국의 아르티나 공작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남자, 그리고 뒤에 시립한 모든 사절단원들과 자그마한 새끼 여우까지.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의 영애를 주시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굉장한 능력을 갖춘 영애임이 분명했다.
‘게이트 관리자 경력 어언 20년. 내 직감은 날카롭지. 분명하다. 이 어린 영애가 이번 사절단의 실세이자 대표이다.’
생각을 마친 게이트 관리자는 욕망에 번뜩이는 눈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 영애에게 잘 보여야 한다.’
이내 게이트 관리자는 손수 지도를 꺼내어 다양한 맛집, 묵을만한 숙소, 구경거리 등을 표시해주며 이벨리아에게 잘 보이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이 아가씨가 황제 폐하께 좋은 소리 한 말씀만 남겨주시면……!’
어쩌면 자신도 그토록 바라던 중앙 정계로 뛰어 올라갈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심으로 가득 찬 게이트 관리자는 끝까지 굽신대며 이벨리아를 배웅했다.
“영애……!”
“감히! 에르카디아 제국의 공녀님이시다. 호칭을 바로잡도록.”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에르카디아 제국 귀족분들을 잘 알지 못하여 그만……. 공녀님, 그저 잘 부탁드립니다!”
“……?”
“그, 수도에 도착하셔서도 제가 드린 지도나 안내서나 가끔 꺼내어 보시고, 누가 어디서 났냐 물으신다면 제 이야기를 슬쩍 흘려주시고…….”
이벨리아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의미의 윙크 몇 방을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실 모든 사절단원들의 이벨리아를 향한 진중한 눈빛의 의미가 다음과 같다는 것을 몰랐기에 생긴 크나큰 오해였다. 사절단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바삐 머리를 굴렸다.
‘나가는 문은 네 개. 보이는 길목은 약 여섯 개.’
‘어느 문을 통해서 어느 길목으로 나가 어떤 사고를 치실지 모르니 다들 뒷덜미 잡아챌 준비해라.’
실세는 무슨. 이 사절단에서 작은 병아리의 지위는 사고 잘 치는 깍두기 마스코트 정도였다. ***
“귀여운 아가씨! 먼 곳에서 오셨나 봐! 비싸게 한 벌 줄 테니까 아무거나 골라 들어봐!!”
“날이면 날마다 오는 당과!! 오늘 안 사도 내일 또 오니 언제든 오시라!!”
“자아, 자아, 물은 떠드리지만, 음식은 셀프!!”
“엥?”
호객하는 문구들이 어딘가 좀 이상한데? 게이트 관리자가 추천해 준 숙소까지 이어지는 길은 시장이었다. 복장도, 건물도, 판매하는 물품들도. 에르카디아 제국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떠들썩한 시장의 분위기만큼은 비슷했다. 이상한 호객 문구들을 들으며 연신 두리번거리던 이벨리아의 시선이 꽃물을 그대로 빼다 놓은 듯한 연분홍색의 당의와 진한 분홍색의 치마에 진득하니 머물렀다.
‘예쁘다…….’
이를 알아챈 휴고는 곧바로 상인에게 금화를 던졌다.
“헤헤- 이게 아주 비-싼 옷이라, 거스름돈은 좀…….”
금화 하나면 그 옷을 사도 몇 벌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휴고도 알고 있었으나, 휴고에게 거추장스러운 은화란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푼돈은 됐다.”
딱 잘라 사양하는 휴고를 보며 입이 찢어져라 웃은 상인은 나비 모양의 장신구 하나를 덤으로 챙겨 주었다.
‘저거 맛있겠다…….’
다음으로 이벨리아의 시선이 당과에 머물자 이번에는 아가레스가 손가락만 한 보석을 꺼내어 던졌다.
“아니, 이런 보석은 거스름돈을 준비할 수가 없는데……!”
“됐다. 썩어 나는 게 그런 거라.”
왜인지 견제하듯 휴고를 슬쩍 쳐다보며 거만하게 말하자, 그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휴고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돈 지랄도 풍년이군.”
“돈이 풍년이라.”
오만하고 거만한 두 금안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채우고 맞닿았다. 돈으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고위 악마와 제국의 공작은 이후 이벨리아의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을 경쟁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여기 담긴 것 전부.”
“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저것도 상자째로.”
“난 이걸 통째로.”
“아빠도 토끼도 그만해…….”
“이봐. 이 시장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이 시장이 얼마이든 저자가 내는 돈의 두 배를 줄 테니 내게 팔도록.”
이쯤 되니 이벨리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진짜, 진짜…….
“창피해! 둘 다 그만하라니까!”
여하튼 그날, 작은 병아리의 시선 한 번에 거금이 와르르 쏟아졌으니. 이벨리아는 본의 아니게 죽어가던 골목 시장을 일시적으로나마 살린 소상공인의 영웅이었다. *** [여기 어때? 이리 와서 놀자!] 게이트 관리자가 추천해준 숙소의 이름은 전혀 고급스럽지 않았다.
“동대륙은 숙소 이름도 참 이상하네.”
그러나 내부는 제법 조용하고 정갈한 것이, 간간이 해안 도시로 쉬러 오는 하르벤타 제국 고위 귀족들을 타깃으로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했다.
“저희 숙소의 방은 모두 1인실입니다.”
“상관없네.”
고급화 전략에 맞추어 모든 방이 1인실로 제작되었기에 이벨리아도 혼자서 방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휴고가 망설이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아가레스와 엔리르의 존재 때문이었다.
‘악마와 용이 옆에 붙어 있으니, 편하긴 하군.’
새끼 여우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엔리르는 이벨리아의 방에서 함께 잠을 청할 것이었다. 더 나아가 보모 역할을 톡톡히 하는 악마는 잠을 자지 않고 이벨리아의 기척을 살필 것이니, 어떤 불청객이 든다 해도 처리에 무리 없을 터였다. 가장 좋은 방을 배정받자마자 운디네를 불러 샤워를 마친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곧바로 쓰러져 잠들었다. 어린아이의 체력으로 이틀간 말을 타고 달린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으니, 아무리 망아지처럼 폴딱거리던 이벨리아라고 하더라도 당연했다.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한창 꿈속에서 헤매던 시간, 새벽 한 시. 진한 브랜디를 마시며 사절단의 업무 서류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훑던 휴고의 눈이 찌푸려졌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군.”
한숨을 쉬던 휴고가 이내 검을 쥐고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아가레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지.”
“수가 꽤 많은 것 같은데-.”
혼자 충분하겠나, 라고 물으려던 휴고는 눈앞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상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느껴지는 기척의 수십 배가 넘는 암살자들이 들이닥치더라도 걱정은 쓸모없는 것일 터였다.
“그대에게 향하는 암살자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가 그대의 보모는 아니니.”
이벨리아가 눈앞에 없으면 늘 그렇듯, 무감정한 얼굴로 툭 내뱉은 아가레스는 이내 휴고의 방 창문을 열고 나와 지붕 위로 향했다. 근처를 맴도는 암살자들의 정체는 휴고가 밝힐 것이었다. 에르카디아의 데퐁트이든 혹은 하르벤타의 다른 누구이든, 아가레스에게는 전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우리 꼬맹이 한창 잘 자고 있는데.’
그 단잠을 방해하지 않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자 검은 연기가 묵색의 검으로 변해 단단한 손에 잡혔다. 이벨리아의 방 바로 위의 지붕에 자리를 잡은 아가레스는 창문으로 들어가려는 암살자들을 마치 하루살이 잡듯 하나하나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아르티나 공작 외에 이런 자가 있다는 말은……!”
“쉿.”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으로 내려다보며 피로 젖은 왼손 검지를 붉은 입술 위에 가져다 대는 모습은 죽음을 지척에 두고 사는 암살자들마저 소름 돋게 했다. 얼굴과 손에 튄 뜨뜻한 피의 감촉을 즐기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비현실적이었다. 휙-. 묵색의 검이 한 번 더 휘둘러졌다. 갈색 지붕에 다시금 피가 튀었다. 한 암살자가 검에 베여 지붕 위로 쓰러지면서 둔탁한 소리를 내자 아가레스가 쯧- 혀를 한 번 찼다.
“죽을 때 조심 좀 하자.”
이후 아가레스는 열댓 명의 암살자들이 겨누는 검을 모두 받아내면서도 지붕에 세게 떨어지거나, 이벨리아의 방 창문에 부딪히려는 암살자들의 뒷덜미를 일일이 잡아채어 지붕 위에 살포시 내려두었다. 혹시라도 암살자들이 건물에 부딪히는 시끄러운 소리에 그의 어린 친구가 깨면 안 되니까.
“아마 좋은 꿈을 꾸고 있을 텐데.”
어린아이의 행복한 꿈은 방해하는 게 아니지. 암살자를 처리하는 것은 진정 순식간이었다. 달을 가리며 흘러가던 구름이 미처 다 흘러가지도 못하였을 정도로 짧은 시간. 마지막 남은 암살자마저 깔끔하게 베어 넘긴 후 평소의 습관대로 검에 진득하게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고자 높이 들어 올리던 그는, 지붕 아래로 시선이 향하자 이내 멈칫했다.
‘핏방울 소리가 잠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피를 채 털어내지 못한 묵색의 검은 그대로 다시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상의에 묻은 암살자들의 피가 흘러내리면서 지붕에 톡, 톡, 부딪히는 소리마저도 신경이 쓰여, 그는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내려두었다.
‘깨지는 않았겠지.’
작은 친구가 잘 자고 있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허락 없이는 함부로 방에 들어가고 싶지도, 창문으로 엿보고 싶지도 않았다. 잃고 싶지 않은 단 하나. 그 존재의 앞에서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으니. 지붕 위에서 예리한 청각을 곤두세우니 새근- 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아가레스가 어두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왼쪽으로 둥근 반달이 눈에 시리게 박혔다.
“……하현달인가.”
문득 언젠가 들었던 동대륙의 구전 설화가 떠올랐다. 동대륙에서는 만월(滿月)이 아이들에게 달콤한 꿈을 가져다준다던데. 잠시 뒤.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이벨리아의 방 창문 앞에는 노랗고 커다란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마치 만월(滿月)이 지상 가까이 내려온 것처럼. 하늘에 뜬 하현달을 가린 악마의 보름달은, 새벽 내내 달이 지나는 길을 따라 이벨리아의 방을 비췄다. 전해져오는 설화처럼, 네게도 달콤한 꿈이 닿길.
‘좋은 꿈 꿔. 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