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누가 이브의 첫 번째 친구라고?2021.02.25.
“……돌아가자.”
이벨리아를 받아 소중히 안은 휴고와 엘리시아, 그리고 아르티나 기사단이 공작저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아가레스는 아공간을 열어 온갖 털옷들을 끄집어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휴고와 엘리시아에게, 아가레스가 털옷을 툭 던지며 말했다.
“꼬맹이 추워해.”
아직 잠들어 있는 이벨리아를 털옷들로 돌돌 감아 산을 내려오는 시간 동안, 휴고와 엘리시아는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지옥 끝까지 떨어졌던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또 엉망이 된 딸을 보며 분노하고 울음 짓느라. 어련히 알아서 돌아갈 줄 알았던 악마와 황태자는 휴고의 뒤를 졸졸 따르며 작은 친구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하여간 악마 새끼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그대도 악마 아닌가.”
“나랑 그것들이랑 비교하는 건 상당히 기분이 상하는데.”
“그래도 내가 빨리 달려간 덕분에 그대가 이브를 찾았으니 다행이다.”
“은근슬쩍 숟가락 얹지 마라. 내가 구했다.”
“하아…….”
휴고는 딸에게 삿된 것들이 붙었다며 한숨을 쉬면서도 매몰차게 떼어 두지는 못했다. 어찌 되었든 딸의 은인들이 아닌가. 그런데 슬슬 공작저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들이 쫄랑쫄랑 뒤를 따르자, 보다 못한 휴고가 루드비히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벨리아를 받아든 이후 내뱉은 첫 마디였다.
“이만 환궁하시지요.”
루드비히는 기다렸다는 듯 유려하게 답했다.
“이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가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황태자 된 입장에서 어떻게 그냥 돌아가겠는가. 공녀가 일어나는 것까지는 보고 가겠네.”
황태자 된 입장 좋아하네. 허구한 날 황태자궁을 비우고 어딘가로 쏘다니신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이럴 때만 잘도 갖다 붙이신다.
“폐하께서 걱정하십니다.”
“폐하께서도 공작저로 오신다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
이 황공하신 강아지가 지금 뭐라고 감읍한 말씀을 지껄이시는 건가. 휴고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칼라일이 왜 와. 왜.
“하……. 그대도 돌아가도록. 오늘 일은 차후 갚지.”
한숨을 내쉰 휴고가 이번에는 아가레스를 향해 말했다. 황태자와 황제의 방문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저 악마 자식이라도 떼어 두어야 했다. 황제, 황태자, 악마, 미친개 기사단, 두 아들의 조합은 생각만 해도 실로 환장, 대환장이었으니. 그러나 아가레스 역시 순순히 돌아갈 리 없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이브가 눈을 감기 전에 어디 가지 말고 꼬옥 같이 있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재수 없는 애새끼는 남는데 자신만 자리를 비우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가레스는 능청스레 거짓말까지 읊어가며 어찌 그리 비정하냐는 듯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
“훌쩍…… 우리 아르티나 공작저에 어디 감히 마족이 출입을 하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이를 잃어버린 곰 마냥 울고 있던 헤롤드가 짐짓 엄한 척을 해보았으나.
“마족 아니고 악마. 그리고 기사, 꼬맹이 구한 게 누구야.”
“형님이심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만능어에 무참히 꼬랑지를 말았다.
“쯧-.”
딸 근처에 붙은 삿된 것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답지 않게 얼굴을 잔뜩 찌푸린 남편을 보며 엘리시아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딸의 절친한 친구 자리를 차지하려는 한 소년과 한 악마. 목적과 상관없이 딸에게 붙는 모든 XY 염색체 보유자가 싫은 아버지. 아기씨라고 하면 눈이 돌아가 짖어대는 기사단. 집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아르칸과 세드릭. 친구가 걱정되어 찾아온 이크리안과 렐리안까지.
‘친구……. 때로는 공녀라는 지위에 휘청일 이브에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지.’
엘리시아는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근엄한 자들이 그녀의 딸을 중심에 두고 유치한 감정싸움을 벌이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 오늘 집이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겠는걸.’
그때까지만 해도 반 정도는 장난 어린 생각이었다.
*** 모든 아이들과 공작저 사용인 전원은 대문 밖에서 목을 빼고 휴고의 귀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주 대리를 맡느라 부모님을 따라 산맥으로 가지 못한 아르칸의 손바닥은 이미 흐르다 못해 굳은 피로 찐득했다. 힘껏 주먹을 쥐고 있느라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며 낸 상처였다. 세드릭은 허공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곧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고 있었다.
“괜찮을 거다, 아르칸. 공작 각하를 믿어라.”
이크리안은 아르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이고.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아이스 볼. 아이스 볼.”
렐리안은 치맛자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동안 배운 마법 술식들을 손 위에서 하나하나 펼쳐보고 있었다. 소중한 친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자신도 마계에 따라가 아주 혼을 내주고 오려는 마음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그때. 멀리서 아득하니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기다리던 아이들은 한시라도 빨리 소식을 듣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버지!! 이브는, 이브는요!!”
휴고가 아무 말 없이 품에 안은 옷을 조금 내려, 이벨리아의 얼굴을 보였다.
“괜찮은 겁니까……?”
어린 동생의 창백한 얼굴에 세드릭은 끝내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양 주먹으로 벅벅 닦았고, 아르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못 가도록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 적어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신께 감사드릴 일이야.”
엘리시아가 아르칸과 세드릭을 껴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고위 악마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살아 돌아왔으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흥.”
그러나 신을 찾는 그 말에 정작 기적을 행한 당사자는 어이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구한 건 난데 왜 자꾸 신을 찾아.
“이브…… 나 때문에…… 내가 같이 선물 사러 가자고 해서. 나 때문에……!”
렐리안이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자 세드릭이 다독였다. 이벨리아를 들여다보던 아르칸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가. 내 동생. 얼마나 무서웠으면 기절까지 했을까요.”
“음?”
아가레스가 흠칫했다.
“무서웠겠지. 이렇게 생채기가 날 때까지 악마에게 위협을 받았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어.”
“우리 아기씨, 항상 용감하고 당찬 것 같았어도 실은 이렇게 여리신 분이셨던 거야. 마치 개복치처럼.”
“그래. 그 악마를 마주 보는 것조차 두려워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신 거다. 끄흡……!”
아가레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탄식을 내뱉으며 이벨리아를 한층 더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악마를 마주보기 두려워 정신을 놓아버렸다니. 저 작은 아기씨가. 심장이 죄어들 듯 아파졌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머리가 많이 아플 것인데…… 하델, 후유증을 완화할 약을 구해오게.”
“예, 마님. 기절 후유증에 가장 좋은 약초로 지금 당장 구해오겠습니다.”
“…….”
뭐냐. 이 오해는. 모두가 이벨리아의 기절을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부둥켜안길래, 차마 아가레스는 말할 수 없었다.
‘도무지 기절을 안 할 태세라 내가 재운 건데.’
기절은 무슨. 얘 지금 꿀잠 자고 있는 건데. *** 이벨리아가 외출한 것이 오늘 점심. 그리고 지금까지 겨우 아홉 시간가량이 흘렀을 뿐이지만 공작저의 모든 이들은 실로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기사단 이외에 하인들과 하녀들, 요리사들, 정원사, 마구간지기까지도. 공작저 내에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이벨리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발길이 닿는 곳이면 사용인들은 어김없이 작은 아기씨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감히 주인 내외에게 바짝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머뭇머뭇 우리 아기씨 괜찮으신가 보고 있던 사용인들은, 이를 눈치챈 휴고가 ‘괜찮다’라는 말을 꺼낼 때까지 응접실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마족!! 아버지, 마족이 들어왔습니다!!”
“……뭐야. 이 멍청이는.”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쥐새끼처럼 숨어들어오다니.”
“쌍으로 잘들 하는군.”
여동생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이제야 아가레스의 존재를 발견한 세드릭이 손가락질을 하며 휴고에게 고자질을 했고, 아르칸은 서늘한 표정으로 검을 빼 들었다. 어이가 없어진 아가레스가 코웃음을 쳤다. 지들 동생 구해온 게 누군데. 게다가 내가 그냥 마족이면 공작이 나를 순순히 들여보냈겠냐고.
“도련님들 헛다리 짚으시는데.”
“재밌는데.”
아르티나 기사단이 키득거렸다. 세드릭 도련님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주군을 똑 닮은 축소판 아르칸 도련님까지 헛다리를 짚는 것은 다시없을 구경거리였다.
“이쯤 되면 누가 설명 좀 해주지?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한데?”
아가레스가 빨리 누군가 나의 공을 널리 알리라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놀랍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하여간 꼬맹이 빼고는 죄다 재수가 없어.”
결국 아가레스는 내가 바로 이벨리아를 구한 영웅이라며 자화자찬을 늘어놓고서야, 불신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이벨리아가 옮겨진 의무실로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 현재 카론이 치료를 받고 있는 공작저 1층 의무실은 기사들, 하인들, 하녀들이 종종 사용하고는 했다. 그러나 아르티나 일가를 위하여 2층에 마련된 의무실은 사실상 빈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티나의 세 부자(父子)는 잔병치레도 없었고, 엘리시아 역시 가끔 가벼운 감기를 앓기는 했으나 의무실을 사용할 정도로 앓았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온갖 의료기기와 약초 등이 갖추어진 의무실은 오랜 시간 사람의 방문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상당히 썰렁했다. 이벨리아의 상처를 살피던 공작저 주치의가 외알 안경을 검지로 치켜올리며 근엄하게 말했다.
“아기씨께서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십니다. 송구하지만 다들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의무실에 들어온 그 누구도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역시 다들 검술의 고수들이셔서 그런지 소리 소문 없이 나가셨나 보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누구도 나가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다들 나가주셔야……?”
“쉿- 조용히 있을게.”
헤롤드가 손가락을 입 위로 가져다 대며 소곤거렸다.
‘응, 안 믿어.’
주치의가 전부 다 내보내 주시고 공작 각하께서도 좀 나가 달라는 눈빛으로 휴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휴고 역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전부 나가라. 나와 부인을 제외하고.”
“……?”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짜게 식었다. 이 아버님 보소?
“이브를 구한 건 나야.”
“이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것은 날세.”
“나는 이 제국의 황제지.”
앞의 악마와 황태자는 그렇다 치고, 황제는 무슨 연관성인데. 마음속으로 점찍어 둔 미래의 며느리를 보러 공작저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황제는 어느새 뻔뻔스럽게도 의무실로 들어와 앉아 있었다.
“저……저는 이브를 구하려고 카시스 후작저로 재빨리 뛰어갔어요!”
“그리고 제가 현명한 지시를 내려 공작 각하께서 사태를 빠르게 알게 되셨죠.”
렐리안과 이크리안도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두 남매는 우리의 공이 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티나 가문의 차기 가주인 저는 모든 일의 진상을 파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기 가주의 동생이고요.”
이브는 우리 동생인데. 저자들이 전부 남아 있는데 우리가 남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아르칸은 평소 귀찮게만 여기던 신분을 들이밀었으며, 세드릭은 손을 번쩍 들며 억지를 부렸다. 그럼, 남은 것들은 너희들이네? 모두의 시선이 의무실 입구에 서 있는 헤롤드, 알렉, 드웬, 에딘을 향했다. 염치는 있어서 다른 기사들은 1층에서 대기하고 네 명만 대표로 올라온 참이었다.
“누구도 아기씨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까지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저희를 제외하고는.”
“보여드려라, 알렉.”
헤롤드와 에딘이 차례로 말하자, 알렉이 마치 보물을 자랑하듯 하늘 높이 들어 올린 것은 바로 이벨리아의 애착 인형 곰치였다.
“우리 아기씨가 눈을 뜨시자마자 곰치를 보셔야 안정감을 느끼시겠지요.”
이래도 내보낼 것이냐는 듯, 미친개 넷이 씨익 웃어 보였다. 알렉의 커다란 손에 하필 모가지가 잡힌 곰치는 기사단을 내쫓는 순간 목이 똑하니 부러질 것만 같았다.
“결국 아무도 못 나가시겠다, 이거로군요.”
사태를 지켜보던 주치의는 의무실 바로 옆에 딸려 의무실 안을 유리로 살펴볼 수 있는 대기실로 그들을 내몰았다.
“제발 소란은 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지요?”
방음이 잘 되는 편이기는 하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디 소란을 일으키지 말아 달라는 당부와 함께. 쫓겨나지 않은 헤롤드와 알렉은 마냥 기뻐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을 자제하는 건 내 전문이지.”
“내가 또 바람처럼 조용하지.”
유리창을 통해 작은 친구를 지켜볼 수 있게 된 아가레스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공기처럼 조용하다.”
*** 의무실의 옆 방, 대기실. 아르티나 공작저의 위명만큼이나 의무실도, 의무실에 딸린 대기실도 말 그대로 광활하였기에 무려 열세 명의 사람이 들어차도 좁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우리 이브가 큰일을 당하고도 이렇게…….”
엘리시아가 여태껏 황망하여 미처 건네지 못하였던 감사 인사를 건네며 울먹이자, 휴고도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인사는 됐어. 그딴 거 받자고 구한 게 아니라고.”
아가레스가 인사치레는 되었다는 듯, 한 손을 들어 휘저었다.
“예의도 모르는 악마 같으니.”
“힘도 없어서 도움을 청하러 왔던 주제에 입만 살았군.”
“내가 알리지 않았더라면 네놈이 이브를 구하러 갈 수 있었을 것 같나.”
“수도에 악마가 설치도록 둔 것은 네 책임 아니던가, 황태자.”
이벨리아를 구하기 위해 잠시 맺었던 동맹은 목적을 달성하자 빠르게 깨졌다. 소년과 악마는 늘 그렇듯 빠른 말싸움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둘 모두의 시선은 여전히 이벨리아에게 닿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오늘은 말싸움에 참전할 자들이 많다는 것이 다른 때와는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그 말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군. 애초에 고위 악마가 휘하 악마들을 잘 감시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응?”
“이게 과연 한 악마의 단독 행동이겠나, 황제? 악마는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아.”
“……?”
“인간계의 누군가와 계약을 맺었던지, 마왕의 지시가 있었던 거라고. 내 생각으론 둘 다인 것 같은데.”
짐작 가는 인간 없나, 응? 아가레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아랫것들 관리 잘하라고, 황제.”
칼라일이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재차 질문했다.
“흠. 그 악마를 죽이기 전에 왜 배후를 밝히지 않았지?”
아가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계약자의 이름과 계약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악마의 영혼에 새겨지는 족쇄지. 그에 대해 입이라도 뻥긋할라치면 순식간에 심장이 터져버리는데. 그렇게 쉽게 죽이는 건 재미없잖아.”
황제와 아가레스의 문답이 비교적 수준 높은 것과는 달리, 바로 옆에서는 상당히 유치한 대화가 오갔다.
“후작 영식, 그대는 마법도 유능하게 쓴다는 자가 이브를 바로 구하러 달려가지 않고 왜 아르티나 공작저로 갔지?”
루드비히 역시 이크리안 혼자서 고위 악마를 상대하는 것은 위험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책망은 단지 매번 이벨리아를 동화책으로 꼬여내는 이크리안에 대한 단순한 심술이었다.
“황태자 전하, 오라버니께 그런 말씀은……!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하더라도 고위 악마를 혼자 상대하시는 건 무리라고요! 제가 이브의 첫 번째 친구이니만큼 전하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첫 번째 친구. 그 말에 이벨리아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아가레스의 시선이 곧장 렐리안을 향했다.
“잠깐, 황제보다 이쪽이 더 중요한 주제인데. 누가 이브의 첫 번째 친구라고?”
렐리안과 루드비히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답했다.
“저요.”
“나지.”
“송구하오나, 접니다. 황태자 전하.”
“미안하지만, 날세. 카시스 영애.”
이거 어이없네? 아가레스가 세상 다시 없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야, 이 하찮은 꼬마 인간들아.”