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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잘 부탁하지, 보모 (58/323)

58화: 잘 부탁하지, 보모2021.04.19.

제발 사절단의 보고가 ‘하르벤타 제국 점령 완료.’로 흐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충분히 현실성 있는 생각을 하며 식은땀을 흘리던 황제가 이내 짧은 축사를 내뱉었다.

16549732668835.jpg“그대들의 손에 에르카디아와 하르벤타의 평화와 교류가 달렸다.”

순간 불안해져서 한 번 더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히 소드마스터와 대악마, 용의 목줄을 한 번에 쥐고 있는 공녀를 향해서.

16549732668835.jpg“평화와 교류다. 응? 평화와 교류. 전쟁하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 명심하고. 긴말은 않겠다. 먼 길, 부디 안전하게 다녀오도록.”

16549732668844.jpg“에르카디아 제국에 영원한 광영을!”

사절단이 한목소리로 답했으며,

16549732668849.jpg“네엡!!”

빵빵한 곰돌이 가방을 멘 병아리 하나도 야무지게 답했다. 황제의 우려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16549732668854.jpg“아가, 잘 다녀와. 그리고 요…… 아니, 여우 너도.”

16549732668858.jpg“여우. 이브 잘 부탁한다.”

아르칸과 세드릭의 인사에 엔리르가 기쁘게 꼬리를 살랑댔다. 잘 다녀오면 그때부터는 누나뿐만이 아니라 형아도 생길 게 아닌가.

16549732668862.jpg“우리 아가, 친구들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엘리시아도 어린 딸을 꼭 껴안으며 당부했다. 먼 타지로 간다고 하니, 아무리 남편과 강한 친구들이 동행한다고 해도 어머니는 마냥 걱정이었다. 감정을 애써 숨긴 엘리시아가 이벨리아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고서 몸을 일으켜 아가레스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오로지 휴고와 아가레스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16549732668862.jpg“과거 전쟁이 끝날 때 즈음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요.”

지루한 허례허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아가레스의 무료한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떻게 잊겠는가. 피 칠갑 된 갑옷을 입고서,

16549732668862.jpg‘제대로 하지 못하면 가장 먼저 그대의 멱을 따버리겠다.’

  라며 검을 들이대던 현 공작부인, 구 전략가를.

16549732668877.jpg“…….”

16549732668862.jpg“아직 유효합니다. 그 말.”

아름다운 드레스, 고운 얼굴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말투는 그 위태로운 시절에 마주했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리 대단한 장군이었다 한들 대악마인 아가레스에게 댈 것은 아니니, 그가 엘리시아의 협박에 위협을 느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꼬맹이에게 소중한 자이니만큼 또 대놓고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이벨리아에게 말했다.

16549732668877.jpg“……꼬맹이.”

16549732668849.jpg“앙?”

16549732668877.jpg“너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면서 커라.”

16549732668849.jpg“앙!”

네가 전사가 된다면 나는 너의 검이 될 것이고, 네가 전략가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너의 손에 잡힌 패가 되어줄 것이나, 부디 네 부모님이 걸었던 그 위험한 길은 걷지 말라고. 그 속뜻을 모르는 이벨리아는 마냥 좋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인간 약 스무 명, 용 한 마리, 대악마 한 명, 깍두기 하나로 이루어진 전례 없는 구성의 사절단이 출발했다. 각자 이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그리고 놀아야 할 것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 커다란 말 앞에 당당히 서서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이벨리아를 향해, 사절단원 일부가 쭈뼛쭈뼛 걸어오더니 두 손을 펴 마차를 가리켰다.

16549732698521.jpg“공녀님께서는 마차에 오르시지요.”

16549732668849.jpg“아니, 나도 말 탈래.”

여행 초장부터 마차라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이벨리아는 지나치게 공손한 사절단원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16549732698521.jpg“공녀님께서 벌써 말 타는 법을 익히셨……?”

16549732668849.jpg“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출발하도록.”

아무리 어려도 제국 유일의 공녀. 무려 이 제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지위의 여성이다. 이벨리아의 자연스러운 하대를 사절단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기실 아직 혼자 말을 타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들 말을 타고 가는데 혼자만 마차에 들어가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16549732668849.jpg‘비장의 방법이 있지.’

앞서나가는 사절단원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벨리아가 툭 외쳤다.

16549732668849.jpg“토끼!”

16549732668877.jpg“이리와, 우리 꼬맹이.”

그런 이벨리아의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챈 아가레스가 어린 친구를 들어 제 앞에 앉혔다.

1654973272702.jpg“난 날면 안 되는데……. 뛰어갈게.”

아직 어린 용이지만 달리는 속도는 말 못지않은 엔리르는 오랜만에 신나게 달리고 싶은 마음에 이벨리아의 품을 거절했다.

16549732727023.jpg“악마. 이브 잘 챙겨라.”

16549732668877.jpg“별걱정을 다 하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휴고가 소중한 딸을 결국 아가레스에게 맡긴 것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설원에서 악마가 그의 딸에게 보인 태도, 그리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보아온 동(東)마계의 지배자에 대한 믿음. 휴고는 에르카디아 대륙을 대표하는 사절단의 인솔자인 만큼 선두에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았기에 부득이하다는 이유가 가장 크기는 했지만. 그렇게 휴고마저도 출발한 후, 가장 후미에 남은 아가레스와 이벨리아, 엔리르도 출발을 알렸다.

16549732668849.jpg“이랴!!”

삐약- 청량한 목소리가 말을 재촉했으나, 말은 한 번 투레질을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16549732668849.jpg“이랴……?”

다른 사람들이 이랴! 하면 잘만 앞으로 나가던데. 대체 왜 앞으로 나가지 않느냐는 듯 아가레스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니, 아가레스가 씩 웃으며 속삭였다.

16549732668877.jpg“말이 못 들었나 보다. 한 번 더 해봐.”

16549732668849.jpg“이랴!!”

말조차 무시할 법한 작은 친구의 맑은 호령에 맞추어 아가레스가 말의 옆구리를 살짝 차자 군마는 비로소 다른 사절단의 흔적을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16549732668877.jpg“봐. 조금 크게 말하니까 되지?”

16549732668849.jpg“응!”

무엇이든 이벨리아가 스스로 해냈다고 믿게 해주고 싶은 아가레스의 배려였다. 그렇게 날쌔게 달리는 군마 위에서 혹시라도 어린 친구가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눈치를 살폈으나 괜한 걱정임이 분명했다.

16549732668877.jpg‘누가 아르티나의 아이 아니랄까 봐.’

바람을 맞으며 황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어린 친구의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있었고, 바다를 가득 담은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니.

16549732668877.jpg“자, 여기를 잡고 달리는 거야.”

아가레스가 자신의 팔을 잡은 이벨리아의 작은 손을 끌어다가 고삐 위에 올려주었다. 고삐는 넘겨주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단단한 두 다리로 말 위를 지탱하며 작은 친구를 뒤에서 감싼 채였다.

16549732668877.jpg“허리는 펴고. 시선은 앞을 보고.”

위험하다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은 그가 친구를 아끼는 방법이 아니었다.

16549732668877.jpg“옳지. 잘하네.”

그래, 지금처럼 너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도록 해. 방해하는 모든 위험요소는 내가 없애면 그만이니.

16549732668849.jpg“헤헤. 행복해. 세상이 예뻐. 말이 커다래.”

16549732668877.jpg“…….”

어린 친구는 그의 시야에 비친 세상마저 아름답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흔하기 짝이 없는 이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다니. 아니, 그가 잠시라도 이 증오스러운 세상을 향해 보기 좋다는 감정을 갖다니.

16549732668877.jpg‘이건 곤란한데.’

아가레스는 그 생경함에 눈을 꽉 감았다가 떠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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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발한 지 이틀째. 모든 사절단원이 어제 제법 무리를 해서 달려왔기에 오늘 저녁까지 꼬박 달리면 게이트에 다다를 예정이었다. 어린 공녀님이 사절단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하였던 단원들은 출발 하루 만에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만 했다.

16549732668849.jpg“육포! 육포를 더 먹을 사람이나 여우 손!”

자기만 식충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벨리아는 어제저녁부터 뽀르르 다니며 식량 보급을 돕기도 했고.

16549732668849.jpg“운디네! 주변에 악당이 있는지 없는지 봐줘!”

운디네를 불러서 주변 정찰을 시키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도움이 되려는 모습을 손수 보여주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16549732668849.jpg“도둑이다! 모두 죽기 싫으면 손 들어!”

심지어 어젯밤 모두가 예견했던 산도적들이 나타났을 때는 호기롭게 검을 뽑아 겨누기도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누나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 엔리르 역시 어딘가로 뛰어가 나무 열매를 따오기도 하고 작은 토끼를 물어오기도 하면서 간식거리에 보탬이 되었다.

16549732698521.jpg“이 강아지 참 똑똑하기도 하지.”

16549732698521.jpg“강아지가 아니라 여우라더라. 공녀님께서 애지중지하신다던데.”

나무 열매를 입에 물고 돌아다니다가 ‘애지중지’라는 말을 듣자 엔리르가 갑자기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가슴을 쭈욱 폈다.

1654973272702.jpg‘애지중지……! 나는 누나가 애지중지하는 대단한 용!’

그렇게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모든 사절단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이번 사절단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순탄하게 게이트로 향하던 도중 잠시 쉬어가게 된 이름 없는 낮은 산맥. - 바스락.

16549732782426.jpg“꾸에엑-!!”

여행 중에 도적 떼나 몬스터 등과 마주치는 일은 다반사이기에, 인간의 몸통에 돼지의 머리를 한 오크가 길을 가로막은 이 상황에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몬스터를 처음 마주한 이벨리아를 제외하고는.

16549732668849.jpg“엥? 꾸에엑?”

풀숲에서 돼지머리가 쏙 올라왔을 때는 세상 해맑게,

16549732668849.jpg“앗, 돼지다! 바비큐 준비!”

라고 외쳤던 이벨리아는, 돼지의 머리에 이어 몸통이 나타나자 딱딱하게 경직되어 눈을 비비고야 말았다.

16549732668849.jpg“…….”

저게 뭐야. 저게 뭐야. 머리는 돼지인데 왜 몸통은 사람 같지.

16549732782426.jpg“꾸에엑-.”

울음소리를 들으니 사람이 아니라 돼지가 맞는 것도 같은데. 입을 떡하니 벌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작은 아이가 걱정되어 휴고와 아가레스를 비롯한 모든 사절단원들은 우려 섞인 눈으로 이벨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16549732668849.jpg“저게 모야…….”

이내 푹하니 숙인 고개가 심상치 않았다. 꼬옥 감은 두 눈이 두렵다는 심정을 대변하는 것도 같았다. 이벨리아의 작은 손이 슬금슬금 아가레스의 옷자락을 쥐자, 휴고와 아가레스가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16549732727023.jpg“오크 따위가.”

16549732668877.jpg“내 꼬맹이를 겁줬어? 감히?”

내 딸을, 내 작은 친구를 겁먹게 한 오크를 처단하려던 찰나. 이벨리아의 작은 입이 서서히 열렸다.

16549732668849.jpg“……잘라서 머리만 먹어야 하려나 봐.”

16549732668844.jpg“……?”

……뭘 먹어?

16549732668849.jpg“머리만 돼지 모양이니까.”

세상 진지한 말투가 다시없을 식자재를 연구하는 요리사의 그것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16549732668849.jpg“응. 저 돌연변이 돼지의 머리만 잘라서- 운디네!”

사절단은 여행 일정을 줄이기 위해 간단한 육포와 수프 따위로 식사를 해결하였기에, 이틀 만에 돼지고기 비스름한 것을 눈앞에 둔 이벨리아는 챱챱 입맛을 다셨다.

16549732810384.jpg[응, 계약자!!]

16549732668849.jpg“저 돼지의 머리를 잘라서 구워 먹을 거야. 출동!”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보았다. 정령이 당황하는 것을.

16549732810384.jpg[뭐……뭘 먹어?!]

16549732668849.jpg“출동!”

16549732810384.jpg[잠깐, 아무도 안 말리고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병아리가 몬스터를 잡아 드시겠다잖아!]

아가레스는 몬스터를 잡아먹겠다고 자잘한 허세를 부리는 꼬맹이의 행실이 마냥 흥미로워 웃음을 터뜨리다가 휴고에게 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벨리아가 내뱉은 말이 진심이 아닌 허세라고 생각하였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16549732668877.jpg“꼬맹이 육아가 힘들다더니. 이 정도면 할 만한데?"

휴고가 무슨 소리냐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16549732727023.jpg“내 딸이 진짜로 오크 머리를 잘라서 먹을 때.”

16549732668877.jpg“……?”

16549732727023.jpg“그 정도는 되어야 육아의 시작이다.”

휴고가 턱짓으로 풀숲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16549732727023.jpg“이브가 저 더러운 것에 닿기 전에 어서 구출해라, 악마.”

설마. 오크 머리를 잘라 먹겠다는 게 진심이었다고……? 아가레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작은 친구가 보였다. 심지어 두 손을 앞으로 쭈욱 뻗고 오크가 있는 쪽으로 도도도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과 몇 보만 더 가면 진정으로 오크의 머리통을 잡아챌 기세였다.

16549732668877.jpg“꼬맹이!! 그거 지지야!!”

드물게 사색이 된 아가레스가 어린 친구를 덥석 안아 허공에 들어 짤짤 털자 휴고가 읊조렸다.

16549732727023.jpg“음, 딱 제 엄마를 닮았어. 전쟁 중의 엘리시아도 종종 오크 머리통이 돼지 머리통과 같은 맛이 날지 궁금해하곤 했지.”

16549732668877.jpg‘뭔데. 이 집안 뭐야 대체.’

악마들이랑 붙여놓아도 남김없이 뜯어먹을 것 같은 이 집안 뭐냐고.

16549732668877.jpg“너, 꼬맹이, 너…… 저건 먹는 게 아니야!”

16549732668849.jpg“이상하게 생긴 돼지인데?”

16549732668877.jpg“돼지가 아니고 오크. 돌아가면 몬스터 도감 보면서 공부 좀 하자. 세상엔 먹으면 안 될 것들이 아주 많아. 가만, 정령이…… 여깄군.”

16549732810384.jpg[악! 운디네 살려!]

운디네를 잡아채 손수건 위에 탈탈 턴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작은 손을 닦아주자, 이를 흡족하게 바라본 휴고가 지나가는 말로 덧붙였다.

16549732727023.jpg“딱 체질이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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