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각자의 생각은 칼을 품고2021.03.04.
마계와 마왕성이라고 하면 어두운 색조의 성에 음침한 공기, 기괴한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박쥐쯤을 연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사실과는 제법 다른 연상이었으나 마계에 방문했다가 살아 돌아온 인간은 전무하니, 오해를 바로잡아줄 사람이 없어 잘못된 구전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인간들의 인식에 따르자면 마계보다 천계의 이미지에 가까울 이곳. 마계. 그리고 처음으로 마계를 방문한 신들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는 여기. 마왕성. 창공을 찌를 듯 솟아오른 성의 지붕은 황금빛으로 번쩍였고, 성의 한편에 자리한 첨탑은 고개를 한껏 위로 꺾어야 끄트머리를 겨우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성 내부에는 마계에 운동하는 특유의 기운을 받아 자란다는 달콤한 과실들이 맺혀 있었다. 작은 폭포수를 통해 연못으로 떨어지는 물은 때로는 포도주가 되기도, 신들의 음료라는 넥타르가 되기도 했으니, 고서에서나 전해 내려오는 진정한 주지육림(酒池肉林)이었다. 그 성의 가장 중심에 있는, 모든 마족들과 악마들을 지배하는 마왕의 거처. 붉은색 머리칼의 사내가 왕좌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긴 다리를 꼰 채 앞에 꿇어앉은 자를 내려다보았다.
“…….”
“음, 그래서. 뭐라고 했지?”
꿇어앉은 마족은 감히 고개를 들어 올리지는 못하였으나 제 눈앞에 있는 것이 분명한 존재들의 기운은 생생히 느껴졌다. 제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 또한 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마족이 건넨 보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반문하는 자. 위대한 왕좌에 앉아 마계를 다스리는 마족들의 정점. 현(現) 마왕 바알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옆에서 키득거리는 자는 제3 악마, 밧사고가 분명했다.
“16 군단장께서, 아무래도 소멸하신 것 같다고…….”
전부 알아들었으면서 농담처럼 되묻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전령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란, 제3 악마란, 그 호칭만으로도 휘하 모든 악마들과 마족들을 굴종시키는 자리였으니.
“16 군단장은 무슨. 낯간지러운 예명 집어치우고 그냥 제파르라고 불러. 이곳엔 인간도 없는데.”
밧사고가 질색하며 전령의 말을 끊었다. 기본적으로 악마들은 그들의 본명이 인간계에 알려지는 것 자체를 상당히 꺼렸다. 고위 악마를 소환하는 것 역시 정령을 소환하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아, 고위 악마의 본명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지배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 기본.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소환 시도는 수명만 갉아먹을 뿐이니 누구나 함부로 시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동등한 위치에서 계약을 맺게 되든, 사역마로서 지배당해 계약을 맺게 되든, 첫 단계는 악마의 이름을 아는 것이었으니 불리는 입장에서야 꺼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하여 본명을 인간계에 알리지 않는 것은 악마들 사이 불문율이었다.
“흐음…….”
마왕의 묵직한 마기가 전령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족들의 복종은 마왕에게 더 큰 지배력을 안겨 준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 마족들의 절대적인 복종을 받는 현 마왕 바알의 힘은 측정조차 쉽지 않았다.
“제파르가 소멸이라…….”
“그 애송이 그럴 줄 이미 짐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실력만 뛰어난 어린이는 노련한 사자의 좋은 먹잇감이지요.”
왕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전령의 말을 따라 읊는 마왕 바알과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젓는 제3 악마 밧사고의 음성은 기분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여상했다.
“뭐, 예상대로 보호가 강한가 봅니다. 이름값 하는군요.”
“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이번에 원하는 건 그것의 목이 아니었으니.”
바알과 밧사고가 주고받는 대화는 한낱 전령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목적은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면 호랑이 등에 올라타야지요.”
밧사고의 말에 바알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렇지. 호랑이를 찾았으니 그 등에 올라타면 되지. 그렇게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모조리 죽여 없애면 그만이지.
“먼저 치워야 할 것들이 꽤 많아.”
“부지런히 임하겠습니다.”
1차 인마전쟁으로 깨달았다. 인간계를 지배하고자 할 때 먼저 치워야 할 방해물들을. 서대륙의 에르카디아 황가와 아르티나 공작가. 동대륙의 하르벤타 황가. 그 외에도 변경백의 귀족 가문들. 뛰어난 정령사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아가레스. 가장 큰 방해물을 잡기 위해서는 비교적 작은 적들부터 쳐나가야 한다. 두 대륙의 황가와 아르티나 공작가는 만만치 않은 위협이긴 했다. 그래도 능력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가레스에 비하자면 비교적 공략법을 아는 축에 속했다.
“인간들은 제법 탐욕스러워.”
그러니 인간들 중에서 마족의 앞잡이가 될 호랑이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종의 스파이, 끄나풀을 심는다면 황가나 공작가를 무너뜨릴 방법이 영 없는 것도 아니었고.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 전면전은 피해야지.”
또 모두가 섣불리 칼을 겨눌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해야 했다. 1차 인마전쟁의 실패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그리하여 마왕 바알은 제파르에게 ‘제16 악마의 서’를 현 황가와 아르티나 가문에 가장 반기를 들고 있는 가문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약삭빠른 제파르는 인간계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아르티나 가문을 가장 적대하는 가문을 파악했다. 데퐁트 후작가(家). 제파르는 제16 악마의 서를 데퐁트 가문의 눈에 띄도록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악마들이 데퐁트 가문을 이용하려는 수작임을 데퐁트 후작이 알지 못하도록, 아주 교묘하게. 예상대로 데퐁트 후작은 악마의 서를 충직한 휘하 기사에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계약을 맺은 기사가 데퐁트 후작의 명을 받아 제파르에게 요청한 첫 번째. 바로 아르티나 공녀의 암살이었다. 이를 제파르로부터 전해 들은 바알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올렸더랬다.
“제파르를 죽인 건 아르티나 가주일까. 증오스러운 동(東)마계의 지배자일까.”
“어느 쪽이든 어떻습니까. 도구로 쓸 호랑이 한 마리를 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달성하신 것을.”
밧사고의 말을 들은 바알이 샐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르카디아 황가와 아르티나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데에 사용할 수는 있겠어.
“쓸 만한 호랑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 깊은 새벽, 데퐁트 후작의 방 책장 뒤 은밀한 공간. 후작부인도, 영식인 리카드도, 영애인 세레스도 모르는 후작의 비밀 공간에는 작은 호롱불 하나만이 데퐁트 후작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옅은 불빛을 받은 회색 눈이 노랗게 빛났다. 멀리서 사냥개가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친 노예 하나를 추적해 물어뜯으라, 그리 명한 참이었다. 곧 사냥개들이 돌아오면 그 잔혹하리만치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에 도주한 노예의 살점이 끼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후작에게서도, 후작의 앞에 꿇어앉은 기사에게서도, 곧 살해당할 노예에 대한 동정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탁. 형태조차 파악하기 힘든 기괴한 문양들이 그려진 두꺼운 책을 마호가니 책상에 턱 하니 내려두며 데퐁트 후작이 입을 열었다.
“고위 악마라더니. 별것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같은 악마라도 10 악마와 그 이하의 악마는 꽤 큰 차이가 난다더니, 16 악마로는 어림도 없었나 봅니다.”
악마들의 이름이 인간계에 알려지지 않은 지금. 결국 악마를 소환할 방법은 딱 두 가지였다. 존재조차 불분명한 악마의 서를 구하여 소환에 사용하거나. 악마 스스로가 이름을 알려주고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거나. 꿇어앉은 기사는 후작의 명령하에, <16 악마의 서>를 이용하여 제파르와 계약했던 자였다. 아르티나 공녀를 죽여 시체를 가져오라는 것이 첫 지령이었다. 그러나 지령 후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제파르와의 계약의 증표인 인장이 사라지더니 이내 연결되어 있다는 미묘한 감각마저 뚝 끊기는 것이 느껴졌다. 상호 합의 없이 악마와의 계약이 해지되는 경우는 딱 하나. 악마의 소멸. - 탁, 탁.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 상황이 불만족스럽다는 듯 점점 빨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제법 고위 악마였는데.”
“…….”
“누구일 것 같나. 그 빠른 시간 안에 그를 잡아 죽인 자가.”
“아르티나 공작 아니겠습니까.”
“아니. 공작은 황궁에 있었다. 그리 빠르게 대처하진 못했을 터인데…….”
후작은 외알안경을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뭔가가 있다. 그 증오스러운 아르티나 여식의 곁을 맴도는 무언가가. 정령이든, 아직 알지 못하는 무엇이든. 고위 악마를 한순간에 소멸시켜버릴 정도의 강한 무언가. 데퐁트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력보다는 지략과 음모에 밝은 두뇌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팔걸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치던 검지가 일순 멈추었다.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악마의 서를 수집하라. 전부.”
“마족의 힘을 빌리실 생각이십니까.”
“그 찾기 힘들다던 악마의 서가. 그것도 고위 악마에 속하는 16 악마의 서가 우리 앞에 쉬이 나타난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그쪽도 우리 힘을 원하고 있단 소리지.”
악마 중 누군가가 우리를 장기 말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 같으니, 우리가 먼저 장기판이 되어 말을 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물고 물리는 지략전은 취향이라.”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16 악마의 서를 우리가 수집할 수 있도록 두고 간 자. 그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적어도 아르티나의 멸문까지는 손을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쪽이 올라탈 호랑이를 찾는 것이라면, 우리 또한 부릴 사냥개를 찾고 있음은 매한가지 아니겠나.”
창문조차 나지 않은 은밀한 방, 사냥개 우짖는 소리가 단단한 벽을 뚫고 들려왔다. 번들거리는 회색 눈이 비열한 웃음을 담았다. 거친 입술을 핥는 혓바닥이 마치 뱀의 그것과도 같았다. 기사가 깊이 묵례 후 방을 나가자, 데퐁트 후작은 어둠 속에 시립한 존재에게 말했다.
“잘 들었겠지.”
끄덕. 어둠 속의 존재가 긍정을 표했다.
“저자는 따라가 죽여라. 달리 아는 자가 있으면 곤란하니.”
타오르던 호롱불이 이내 존재를 감추었다. *** 일이 벌어지던 그 순간, 정령계의 정령들은 지옥을 맛보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령들부터 정령왕의 탄생과 함께하여 세상 빛을 본 지 어언 수천 년이 다 되어가는 정령들까지. 이런 아수라장을 겪어 본 정령은 단연코 없었다. 물의 정령왕이 괜히 ‘물’의 왕이겠는가. 물이라 함은 때로는 거칠게 몰아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것. 가로막는 것들을 부수기보다는 휘돌아 흐르는 물의 본성답게, 물의 왕인 엘라임 역시 성격이 더러운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주변 그 어떤 것에도 무심한 성격이었다.
“저 찢어 죽일 새끼!!”
그런 엘라임이 다른 두 정령왕의 손에 팔을 잡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꼴은 정말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정령계를 이루는 기운들이 모두 얼음에 잠식되어 나가는 것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페르세스, 힘 좀 더 써봐.”
“으윽-! 쓰고 있어. 너야말로 땅속에라도 파묻어 보라고!”
입술을 깨문 채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과 용을 쓰듯 벌게진 얼굴의 여인은 이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씩씩대는 이프리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야, 이프리트. 너까지 이러면 안 된다, 진짜!”
“이프리트, 알잖아. 지금 우리가 가서 아이를 구하면 수백 년의 징계를 받을 것을.”
“왜!! 왜 우리는 마음에 드는 인간 하나 구하지 못하는 건데!!”
“우리는 자연 그 자체니까.”
계약 후 우리가 계약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그 많은 일들. 신께서는 그를 허락하시는 대신에 계약을 맺지 않은 인간의 삶엔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셨으니까.
“계약도 맺지 않은 인간의 삶에 자연이 툭하면 간섭해서야 질서가 깨져버리잖아.”
트로이가 조곤조곤하게 이프리트와 엘라임을 설득했다.
“이번 일로 아이의 생이 다할 것이었다면 당연히 너희를 말리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너희가 나가서 날뛰다가 수백 년씩 봉인 당하면 나야 좋지. 아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자가 줄어드는 것이니.”
트로이가 서늘하게 웃었다. 가서 확 봉인되어 버리던가. 이 진상들아.
“하지만 이번에 아이를 구하는 것은 너희들이 아니야. 냉정히 봐. 충분히 많은 존재들이 아이 곁에 있는걸.”
물과 불, 바람과는 다르다. 땅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심지어 심해를 받치고 있는 것 역시 대지가 아니던가. 그래서 트로이가 보는 세계는 다른 정령왕들보다 조금 더 넓었고, 이는 자연히 깊은 지혜와 함께 차분한 성정을 만들어냈다.
“우리와의 인연도 깊은 아이야. 엘라임과 페르세스가 인장까지 남겨두었잖아.”
곧 아이가 먼저 우리를 불러줄 거야.
“그러니 제발 좀 참아, 이 팔불출들아.”
트로이가 좋게 다른 정령왕들을 설득했으나, 이프리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알 게 뭐야! 당장 가서 죽여버릴 거야!”
트로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들 사이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참 쉽지 않다.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려야 대할 수가 없다. 트로이는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발을 구르는 이프리트를 땅속으로 토닥토닥 파묻으며 해사하게 속삭였다.
“널 먼저 죽여버리기 전에 그만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