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세 번째 형제, 용2021.04.12.
“오늘은 특별히 고기를 구워 먹자!”
“꼭 오늘만 먹는 것처럼 말하네. 어제도, 그제도 같이 구워 먹었잖아.”
이벨리아가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발딱 일어나 외치자, 아가레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반박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식량 창고에 쌓인 최고급 고기를 들고 오는 움직임은 신속했다.
“고기……! 악마, 고기를 구워달라……!”
이벨리아를 따라 벽난로 앞에 널브러져 있던 엔리르도 눈을 반짝이며 파닥파닥 날개를 흔들었다. 여느 때와 같은 비밀기지. 밖은 여전히 찬 바람이 부는 한겨울이기에, 아가레스는 오두막 안에서 고기를 굽고자 불을 피워내고 그릇을 세팅했다.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계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타공인 대악마. 이딴 허드렛일 따위 손을 대본 적이 있을 리 만무하다. 속으로 한탄하던 아가레스는 눈을 반짝이며 제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한 꼬맹이와 한 새끼 용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있나. 소중한 내 꼬맹이가 먹고 싶다는데. 굽는 김에 저 용은 덤이고.’
“고기! 고기 다 익었어?”
“잠시만. 익으면 바로 줄게.”
“고기…… 이젠 다 익었어?”
“넌 조용히 해. 우리 꼬맹이 먼저 먹고.”
졸지에 두 아이의 보모가 된 아가레스는 먼저 이벨리아의 그릇 위에 커다란 고기 조각을 올려주었다. 뼈를 붙잡고 뜯어먹을 수 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 다음으로 익은 것은 엔리르의 접시 위에 툭 던져 주었다.
“고마워, 토끼!”
이벨리아가 맑게 외치며 항상 하던 대로 고기를 와앙 물어서 쭉 뜯는데. - 툭.
“……?”
이로 잡아 뜯은 고깃덩이와 함께 바깥으로 흰 무언가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이게 모지?”
이벨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작은 것을 집었다. 잠시 요모조모 돌려본 이벨리아가 입을 헤- 벌리고 외쳤다.
“나 이 빠졌다!”
*** 어른이 되려면 응당 이가 전부 빠졌다가 다시 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흔들거리는 앞니에 기겁하여 어머니에게 후다닥 달려갔다가 들은 얘기였다. 톡 빠져나온 제 앞니가 마치 곧 어른이 될 것을 시사하는 듯하여, 이벨리아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하도 많이 흔들리던 이라서 빠지는 데에 그다지 통증도 없었다. 그런데 오랜 친구인 아가 토끼와 동생인 아가 용은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표정이 영 심상치 않은 것을 보아하니.
“왜들 그래?”
“……누……누나 이빨이……!”
“너…… 꼬맹이 너…… 이가……!!”
심지어 손가락으로 빠진 이를 가리키며 야단법석이다.
‘왜 난리들이지? 당연히 빠지는 이를 가지고?’
이벨리아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우리 누나 고기를 먹다가 이가 빠져버렸어. 이렇게 약한 생물은 용생 처음이야.”
엔리르가 세상 약한 생물을 다 보겠다는 양 미간을 찌푸리고 이벨리아의 근처를 빙글빙글 날았다.
“이가 하나 없어져 버려서 어떡하지……. 조금만 참아. 내가 얼른 이가 다시 자라는 마법을 알아낼게.”
이벨리아가 빠진 이는 금방 다시 나는 거라고 얘기하려 했으나, 아가레스가 곧바로 말을 잇는 바람에 그럴 틈도 없었다.
“이가 빠지다니! 우리 꼬맹이 이가…… 잠깐, 얼른 공작에게 가자. 의사에게 보이면 이를 다시 박아 줄지도 모르니.”
“아. 그래! 이를 다시 붙이면 되겠구나. 얼른 집으로 가자!”
악마와 용의 상식이 영 이상하다.
‘분명 이는 다시 난다고 했는데?’
어린 용은 그렇다 치고, 꽤 오랜 세월 존재한 악마마저 제 이가 다시 나지 않을 것처럼 구니 이벨리아도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거울을 보고 입을 아- 벌려보니 영 모자라 보였다. 하필 앞니라서 더더욱.
‘나 평생 이렇게 빙구로 사는 거야……?’
바르르 떠는데, 아가레스가 빠진 앞니를 왼손에 소중히 쥐고 오른손으로는 이벨리아를 덥석 들어 걸음을 옮겼다.
“가자. 이 붙이러.”
목적지는 당연히 공작저였다.
***
“공작! 공작 어딨나!”
항상 여유를 잃지 않던 악마의 표정에 다급함이 흘러넘쳤다.
“누나 이 좀 구해줘!”
엔리르도 평소와는 달리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응접실 한가운데서 소리를 치자, 마침 공작저 안에서 휴식을 취하던 세 부자와 엘리시아가 급히 달려 나왔다. 불과 얼마 전, 이벨리아가 악마에게 납치를 당했던 그때의 끔찍함이 여전히 커다란 잔재로 남아 있기에 행동은 더욱 빨랐다.
“우리 이브가 왜!”
“무슨 일인가?”
세드릭과 휴고가 다급히 물었다. 아가레스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폈다.
“우리 꼬맹이 이가 빠졌다. 고기를 먹다가. 당장 의사를 불러 다시 붙이라 명하도록.”
“……?”
“……이가 빠졌다고?”
“응, 누나 이가 빠졌어. 인간의 육체가 이렇게 약할 줄이야. 음식을 먹다가 이를 잃다니. 인간 의사가 붙일 수 없다면 내가 얼른 커서 붙여줄게.”
혹시라도 소중한 막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각자의 방에서 우당탕 달려 나온 공작저 가족들은 말을 잃었다. 무려 대악마에 용. 하나는 결투를 벌인다면 휴고조차 패배를 직감할 정도로 강한 마계의 지배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지상 최고의 지혜와 최강의 육체를 가졌다는 생물이다. 그런데 상태들이 왜들 이런가.
‘상종할 가치도 없군.’
‘뭐야, 이 멍청이들은.’
‘우리 아가 주변에 웬 머저리들이.’
세 부자가 차례로 생각했다. 대악마가 소중히 들고 온 작은 이,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대악마, 그 옆에서 날갯짓하며 제 누나 아프지 말라고 자잘한 힐링을 퍼붓는 용. 그것들을 번갈아 보던 엘리시아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런, 바보들이 따로 없네.”
*** 어린아이의 이는 응당 빠지는 것이며, 이내 더 강하고 튼튼한 이로 다시 난다는 사실을 들은 대악마와 용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악마 생에 어린 인간 친구는 처음이라.”
실로 그러했다. 오래 살았다 해서 일절 관심이 없었던 분야에 대한 지식까지 저절로 습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 인간 친구는, 더욱이 어린 인간 친구는 처음인 아가레스가 이를 모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 위대한 용생에도 처음이라서…… 깜짝 놀랐어…….”
“넌 얼마 살지도 않았잖아.”
엔리르도 다시 몽환적인 말투로 돌아와 민망한 듯 변명했다. 소중한 꼬마 친구의, 둘도 없는 누나의 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대악마와 용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내 아가레스는 휴고에게 한 손을 뻗으며 요청했다.
“그 이. 내가 가져왔다. 내놔.”
“내 딸 처음으로 빠진 유치를 그대가 왜 탐을 내나.”
“잘 보관할 테니까. 내놔.”
“내가 잘 보관할 건데.”
“공작, 그대와 내가 레녹스 산맥에서 했던 계약을 잊은 것은…….”
“이게 그 범위에 포함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무리 악마라 해도 사기 치는 데는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계약을 운운하며 작은 친구의 이를 좀 가져와 보고자 거드름을 피워보았으나, 역시 상대는 만만치 않다.
‘안 속네. 쳇.’
아가레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제 소중한 꼬맹이의 처음 빠진 이가 공작의 보석함 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 한편 하르벤타 제국으로 가는 사절단의 출발일은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사절단이 몇 날 며칠을 산 넘고 물 건너 하르벤타 제국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광활한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려면 한 달을 잡아도 부족할 지경. 영리한 인간들은 각종 마법과 정령술, 신성력 등의 초월적인 힘들을 이용하여 이동에 편리한 기술들을 개발하였으니. 그리하여 이미 백여 년 전에 개발된 것이 <게이트>였다. 공간 이동 마법의 술식을 새겨 넣은 문은 주기적으로 고위 마법사들의 마력을 채워야 해서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 출발하는 사절단은 왕복하여 게이트를 사용할 권리쯤은 당연히 확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르카디아 제국의 수도로부터 약 이틀가량 남하해서 <위고>라는 도시에 도착하면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단다.”
“그 게이트는 하르벤타 제국 황궁으로 날아가요?”
“아니. 하르벤타에는 아주 유명한 해안 도시가 있지. 그 도시로 도착하게 될 거야. 거기서 사흘 정도는 말을 타고 달려야 황궁이 나타나고.”
“왜 황궁이랑 황궁을 바로 안 이어놔요?”
엘리시아가 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국방을 위해서지.”
두 제국의 수도가 게이트를 통하여 곧바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국방을 위한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제국이 게이트를 사용하여 곧장 수도로 쳐들어온다면 방어에 소요되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가 어려우니.
“그럼 우리 제국에서 이틀, 하르벤타 제국에서 사흘 정도는 말을 타고 가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지.”
이벨리아는 씨익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만족스러워!’
휴고를 비롯한 사절단들에게는 약 닷새가량의 여행이 마냥 귀찮기만 했으나, 세상의 온갖 것이 궁금한 이벨리아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여행 가방! 여행 가방을 싸야겠다!”
그렇게 세상 구경을 무려 닷새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은 이벨리아는 출발이 무려 석 달이나 남은 12월, 이미 여행 출발 준비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위대한 모험가의 시작은 여행 가방부터지!”
[병아리야, 그거 설마 동대륙으로 가져갈 배낭은 아니지?]
이벨리아의 방 안을 휘돌던 운디네가 이벨리아의 몸보다 커다란 가방 근처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분명 아니겠지.’
마차를 사용해서 필요한 짐은 다 옮기는걸. 병아리는 자그마한 가방 속에 자기가 먹을 간식이나 좀 챙기면 되는 건데,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저 가방을 메고 간다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비밀기지에서는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거 사절단 출발 때 메고 갈 가방은 아니지?”
“설마 그거 동대륙으로 가져갈 여행 가방은 아니지?”
한 정령과 한 인간과 한 악마의 질문이 종족 대화합을 이루자, 이벨리아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고 대답했다.
“꼭 필요한 것들만 넣은 모험 가방!”
“……그 불길한 가방 이리 줘봐.”
루드비히가 가방 내놓으라며 손을 뻗고.
[쟤 빨간색 책도 주워왔어. 얼른 압수해.]
운디네는 아가레스가 무서워 루드비히의 등 뒤에 숨어 거들었다. 루드비히는 발로 톡 차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만 같은 가방 속 물품들을 하나하나 빼내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에 올라갈 때 필요한 막대기. 아마도 ‘하르벤타’라는 문구만 보고 마구잡이로 집어넣었을 것이 뻔한 [하르벤타 제국 귀족들의 화끈한 밤]이라는 제목의 책. 본인이 직접 삐뚤빼뚤하게 그린 지도, 조폭 곰치, 커다란 담요, 바람을 넣을 수 있는 베개 등.
“……뭐야. 이 일관성 있게 해괴한 물품들은.”
“꼬맹이. 이런 책은 네 표현을 따르자면 지지야.”
아가레스가 [하르벤타 제국 귀족들의 화끈한 밤]이라는 이름의 망측한 책을 뒤로 휙 던졌다. 살 색이 난무하던 책에 삽시간에 검은 화염이 붙더니, 이내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소멸했다. 우리 꼬맹이의 눈을 이런 지지로 더럽힐 수는 없지.
‘내 어린 친구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면서 자라야 한다고.’
“하르벤타 제국 책인데, 그거. 귀족들의 화끈한 밤이 담긴 역사책.”
“……나중에 크면 다 알게 돼.”
아르티나 공작저에 저 책은 왜 있던 거야. 대체 누구 취향인데.
“하르벤타 제국의 역사는 내가 알려줄 테니까 더러운 책에는 미련 버려.”
어린 친구가 가져온 빨간색 책에 살포시 눈살을 찌푸리던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보다 편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등 뒤에 쿠션을 받쳐주었다. 이벨리아가 몸을 꼼지락대며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이내 낮은 목소리가 하르벤타 제국의 설화부터 독특한 풍습까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진짜야? 신기하다!”
커다란 초록색 쿠션에 기댄 이벨리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연신 감탄을 내뱉었으며, 운디네는 이벨리아의 어깨 위에 안착하여 마치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흠. 그 부분 더 설명해봐, 악마.”
루드비히는 아가레스가 해주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안 그런 척 귀담아들으며 이벨리아의 거대한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물건 중 꼭 필요한 것들만을 추려서 다시 넣어주었다.
“대륙은 여러 개구나. 아주 넓구나…….”
엔리르 또한 작은 방석 위에서 한쪽 귀를 쫑긋 세운 채 시선을 고정했다. 오두막 바깥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금방 손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그러나 그것과는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비밀기지 내부는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모닥불, 폭신한 담요와 쿠션으로 가득했다. 그 분위기를 타고 흐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한 악마와 한 정령, 한 소년과 한 어린 용.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앉은, 이제는 이 비밀기지의 지배자가 된 한 병아리. 모두에게 더없이 완벽한 시간이었다. *** 사절단의 출발일로부터 일주일 전.
‘졸려……. 누나 방에 가서 잘까?’
어린 용 엔리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방에 들어가면 실례랬어.’
비록 함께 잠을 자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푹신한 의자와 든든한 천장, 따뜻한 러그가 있는 게 어딘가. 어린 용은 응접실 의자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통통한 앞발에 머리를 턱 올려놓은 채 편안히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스르르 잠들려던 찰나.
“……?”
두 어린 인간의 기척이 바로 앞에서 느껴지자 엔리르가 한쪽 눈을 슬쩍 떴다. 아르칸과 세드릭은 중요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 야밤중에 새끼 용을 찾아 내려온 차였다. 세드릭이 잡설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용. 너 우리 이브를 뭐라고 생각해.”
“누나.”
“또.”
“병아리?”
“음. 또.”
“……약간 모지리.”
“그래. 정확히 파악했군.”
두 형제는 시선을 맞추었다. 이 정도면 통과다.
‘만만치 않은 악마와 황태자 전하가 우리 아가를 노리는 적군인 마당에.’
‘용까지 적군 3호로 가담하게 두는 것보다는 아군이 되도록 꼬시는 것이 이득이겠지.’
아르칸이 어린 용의 꼬리를 잡아 휙 들어 올렸다.
“잠깐 우리랑 얘기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