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 생물이 왜 거기서 나와?2021.03.29.
“이게 뭐야?”
“식량 도둑네 집에서 나온 동물인데 식량 도둑도 몰라?”
“처음 보는데?”
“그렇지만 치료부터 해줘야 할 것 같아. 피가 많이 나!”
작은 친구의 손에 들린 짐승은 루드비히에게도 낯설었다. 그러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뒤로 미루고, 일단은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체 모를 생물을 황실 전담 수의사에게 데려다주었다.
“이 짐승에 대한 모든 사항은 기밀이다.”
“물론이지요, 황태자 전하.”
“새어나갈 시 대가를 무엇으로 치를지는 잘 알고 있겠지.”
“아이고, 소인이 이 황궁에서 무려 30년간 자리를 지켰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법 특이한 짐승이기에 수의사의 목숨을 담보로 입을 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아지겠지? 아주 많이 다쳤던데.”
“저 수의사 실력이 나쁘지 않다. 금방 나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이벨리아는 이전보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이나 더 황궁을 헤집고 다녔다. *** 한편 황제의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칼라일과 휴고는 이벨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었다.
“공녀님께서 전망대 난간에 머리가 끼셨다고…….”
“전망대 난간이 잘못했군. 적어도 머리가 들어갈 만큼은 넓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사과하지. 공녀가 참으로 혈기 왕성하구먼.”
“공녀님께서 회랑에 전시된 도자기 하나를 깨뜨리셨다고…….”
“배상하지요.”
“됐네. 공녀가 다치지 않았으면 도자기 한두 개쯤이야 뭐가 문제겠는가.”
“그…… 공녀님께서 황실 기사단에게 덤비라 외치셨다고…….”
“진짜 덤비면 내가 직접 가서 상대하겠다고 일러라.”
“공작한테 두들겨 맞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하라 전해.”
시종이 전해주는 이 정도 사고쯤이야 이벨리아가 평소에 치는 사고의 수위에 비하면 얌전한 수준에 속했다. 그걸 잘 아는 황제나 휴고나 별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을 뿐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것은 단 한 가지. 해가 질 무렵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온 딸의 손에 들린 붉은색 강아지인지 늑대인지 모를 오묘한 그것이었다.
“우리 아가, 손에 든 그건 어디서 주웠지?”
휴고의 목소리는 바로 전까지만 해도 수만 명의 목숨을 가지고 전술을 구상하던 자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저어기 황궁 숲 뒤편에서! 멍멍이가 많이 다쳐서 루이가 수의사님에게 데려다가 치료해 줬어요.”
동물의 목숨은 물론 소중하지만, 다친 동물은 구조하여 치료를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공작저 한편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는 미래를 생각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칼라일과 휴고의 눈이 루드비히를 향했다.
‘대체, 왜, 쓸데없는 짓을.’
‘이 황공하신 강아지가 말리지는 못할망정.’
억울해진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뒤에서 자신의 의지로 수의사에게 데려간 것이 아니라는 몸짓을 취해 보였다. 잠시간 눈을 가늘게 뜨고 이벨리아의 품에 안긴 생물을 가늠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공작, 아무래도 저거-.”
“예, 그냥 강아지나 여우 따위는 아닌 것 같군요.”
미력한 숨소리를 색색 내뱉으며 눈도 제대로 뜨질 못하면서도, 붕대를 감은 옆구리에는 여전히 피가 넘치듯 배어 나오고 있으면서도, 작은 짐승은 마치 거대한 맹수와 다를 바 없는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고위 마물이나 적국의 걸출한 기사들을 베어 넘기며 마주했던 기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는 않았다.
“아가, 그건 다시 숲에 놓아주고 오거라. 그 정도 상처로 죽을…….”
-짐승이 아니다. 라고 말을 이으려 하였으나, 마주한 딸의 눈이 충격으로 커진 것을 보고 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책망하는 듯한 딸의 눈은 분명.
‘우리 아빠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었어? 죽어가는 동물을 숲에 내던지고 오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어? 사실 당신 우리 아빠 아니지……?’
정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에.
“……그 정도 상처로 죽을 짐승일 수도 있겠지. 일단 공작저로 데려가서 치료하고 지켜봐야겠구나.”
역시 그럼 그렇지. 우리 아빠가 그런 냉혈한일 리가 없지. 다시 제 아빠에 대한 신뢰로 반짝이는 공녀의 눈과, 공녀의 눈망울 하나에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공작을 보며 칼라일은 생각했다.
‘뭐 하는 거야, 저 머저리가.’
뭔지도 모를 짐승을 어디 냉큼 집에 들여.
“공녀. 아무리 봐도 그냥 짐승은 아닌 듯한데, 안전을 위해 다시 숲에 버려두고…….”
“흐이잉-.”
“……오면 그 어린 짐승이 괴롭겠구나. 그래, 공작저로 데려가 잘 보살핀 후 놓아주거라.”
인정한다, 휴고. 내 친우여.
‘저 눈망울을 마주하고서야 머저리가 되지 않을 수가 없군.’
결국, 황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이벨리아의 손에는 루드비히가 싸준 금낭화 다발과 마들렌, 각종 간식, 오렌지 주스 한 병, 그리고 붉은 생물이 들려 있었다.
“땅 도둑. 그거 다음번에 비밀기지로 데려와.”
배웅을 위해 위엄도 잊고 황궁 문 앞까지 직접 나온 루드비히가 작게 속삭였다. 이벨리아야 루드비히가 이 붉은 강아지와 함께 놀고 싶어서 그러나보다 싶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실 루드비히의 의도는 다른 데에 있었다.
‘아버지와 공작이 이상함을 느꼈다면 분명히 뭔가 있는 건데.’
뭐가 이상한지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우니 오래 산 악마 자식한테 보일 예정이었다.
‘오래 살았으면 그만큼 아는 것도 많겠지.’
짐승의 정체를 듣고 작은 친구에게 조금이나마 해를 가할 존재라면 직접 처리하면 되니까. 루드비히의 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아이고, 우리 아기씨 재밌게 놀다 오셨습니까?”
“응! 맛있는 밥도 먹었지!”
“우리 아가, 황태자 전하가 괴롭히진 않았지?”
“응! 내가 괴롭혔지!”
“예쁜 인형도 선물로 받으셨군요.”
“아니! 이거 인형 아닌데!”
황궁에서 귀환한 이벨리아를 반기던 식솔들은 일견 이벨리아가 붉은 강아지 인형을 선물로 받아온 것인 줄로 착각했다. 바구니 안에 웅크려 붉은 꼬리만을 밖으로 내민 작은 생물은 현존하는 존재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기이한 털빛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형이 아니라고?”
“형님, 이거 움직이는데?!”
“인형이 아닌데 날개는 왜 있어?”
“형님, 이거 날개도 파닥이는데?!”
붉은 짐승이 꼬리를 살짝 움찔대고서야 그것이 인형이 아닌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아르칸과 세드릭은, 혹시라도 이 생물이 소중한 여동생에게 해를 가할까 싶어 미심쩍은 눈으로 짐승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린 짐승이 많이도 다쳤구나.”
반면 이벨리아와 마찬가지로 작은 동물에 약한 엘리시아는 붉은 짐승을 당장 치료실로 옮기라 지시했다. 제법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정체 모를 짐승이었으나, 이 공작저에는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와 제국에서 손에 꼽는 황실 정령사가 있다. 어린 짐승 하나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이틀.
“여기 차가운 수건.”
- 철퍽.
“여기 달콤한 쿠키.”
- 흔들. 이벨리아는 작은 손수건에 차가운 물을 묻혀 붉은 짐승의 작은 이마에 올려주기도 하고, 기운을 차리라며 코앞에서 달달한 쿠키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혀 효과 없는 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한 셈이었다. 붉은 짐승은 손수건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눈과 귀를 불편하게 하여 오히려 푸르르 털어내기 일쑤였지만, 구해준 인간의 정성임을 알기는 아는지 딱히 떼어내지는 않았다.
“이제 치료가 더 필요하진 않습니다. 나머지 가벼운 상처들은 알아서 곧 나을 겁니다.”
정체 모를 짐승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나았다.
“이건 다 내 훌륭한 간호 덕분이야!”
이벨리아는 분명 자신의 간호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그것이 아님은 공작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리 아가가 한 게 간호였어? 난 또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줄 알았지.”
이벨리아가 자행한 것은 간호라기보다는 테러 수준이었으니. *** 그리하여 지금, 비밀기지.
“얘 좀 봐. 귀엽지!”
아가레스는 자신과의 인사도 생략한 채로 붉은 짐승을 불쑥 들이미는 작은 친구가 다소 당혹스러웠다.
‘뭐야, 이 먼지 덩어리는.’
“아가 토끼의 친구, 아가 강아지야. 둘이 친하게 지내야 해.”
가지가지 한다. 며칠 눈을 떼었다고 어디 저런 걸 주워왔어.
“네가 토끼라면 내가 토끼기는 한데, 그건 강아지는 아닌 것 같다.”
“뭔지 모르니까 일단 강아지로 부르기로 했어.”
“그거 어디서 났어?”
“루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숲에서 주웠어!”
때마침 거대한 매 라르고의 알림을 받고 나타난 루드비히가 아가레스를 보며 붉은 짐승의 정체를 좀 밝혀보라는 듯 턱짓했다.
“이리 내 봐.”
루드비히의 궁금증은 알 바 아니고, 아가레스는 작은 친구의 손에 들린 저 존재가 그가 생각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손을 내밀었다.
“다치게 하면 안 돼. 아가니까 살살 잡아야 해.”
“나도 아가 토끼라며. 아가끼리 잡는 거니까 괜찮아. 빨리 이리 내.”
본인을 스스로 아가 토끼라고 칭하면서도 언제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고고한 지배자는 한숨을 내뱉었다. - 아르르릉. 이벨리아의 품 안에서는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던 짐승은, 아가레스의 손 위로 옮겨지자마자 귀를 한껏 뒤로 젖히고 아르릉-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내던 소리랑 비슷하네.”
“옹, 기억나. 그때 토끼가 상당히 겁에 질렸었지.”
‘……겁에 질리긴 누가.’
그날 내가 너를 한입에 홀랑 털어 넣지 않은 것을 감사할 날이 분명 올 거야. 언젠가. 꼬맹이 친구의 허세에 픽 웃음 지은 그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붉은 짐승을 이리저리 살폈다. 주둥이를 살피더니 표정이 설핏 굳어지고, 귀와 꼬리를 살피더니 한층 더 차가워진 표정을 짓더니, 날개를 슬쩍 들었을 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잇새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갖다 버려.”
당장이라도 갖다 버릴 것처럼 붉은 짐승의 목덜미를 잡고 숲으로 향하는 아가레스를, 이벨리아가 막아섰다.
“그러지 마! 아직 다친 강아지야!”
“강아지 아니고.”
“다친 동물이야!”
“동물도 아니야.”
내버려 둬도 안 죽어, 쉽게는.
“그럼 뭔데?”
짐승을 높이 치켜든 아가레스의 발치에서 폴짝폴짝 뛰며 손을 뻗는 이벨리아 대신, 루드비히가 물었다.
“……이거 당황스러운데.”
“뭐길래 악마가 당황스러울 정도야.”
“뭐길래 아가 토끼가 당황스러워해?”
궁금해진 이벨리아도 뛰기를 멈추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올려다보았다. 비밀기지에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두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아가레스가 드물게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용인 것 같은데.”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잠시간의 침묵. 이내 손아귀에 들린 짐승이 작은 앞발로 제 얼굴을 폭 감쌌다. 마치 정체를 들켰다는 듯. 루드비히가 황망하게 되물었다.
“용이 여기서 왜 나와?”
*** 어지간해서는 당황한 기색을 비치지 않는 것이 지배자의 덕목. 그러나 아가레스와 루드비히 모두 이 순간만큼은 그 덕목을 지키지 못했다.
“용은 멸종된 거 아니야? 아주 오래전에?”
루드비히가 보편적인 통념을 근거로 의문을 제기했다.
“멸종됐지.”
“근데 이게 용이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한 용이라기보단 반쪽짜리 용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
이벨리아도 거들었다.
“내가 그림책에서 본 용은 딱딱해 보였는데. 얘는 털이 복슬복슬한데.”
“이게 용인 줄은 뭘 보고 확신한 거지?”
“기운. 용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는 육신과 존재력이거든.”
“존재력이 뭐야?”
작은 친구가 갸웃하자 아가레스는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꼬맹이가 정령을 소환하는 힘을 자연력. 악마의 힘은 지배력이라고 부르지. 비슷해. 과거 용의 힘은 존재력이라고 불렸어.”
정령은 자연을 기반으로 하고, 마족은 지배를 힘으로 삼으며, 용은 존재만으로 정점을 차지했으니까.
“근데 이 용은 존재력이 애매해. 내가 과거에 마주쳤던 용들의 것과는 다르게 불순물이 끼어 있달까.”
아가레스가 짐승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생긴 것도. 우리 꼬맹이 말대로 이렇게 작고 복슬복슬한 용은 본 적이 없거든.”
일견 폄하하는 것으로 느껴질 법한 말에 아가레스의 손에 들린 용이 제 딴에는 위용 넘치게 날개를 펼치며 몸집을 부풀렸다. 마치 나는 용이 맞다며 항의하는 모양새였다. 이를 본 아가레스가 픽 웃었다. 한때는 지상 최강이라 불리던 생물이다. 불순물 좀 끼어 있다고 해서 그 격이 한순간에 떨어질 리 없다. 몸집이 작아도, 자태가 하찮아도, 기운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도.
“그래도 용은 용. 이 존재력은 부정할 수가 없지.”
*** 이벨리아도 루드비히도 범상치 않은 생물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무려 ‘용’일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멸종되어 지금은 그림과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지상 최강의 생물을 눈앞에서 보다니.
‘물론 지상 최강의 생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고 복슬복슬하지만.’
한참 눈을 깜박이던 이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용은 이제 더 없잖아. 그러면 얘는 어디로 가?”
“그냥 내버려 둬. 어디서 온 건지,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회복하고 살아갈 테니까.”
“아직 아가 용 아니야?”
“……그렇긴 하지.”
“나랑 토끼처럼 아가잖아.”
“……난 아가는 아니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렇지.”
“그런데 갖다 버리자고?”
마치 자기가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벨리아의 눈매가 서러워졌다.
“하…….”
아가레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멸종된 생물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과 이상한 기운을 안고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상황. 아직 어린 용이니만큼 아르티나 공작과 자신이 곁을 지킴에야 별다른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악마는 직감했다.
‘이거 딱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데.’
한편 자신을 가져다 버리려는 분위기를 감지하였는지, 작은 용은 이벨리아의 어깨를 툭툭 친 뒤 나름대로 장기를 선보였다. 붉은 귀를 쫑긋대고, 풍성한 꼬리를 살랑대고, 아직은 작은 날개를 파닥파닥 움직이면서. 이 비밀기지의 위계질서를 완벽하게 파악한 용의 애교는 즉효였다.
“토끼는 이 용보다 강하잖아. 그치?”
“그렇지.”
“나한텐 토끼가 있잖아. 얘가 혹시 나쁜 용이더라도 안 위험하게 구해줄 거잖아. 그치?”
“……넌 날 참 잘 다뤄.”
긍정이나 다름없는 말이 떨어지자, 이벨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선포했다.
“내 동생 삼을래.”
붉은 짐승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개가 한층 더 분주히 파닥였다. 꼬리는 쉴 새 없이 살랑거렸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이를 가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며. 뭘 저리 채신머리없이 파닥대?’
‘……요망한 먼지 덩어리.’
“이름은 뭐로 할까? 계속 용아, 용아, 부를 수는 없잖아.”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즉각 답했다.
“파닥이.”
“털뭉치.”
“……아르릉.”
작은 용이 처음으로 이를 드러냈다. 그래도 내가 하나뿐인 용인데. 파닥이와 털뭉치가 가당키나 한가.
“너희들은 아가 토끼랑 식량 도둑이라는 멋진 이름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용한테만 그런 이상한 이름을 지어줘.”
아가 토끼와 식량 도둑이라는 말을 듣자 작은 용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우리 이름이 멋진 이름이라고? 할 말을 잃은 두 지배자를 앞에 두고 이벨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그래. 엔리르. 엔리르라고 할래.”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
“그냥 느낌이 예뻐서 말한 건데. 무슨 뜻이 있어?”
‘그래, 알 리가 없지.’
엔리르. 고대어로 ‘공포’라는 뜻. 모르는 것치고는 참으로 적절하게 잘 지었다. 곰돌이 이름은 곰치 따위로 지어놓고.
“아가 용, 아니 엔리르 배고프겠다. 간식 좀 가져올게. 잠시만!”
이벨리아가 오두막의 식량창고로 뛰어갔다. 작은 친구가 오두막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 아가레스는 서늘한 눈으로 작은 용을 바라보며 루드비히에게 날 선 음성을 내뱉었다.
“너. 황궁 관리 제대로 안 하냐. 왜 꼬맹이가 저딴 걸 주워들고 오게 만들어.”
“……면목 없군.”
“아르릉.”
“넌 뭘 아르릉이야. 용이면 다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먹기 전에 눈 제대로 떠라. 내 친구한테 붙어서 치대지 말고.”
‘내’ 친구라는 말에 루드비히는 즉각 반응했다.
“내 친구야.”
여느 때와 같은 유치한 말다툼의 시작이었다.
“내 친구지. 너는 그냥 비밀기지 공유 관계고.”
“악마랑 인간이 어떻게 친구가 되나.”
“그러는 황태자와 공녀는 어떻게 친구가 되나.”
“나는 그리 딱딱한 군주는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