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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황궁에 웬 커다란 지지가 (50/323)

50화: 황궁에 웬 커다란 지지가2021.03.22.

살짝 입을 벌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표정.

16549730473381.jpg‘후후. 역시.’

황자 에드윈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뻗었다. 황자라는 지위에,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매력적인 외모였기 때문에 웬만한 귀족 영애들은 에드윈의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16549730473381.jpg‘공녀도 별다를 건 없군.’

그러나 이벨리아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16549730473437.jpg‘뭐야, 이 꼴뚜기. 뭘 웃어 짜증 나게.’

아버지와 오라버니, 악마 친구와 황태자 친구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눈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이벨리아에, 눈앞의 황자는 꼴뚜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제 친구 루이를 괴롭히는 존재 아니던가. 루이의 어머니, 황후 역시 이들 손에 독살을 당한 것이라는 설도 들었는데 말이지. 무섭게 썩어들어가는 이벨리아의 표정을 제게 반한 것이라 단단히 오해한 황자는 다시금 어깨를 쭈욱 폈다.

16549730473381.jpg“황궁 구경은 내가 시켜주겠네, 공녀.”

모후를 잃은 황태자와는 달리, 그에게는 뒷배가 되어 주는 든든한 어머니가 계셨다. 훗날 현 황태자를 밀어내고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그에게 한낱 영애들이 불경하게 굴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위세 높은 데퐁트 후작가의 세레스 영애조차도 황자인 자신의 앞에서는 고분고분 얌전하지 않았던가. 책임은 없고 권리만 넘쳐나는 황자의 삶은 오만하고 방탕한 에드윈의 성정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다. 그리하여 에드윈은 크게 착각했다. 눈앞의 아르티나 공녀 역시도 애써 도도한 척을 하고자 얼굴을 굳힌 것일 뿐, 황자라는 지위를 들은 이상 그에게 얌전히 손목을 잡혀 황궁 구경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허락 없이 손을 뻗는데. - 탁.

16549730473446.jpg“감히 어디 손을 대느냐, 에드윈.”

이벨리아에게로 향하던 에드윈의 손목은 목표에 채 닿기도 전에 강한 악력으로 잡아 채였다. 고된 검술 훈련으로 인하여 여기저기에 굳은살이 배인 단단한 손. 루드비히의 손이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에드윈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는 것과 정확히 동시.

16549730473437.jpg“운디네-.”

찰박- 황궁 복도에 청량한 물보라가 튀었다. 계약자의 부름을 받고 나타난 운디네는 사납게 꼬리를 흔들며 에드윈의 손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작은 물의 장벽을 세웠다. 마음 같아서야 운디네에게 손목을 세게 휘감아 멍이라도 들게 하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황족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제국법상 극형을 피하기 어려운 죄라는 것쯤은 이벨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친구에게로 향하던 손을 잡아채고 홍안에서 살벌한 기운을 흘려내는 루드비히와, 동시에 운디네를 불러 지지인 손을 막은 이벨리아. 두 소꿉친구의 눈이 마주쳤다.

16549730473446.jpg‘괜찮아?’

홍안이 눈으로 물었다. 이벨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루드비히에게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마치 그만두라는 듯. 감히 작은 친구에게 손을 뻗은 증오스러운 이복동생의 손목을 부러뜨릴 심산이었던 루드비히는, 이벨리아가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니 마지못해 손을 떼었다. 저 쪼그만 꼬맹이가 뭘 어쩌려고 저러나. 루드비히는 이벨리아의 뜻에 따라 에드윈의 손목을 놓으면서도 언제든 달려들 것처럼 형형한 눈으로 황비와 황자를 바라보았다. 한편 이벨리아는 마치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반보 앞에 선 소꿉친구 덕분에 불쾌하던 기분이 모두 씻겨 내려간 것만 같았다.

16549730473437.jpg‘그도 그럴 것이, 정말 흰색 강아지 같잖아.’

덕분에 이벨리아는 분노를 내리누르고 떨리지 않는 음성으로 입을 열 수 있었다.

16549730473437.jpg“황자 전하, 제 몸에 함부로 손을 대고자 하셨던 무례는 사과를 받아야겠으나 그를 기대하긴 어렵겠군요.”

에드윈을 향한 바다 빛 눈은 심해와도 같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그보다 훨씬 냉락했다. 처음 보는 태도. 처음 듣는 음성. 루드비히가 의외라는 듯 살짝 커진 홍안으로 이벨리아를 흘끗 돌아보았다.

16549730473437.jpg“감히 황족의 몸에 해를 가할 수 없어 막는 것으로 그쳤습니다만,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시에는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정령들이 꼭 제 뜻에 따라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지요.”

이벨리아의 말에 호응하듯, 운디네가 에드윈의 근처로 사나운 물보라를 일으켰다.

16549730473381.jpg“감히, 황족을 겁박하는가-!”

고작 아홉 살, 아직 허물을 제대로 벗지 못한 쭉정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은 황자였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겁을 먹고도 남을 운디네의 위력 행사에도 황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16549730473446.jpg“목소리 낮추어라. 듣기 거슬린다.”

16549730473381.jpg“형님!”

16549730473446.jpg“그 호칭 또한 달갑지 않구나, 아우야.”

에드윈이 이를 갈았다. 한낱 공녀 앞에서, 하필 루드비히로부터 당하는 망신은 참기 어려웠다. 형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바라는 아우. 아우로부터 수도 없는 생명의 위협을 받은 형. 두 이복형제가 서로를 형과 아우라고 칭하는 것은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16549730473381.jpg“황족의 앞에서 무기를 소지하여 위력을 행사하는 것은 제국법 제87조에 의거, 극형입니다-!”

16549730473446.jpg“무기라…… 공녀가 무기를 소지했던가.”

16549730473381.jpg“제 앞에서 정령을 소환하였습니다. 무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검사에게는 검이 무기이고, 마법사에게는 완드가 무기이듯, 정령사에게는 정령이 무기이지요!”

울리는 목소리에 루드비히가 진정으로 듣기 싫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이내 내뱉는 말은 마치 준비된 답안인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16549730473446.jpg“첫째, 무기란 도구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나 정령은 생명인 만큼 ‘도구’가 될 수는 없지. 둘째, 제국법 주석서에 따르면 ‘소지’란 해할 의도로 당초부터 몸에 지닌 것을 말하는 것이나 공녀는 정령을 소환하였을 뿐,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았으며, 셋째, 위력이란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나 공녀는 물의 장벽을 만들었을 뿐, 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물리력을 가하진 않았다.”

언쟁으로 가자면 에드윈은 루드비히의 위에 있을 수 없었다. 절대로. 에드윈이 안락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을 때, 루드비히는 살고자 맨몸으로 모든 것에 맞서며 닥치는 대로 배우고, 익히고, 견뎠으니.

16549730473437.jpg“한 가지 더.”

두 형제의 논쟁에 맑은 목소리가 첨언했다.

16549730473437.jpg“황자 전하께서 제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대고자 하신 사실을 저희 아버지께서 알게 되신다면…….”

뒷말은 굳이 이을 필요도 없었다. 이벨리아는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겠어?’라고 묻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녀들이 들려주는 동화 속 이야기 중에는 여린 여자 주인공이 백마 탄 왕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이겨내는 것도 있었고, 거대한 뒷배를 모두 숨긴 채 홀로 아등바등 헤쳐나가는 것도 있었다.

16549730473437.jpg‘둘 다 어리석긴 매한가지.’

이벨리아는 두 가지 모두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다. 스스로 이겨내는 것을 기반으로 하되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때는 받고, 뒷배를 이용할 때에는 이용해야지. 그 아까운 것들을 왜 죄다 썩힌단 말인가? 평소 가진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이벨리아는 자신의 힘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루드비히의 지원사격을 거절하지 않았고, 마무리로 가문의 힘을 들먹여 황자의 입을 봉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황자가 무엇이라 입을 열고자 하였으나.

16549730535507.jpg“그만. 황자, 공녀에게 사과하세요.”

여태 관전하던 황비가 나서 언쟁을 종결시켰다. 판돈이 곧 목숨인 황궁. 그 중심에서 살아남은 자였다. 황비의 표정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온화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과한 장난을 친 아들을 부드러이 타이르는 모양새.

16549730473381.jpg“…….”

16549730535507.jpg“황자, 어서요. 황자가 사과한다면 공녀도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사과를 받으면 따로 공론화하지 말라는 암묵적 요청까지.

16549730473381.jpg“……미안하게 됐군. 오랜만에 또래 친구를 만나 주체를 못 하였어.”

황비의 압박에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 한마디를 툭 내던진 에드윈의 눈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짙어진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16549730473437.jpg“……황궁 구경은 먼저 한 약속이 있어 함께하긴 어렵겠습니다. 황비 마마, 황자 전하, 나중에 좋은 자리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눈빛이 영 기분 나빠 이벨리아는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끝내 건네지 않았다. 차분하게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아이. 아직 이성이 감정을 온전히 누르기에는 부족했다. 불쾌함으로 몸이 바르르 떨리려 하는 것을 애써 참고 이벨리아가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인사한 후 뒤를 돌았다. 기다란 황궁 복도를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친구를 바라본 루드비히가 에드윈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이벨리아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16549730473446.jpg“탐내지 말거라, 아우야.”

감히 네까짓 것이 눈에 담을 아이가 아니니. 이벨리아의 뒤를 쫓던 검은 눈이 홍안과 얽혔다. 에드윈이 가지지 못한 황가의 축복, 루드비히의 홍안이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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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비 베나카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벨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6549730535507.jpg‘적당히 구워삶기 편할 것으로 생각했건만.’

아직 어린 공녀이기에 이 제국의 황자비라는 지위와, 몇 가지 혜택, 선물, 달콤한 말이면 쉽게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을 줄로 얕잡아 보았다. 황자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어달라는 요구에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일그러트릴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마음을 숨기는 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니, 입맛대로 요리하기 쉽겠다고.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여섯 살이지 않은가. 그러나 공녀는 나타난 황태자의 뒤로 숨어들기보다는 스스로가 가진 힘을 과하지 않은 선에서 보여주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비호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으며, 이 제국에서 아르티나 가문이 가진 위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16549730535507.jpg“햇병아리인 줄 알았더니…….”

상당히 영리해. 공작부인을 빼다 박았어. 아군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추후 아주 귀찮아지겠군.

16549730535507.jpg“황자, 경솔하셨습니다.”

16549730473381.jpg“…….”

16549730535507.jpg“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공녀가 황자의 아랫사람인 것을요. 그래서- 보시니 어떻습니까.”

16549730473381.jpg“형님과 비슷한 느낌이더군요. 가지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

완벽한 것을 망가트릴 때. 그 쾌감은 그 어떤 것에도 비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율이 흐르지 않습니까. 에드윈의 대답을 들은 황비, 베나카는 손에 쥐고 있던 화려한 부채를 펼쳐 몇 번 살랑였다.

16549730535507.jpg“우리 황자가 가지고 싶으시다면 가져야지요.”

그것이 혹여 망가뜨리기 위해 갖는 것이라 하더라도. 혹여 빼앗는 과정에서 망가뜨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요. *** 두 소꿉친구는 황궁 복도를 벗어나 중앙 정원 쪽으로 나왔다. 걸어오는 약 5분의 시간 동안 루드비히는 아닌 척하면서도 이벨리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16549730473446.jpg‘빌어먹을.’

황궁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싶어서, 그래서 작은 친구가 자주 방문해주었으면 싶어서 땅 도둑이 좋아하는 것들을 준비해 두었는데, 초장부터 완전히 망해버렸다.

16549730473446.jpg‘심지어 제대로 구해주지도 못하고.’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들에서는 하나같이 멋진 남성이 ‘짠’하고 나타나 ‘당장 그 손을 치우지 못할까!’라고 말하고 레이디를 위기로부터 구하던데. 그것 또한 실패했다. 작은 친구는 스스로도 잘 헤쳐 나올 줄 아는 아이였다.

16549730473446.jpg‘멋있기는 또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역시 그의 친구는 지켜야 할 꽃이라기보다는 좇아야 할 빛이었고, 레이디보다는 아르티나 가문의 일원이었다.

16549730473446.jpg‘지금은 또 저렇게 하찮아 보이는데.’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입을 앙다물고, 작달막한 다리로 애써 성큼성큼 걷는 그의 친구는 황비와 황자 앞에서 침착하게 대응하던 바로 그 친구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달라 보였다. 그 간극이 웃기기도, 귀엽기도 하여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사과를 건네려던 찰나, 이벨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16549730473437.jpg“으아! 짜증 나! 황궁에도 지지가 있구나!!”

두 볼은 분노로 발개져 통통하게 부어올라 있으면서 내뱉은 첫 마디가 ‘지지’라니. 아, 이 상황에서도 땅 도둑의 언어력은 범상치 않았다. 눈치를 보던 루드비히의 입술에 결국 수려한 웃음이 걸렸다.

16549730473446.jpg“사과하지. 커다란 지지인데 치우기도 영 쉽지 않아서.”

16549730473437.jpg“아니야. 그렇게 커다란 지지이면 쓰레기통도 마땅치 않지. 손목을 그냥 콱 뿐질러 버리려다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우리 곰치 생각하면서 참았네.”

어디로 가는지 길도 모르면서 씩씩대며 앞으로 걸어가던 이벨리아가 걸음을 멈추고는 뒤로 홱 돌았다.

16549730473437.jpg“커다란 지지들 때문에 식량 도둑이랑 인사도 못 했어. 식량 도둑 집은 아주 넓어서 구경할 게 많겠다! 오래 구경해도 돼? 늦은 시간까지?”

16549730473446.jpg“얼마든지.”

네가 오래 있어 준다면 나야 좋지.

16549730598128.jpg“황태자 전하. 이쪽으로 가면 전하의 집무실 방향인데, 공녀님께 집무실부터 구경시켜드리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아, 시종장. 역시 황궁물 오래 먹은 시종장은 달라도 달랐다. 땅 도둑에게 보여주려고 열심히 청소도 했으니, 사실 어떻게 자연스럽게 집무실로 데려가 구경시켜주나 나름 고민했더랬다.

16549730473437.jpg“집무실!! 식량 도-, 아니, 루이- 아니, 황태자 전하…….”

이벨리아는 여느 때와 같이 루드비히를 식량 도둑이라고 칭하려다가 두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았다가, 다음으로 흘러나온 애칭에 화들짝 놀라 황태자 전하라고 정정하면서 시종장의 눈치를 살폈다. 시종장은 공녀님께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 싶어 가만히 시선을 맞춘 것이었으나, 이벨리아는 시종장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굉장한 오해를 시작했다. 나 아까 이미 식량 도둑이라고 한 것 같은데.

16549730473437.jpg‘망했다, 망했어!’

불경하다고 이대로 홀랑 잡아가서 지하 감옥에 가둘지도 몰라. 밥도 안 주고 평생 감옥에 돌아다니는 쥐나 잡아먹으라고 할지도 몰라.

16549730473437.jpg“황태자 전하라고 했어요. 식량 도둑이라고 들었다면 잘못 들은 거예요. 둘이 워낙 발음이 비슷하니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웅얼거리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16549730473437.jpg“아!”

이내 황태자 친구와 작성한 계약서를 상기해냈다.

16549730473437.jpg“나, 나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기로 했어. 엉덩이도 안 때리고, 사형에도 처하지 않기로 했어. 그치?”

빨리 저 시종장님한테 말씀드려. 빨리. 계속 쳐다보잖아. 나 잡아가려고 계속 쳐다보잖아.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여기 눈치 봤다가, 저기 눈치 봤다가. 머릿속이 바쁜 작은 친구를 보면서 루드비히는 끝내 낮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시는 작은 주인의 두 입꼬리가 모두 올라가는 웃음을 진정으로 처음 본 시종장은 애써 놀란 표정을 갈무리했다.

16549730473446.jpg“그랬지. 시종장. 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벌하지 말도록.”

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시종장, 또는 전해 들은 황제 칼라일이 이벨리아를 벌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이는 온전히 이벨리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자 하는 루드비히의 배려였다. 그를 아는 시종장도 가벼이 넘기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작은 주인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의미를 담았다면 제법 많은 것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말에, 시종장은 여러 번 그 진의를 곱씹어야만 했다.

16549730473446.jpg“평생토록 내게 예를 갖출 필요 없는 유일한 아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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