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나는 대단한 용!2021.04.05.
“아기씨 옆에 저건 뭐야.”
“아기씨께서 주워오신 그 짐승과 느낌이 비슷한데.”
공작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지사였다. 분명 2층 방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어린 짐승을 달랑달랑 안고 있던 이벨리아가, 내려올 땐 웬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으니. 아무리 어리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어린 짐승이 어린아이로 변하는 것은 그렇구나, 하고 넘길 만큼 흔한 일은 아니었다. - 챙! 아르티나 기사단은 망설임 없이 검을 겨누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것을 멈추고 순식간에 서늘한 얼굴로 검을 겨누는 그 표정 변화는 진정으로 미친개를 연상시켰다. 부지불식간에 날붙이가 겨누어지니 엔리르 역시 본능적으로 방어기제인 기운을 내뿜었다. 멍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뿜어내는 기운이 제법 사나웠으나.
‘이러다가 나를 내쫓으면 어떡하지.’
어린 용은 이벨리아의 눈치를 보다가 곧바로 기운을 죽였다. 가운데에 낀 이벨리아가 아르티나 기사단을 말리고 엔리르를 소개하려던 찰나였다.
“거두어라.”
짧은 명령과 함께, 응접실에는 기사단의 기운 대신에 휴고의 기운이 묵직하게 들어찼다. 단 한 번의 발걸음만으로 들어찬 기운을 손쉽게 흩어내는 경지가 아르티나 기사단에게는 익숙하였고, 엔리르에게는 놀라웠다.
“그 짐승이로구나.”
휴고가 엔리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제 딸에게 해가 될 존재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정체 모를 짐승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정체를 모른다는 휴고의 말에, 이벨리아가 천진하게 답했다. 가벼이 내뱉을 말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 응접실에는 가족들과 아르티나 기사단 외에 다른 이들은 없었다.
“아빠.”
“그래.”
“용이에요.”
“용이가 뭐지, 우리 아가?”
“용이라구요.”
“……뭐라고?”
“요옹! 요옹!”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 그리고 아르티나 기사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응접실이 기이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생각은 모두 같았다.
‘……용이 여기서 왜 나와?’
***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단연, 이 공작저의 안주인이었다. 엘리시아가 짝, 손뼉을 치며 입을 열자 얼어 있던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용은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놀랍네.”
엔리르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가는 어디서 온 걸까?”
‘아가. 나보고 아가라고 했다…….’
다정한 호칭을 들은 어린 용의 얼굴이 붉어졌다.
“몰라.”
“모른다?”
휴고가 날카롭게 되묻자 엘리시아가 한 손을 들어 남편의 입을 막았다.
“용이라 해도 아직 어린아이예요. 그런 말투는 옳지 않아요.”
엔리르는 엘리시아를 꽤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벨리아와 함께 아주 따뜻하게 저를 간호해주던 인간이었으니까.
‘아는 건 다 말해줘야 해.’
친절한 인간의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어린 용은 있는 그대로 내뱉었다.
“태어나보니까…… 깜깜한 곳이었는데.”
응접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엔리르가 말을 이었다.
“나 말고도 여러 존재가 있었는데, 나 같은 건 나밖에 없었어. 인간들은 가끔 왔어.”
“인간들이 와서 뭘 했지?”
“……뭘 먹이기도 하고, 피를 뽑기도 하고, 또…… 때리기도 하고, 마법으로 나를 얼리기도 하고…… 불에 태우기도 하고-.”
당했던 일을 느린 말투로 하나하나 읊고 있는데 제 앞에 선 은인의 푸른 눈에 눈물이 들어찬 것이 보였다.
“왜 울어?”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뿐인데. 이해하지 못한 엔리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이내 약간은 다급해진 표정으로 덧붙였다.
“잘못했어. 미안해. 울지 마.”
이벨리아가 울먹이며 미처 말을 잇지 못하자 엘리시아가 대신 물었다.
“……거기가 어디였니, 아가? 어디서 도망친 거지?”
“몰라. 충분한 마력이 생겼다는 걸 알고 나서 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썼어.”
용이기에.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마력이 적어도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만큼 충분해졌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도망을 쳤다는 소리였다.
“공간 이동 마법은 좌표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육신이 정확한 이동 지점을 찾지 못해 제각기 찢어질 수도 있었다. 엘리시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엔리르가 답했다.
“나는 그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어.”
엘리시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어린 용을 끌어안았다.
*** 어린 용의 처분은 보류. 곧바로 내쫓는다거나, 혹은 그저 불쌍하니 머무르게 둔다거나. 그 자리에서 쉬이 결론이 날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동정만으로 아르티나 공작가의 비호 아래 두기에는 제국 유일의 공작가라는 이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휴고와 엘리시아는 집무실로 올라가 어린 용의 처분을 고민했다.
“용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어린 딸은 이를 알려준 이가 동(東)마계의 지배자라 했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딸에게 알려준 정보라면 다른 결론을 의심할 여지 없이 맞는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휴고 자신이 보기에도 저건 빈말로라도 평범한 생물이라 할 수는 없었으니.
“멸종된 것이 아니었군.”
한숨처럼 내뱉자 엘리시아가 정정했다.
“멸종된 것이 맞죠. 저 어린 아가는 예외적인 상황인 거고요.”
엘리시아가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들다 말고 이를 다시 내려두었다. 평소의 우아한 손짓과는 달리 잔이 받침대에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까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끔찍한 일들을 당한 것 같던데……. 태어나는 과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눈을 떴을 때부터 그곳이라고 했었으니까.”
“…….”
“누굴까요……?”
“아무리 어리다 해도 용은 용. 부인도 느꼈겠지만, 지상 최강의 생물이었던 종족의 존재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지 않소.”
휴고마저도 입맛이 떨어진 듯 잔을 내려두었다.
“용을 두고 실험을 할 만한 단체라…….”
한때 커다란 전란에 휩싸였던 대륙. 그만큼 악인도, 이기적인 단체도, 앞뒤 없는 테러 집단도 즐비했다. 제법 많은 단체가 전쟁 과정에서 궤멸되었으나, 그만큼 많은 집단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짚이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그때 다 뒤쫓아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엘리시아가 음산하게 말했다. 지금이야 공작부인이나 과거 그 전란의 시절에는 맨몸으로 수많은 전장을 누빈 장군. 그때 직접 보고 겪었던 끔찍한 일들이 아직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다니. 엘리시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래서 그 용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잘 아시잖아요.”
“……혹시라도 우리 아가가 위험할 수 있소.”
“힘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어린 용이에요. 우리 아가 주위엔 당신도 있고, 저도 있고, 기사단도 있고, 더 나아가서 동(東)마계의 지배자도 있는걸요.”
휴고도 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린 용 하나에 제 딸의 목숨이 위협받기에는, 딸을 둘러싼 이들의 존재가 만만치 않다.
“위험하지 않더라도 꽤 귀찮은 일들이 생길 수도 있고.”
“귀찮음 하나 감당하지 못할 아르티나의 힘이 아닐 텐데요.”
그것도 그렇다. 가문의 힘은 이런 일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말을 돌리던 휴고는 한숨을 쉬며 본심을 내뱉었다.
“귀찮은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냥 싫은데…….”
휴고가 유일하게 약해지는 상대, 엘리시아에게 중얼거리자 그녀가 엄한 표정으로 답했다.
“쓰읍. 답은 정해져 있어요. 당신은 그냥 대답만 하면 되는데. 어렵나요?”
“……그럼 처음부터 왜 물어봤소?”
엘리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예의상이라고 해두죠.”
그날 저녁.
“당분간 우리와 함께 머무른다.”
가주 휴고의 선포와 함께 아르티나 공작저에는 군식구 하나가, 아니, 군용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나도 집이 생겼어!’
소식을 들은 작은 용이 파닥거리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 물론, 같은 집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거리감이 단번에 줄지는 않는다. 그리 평탄한 인생을 살아오지는 못한 대귀족 가문, 아르티나 공작가의 식솔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고위 귀족들일수록 세상의 씁쓸함을 알아 극히 폐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러니 대부분의 구성원, 특히 아르칸과 세드릭은 하루아침에 용과 같은 집을 쓰게 된 이 현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거 귀여운 척하는 것 좀 봐.”
“꽤 힘들게 지냈다던데. 그 말을 다 믿을 순 없지.”
그러나 어린 용을 받아들인 엘리시아 본인은 매우 만족했다. 애당초 동물과 어린아이에게 약할 뿐만 아니라, 이벨리아의 동생 명목으로 귀여운 어린 용이 함께 지내게 된 것이 제법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낳을 거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동생이 없는 우리 아가나, 남동생이 없는 세드릭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도 있고.’
엘리시아가 고대 용들에 대해 기술한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우리 아가에게 닥쳐올 위기 상황에서 용 하나가 곁을 지켜준다면 그것도 안심이고.’
책장이 팔락팔락 넘어갔다.
‘무엇보다도, 어린 용을 내쫓았다가 그 단체가 다시 데려간다면?’
일순간 엘리시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이의 말대로 어딘가 부족하더라도 용은 용. 그쪽 손에 넘어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가장 큰 적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 방법이 최선이다. 과거 이 제국 일선의 전략가였던 엘리시아는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 하나의 단면만 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공작저의 실질적인 실세인 엘리시아와 이벨리아가 작은 용을 감싸고 도니, 세 부자와 아르티나 기사단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사흘. 안 그래도 털이 반지르르하던 작은 용은 뽀득뽀득 샤워를 마쳐 더욱 반짝였으며, 인간형으로 변했을 때 입고 있던 해진 누더기는 엘리시아가 새로 골라준 짙은 청색 튜닉으로 바뀌며 귀티가 줄줄 흘렀다.
‘행복해.’
용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보다 편하기는 하였기에, 엔리르는 대부분 용의 모습으로 생활했다.
‘이 집은 따뜻해. 친절해.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아.’
밤에는 마냥 좋은 누나와 함께 잠을 청하고자 이벨리아의 방에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다가, 아르칸과 세드릭에게 꼬랑지가 잡혀 새로운 방으로 내던져진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좋았다.
‘저 두 인간은 조금 나빠. 그래도 누나의 가족들이랬어. 나쁘게 굴어선 안 돼.’
그리고 지금. 두 형제와 한 용은 연무장에서 이벨리아 없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엔리르에게 아르칸과 세드릭을 ‘형아’라고 부르라고 하였기에 작은 용은 그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곧바로 날아온 참이었다.
“뭐야. 왜 왔어.”
“우리랑 같이 수련하려고?”
아르칸과 세드릭이 의문을 표하자, 엔리르는 곧바로 아르칸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형아.”
“……?”
아르칸이 당황했다.
“다……닥쳐라!”
이번엔 미련 없이 세드릭을 향해.
“형아?”
“내 동생은 안 돼! 이 요망한 용!”
역시 가족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난 누나가 있으니까. 이벨리아가 시킨 임무를 달성하였으니 엔리르는 바닥에 놓여 있던 목검을 발로 툭 차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런 엔리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세드릭이 목검을 주워 엔리르의 빨간 뒤통수에 휙 던졌다.
“흥!”
그러나 용이 괜히 용이겠는가. 날렵한 순발력으로 잽싸게 피한 엔리르는 세드릭을 보며 빼꼼 혀를 내밀고서 와다다 이벨리아가 있는 방 쪽으로 뛰어갔다.
“와, 씨, 저 새끼가! 무표정한 얼굴로 메롱 하니까 더 얄미워. 진지한 메롱 같아.”
세드릭이 씩씩대며 발을 굴렀다.
“야, 세드릭.”
“왜, 형님.”
“내가 아까 닥치라고 했는데.”
“응. 잘했는데.”
“그…… 어린애, 아니 어린 용한테 말하기엔 좀 나쁜 말이었나?”
형까지 왜 이래. 어딘지 미안한 듯한 형의 표정을 보며 세드릭은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수상한 용을 제대로 감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 격렬하던 수련이 끝나고 간단히 저녁밥을 먹은 후, 아르칸은 응접실에서 쉬는 대신에 공작저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제국 유일 공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저택 내부의 도서관은 황궁의 도서관 못지않았다. 약 5층가량의 높이이나 달리 층이 나누어져 있지는 않았으며, 책의 이름이나 내용, 열을 읊으면 책이 저절로 책장에서 뽑혀 아래로 내려오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르칸은 <종족> 카테고리의 책장에 가까이 가서 근처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용. 멸종. 실험. 신화.”
네 개의 키워드를 말하자 여기저기에서 두꺼운 책들이 날아와 아르칸의 옆에 쌓여갔다.
“많네.”
그렇게 대략 저녁 8시부터 책을 읽던 아르칸은, 약 새벽 3시에 이르러서야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어린 용은 분명 5년 정도 살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용이 공식적으로 멸종한 시기는 약 200년 전.
‘용이 멸종한 시기와 엔리르가 태어난 시기가 맞질 않아. 차이가 너무 크다.’
태어날 때부터 그곳이었다고 했지. 여러 가정이 떠올랐으나 하나같이 스케일이 너무 컸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차기 아르티나 가문 후계자의 마음속에는 엔리르를 두고 실험을 자행했다는 이름 모를 단체에 대한 경계심이 확실히 자리 잡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칸이 책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오늘 읽은 책들로부터 알아낸 사실 중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구전으로만 들어와서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고증이 확실한 역사서들을 읽으니 안개가 걷힌 것처럼 명확히 이해가 갔다.
“아가 용은 대단하군.”
함께 살게 된 어린 용은 제법 대단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 그 시간. 그 대단한 어린 용은 단꿈에 빠져 있었다.
“헤헤-.”
자면서 흐르는 잠꼬대가 꽤 좋은 꿈을 꾸고 있음을 알렸다. 꿈속에서 엔리르는 수많은 적군에게 브레스를 팡팡 쏘며 위풍당당하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강한 용! 대단한 용! 위대한 용! 우리 집과 우리 누나는 내가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