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오직 너를 위한 계약서2021.03.11.
- 타박 타박.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쯧-.”
아가레스가 여느 때와 같이 인상을 찌푸리며 날개로 더욱 단단히 덮었으나, 이미 소리를 들어버린 이벨리아는 부스스 눈을 비비며 얼굴을 쏘옥 내밀었다. 얼마나 다급히 달려왔는지, 웬만해선 붉어지는 일 없던 소년의 두 뺨은 홍조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수려한 입술에서는 거친 숨이 뭉쳐져 나왔다.
“이브, 괜찮아? 응?”
소꿉친구에게 쏜살같이 달려와 묻는 소년의 붉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그득 묻어 있었다. 공작저에서 쫓겨나 황궁으로 돌아온 그 날로부터 무려 엿새. 그동안 루드비히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귀족들이 전부 모인 정기 회의에서 짧은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쳐대며 귀족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기본. 심지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에르트 백작으로부터 도대체 어디가 아프신 거냐며 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모두 이 작은 친구 때문이었다. 잘 있나. 더 아프진 않나. 언제쯤 라르고가 친구의 비밀기지 방문 소식을 알리러 날아올까.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온통 처음 사귄 친구의 걱정뿐이었으니, 이를 몰래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흐뭇하게 빛나고 있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마음은 이미 수십 번도 더 공작저로 달려갔지만, 왠지 모르게 공작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 발걸음을 애써 참은 것이었다. 그렇게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거쳐 엿새 만에 만난 친구였다. 마냥 반가워 입가에 나직한 웃음이 걸리려던 찰나.
“루이!! 너, 너어…… 황태자야? 아니, 황태자님이야?!”
아-. 호선을 그리려던 루드비히의 수려한 입술이 경직되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생생하게도 들려왔다.
‘알아버렸어…….’
언젠가, 언젠가는 땅 도둑이 알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었다. 모를 수가 없지. 땅 도둑은 아르티나 가문의 공녀이니.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 이 땅 도둑도 자신을 경계 어린 눈으로. 권력의 대상을 보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제국의 굳건한 태양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부담스러운 눈으로. 그렇게 바라볼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잘 알고 있었는데.
‘그저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조금만 더 길었으면 했는데.’
이 제국에서 진정한 친구라고는 만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제넘게도 아이의 순진함에 기대어 불가능한 기대를 머금었었다.
“…….”
“…….”
침묵이 길어지자 작은 친구는 물음에 대한 답을 확신한 듯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한층 더 커지는 것을 보아하니. 조금 전까지는 분명 따뜻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지금은 몸이 떨려올 만큼 서늘하다. 바라보기만 해도 흥미로웠던 바다색 눈동자, 오늘만큼은 그 안에 담긴 의문이 두렵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황태자와 고위 귀족이 아니라 단지 땅 도둑과 식량 도둑으로, 비밀기지의 주인과 손님으로, 그렇게 지금처럼 남을 수는 없을까. 속으로 바라던 루드비히가 자조했다.
“……그럴 리가 없지.”
여태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 단 한 명도. 작은 읊조림이 바람에 묻혀 날아간다. 일렁이던 홍안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사방이 사지(死地)였으니, 그 사막 안에서 만난 신기루에 잠시 홀렸던 것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목이 말라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 작은 친구는 그렇게 간절하기도, 또 차마 억지로 잡아 곁에 둘 수 없기도 한 아이였다. 조금 전까지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였던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못내 두려워, 루드비히는 바다 빛 시선으로부터 도망쳐 땅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붉은 입술을 감아 물었다.
‘어서 말해.’
황태자 전하를 뵙는다고, 지금까지 무례했다고, 앞으로는 친구로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편, 이벨리아는 파도치듯 일렁이던 홍안이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잔잔해지다가 이내 땅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며 크나큰 오해를 했다.
‘성질 더럽긴!’
애초에 이벨리아에게 지위란 친구를 정하는 기준점이 되진 않았다. 처음엔 범죄자인 줄 알았다가, 루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가, 이젠 황족임을 알아버렸다 해도. 그게 소꿉친구의 본질을 결정하진 않는다.
‘존댓말 안 해서 지금 저렇게 노려보는 게 분명해!’
내가 감옥에 갇히거나 사형을 당할까 봐 겁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고, 황태자라서 존댓말 해주는 거야. 황태자라서.
“……요?”
아주 뒤늦게 소심히 붙는 잔망스러운 존댓말이 어쩐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루드비히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들려오는 말들은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칫. 친구가 황태자인 적은 없어서 아주 혼란해. 이제 뒤통수에 솔방울 던지면 안 되겠다.”
……그거 말고도 하지 말아야 할 게 많을 텐데?
“이제 오렌지주스 맛없는 윗부분만 주는 것도 안 되겠다.”
그랬었군. 어쩐지.
“이제 빵 속에 고추냉이를 넣어서 주는 것도 하면 안 되겠네.”
그건 원래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니 그보다. 이게 다야?’
무려 황태자라는데 반응이 이게 끝이라고? 솔방울, 오렌지주스, 고추냉이 그런 거 안 하겠다는 게 전부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반응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벨리아의 자그마한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포옥 새어 나오는 한숨이 답지 않게 깊었다. 친구가 하필이면 황태자라니. 저기 쟤처럼 만만한 악마 같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친구라서 솔방울도 던지고, 오렌지 주스도 윗부분만 주고, 빵에도 고추냉이를 담아서 준 건데. 계속 친구 하면 좋겠는데. 나 루이가 황태자인 거 못 들은 척하고 싶은데.”
이내 들려오는 말은 달콤했다. 심히 사악한 앞부분은 모두 건너뛰고 듣고 싶은 뒷부분만 주워 담은 루드비히의 귀에는 분명 그러했다.
“해. 친구. 계속하자.”
희망이 생기자 애써 묻어두었던 진심도 함께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신기루는 무슨. 이미 그 신기루가 손 뻗으면 닿을 실체가 되어버렸는걸. 돌멩이를 던져도 돼. 오렌지 껍질만 줘도 돼. 고추냉이만 먹으라고 줘도 괜찮아. 우리, 계속 친구 하자. 그 뒷말들은 미처 내뱉지 못했지만, 그 모든 말을 읊을 수 있는 시간 동안 루드비히의 눈은 간절함을 담고 이벨리아를 향했다.
“그래도 돼? 친구 해도 돼?”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힐끗 눈치를 보는 이벨리아에게, 루드비히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이를 본 이벨리아의 얼굴에 평소와 같이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걸려들었군!’
이내 이벨리아는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 이내 공책 하나와 펜을 품에 안고 달려 나왔다.
“웬 공책이랑 펜이야?”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이벨리아가 공책을 한 장 넘겨 가장 윗부분에 <게약서>라고 큼지막하게 적어 루드비히에게 건네었다. 내가 주방을 알짱거리다가 요리사들한테 들었어. 계약서를 제대로 남겨놓지 않으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다 들었지!
“자! 여기에다가 내가 불러주는 거 적는 거야. 1번부터.”
“응.”
일단 <게약서>에 한 획을 추가하여 <계약서>로 올바르게 고친 루드비히가 알겠다며 대답했다. 아가레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대고 구경했다. 꼬맹이의 모든 독특한 행동들은 어김없이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이후 무려 15분. 이벨리아의 작은 입은 생각을 거듭하며 종알거렸고, 루드비히는 순순히 이를 받아 적었다. 계약이란 분명 쌍방의 의사 합치가 기본일 것임에도 루드비히는 이벨리아의 조건만 말없이 받아들일 뿐 역으로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않았다. 불공정한 계약이라면 어떤가. 공정과 불공정, 이익과 불이익, 그런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작은 친구의 앞에서는 모두 의미가 없는데. 그러나 듣다 보니, 받아 적으라며 불러주는 계약 조항들 모두 핵심이 조금 어긋난 것 같았다.
“……너는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뭐로 보긴. 성질 까칠한 식량 도둑으로 보지.”
불러주는 계약서 조항 3번을 받아 적으면서 한숨을 내쉬듯 작은 친구에게 묻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황태자 따위가 아니라 ‘성질 까칠한 식량 도둑’이라서 또 그것이 마냥 좋다. 나 변탠가. 아니면 이 꼬맹이가 지금 나를 길들이는 건가.
‘뭐든 어때.’
루드비히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렇게 작성된 계약서의 최종본은 이랬다. <계 약 서> 1. 이브를 감옥에 가두지 않을 것. 2. 이브의 엉덩이를 때리지 않을 것. 3. 이브를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것. 4. 이브의 재산과 식량을 빼앗지 않을 것. 5. 이브를 괴롭히지 않을 것. 6. 비가 오는 날에는 이브의 머리 위에 나뭇잎을 덮어 줄 것. 7. 갑과 을조차 제대로 명시되지 않은, 계약 주체와 날인마저 누락된, 그리하여 법적인 효력은 전혀 없을 정도로 조잡한 계약서였다. 그 내용 또한 자신이 장난을 치더라도 처벌을 할 수 없도록 한 것이 전부. 그러니까 결국 루드비히가 황태자이든 황제이든 앞으로도 두고두고 놀려먹겠다는 의도가 가득 담긴 계약서였다. 기대어 앉아 있던 나무에서 몸을 일으켜 걸어와 계약서 조항들을 본 아가레스는 호선을 그리려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의 작은 친구는 너무나 진지해서 웃음을 터트렸다가는 팩 토라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
“다 돼따! 6번까지는 내가 적고 싶은 거 적었으니까 마지막 하나는 루이가 적어. 나중에 잘 생각해보고 적어도 돼!”
이제 불경한 반말을 찍찍해도, 여전히 맛없는 오렌지주스 윗부분만을 건져주어도, 솔방울을 던지거나 고추냉이가 든 빵을 먹여도 안전하다. 엉덩이를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과 식량을 뺏을 수 없다. 계약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이벨리아가 악당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곱게 자란 것들은 안 돼. 이런 사기 같은 계약서에 홀랑 넘어가 버린다니까?”
효력도 없는 종이 쪼가리를 작성해두고 마치 자신이 엄청나게 꼼꼼하고 현명한 것처럼 턱 끝을 치켜들었다. 결국 두 지배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 제국에 자기보다 곱게 자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으이구, 으이구. 황태자가 이렇게 순진해서야. 나중에 다른 왕국이랑 계약서 쓸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먼저 보여줘야 해.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계약서로 면책 특권도 얻었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이벨리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짧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작은 꼬맹이가 요망하게 근처를 알짱거리며 놀려대는데도 루드비히의 눈에는 전혀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기가 막히게도. 스치는 바람이 다시금 따뜻하게 느껴진다. 눈앞의 작은 친구는 아무래도 자신의 기분뿐만이 아니라 날씨까지도 조종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루드비히는 계약서를 소중히 말아 넣으며 생각했다.
‘나 진짜로 당하고 있는 건가.’
그 조련이라는 거. *** 늦은 새벽. 평소 같으면 빳빳한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커다란 매가 깃털을 고르는 소리만 가득할 루드비히의 방에 낮은 웃음소리가 가라앉았다. 생전 보지 못한 주인의 실없는 웃음에 라르고가 고개를 갸웃대었다. 평생을 황태자로 살아온 그를 처음으로 황태자가 아닌 루드비히로 보아준 친구였다. 관계가 언제 깨지려나 늘 외줄 타기였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첫 친구는,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첫 친구로 남아 주었으니.
‘무슨 내용을 적을까.’
하찮은 계약서, 공란인 7번 조항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어느 순간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그렇게 밤을 새워 오랜 시간을 고민하던 루드비히는 이내 깃펜을 잉크에 담갔다. 작은 친구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도, 가져오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망설임 없는 유려한 글씨로 계약서 마지막 조항이 채워져 간다. 신기루, 너는 이미 나를 환상 속에 빠트렸으니. 그리하여 마지막 조항마저도 네가 아닌 내게 거는 굴레. 네가 변하지 않도록, 네가 굽히지 않도록, 네가 빛일 수 있도록, 내가, 너의. 7. 곁을 지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