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황궁을 접수하러 왔지!2021.03.25.
이 제국 황태자에게 저지르는 모든 범죄에 대한 면책특권자. 조금 더 멀리 보자면 언젠가 이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분이니, 그날이 되면 황제에 대한 전례 없는 면책특권자. 절대 가볍지 않은 의미였다. 시종장은 새삼스레 눈앞의 면책특권자를 바라보았다.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공녀님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은.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으셨기에 공녀님 앞에서는 꼬리 흔드는 멍-.’
아니, 내가 감히 이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시종장은 불충을 저지를 뻔한 자신의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다행히도 시종장은 두 걸음 뒤에서 따르고 있었기에 루드비히와 이벨리아는 시종장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근데 루이 옷은 비밀기지에서 보던 옷이랑은 다른데. 아주 반짝반짝하고 예뻐.”
“음. 황궁에서는 대부분 이렇게 정복을 입고 있지.”
거짓말. 실은 정복을 입는 일은 제법 드물다. 그저 소꿉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작은 뽀시래기의 소심한 허세였다.
“여기가 내 집무실이야.”
시종들이 치워두었기에 루드비히는 자신만만하게 방문을 열었다.
‘음. 깔끔. 깨끗. 단정. 마음에 들어.’
“와아아- 엄청 넓고 엄청 서류도 많다!”
“항상 공무로 바쁘니 당연하지.”
“루이 방은 되게 깨끗하네! 내 방은 인형들이 많아서 지저분한데!”
“항상 이렇게 깨끗하지. 서류 처리에 집중해야 하니.”
또 살짝 거짓말. 늘 서류 더미로 뒤덮여 서류 외의 나머지 물건들은 어디에 있는지 찾기조차 어려웠지만, 이 또한 소꿉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허세였다. 집무실을 구경시켜 준 루드비히는 이벨리아를 자연스레 이끌어 연무장으로 데려가 황실 기사단의 훈련을 보여주었다.
“자, 여기가 황실 기사단이 훈련하는 곳. 내가 언젠가 저 기사단의 주인이-.”
언젠가 이 위용 넘치는 기사단의 주인이 될 것을 보여주어 점수를 좀 따보고자 하였으나, 그 의도는 달성되지 못했다.
“나도 검 배웠는데! 목검이…… 저기따!”
“자……잠깐만 이브! 서봐! 저기 들어갔다가 밟힌다고!”
자기도 검을 배웠다며 목검을 집어 들고 훈련 중인 황실 기사단 한가운데로 달려들려는 이벨리아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황궁에는 유아용 목검이 없었기에, 자기 몸보다 기다란 목검을 두 손으로 번쩍 치켜들고.
“덤벼라!! 내가 대장이다!!”
당당히 외치는 이벨리아는 상당히 하찮아 보였다.
“하하하하-!”
“크하핫- 아르티나의 공녀님이신가 본데-!”
그에 훈련 중이던 황실 기사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결국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내뱉었더랬다.
“저런 공녀님과 함께 생활하며 훈련한단 말이지, 아르티나 기사단 녀석들.”
“어쩐지 헤롤드 자식 얼굴이 폈더라니.”
“부럽게스리…….”
각종 토벌과 전쟁에 함께 동원되기에 제법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기사단이었다. 또 나름의 경쟁의식도 한몫했다. 황실 기사단으로서야 귀족 사병인 아르티나 기사단의 무위에 지고 싶지 않음은 당연지사였고, 아르티나 기사단 역시 거두어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넘쳐나 어디서 누구보다 뭘 못한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했으니. 그러나 황실 기사단은 이 순간 패배를 인정했다.
‘하이고, 저 목검 휘두르시는 것 좀 봐.’
‘목검에 휘둘리시는 것 같은데.’
‘아이고, 아이고, 다치시겠다!’
‘저 목검은 왜 저렇게 길고 난리야. 목검이 잘못했네.’
지금만큼은 저 공녀님을 모시는 아르티나 가문의 기사들이 진정으로 부러웠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다들 열심히 정진하도록!”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검을 휘둘러 위용을 뽐낸 이벨리아가 마치 대장처럼 한 손을 쫙 올리고는 씩 웃으며 나가자 황실 기사단은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더랬다. 연무장에서 겨우 하찮은 병아리를 빼낸 루드비히는 친구를 회심의 역작인 후원의 분수대로 데려갔다.
“와아- 분수대!”
그랬다가 이번에는 당장이라도 분수대에 발을 담그고 참방참방 대려는 이벨리아를 말리느라 녹초가 되었다. 심혈을 다해 준비한 분수대를 좋아해 준 건 고마운데, 거기 들어가서 물장구치고 놀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감기 걸려. 이 병아리야.
“제발 좀 가만히- 아니, 너, 솔직히 말해봐. 이중인격자지.”
“앙?”
“대체 황비랑 황자 앞에서의 땅 도둑이랑 내 앞에서의 땅 도둑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어?”
뽈뽈대며 황궁을 누비는 병아리를 말리다가 지친 바람에 던진 우문에.
“무슨 소리야. 그러면 식량 도둑은 적을 대할 때랑 나를 대할 때랑 똑같아?”
여전히 많은 체력이 남아 있는 병아리의 현답이었다.
“앗, 이번엔 저기 구경할래!”
또 무엇을 발견하였는지 도도도- 뛰어가는 병아리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루드비히에게, 시종장이 넌지시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육아는 참으로 힘들지요, 전하.”
“하아…….”
마주친 시선에는 동정이 가득했다. 서로의 눈에 비친 상대방의 안색이 제법 창백했다. 불과 두 시간 만에 이 제국 황태자와 시종장, 두 인물을 함락시킨 병아리는 위대했다.
‘와아! 이 건물은 아주 높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자들의 눈빛이야 이벨리아가 알 바 아니었다. 온갖 진귀한 것들이 넘치는 황궁은 마냥 신기했다. 이벨리아는 전망대 건물 속으로 쏙 들어가 위로 뛰어 올라간 다음 고개를 내밀었다. 문제라면, 키가 작아 난간 위로는 얼굴을 내밀 수 없었기에 난간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것이랄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화원은 또 장관이었기에 실컷 구경한 후에 난간 사이에서 머리를 빼려고 했는데. - 낑낑.
“……?”
- 끼잉. 이런.
“……꼈당!”
머리가 꼈어! 난간에 꼈어! 들이밀 땐 잘 들어갔는데, 나가려니까 껴버렸다. 한편 루드비히와 시종장은 전망대 아래에서 난간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이벨리아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마냥 헤실거리던 얼굴이 발갛게 물들더니 고개가 도무지 들어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닌가. 루드비히가 제 이마를 턱 짚었다.
“또 왜 저럴까.”
“공녀님께서 또 무슨 사고를 치신 것 같군요.”
“……그런 것 같군. 저걸 그냥.”
마치 사신과도 같은 표정으로 전망대 위로 올라온 루드비히에게 이벨리아는 울상으로 애원했다.
“나 꼈어…….”
“알아.”
“난간이 아주 좁아.”
“네 얼굴이 큰 거겠지.”
결국 루드비히가 난간을 두 손으로 잡고 벌려주고 나서야 이벨리아는 머리를 빼낼 수 있었다.
“헤헤-. 깜짝 놀라따.”
“…….”
소꿉친구의 표정이 세상 둘도 없는 한심한 인간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영 민망해진 이벨리아는 슬슬 게걸음으로 다음 목표지를 향해 나아가려다가 뒷덜미를 덥석 잡히고 말았다.
“놔라!”
“아무래도 입에 뭔가 물려놓아야 얌전해지겠어. 밥 먹자, 땅 도둑.”
발버둥 치던 이벨리아는 ‘밥’이라는 말에 마취총을 맞은 병아리처럼 얌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빛나던 바다색 눈이 이젠 과한 안광을 발했다. 밥!!
‘무려 황궁 밥!!’
*** 벌레는 싫어하고 꽃은 좋아하는 작은 친구의 취향에 맞춰 정원이 아닌 온실에 점심을 준비하도록 지시한 것은 상당히 주효했다.
“난 이 꽃이 가장 좋아. 루이한테서도 이 꽃이랑 똑같은 냄새가 나는데.”
“금낭화야. 집에 갈 때 챙겨줄게.”
이벨리아는 좋아하는 금낭화 향에 담뿍 빠져 코를 발랑대며 한참 온실을 구경했다.
“식사를 들이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이내 애피타이저부터 천천히 식사가 들어오자 이벨리아는 얌전히 식탁 앞에 앉아 홀린 듯 눈을 반짝였다.
“황궁 밥은 역시 생김새부터가 멋있어.”
루드비히는 앞으로도 이벨리아가 황궁에 놀러 오면 미끼로 쓸 먹을거리들을 항상 대기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참치! 생선 중에 가장 맛있는 참치!”
“참치도 알고. 똑똑하네.”
“난 모르는 게 없지!”
애피타이저로 나온 참치 마리네는 작은 친구의 입에는 약간 커 보였기에, 루드비히는 제 접시에 놓인 마리네를 작게 잘라 이벨리아의 앞에 놓아주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네 것도 줘봐. 잘라 줄게.”
“여기.”
식사 시중을 들던 모든 이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공녀님을 살뜰하게 챙기는 이 제국의 작은 주인도 낯설었지만, 무려 황태자의 호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어린 공녀님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놀란 눈빛을 몰래몰래 교환하다가 시종장의 엄한 눈초리에 부산한 기색을 애써 숨겼다.
“그런데 왜 내 접시에 놓인 밥을 자꾸 루이가 먼저 먹어?”
제 몫의 식량에는 꽤 예민한 편인 이벨리아가 눈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누가 이름값 못한달까 봐. 아까부터 식량 도둑이 자신의 접시에 놓인 음식들을 먼저 집어 먹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미처 손을 대기도 전에.
“혹시라도 도…… 아니, 난 식량 도둑이잖아. 본분을 다하는 것뿐이지.”
이미 시종들이 독의 유무를 다 확인하였을 테지만, 혹시 모를 일 아니던가. 직접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맨 경험이 있는 루드비히는 혹시라도 이 작은 친구가 같은 경험을 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얼버무리는 친구의 말에서 이벨리아도 단숨에 눈치를 챘다.
“……이제 그만 해. 난 내 식량을 빼앗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친구가 밥 한 끼 편히 넘기지 못하도록 만든 이 황궁이 미웠다. 잠시 우울해질 뻔했으나, 그랬다가는 제 친구가 더 속상해할 것을 잘 알았기에, 이벨리아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정말 맛있다!”
이어져 나온 파피요트가 입에 맞았는지 금방 한 그릇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자, 루드비히는 즉각 이벨리아의 빈 접시와 가득 찬 자신의 접시를 바꾸어주었다. 시종들이 파피요트 한 접시를 새로 내오려고 다가왔지만, 루드비히가 한 손을 저어 그를 막았다. 땅 도둑하고 보내는 조용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잘 먹네. 그 볼살이 다 어떻게 생긴 건지 알겠다.”
“운디네도 통통한 볼따구라고 했는데.”
“그렇게 잘 먹으니까 볼이 통통해지지.”
“아냐, 이건 다 어려서 생긴 살이랬어. 크면 없어진댔어.”
“그렇게 먹어서는 안 없어질지도.”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놀리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루드비히의 표정은 마냥 따뜻함과 만족스러움만을 담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그의 몫으로 나온 파피요트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운 것을 보니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오늘 황실 요리사들에게 거한 포상을 내려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루드비히는 이벨리아에게 커다란 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손수 따라주었다.
‘윗부분은 싫어하니까. 아랫부분으로 줘야지.’
이벨리아가 싫어하는 맑은 윗부분은 자신의 컵에 따라내고, 오렌지 덩어리가 잔뜩 들어 있는 아랫부분을 따라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늘 하나하나 시중을 받던 식사에서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시중을 들어주는 식사로 바뀌었지만, 그 어색함이 오히려 달가웠다. 단지 생존이 목적이었던 식사 시간에 즐거움을 느낀 것도. 기계적으로 입에 밀어 넣던 음식을 씹으며 그 맛을 느낀 것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자신이 독을 삼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기에. 그렇게 루드비히는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모든 음식을 제 소꿉친구보다 먼저 입에 대었다. ***
“전하. 그 마들렌 안 먹을 거면 나 줘. 황궁 구경하면서 먹을래.”
“부르던 대로 불러. 어색하게 무슨.”
투덜대면서도 착실히 마들렌을 넘겨준다. 심지어 옆에 놓인 바구니 속에 손수 차곡차곡 담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 요리장 들었습니다.”
그때, 식사가 거의 끝나간다는 기별을 받고 달달 떨리는 다리로 온실로 들어온 것은 오늘 이 식사를 준비한 요리장이었다.
‘공녀님마저 식사가 별로였다고 하신다면 나는 오늘로 내쳐진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드려도 맛있게 드시는 법이 없으셨다. 그러니 공녀님마저도 식사가 별로였다고 말씀하신다면 요리장은 직장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티나 가문의 공녀님이라고 한다면 이 황실에 드나들 수 있는 귀빈 중에서도 최고 귀빈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시던가.
“인사 올립니다. 오늘 영광되게도 황태자 전하와 공녀님의 식사를 준비한 요리장입니다. 혹시, 식사가…… 입에 맞으셨을는지…….”
이벨리아가 손에 쥔 마들렌을 오물오물 삼키느라 대답에 약간 시간이 걸리자, 황실 요리장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댔다.
“…….”
“아주 맛있었어요!”
어린 공녀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존 선고였다.
“아이고! 가……감사합니다!”
황실 요리장은 크게 외치며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했다. 늘 그렇듯 황태자 전하의 답은 기대하지 않고 물러나려 하는데, 루드비히가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잘했다. 식사를 준비한 이들에게는 따로 포상을 내리도록 하지.”
황태자 전하의 식사를 담당한 지도 어언 10년째. 10년 만에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눈치 빠른 시종장과 감격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는 요리장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황태자 전하의 칭찬을 받으려면-.’
‘전하가 아닌 공녀님을 공략해야 하는군.’
그날부터 노련한 시종들 사이에서는 황태자 전하께 칭찬을 받을 방법이 알음알음 공유되었다. ***
“나 아까 마차를 타고 오다가 사슴이 뛰어가는 걸 봤어. 사슴 구경하러 가자!”
“사슴은 황궁 뒤쪽 숲에 있다.”
이벨리아는 루드비히가 준비한 루트를 차근차근 따르고 있었다. 앞서 안내하는 루드비히를 쫄랑쫄랑 쫓아가며 이벨리아는 지나는 꽃 하나, 기둥 하나, 사람 한 명 한 명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몸담고 있는 곳이기는 하나 정을 느껴본 적은 없기에, 루드비히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황궁에 이토록 볼 것이, 궁금할 것이 많았나.’
생소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아마 땅 도둑이 돌아가더라도 그는 땅 도둑이 물었던 그 모든 것을 볼 때마다 다시금 어린 친구를 떠올릴 터였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물어보면 좋겠다.
‘너의 흔적을 많이 남겨둘수록 나는 더 수월히 이 사지에서 견딜 테니.’
그렇게 두 아이가 황궁 뒤쪽 숲으로 약간 들어갔을 무렵.
“사슴이다! 엄청 많네, 사슴이!”
이벨리아는 이미 시종들이 뿌려둔 먹이 냄새를 맡고 몰려든 흰색 사슴들에게 냉큼 다가섰다.
“착하지- 착하지-. 잡아먹지 않아요. 사슴 고기는 좋아하지 않아요.”
“야, 그 말이 더 무서운데.”
사슴으로서는 무섭게 들릴만한 말을 내뱉으면서 당차게 다가가는데도, 이상하게 이벨리아가 다가가면 사슴들은 도망을 가지 않았다. 루드비히와 시종장은 멀리 떨어져 이벨리아가 사슴들을 쓰다듬는 것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그보다 더욱 환한 웃음을 머금고 흰색 사슴들을 쓰다듬는 이벨리아를 보며, 시종장은 한마디로 감상을 정리했다.
“외람되오나 공녀님께서는 실로 요정 같으십니다.”
“…….”
시종장의 감탄에 달리 답변하지는 않았으나, 루드비히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저 광경을 그 외에 또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뭔가를 눈에 담는 것이 이토록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한 적은 처음이다. 루드비히는 기꺼이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 한편 순하게 눈을 깜박이는 사슴들을 가만가만 쓰다듬던 이벨리아의 귀에 작게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기 사슴인가?”
새끼 사슴이 내는 소리인가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몰려든 사슴 중 새끼 사슴은 없었다.
“안 보이는 곳에 있나?”
이벨리아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
있기는 있었다. 다친 무언가가. 사슴은 아니었지만.
“……이게 모야?”
“낑…….”
강아지? 아니 여우인가? 강아지랑 여우는 날개가 없는데 왜 날개가 달려 있지?
“빨간색 날개 달린 동물은 난 안 배웠는데.”
단연코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어떤 도감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작은 생물.
“멍멍이!”
이벨리아는 일단 이것을 멍멍이로 지칭했다. 일반적인 강아지와는 상당히 달랐으나 대략 복슬복슬하고 꼬리가 있으니 비슷한 생명체로 뭉뚱그렸다. 진한 붉은빛이 도는 짐승의 옆구리에는 긴 자상이 남아 있었고, 그 때문인지 얕은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끼잉…….”
이벨리아가 급히 다가서자 강아지는 한 번 더 희미한 소리를 내며 한쪽 눈을 흘끗 떠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보인 붉은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마치 도와달라 외치는 것 같았다.
“운디네!”
[계약자! 오늘 내가 정령계에서 실프를 아주 혼쭐을…… 이게 뭐야?]
“날개 달린 강아지인데, 다쳤나 봐. 강아지한테 물 좀 줘. 목이 마른 것 같아.”
작은 계약자의 부탁에 따라 물줄기를 흘려 입에 넣어주면서도 운디네는 당황스러운 음성으로 이벨리아의 곁을 휘돌았다.
[물을 주래서 물을 주긴 했는데, 병아리야, 이거 아무래도 그냥 강아지는 아닌 것 같은데? 세상에 날개 달린 강아지는 없는데……?]
그냥 동물이라기에는 너무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데.
“나도 날개 달린 강아지는 배운 적이 없긴 해.”
운디네와 이벨리아는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끼잉.”
“어쨌든 아가니까 치료는 하고 놓아줘야지!”
품 안에 안긴 생물이 다시 한번 낑낑대자 이벨리아는 고민을 멈추고 바로 루드비히에게로 뛰어갔다. 뒤에 남은 운디네는 그 자리를 한 바퀴 휘돌며 의문을 표했다.
[저거 아무래도 이상한데. 이 기운을 내가 어디서 느껴봤더라?]
영 생각이 나질 않는다. 떠올리기를 포기한 운디네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작은 계약자의 뒤를 따랐다.
[어떻게 우리 병아리 주변에는 저런 것들만 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