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소드마스터, 대악마, 용의 조합2021.04.15.
‘이제 막 잠이 오려고 했는데!’
못마땅하다는 듯이 아르칸의 팔을 꼬리로 탕탕 때려봤으나 어린 용의 꼬리털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벨리아가 주워와 공작저에서 함께 생활한 지도 어언 반년. 더불어 말하자면 공작저 식솔들을 비롯하여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와 함께 부대낀 지도 어언 반년. 처음에는 대부분 이들이 탐탁지 않아 했던 작은 용은 짧지 않은 시간을 거치며 공작저와 비밀기지의 모든 존재에게 익숙해져 갔다. 아르칸과 세드릭이 검술 수련을 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수련이 끝날 때 즈음 시원한 주스를 물어 휙 던져 주는 것은 이제 일상이었다. 때로는 휴고의 집무실로 날아 들어가 초콜릿 따위를 집어오기도 했다. 날이 따뜻할 때는 화원을 가꾸는 엘리시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귀중한 꽃들을 답삭답삭 물다가 토실토실한 궁둥이 몇 번을 팡팡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벨리아를 비밀기지의 두 악당으로부터 떼어내고 싶었던 마음 또한 내려두었다.
‘누나는 비밀기지에서 친구들하고 있을 때 행복해 보여.’
엔리르에게는 어린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유욕보다는 이벨리아의 행복한 감정이 훨씬 값어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누나의 의사보다 우선일 순 없어. 누나의 감정보다 중요한 건 없어.’
어린 용인 지금도, 그리고 성체가 될 그 어느 날에도. 엔리르에겐 불변의 명제일 터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집단생활을 해보지 못한 엔리르는 그렇게 공작저에도, 비밀기지에도, 그리고 그 속의 모든 존재에게도, 서서히 배려를 배우며 정을 붙여갔다. 그것은 역으로 비밀기지와 공작저의 존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다르게 거리를 좁히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작은 짐승을 마냥 밀어낼 만큼 모진 이는 없었다. 특히 그 짐승이 엘리시아와 이벨리아의 비호를 받고 있다면 더더욱. 그리하여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두 형제는 생각했다. 차라리 우리 형제로 받아주어 이벨리아를 지키는 데 일조하게 만들자고. 지금, 이 늦은 밤의 회동은 바로 그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봐, 어린 용.”
“아버지께서 하르벤타 제국으로 따라가라고 하셨다며.”
그랬다. 엔리르는 이벨리아와 아가레스를 따라 하르벤타 제국으로 따라가는 것을 허락, 아니 명 받았다. 이 공작저의 주인, 휴고로부터.
“인간으로 좀 변해봐. 표정이 안 읽히잖아.”
잠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엔리르가 아르칸과 세드릭의 말에 대강 고개만 끄덕대자 보다 못한 세드릭이 요청했다. - 퐁. 작은 소리와 함께 나타난 붉은 머리칼의 어린아이가 졸음이 가득 담긴 눈을 비볐다.
“왜애…… 졸리운데…….”
“아버지께서 하르벤타 제국에 따라가라고 하셨다며.”
“응…….”
엔리르가 ‘집주인’이라고 부르는 휴고의 명령은 딱 두 개였다. 악마가 자리를 비울 때는 엔리르가 이벨리아를 지킬 것. 누군가 이벨리아를 괴롭힐 때는 손을 물어 결딴낼 것. 휴고나 아가레스에 비견하자면 아직은 보잘것없는 힘이지만 어쨌든 용은 용이니, 기사 한둘쯤은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소중한 딸의 주위에 자국 출신 기사를 두기 어려운 휴고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다.
“용. 혹시라도 하르벤타에서 누가 이브에게 허튼짓하려거든 네가 혼내줘야 해. 네 누나니까.”
“응.”
“그 악마는 아직 네가 덤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거든 그냥 두고.”
“……응.”
대답하면서도 엔리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요즘 들어 처음보다는 상냥해졌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는데, 오늘 엔리르의 눈앞에 선 두 형제는 평소보다도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적군과 아군 사이 그 어딘가에 세워두고 탐색하는 눈빛을 보내었더라면, 오늘만큼은 어딘지 신뢰감 굳건한 눈빛이었다. 마치 아군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우리 아가 잘 부탁한다. 여러모로.”
“귀엽지만 아직 모자란 게 많은 아이야. 너도 잘 알다시피.”
“응…… 잘 물 거야.”
“뭘 문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대상이 이브만 아니면 됐어.”
“누나는 안 물어.”
용건이 끝났냐는 듯 작게 하품하고 돌아서려는 엔리르에게 아르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가서 인간으로는 변하지 마라. 날개는 잘 숨기고. 날개를 보여도, 짐승과 인간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도 좋을 게 없어. 동대륙은 이종족에 관대하지 않다.”
조용한 아르칸의 충고에 세드릭이 동조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두 금발 소년들을 바라보며 엔리르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걱정……?”
아르칸과 세드릭이 내비치고 있는 감정을 제가 아는 단어와 끼워 맞춰보자, 즉각적인 반박이 돌아왔다.
“걱정은 무슨. 네가 사라지면 어머니와 이브가 속상해하니까.”
“그래, 걱정은 무슨. 너는 납치되지 말고 이브를 지켜야 하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가 데리고 잘 돌아오라고. 뭐, 그러다가 가능하면 너도.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서툴 뿐, 눈치 하나는 빠른 엔리르가 이번에는 이 관계에 가장 들어맞는 단어를 찾아 더듬어보았다.
“……형아?”
“닥쳐.”
이 역시 즉각적인 반박이 돌아왔다. 마치 몇 달 전의 연무장에서처럼. 그러나 뒤에 따라붙는 말은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듯 달라져 있었다.
“우리 아가 데리고 잘 돌아오면. 그때.”
“…….”
“그리고 네가 나중에 커서 우리 아가에게 다른 마음을 품으면 바로 취소야.”
“……응.”
몽롱한 대답이 어딘지 시원치 않았으나 뭐, 일단은 악마와 용이 곁에 붙어 있으니 우리 아가는 안전하겠지.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일단 우리 아가가 동대륙에서 안전히 돌아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렇게 이벨리아가 세상모르고 잠을 자던 늦은 밤에 이루어진 두 형제와 한 예비 형제의 은밀한 회동은 달이 기울고 나서야 해산되었다. 각자 방에서 침대에 눕는 아르칸과 세드릭의 입매에도. 다시 의자 위에서 몸을 말고 눈을 감은 엔리르의 입가에도. 달빛에 비치는 얼굴들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 것도 같았다. ***
“캬- 날씨 좋다!”
상쾌한 공기 속에 서늘한 겨울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3월 중순의 봄. 바로 사절단의 출발일이었다. 해가 바뀌어 일곱 살이 된 지금도 오라버니들이 깨우러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 이벨리아였으나, 오늘만큼은 빠르게 눈을 뜨고 일어나 혼자서 고양이 세수도 하고 응접실로 힘차게 달려 나갔다.
“자, 나를 더 이상 아기씨라고 부르지 마! 오늘부터는 모험가님이라고 부르도록!!”
여전히 짧똥한 허리에 두 손을 챡 얹고 그 언젠가 모두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격문을 외쳤다. 한 3년 전 즈음에는 분명 ‘대장님’이셨지.
“아이고, 우리 모험가님 납시셨습니까-!”
“그래! 엣헴! 나 모험가는 저 먼 동대륙까지 모험하러 갈 예정이다!”
“그렇게 멀리! 아주 위대한 모험가님이로군요!”
“거기, 충성스러운 그대에게는 내 친히 기념품을 사다 주도록 하지!”
헤롤드가 장단을 맞춰주니 또 신이 나서 답한다. 그러나 실상 모험가님이라기에는 밤새 베개에 비비는 바람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 토끼 머리가 달랑이는 분홍색 슬리퍼, 병아리가 그려진 노란색 잠옷이 제법 귀여워 응접실에 있던 모두는 크게 웃고 말았다. 악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찮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소중한 친구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 퍽 기대되던 참이었다. 그래서 꼭두새벽부터 아르티나 공작저 응접실로 쳐들어와 오만하게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아가레스는 작은 병아리의 허세를 즐겁게 감상하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카론은 이벨리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자그마한 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채 잔소리를 퍼붓는 중이었다.
“아기씨, 혼자서는 절대로, 절대로,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황궁 안이라고 해도요.”
“옹! 걱정하지 말라니까.”
“믿겠습니다. 아기씨, 이 약은 어떨 때 먹는 약이라고 말씀드렸죠?”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아니, 화장실에 못 갈 때 먹는 약입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실 때 드시면 큰일 납니다. 배 아야하십니다.”
기사는 대동하지 못하기에 이벨리아의 호위 기사인 카론 역시 하르벤타 제국으로는 갈 수 없었다. 하르벤타 제국에서 국빈을 위한 호위를 붙여줄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 누가 이 작은 주인을 위하여 목숨조차 던져버릴 수 있는 자신보다 잘 호위할 수 있겠는가.
“이봐, 호위 기사. 내가 붙어 있을 건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본의 아니게 자꾸 시야에서 병아리를 가리는 호위 기사가 못마땅하여, 아가레스가 무감한 눈으로 카론을 내려다보며 툭 하니 내뱉었다.
“난 그대가 못 미덥다.”
“고작 16위 악마한테 배가 뚫려 침대 신세를 진 게 어디의 누구더라.”
“…….”
완패. 그날의 일을 상기하면 카론이 아가레스에게 할 말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도 눈앞에 늘 붙어 계시던 작은 주인께서 먼 타지로 떠나신다니, 어떻게 달래도 카론의 불안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대로 모시고 다녀와라.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셨다가는-.”
카론이 아가레스의 앞에서는 그다지 효용이 없는 살기를 내뿜으며 음산하게 경고하였으나, 그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 아가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보다는 내가.”
잠시 끊겼던 낮은 음성은 이내 이어졌다.
“더 간절하다.”
“…….”
곰돌이 가방을 간식으로 꾹꾹 채워 넣는 아기씨에게 닿는 악마의 시선은 헤아릴 수 없이 깊어, 카론은 간절하다는 그 말을 끝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하더라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무저갱 같은 눈빛은 거짓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 황궁 앞. 공식적인 사절단 환송회는 이미 며칠 전 연회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바 있었다. 따라서 환송식은 조촐하게 황제와 황태자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 몇 명의 참석 하에 이루어졌다. 본디 황제가 알현실을 벗어나 황궁 앞까지 직접 걸음 하여 환송하는 일이 흔치는 않으나, 무거운 임무를 지고 동대륙까지 먼 길을 가는 이들이니만큼 손수 배웅하러 나온 차였다. 엘리시아와 아르칸, 세드릭 역시 황궁까지 쫓아와 황제의 지척에 서 있었다. 한 귀족이 슬쩍 아가레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자는 처음 보는 자이온데…….”
“아르티나 공작가에서 고용한 제법 뛰어난 마법사요.”
아가레스의 얼굴을 아는 자는 각 제국이나 왕국의 최고위 지도층뿐이었기에 휴고는 대충 아르티나 공작가가 고용한 상당히 뛰어난 마법사쯤으로 얼버무렸다.
“이 짐승도 공녀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까?”
“넹. 없으면 잠을 못 자죠.”
엔리르는 아르칸과 세드릭의 충고에 따라 날개를 감추었으므로, 이벨리아의 반려동물 정도로 소개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가락 하는 고위 귀족이니만큼 역시 환송식에 나와 있던 데퐁트 후작이 휴고에게 성큼 다가왔다. 마치 악수하자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으나, 휴고가 이를 잡지 않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내리며 여상히 미소 지었다.
“부디 잘 다녀오시길. 쉬운 여정이 아니지 않습니까.”
“별걱정을 다 하는군.”
“살펴보니 사절단에 뛰어난 무력을 갖춘 자는 각하뿐인 듯하여.”
휴고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혼자서 이 많은 사절단을 다 지킬 수 있겠느냐, 그 정도의 의미로 보이는데, 이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도발이다. 한편 아가레스와 엔리르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는 황제 역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녀 곁에 달라붙은 존재들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군.’
황실 기사단이나 아르티나 기사단을 모두 떼어두고 간다고 하더라도, 저 전력을 좀 보라. 무려 소드마스터, 대악마, 용의 조합이다.
‘하르벤타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더 이상하지.’
마음 놓고 허허 웃던 황제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아니, 잠깐. 다른 의미로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은가.
‘설마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공녀를 건드리진 않겠지……?’
만일 그렇게 되면.
‘공녀의 손짓 한 번이면 저 셋이 하르벤타 제국이라도 발아래 가져다 바칠 테니.’
황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칫하다가는 평화를 위한 사절단이 하르벤타를 점령하고 공녀가 황위에 앉을 수도…….’
저 조합, 이대로 괜찮은가. 황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