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악마, 황제를 협박하다2021.04.08.
여섯 살의 겨울. 비밀기지의 잔디밭 위에 항상 펼쳐져 있던 돗자리는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오두막 안으로 옮겨졌고, 늘 앉아서 놀던 바위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이벨리아는 여느 때와 같이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와 벽난로 앞에 주저앉았다.
“흐아아, 추워!”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목걸이와 연결되는 비밀기지의 통로를 잔디밭 한가운데가 아니라 벽난로 앞으로 할 걸 그랬어! 아직 어려 인간의 형태보다는 용의 모습이 편한 엔리르 또한 짧은 날개를 열심히 파닥이며 날아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 추워.”
“엔리르는 털이 그렇게 복슬복슬한데도 추워?”
“그냥 누나가 추워하니까 나도…….”
그렇게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데 작은 몸 위로 커다란 담요가 내려앉았다. 애써 엄한 척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따뜻하게 좀 입으라고 했는데.”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니 어딘지 못마땅한 황금색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악마 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토끼!!”
“매해 겨울마다 말 더럽게 안 듣지.”
들려오는 문장은 잔소리이지만 다가오는 어조는 따뜻했다.
“대체 얼마나 더 많은 겨울을 잔소리해야 들을까, 응?”
매번 실내용 원피스 하나만을 입고 다다다- 뛰어 비밀기지로 들어오는 작은 친구의 건강이 염려되어 이번만큼은 제대로 혼을 내리라 결심했건만.
“으웅, 앞으로- 한 80년?”
또 곁에 있을 빌미를 이렇게 만들어주니 단단히 붙잡았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 오렌지 주스.”
자그마한 몸에 달라붙은 눈송이들을 모두 녹여낸 이벨리아에게, 아가레스가 선명한 주홍빛의 오렌지 주스를 건네었다.
“토끼는 참 신기해. 겨울에 오렌지는 모두 사라지는데 매번 오렌지를 구해와.”
“네가 원하면 앞으로 한 80년 정도는 더 구해다 줄 수 있어.”
이벨리아가 제시했던 숫자를 역으로 제시하며 아가레스가 매혹적으로 웃었다. 작은 친구가 알맹이가 가득한 오렌지 주스를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수하들이 80년을 더 고생하든 말든 지배자는 알 바 아니었다.
“꿀꺽-.”
옆에서 어린 용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레스는 옅게 남은 오렌지 주스 조금을 휙 넘겨주었다.
“이거나 먹던가.”
매번 꼬맹이 옆에서 치대는 것이 영 못마땅하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꼬맹이 것을 빼앗아 먹는 것보다는 이걸 먹는 게 낫겠지, 싶어서 넘겨준 것이었다.
“고마워, 악마 토끼.”
저걸 진짜 확 그냥. 한 대 콱 쥐어박으려던 아가레스는 옆에서 소중한 친구가 보고 있음을 상기하고는 얌전히 손을 내렸다. 한편 이벨리아는 짧은 다리를 동당거리며 새로운 화두를 꺼내 들었다. 이벨리아는 아가레스와 대화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제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는 듯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끝을 한 번씩 따라 읊는 그 화법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이벨리아를 즐겁게 만들었다.
“있지, 우리 집 안 어딘가에는 아무도 모르는 보물이 숨겨져 있대.”
“보물이 있대?”
“웅,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거래.”
“음, 전설로 전해지는구나.”
“웅. 그래서 어저께 밤에 엔리르랑 같이 집을 탐험했어. 엔리르는 냄새를 아주 잘 맡으니까.”
자신의 칭찬이 들려오자 오렌지 주스를 바닥까지 탈탈 털어먹던 어린 용이 마치 ‘나 뛰어나지?’ 하는 것처럼 가슴 털을 한껏 부풀렸다.
“탐험해서, 찾았어?”
“아아니- 대신 더 좋은 정보를 들었지!”
“무슨 정보를 들었어?”
이벨리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년 봄에 동대륙으로 사……사단? 사진단?”
“사절단.”
“옹. 그거. 그게 가는데, 우리 아빠가 그거 대표래.”
잠깐. 그 웃음, 불길한데. 꼬맹이 너 설마.
“나도 가려고.”
……아, 역시나. 아가레스가 이마를 짚었다. *** 그러나 단번에 허락해 줄 것이라는 이벨리아의 생각과는 다르게, 휴고는 단호히 거절했다.
“안 된다, 우리 아가.”
“왜요?”
“동대륙을 깡그리 털어 아가의 앞에 놔 줄 수는 있지만, 아가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건 안 돼.”
동대륙, 하르벤타 제국의 패권이 가장 강한 곳. 역으로 말하자면 서대륙을 제패하는 에르카디아 제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곳. 사절단으로 방문할 때는 자국의 기사를 거느릴 수 없는 것이 제국 간의 불문율이었다. 기사들을 잔뜩 데리고 들어가 황족을 해하려는 심산은 아닐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자연히 이번에 동대륙으로 떠나는 사절단 역시 기사들을 대동하기 어려웠다. 휴고가 이벨리아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휴고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었고, 나머지 사절단원들은 불의의 사고로 죽든 말든 딱히 알 바 아니었으나, 그의 딸만은 달랐다.
‘내가 계속 시선을 두고 있을 수가 없을 텐데.’
제국의 대표로서 방문하는 자리이기에 하르벤타 제국의 황제나 귀족들을 수도 없이 만나야만 했고, 당연히 딸로부터 시선을 떼는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벨리아가 서대륙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험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휴고는 하르벤타와 에르카디아의 국교 따위야 어찌 되든 그 자리의 모두를 몰살하고 말 것이니. 휴고의 단호한 거절을 들은 이벨리아의 입에서 서러운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히잉…….”
아직 어린 나이이나 이치를 모르진 않는다. 이번만큼은 안 된다는 휴고의 단호한 말과 반박할 수 없는 타당한 이유에 이벨리아는 수긍했다. 그런데도 시무룩해진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는 며칠 뒤 다시 비밀기지를 방문하여 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나 못 간대……. 집 밖으로도 얼마 못 나가 봤는데. 다른 대륙은 정말로 신기할 것 같은데.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보고 싶은데.”
“태어난 지 아직 일곱 해도 안 된 꼬맹이가 뭘 벌써 죽는 타령이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했어.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동대륙을 꼭 한번 보고 싶어.”
입으로는 커다란 쿠키를 쉴 새 없이 오물오물하면서 눈은 세상 처량하다. 세상이 무너진 듯 슬픈 눈으로 열심히 과자를 씹어 먹는 이벨리아의 다리에, 어린 용이 위로하듯 꼬리를 비볐다. 이제 막 여섯 살의 끝자락을 맞이한 병아리가 내뱉는 깊은 한숨을 들으며 두 지배자는 입꼬리에 웃음을 매달았다.
“왜 못 간대? 공작이 네 부탁을 거절하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동대륙에는 기사들을 데려갈 수 없대. 그리고 오라버니가 그러는데 동대륙에는 나를 한입에 홀랑 털어먹을 강한 사람들이 많대.”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러면 내가 같이 가줄까?”
루드비히가 냉큼 제안하였으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황제가 황태자를 적국으로 잘도 보내겠군.”
아가레스가 헛소리라는 듯 즉각 반박했다. 쯧- 혀를 차는 루드비히 자신도 실은 어려운 제안임을 잘 알고 있었다. 땅 도둑이 워낙에 가고 싶다는 표정으로 시무룩해져 있으니 어떻게든 방도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바닥을 긁적이는 작은 친구를 본 아가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꼬맹이.”
“어딜? 난 동대륙이 아니면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버티듯 바닥에 털퍼덕 드러눕는 이벨리아를 번쩍 들어 한 팔에 앉힌 채, 아가레스가 여상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집.”
이벨리아가 엥? 어디? 라고 반문할 틈도 없었다.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아가레스는 이미 아르티나 공작저 응접실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으니. 왼팔 위에는 이벨리아를 소중히 앉혀두고, 오른손으로는 엔리르의 꼬리를 대강 잡은 채로. 난데없이 악마가 나타나자 헤롤드가 즉각 검을 뽑아 겨누며 외쳤다.
“어디 감히 악마가 아르티나 공작저에-.”
“그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군. 시끄럽다.”
아가레스는 엔리르의 꼬리를 잡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말을 끊었다.
“아무리 그래도 악마를 그냥 보내긴 좀 이상하지.”
“그렇지. 그래서 한번 해봤어.”
기사단이 수군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아가레스는 엔리르를 바닥에 휙 던진 다음 이벨리아를 조심히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이내 기척을 전혀 죽이지 않은 채로 다가오는 휴고를 향해 말을 건넸다.
“딸이 동대륙에 가고 싶다는데, 견문을 넓히도록 돕는 것이 그대의 도리 아니던가.”
다짜고짜 공작저 한가운데의 응접실에 나타나 헛소리를 지껄이는 고위 악마를 향해 휴고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누군 안 보내주고 싶은 줄 아나. 우리 딸이 바깥 구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는데.
“기사의 대동이 금지되어 있다. 동대륙에는 이 교류를 못마땅해하는 자들도 많지. 나는 대부분 시간을 동대륙 황제와 보내야 하고, 그 시간 동안 이브를 지켜줄 자가 없으니 부득이하다.”
알았으면 빨리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젓고 돌아서는 휴고의 등 뒤로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켜줄 자가 왜 없어.”
시간이 아깝다는 듯 빠르게 집무실로 걸어가던 휴고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여기 있는데.”
“……진심인가?”
“그 산맥에서 그대가 치른 대가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공작. 이것 또한 그 범위에 포함되는 것일 텐데.”
이벨리아를 악마 제파르로부터 구해내던 그 눈보라 치던 산맥. 아가레스가 휴고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이벨리아와 친구로 지내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후-.”
결국, 휴고는 승낙했다. 자기는 아무리 해도 안 되던 것을 악마 친구가 말 한마디로 해결해버리니, 아가레스를 바라보는 이벨리아의 시선은 마치 신을 보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역시 이편이 훨씬 보기 좋지.’
시무룩하던 아까보다 훨씬 낫다. 햇빛을 받은 바다처럼 반짝이는 어린 친구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본 아가레스는, 할 일이 남았다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꾸는 나의 대단함을 알았으니 이제는 호칭이 좀 바뀌-.’
“정말 고마워, 토끼!! 다음에 봐!!”
‘-는 건 역시 포기하는 게 낫겠군.’
그렇게 간절한 딸의 눈빛과 인정하기는 싫지만 든든한 조력자. 상황 때문에 안 된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딸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공작 부부의 수긍. 차후 이 제국의 인재로 발돋움할 이벨리아가 동대륙의 정세도 배우길 원하는 황제의 승낙. 그 모든 것이 작용한 결과, 사절단에는 병아리 하나가 추가되었다. *** 작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아가레스가 향한 곳은 마계가 아니었다. 서대륙의 화려함과는 달리 단아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 동대륙 하르벤타 제국. 서대륙의 높고 웅장한 황궁과는 다르게 낮고 넓게 건축된 하르벤타 제국의 황궁, 그 한가운데 위치한 황제의 집무실에 고위 악마의 기운이 가득 들어찼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고 있던 책상 위의 호롱불이 옅게 흔들리다가 이내 꺼졌으나, 황제와 악마가 서로 마주하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만큼 오늘 밤의 달은 밝았으니.
“그대인가, 동(東)마계의 지배자.”
“놀라지도 않는군.”
“그대의 기운은 헷갈릴 수가 없지.”
홍염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화려한 붉은 머리를 높게 묶은 여인이 집무실 의자를 뒤로 밀고 긴 다리를 꼬았다.
“마계 어딘가에서 두문불출한다 들었건만.”
“잡설은 생략하지. 그대는 내게 빚이 있어. 기억하나.”
안부를 물으려던 하르벤타 제국 황제의 말을 단번에 끊어내는 악마의 눈빛에서는, 바로 조금 전 작은 친구에게 보내던 따스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은 진정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잊겠나.”
그대가 전쟁을 멈춘 덕분에 패전의 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던 그 순간을.
“악마의 호의에는 늘 대가가 따르지.”
달빛조차 고개를 숙이게 하는 황금빛 눈이 서늘하게 응시했다.
“받으러 왔다. 그 빚.”
목숨 빚이니 쉬이 탕감할 수도 없을 터. 아니, 그것을 떠나서라도 내려다보는 오만한 시선, 적지에 홀로 서 있으면서도 여유로운 입매,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지배자의 그것이었으니. 황제, 세필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이자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존재하긴 할까.’
이내 장신의 여인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묵직한 마기를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한 치 흔들림 없는 눈빛이, 과연 창칼이 난무하던 그 전란 시대를 헤쳐 나온 자다웠다.
“그대의 호의 덕분에 이 제국을 지켜냈지. 더불어 이 목숨 또한.”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집어치우라는 듯, 아가레스의 얼굴이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본론에 대한 대답을 말하라는 의미였다.
“이 제국을 넘기라는 요구만 아니라면, 무엇으로든 갚도록 하지.”
아마도 목숨, 영혼, 국보, 뭐 그런 것이겠지. 악마의 대가는 늘 그런 것이니.
‘이 자의 호의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켰으니, 그 외의 것을 내던진들 무슨 아쉬움이 있을까.’
각오 어린 황제의 눈빛을 본 악마의 입매에 그제야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대의 제국과 그대의 목숨을 살린 대가로 내가 받을 것은.”
열어둔 창문 사이로 미풍이 불어온다. 겨울의 입김이 닿지 않은 하르벤타 제국의 바람을 어린 친구는 분명히 좋아할 것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조잘댈 어린 친구를 생각하니 냉정하던 얼굴에 저절로 온기가 돌았다. 아가레스를 마주한 세필리아는 달빛이 일으킨 착시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환대.”
“……?”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듯 세필리아의 한쪽 눈 밑이 살짝 경련하자, 아가레스가 덧붙였다.
“곧 방문할 에르카디아 제국의 사절단에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있을 것이다.”
“…….”
“동대륙에서 가장 좋은 음식과 디저트를 준비하고, 가장 화려한 연회를 열도록.”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세필리아의 눈동자가 살짝 크게 벌어졌다.
“꼬치구이를 가장 좋아하고 고기는 약간 덜 익힌 것을 좋아하니 특히 신경 쓰고.”
대체 누구이기에,
“연회에서 서대륙에는 없는 코끼리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해둬.”
그토록 무감정하던 자로부터,
“따스한 햇볕을 좋아하니 큰 창문이 있는 방을 배정하고, 밤에는 별을 잘 볼 수 있도록 황궁 내의 불은 모두 끄도록.”
이토록 생경한 감정을 끌어냈다는 말인가.
“나 또한 에르카디아 제국의 사절단으로 방문할 터이니, 환대가 내 기준에 차지 않을 시에는 네 목숨을 호의의 대가로 받아 가겠다.”
고위 악마의 도움을 받아 목숨과 제국을 구한 것 치고는 싼값이다. 세필리아는 망설임 없이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음을 던졌다.
“그대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그 어느 것을 받아도 충분할 호의의 대가로 고작 ‘환대’를 요구한단 말인가.”
그대가 요구하였더라면 그 어떤 보석이라도, 그 어떤 작위라도, 혹은 그 어떤 목숨이라도 거머쥘 수 있었을진대. 고고한 악마는 달리 대답 없이 뒤를 돌았다. 하르벤타의 황제 또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니 악마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응접실 의자에 앉아 깃펜을 쥐었다. 집무실을 나가던 아가레스의 발걸음이 일순 멈추었다. 달빛을 고스란히 받아 빛무리를 머금은 악마의 모습은 과거 그 시절과는 달랐다. 세상에 매이지 않던 초월자를 누군가 잡아 이 땅에 붙박아둔 느낌. 이내 낮은 목소리가 황제의 집무실을 흘렀다.
“……받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아쉽지 않은,”
그래, 이미.
“친구.”
이미 딱 그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